영화속클래식 브래스드 오프 - 절망적인 현실 속 처절한 음악 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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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545회 작성일 16-02-06 1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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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최초의 여성 수상인 마가렛 대처는 신자유주의 정책의 일환으로 공기업을 민영화하고, 산업 전반에 대한 구조조정을 실시했다. 당시 사양 산업이던 탄광도 구조조정의 칼날을 피해 갈 수 없었는데, 그 결과 1984년 이후 영국에서는 140개의 탄광이 폐쇄되었고, 이로 인해 250만 명의 실직자가 발생했다. 영화 [브래스드 오프]는 바로 이 시기에 폐광 위기에 처한 한 광산촌에서 일어난 일을 담은 것이다.

1992년, 영국 북부 요크셔에 있는 작은 탄광촌, 이곳에 있는 그림리 탄광은 현재 폐광 위기에 처해 있다. 탄광의 경영자는 찬반 투표를 통해 폐광 여부를 결정하려고 하고, 광부들은 폐광 결사반대 세력과 그렇지 않은 세력으로 양분되어 있다. 그런데 그림리 탄광에는 100여 년의 전통을 자랑하는 브라스 밴드가 있다. 지휘자인 대니는 이 밴드에 대해 엄청난 애정과 자부심을 갖고 있다. 광산이 문을 닫으면 밴드 역시 해체될 운명에 처해질 것이 분명한데도 밴드의 명맥을 이어가기 위해 열과 성을 다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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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리스트
No.아티스트 & 연주 
1로드리고, [아랑후에즈 협주곡] 중 2악장 / 밀로쉬 카라다글리치(기타),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연주), 야닉 네제-세갱(지휘)음악 재생
2로시니, [빌헬름 텔] 중 [Overture(서곡)] /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지휘),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음악 재생

1분 미리듣기 / 음원제공: 유니버설 뮤직 / 앨범 정보 보러가기




그러는 동안 어느덧 전국 대회가 목전으로 다가왔다. 대니는 이미 열정이 식어버린 단원들을 독려해 연습에 매진하도록 하지만 광부들은 시큰둥하기만 하다. 그중 일부는 폐광이 되면 밴드도 자연히 없어질 것이라는 생각에 미리 밴드에서 탈퇴하려고 한다. 그런데 바로 이때 그들 앞에 묘령의 아가씨가 나타난다. 이 지역 출신의 글로리아라는 여성이다. 밴드의 젊은 단원인 앤디는 그녀를 금세 알아본다. 사춘기 시절 한때 그녀와 잠시 모종(?)의 접촉을 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침울하던 밴드의 분위기는 글로리아의 출현으로 활기를 되찾는다. 사실 글로리아는 밴드의 전설적인 지휘자 아더 멀린즈의 손녀인데, 할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트럼펫으로 연주하는 솜씨가 전문가 뺨치는 수준이다. 글로리아는 광부들과 함께 로드리고의 [아랑후에즈 협주곡]을 연주하며 어린 시절에 대한 아련한 추억에 젖는다.

글로리아는 사실 영국 광산협회의 조사관이다. 그녀가 10년 만에 고향을 찾은 것은 광산의 경제성에 대해 조사하기 위해서이다. 비록 광산협회에서 일하고 있지만 글로리아는 광부들과 같은 마음을 갖고 있다. 그녀 역시 폐광을 원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조사하는 틈틈이 광부들과 함께 음악을 연주하고, 어린 시절 한때 애인이었던 앤디하고도 친구 이상의 감정을 나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글로리아가 영국 광산협회가 파견한 감정사였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광부들과의 관계가 급격히 식어버리고, 앤디와의 관계 역시 소원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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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산협회 조사관으로 고향에 돌아온 글로리아는 광부들과 같은 마음으로 음악을 연주한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 그림리 탄광의 브라스 밴드는 준결승에서 우승을 거둔다. 이로써 밴드는 런던의 로열 앨버트에서 열리는 결승대회에 참가할 자격을 얻게 되었다. 광부들은 승리감에 도취해 웃고 떠들며 마을로 돌아온다. 하지만 그들 앞에 충격적인 소식이 기다리고 있다. 폐광이 최종적으로 결정되었다는 소식이다. 그 말을 들은 광부들은 절망한다. 밴드의 지휘자 대니는 광부들에게 런던에서 열릴 결승대회에 대해 얘기하지만 이제 그의 말을 들어 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런 태도에 충격을 받았기 때문일까. 대니는 평생 탄광에서 일하며 얻은 진폐증이 악화되어 병석에 눕는다.

