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속클래식 시계태엽 오렌지 - 인간의 폭력성과 합창교향곡의 역설적 공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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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637회 작성일 16-02-06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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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들의 침묵]의 한니발, [리플리]의 리플리, [셜록 홈즈: 그림자 게임]의 모리아티 교수. 이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모두가 악인이라는 점과, 악인임에도 불구하고 클래식 음악을 좋아하는 매우 고상한 취미를 가졌다는 점이다. 희대의 살인마 한니발은 바흐의 음악을 들으며 사람을 죽이고, 타고난 사기꾼 리플리는 평소에 피아노 연주와 오페라 감상을 즐긴다. 모리아티 교수 역시 클래식 마니아로 슈베르트의 가곡을 부르며 셜록 홈즈를 고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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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리스트
No.아티스트 & 연주 
1로시니 [세빌리아 이발사] 중 ‘서곡’ / 유럽 챔버 오케스트라, 클라우디오 아바도(지휘)음악 재생
2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 4악장 / 서울시립교향악단, 정명훈(지휘)음악 재생

1분 미리듣기 / 음원제공: 유니버설 뮤직 / 앨범 정보 보러가기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시계태엽의 오렌지]에 나오는 알렉스도 이들과 비슷하다. 그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성악설(性惡說)을 믿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타고난 악당이다. 각종 악행을 저지르면서도 결코 반성하는 법이 없다. 악인들이 악행을 저지르는 배경에는 대개 이기적인 동기가 있게 마련이다. 하지만 알렉스는 보통의 악인들과 다르다. 그는 특별한 목적 없이 그저 다른 사람을 괴롭히는 것에서 순수한 쾌감을 느낀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악당 중에서도 가장 악랄한 악당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악랄한 그가 취미만은 고상하다. 그는 베토벤의 열광적인 팬이다.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알렉스는 ‘베토벤을 좋아하는 사이코패스’이다. 평소에 패거리들과 함께 밀크바를 자주 찾는 그는 이곳에서 마약이 들어간 우유를 마신 후 기분이 좋아져 밀크바를 나선다. 그리고 길을 가다가 다리 밑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는 거지 노인을 단지 노래를 못한다는 이유로 때리고, 라이벌 갱단인 빌리 보이를 찾아가 이들 패거리와 한바탕 싸움을 벌인다. 그런 다음 자동차를 훔쳐 타고 교외로 드라이브를 간다.

그렇게 신나게 달리다가 외딴 집을 발견한다. 그 집에는 늙은 작가와 그의 아내가 살고 있는데, 알렉스와 그 패거리들은 집으로 쳐들어가 작가를 흠씬 두들겨 패고, [사랑은 비를 타고(Singing in the rain)]를 부르며 작가가 보는 앞에서 그의 아내를 겁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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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크바를 찾은 알렉스와 그 패거리들



그 후에도 알렉스의 악행은 계속된다. 그러다가 어느 날, 혼자 살고 있는 과부의 집에 들어가 그녀를 죽인다. 이 일로 알렉스는 경찰에 체포되고, 살인죄로 징역 14년을 선고받는다. 그런데 감옥에서 2년을 보낸 어느 날, 그는 놀라운 실험에 참가하게 된다. 정부에서 범죄자들을 효과적으로 교화하기 위해 루드비코 요법이라는 것을 개발했는데, 그가 실험 대상자가 된 것이다. 루드비코 요법이란 일종의 조건반사 요법이다. 실험 대상자에게 선정적이거나 폭력적인 행동을 담은 영상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구토를 일으키는 약물을 투여하는 것이다. 이런 과정을 반복하면, 실험 대상자는 선정적이거나 폭력적인 생각을 하기만 해도 바로 구토를 일으키게 된다. 육체적인 고통 때문에 나쁜 짓을 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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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드비코 요법이라는 실험에 참가하는 알렉스



그런데 이 요법을 시행하면서 하필이면 알렉스가 가장 좋아하는 베토벤의 [합창 교향곡]을 틀어놓는데, 그때부터 알렉스는 이 곡을 들으면 구역질을 하는 고통을 겪게 된다. 한때는 그토록 좋아하던 음악이 이제는 구토를 유발하는 고통스러운 음악이 된 것이다.

여하튼 이 요법으로 알렉스는 전혀 범죄를 저지를 수 없는 사람이 되었고, 덕분에 2년 만에 감옥에서 풀려나게 된다. 하지만 그 후 알렉스는 자신이 없는 동안 변해 버린 현실에 직면한다. 부모는 자기 자신을 대신할 아들을 두었고, 한때 한 패거리로 악행을 일삼던 친구들이 이제는 범인을 잡는 경찰이 되어 있다. 예전부터 그에게 적개심을 가지고 있던 옛 패거리들은 알렉스를 한적한 시골로 끌고 가서 매질과 물고문으로 만신창이를 만들어 놓은 다음 사라진다.

알렉스는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한 채 시골길을 헤매다가 한 외딴 집에 들어가 도움을 요청한다. 그런데 그 집은 예전에 그가 패거리들과 함께 들어가 아내를 겁탈했던 바로 그 작가의 집이다. 작가는 이들에게 맞아 반신불수가 되었고, 그의 아내는 성폭행의 충격으로 세상을 떠났다. 작가는 그런 줄도 모르고 알렉스를 잘 대해 주지만, 그가 사워를 하면서 [사랑은 비를 타고]를 부르는 소리를 듣고 그의 정체를 알게 된다. 복수심에 불탄 작가는 알렉스가 베토벤의 [합창 교향곡]에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킨다는 것을 알고, 그를 2층 방에 가두어 놓고 베토벤의 [합창 교향곡]을 크게 틀어 놓는다. 알렉스는 구역질을 하면서 고통을 호소하다가 결국 자살을 하려고 창밖으로 몸을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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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에 갇힌 알렉스는 베토벤 [합창 교향곡] 음악 소리에 고통스러워한다.