대니의 아들이자 밴드의 트롬본 주자인 필은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절망에 빠진다. 당시 필은 최악의 상황에 처해 있었다. 대출금을 갚지 못해 빚쟁이들이 와서 집 안의 물건을 모두 가져갔고, 아내는 그것을 보다 못해 아이들을 데리고 친정으로 가버렸다. 그런데 이제 아버지마저 쓰러진 것이다. 광부들은 필에게 와서 병상에 누워 있는 대니에게 결승대회에 나가는 것을 모두 포기했다는 말을 하라고 종용하지만 아버지가 크게 실망할 것을 걱정한 필은 쉽게 말을 꺼내지 못한다.

한편 글로리아는 광산에 대한 경제성 조사를 통해 탄광을 계속 운영하는 것이 옳다는 결론에 도달하고, 이런 취지로 보고서를 작성하지만 정작 사장은 보고서를 읽어보지도 않는다. 그들은 이미 2년 전에 폐광을 결정했고, 보고서는 하나의 요식행위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글로리아는 사장의 면전에 보고서를 집어던진다. 그리고 이 때문에 해고를 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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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지휘자 대니는 음악을 통해 광부들의 마음을 모으고, 어려운 광부들의 현실을 알리고자 한다.



그 후 글로리아는 광부들을 찾아가 3만 파운드가 들어 있는 통장을 주며 런던에서 열리는 결승대회에 참가할 것을 권한다. 그녀가 광부들 편에 섰다가 회사에서 해고를 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광부들은 글로리아에 대한 오해를 푼다. 그리고 로열 앨버트 홀에서 열리는 전국대회에 참가한다. 지휘는 병상에 누워 있는 대니를 대신해 다른 광부가 맡기로 한다. 이들이 전국대회에서 연주한 곡은 로시니의 [빌헬름 텔, 서곡]. 그런데 곡이 한창 클라이맥스를 향해 달리고 있을 때 대니가 연주홀에 나타난다. 절대로 외출해서 안 된다는 의사를 말을 어기고 병원에서 탈출한 것이다.

결국 그림리 광산의 브라스 밴드는 이 대회에서 우승을 거둔다. 엄청나게 커다란 트로피를 받기 위해 무대에 올라온 대니는 트로피를 받지 않고 마이크 앞에 선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지난 10년간, 이 망할 놈의 정부는 나라의 모든 산업을 체계적으로 파괴해 왔습니다. 우리의 산업을요. 산업뿐만 아니라 우리의 공동체, 우리의 가정, 우리의 인생까지도 파괴했습니다. 소위 진보라는 이름으로 소수의 더러운 인간들을 위해서 말이지요. 여러분이 모르는 것을 제가 말씀드리지요. 2주 전에 이 밴드가 속한 탄광이 폐광되었습니다. 수 천 명이 직장을 잃고,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승리에 대한 희망도 잃었습니다. 투쟁 의지조차 잃었습니다. 삶의 의욕도, 숨 쉴 의욕도 잃었습니다. 하지만 말하고 싶은 건 이들이 차라리 동물이었다면 화를 냈을 겁니다. 이들은 어떻게 했을까요? 화를 내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평범한, 보통의, 정직하고 예의 바른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티끌만한 희망도 없죠. 이들이 여기서 아름다운 음악을 연주했습니다. 하지만 그게 무슨 소용이란 말입니까? 이제 동료들이랑 같이 런던 관광이나 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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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크 앞에서 그림리 탄광의 현실을 이야기하는 대니



처음에 이 영화에 브라스 밴드가 나온다는 얘기를 듣고 나는 이 영화가 음악영화인 줄 알았다. 하지만 이것은 음악영화가 아니다. 삶에 관한 영화,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생존의 마지막 수단을 박탈당한 사람들에 대한 영화, 그들이 처한 가혹한 현실과 뼈저린 절망에 관한 영화이다.

대개의 음악영화는 ‘절망 속에서 희망을’이라는 교과서적인 메시지를 던진다. 하지만 이 얼마나 무책임한 구호인가. 당장 먹고살 돈이 없는데, 당장 대출금을 못 갚아 집을 잃게 생겼는데, 음악을 통해 절망 속에서 구원을? 그처럼 무심하고 비현실적인 말이 어디 있는가? 대니의 말마따나 아름다운 음악을 연주한들 그것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브래스드 오프]는 그 현실을 미화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결승전에 나가서 우승을 해도, 그것이 이들에게 더 나은 미래를 보장해 주지 않는다. 그런데 무슨 희망을 가지란 말인가. 한 푼이라도 벌어볼 요량으로 광대 의상을 입고 마술사 노릇을 하다가 쫓겨난 필은 자살을 기도하기 직전 다음과 같이 발악한다.



“하느님? 맞다. 그 자식이 저기 있구만. 그런데 뭐 하고 있는 거지? 존 레넌도 데려가고, 메인즐리 탄광의 광부를 셋이나 데려가더니 이제 내 아버지마저 데려가려고 하면서 왜 마가렛 대처는 살려두는 거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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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주민들의 박수를 받으며 거리를 행진하는 그림리 탄광의 브라스 밴드



이렇게 이 영화는 하고자 하는 말을 조금치의 순화 과정도 거치지 않고, 그냥 직설적으로 내뱉는다. 마가렛 대처가 밉다고 정공법으로 얘기한다. 예술을 표방한 수사(修辭)도 어느 정도 여유가 있을 때나 하는 것이다. 상황이 이럴진대 영화에 나오는 음악에 대해 이러쿵저러쿵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글로리아가 처음 밴드를 찾아왔을 때, 그녀는 로드리고의 기타 협주곡 [아랑후에즈] 2악장의 기타 독주 부분을 트럼펫으로 연주했다. 그런데 지휘자인 대니는 이 곡을 ‘오렌지 주스’라고 불렀다. ‘아랑후에즈(Aranjuez)’를 영국식으로 발음하면 ‘오렌지 주스’와 비슷하게 들리는데, 그래서 아마 이 곡을 ‘오렌지 주스’라고 불러왔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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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아킨 로드리고 <출처: Wikipedia>



하지만 정작 음악을 들어보면 상큼함이 연상되는 오렌지 주스와는 완전히 정서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곡을 쓴 로드리고(Joaquín Rodrigo, 1901-1999)는 스페인 출신의 맹인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이다. 로드리고는 여러 종류의 음악을 썼지만 그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기타 음악이다. [아랑후에즈 협주곡]과 [어느 귀인을 위한 환상곡], [안달루시아 협주곡] 같은 그의 대표작이 모두 기타곡이다. 이 중 [아랑후에즈 협주곡]은 1940년에 작곡한 기타 협주곡으로 여기서 아랑후에즈는 스페인 남부에 있는 궁전을 말한다. 1악장은 스페인 춤곡풍의 악장이며, 2악장은 애수에 어린 아름다운 악장이다. 먼저 기타의 아르페지오 반주에 맞추어 잉글리쉬 혼이 아름다운 선율을 연주한다. 이 선율은 이어 기타로 반복된다. 3악장은 론도 형식으로 먼저 기타가 경쾌하고 소박한 주제를 제시하면 오케스트라가 이를 반복한다. 기타와 오케스트라가 서로 대화를 하듯 연주한다.

원곡에서 2악장의 주제선율을 먼저 제시하는 악기는 독주악기인 기타가 아니라 오케스트라에 있는 잉글리쉬 혼이다. 그런 다음 기타가 특유의 뚝뚝 끊어지는 소리로 이 선율을 반복하면, 나중에 관악기들이 일제히 애수에 찬 선율을 격정적으로 연주한다. 영화에서는 기타 독주를 트럼펫 독주가 대신하고, 오케스트라 파트 역시 브라스 밴드가 대신한다. 그런데도 별로 어색하지가 않다. 원곡에서도 관악기의 역할이 두드러지기 때문에 이런 전환이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것이다.

[아랑후에즈]의 2악장은 계면의 그늘이 짙게 드리워진 음악이다. 그 짙은 그늘이 곧 사라지고 말 탄광촌의 퇴영적 분위기와 어우러진다. 반면에 이들이 결승대회에서 연주한 로시니의 [빌헬름 텔, 서곡]은 계면의 그늘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그야말로 순진무구한 희망으로 가득 찬 음악이다. [빌헬름 텔]은 로시니의 마지막 오페라로 오스트리아의 지배 아래 있던 스위스의 활쏘기 명수 빌헬름 텔의 일대기를 그린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전막이 공연되는 일은 드물고, 막이 오르기 전에 연주하는 서곡만 널리 연주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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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 국립박물관에 있는 빌헬름 텔 모자이크 <출처: Wikipedia>



서곡은 모두 네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제1부 [새벽]에서는 스위스 산간 지방에 서서히 여명이 밝아오는 모습을 독주 첼로가 조용하고 서정적인 멜로디로 노래한다. 제2부 [폭풍]에서는 거칠게 몰아치는 폭풍과 검은 구름이 몰려오는 광경이 실감나게 그려진다. 폭풍우가 끝나고 나면 팀파니가 멀리서 아련하게 들리는 우렛소리를 묘사하고 이어 아름다운 새소리가 들린다. 제3부 [정숙]은 폭풍우가 지난 후에 부르는 평화로운 목가이다. 느리게 연주하는 잉글리쉬 혼 소리가 목동의 피리 소리를 연상시킨다. 제4부 [스위스 군의 행진]은 트럼펫의 팡파르로 화려하게 시작된다. 씩씩하게 행진하는 스위스 군인들의 모습과, 그것을 바라보는 군중들의 흥분된 모습을 생생하게 그리고 있다. 영화에서 밴드가 연주하는 대목은 이 중 제4부 [스위스 군의 행진]이다.

[빌헬름 텔]은 스위스 판 ‘시련과 극복’의 드라마이다. 시련의 끝에서는 당연히 승리가 찾아온다. 그래서 그런지 로시니의 피날레는 정말로 신나고 멋지다. 이 화려한 팡파르는 정말로 듣는 사람의 마음을 과도하게 흥분시킨다. 도저히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도록 만든다. 하지만 그뿐이다. 희망찬 음악을 연주한다고 해서, 전국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다고 해서 무엇이 달라지랴. 화려한 음악이 끝나고 나면, 그 화려함의 강도만큼이나 깊고 어두운 현실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그러니 우리, 음악이 희망을 가져다줄 것이라고 감히 얘기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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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브래스드 오프(1996)
    평점


    9.17


    개요



    드라마

    |


    영국

    ,

    미국

    |
    1997.07.05 개봉
    | 105
    |


    15세 관람가

    감독



    마크 허만

    출연



    피트 포스틀스웨이트

    ,

    타라 피츠제랄드

    ,

    이완 맥그리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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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회숙 | 음악 칼럼니스트
이화여대 음대 및 서울대 음대 대학원 졸업
현재 서울시립교향악단 월간지 SPO 편집위원이며, 서울시향 ‘콘서트 미리 공부하기’를 비롯한 여러 클래식 강좌의 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평화방송 FM 음악공감 ‘진회숙의 일요 스페셜’의 진행자이다. 저서로 <모나리자. 모차르트를 만나다> 외 여러 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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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Wikipedia





발행2015.0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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