알렉스는 목숨을 건지지만 이 일은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다. 루드비코 요법에 문제가 있다는 비판이 일기 시작한 것이다. 정부의 정책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루드비코 요법이 반인륜적, 비인간적 행태라고 비난한다. 비난이 거세지자 정부는 알렉스로 하여금 예전의 상태로 돌아가는 역 루드비코 요법을 받게 한다. 그리고 그에게 루드비코 요법을 제안했던 내무부 장관이 찾아와 정중하게 사과한다. 그런 다음 치료가 성공적으로 끝났는지 확인하기 위해 베토벤의 [합창 교향곡]을 틀어놓는데, 놀랍게도 음악을 들으며 더 이상 구토를 하지 않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기뻐한다. 이제는 예전과 같이 편하게 베토벤의 [합창]을 들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알렉스는 베토벤의 음악을 들으며 여자와 성행위를 하는 장면을 상상한다. 그리고는 이렇게 외친다.



“나는 완전히 치료되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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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무부 장관의 사과와 함께 사진을 같이 찍는 알렉스



[시계태엽 오렌지]에는 노골적인 폭력이나 성(性) 묘사가 많이 나온다. 그런데 그 방식이 여타의 영화와는 많이 다르다. 마치 세상을 조롱하고 비웃는 것 같다. 스탠리 큐브릭의 폭력과 성 묘사에는 아무런 감정이 실려 있지 않다. 관객의 치를 떨게 하거나 얼굴을 화끈거리게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세상을 마음껏 비웃는데, 이런 감독의 시각은 영화에 사용된 음악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이 영화에는 로시니의 [세빌리아의 이발사 서곡]과 [빌헬름 텔 서곡], 베토벤의 [합창 교향곡]이 나온다.

이 중 [세빌리아의 이발사 서곡]은 빌리 조이 일당이 여자를 겁탈하는 장면과 알렉스 일행이 폭력을 저지르는 장면에서, [빌헬름 텔 서곡]은 알렉스가 길거리에서 만난 두 명의 여자와 난잡하게 노는 장면에서 나온다. 상황 자체는 매우 잔인하고 선정적이지만 그 순간 울려 퍼지는 로시니의 음악은 가볍고 코믹하다. 알렉스에 있어 폭력과 악행은 로시니의 음악처럼 가볍고 즐거운 놀이에 불과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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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천적으로 낙천적이며, 미식가였던 로시니. 1865년 사진. <출처: Wikipedia>



로시니는 19세기 유럽 무대를 석권했던 이탈리아 오페라의 거장이다. 그의 오페라는 재미있는 줄거리와 달콤한 멜로디, 탁월한 무대 감각, 경제적인 짜임새, 뛰어난 관현악법으로 가는 곳마다 사람들의 환영을 받았다. 당시 로시니의 인기는 악성 베토벤이 울고 갈 정도였다. 그는 1808년부터 20년 동안 모두 37편의 오페라를 작곡했는데, 그중 상당수가 흥행에 성공한 덕분에 일찌감치 상당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놀랍게도 로시니는 39살이 되던 해에 갑자기 오페라 작곡을 중단했다. 그리고 젊은 시절 모아놓은 돈을 가지고 이후 40여 년이 넘는 여생을 놀고먹으면서 보냈다.

로시니는 선천적인 쾌락주의자였으며, 식도락가였다. 요리에도 취미가 있어 자기만의 레시피를 개발하기도 했는데, ‘로시니 스테이크’라고 불리는 ‘투르네도 로시니’를 비롯해 그의 이름이 들어간 요리가 지금까지 전해내려 오고 있다.

로시니는 오페라 세리아(진지한 오페라)와 오페라 부파(희극 오페라) 두 분야에 모두 작품을 남겼다. 하지만 그의 본령은 어디까지나 오페라 부파라고 할 수 있다. 그의 대표작인 [세빌리아의 이발사]는 오페라 부파에 속한다. 로시니는 탁월한 유머 감각으로 등장인물들의 성격을 생생하게 묘사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로시니 스스로도 오페라 세리아보다는 오페라 부파를 더 좋아했다. 자신의 기질과 잘 맞았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당시 청중들이 이것을 열렬하게 원했기 때문이다.

로시니의 오페라는 즐겁고 유쾌하다. 하지만 그냥 즐거운 것이 아니다. 그 안에 뼈가 있다. 로시니 오페라의 매력은 풍자와 해학을 통한 현실 비판에 있다. 그는 풍자하고자 하는 인물을 졸지에 조롱거리로 만들어 버리는 놀라운 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능숙한 솜씨로 귀족들의 허위의식과 위선을 고발하고, 그것을 건강한 웃음으로 승화시켰다.

로시니나 큐브릭 모두 현실을 비판했다. 하지만 큐브릭의 현실 비판은 로시니의 그것보다 훨씬 냉정하고 가혹하다. 19세기와 20세기라는 시대의 간극이 이 차이를 설명해 준다. 로시니의 시대는 아무리 세상이 문제가 있다고 해도 세상에 대고 농담을 걸 여유가 있던 시대였다. 로시니의 오페라 속 인물들은 그 허위의식으로 사람들에게 웃음을 안겨 주고, 카타르시스를 제공했다.

하지만 그로부터 한 세기가 흐른 후, 이 세상은 그런 식의 유유자적한 비판으로는 도저히 어찌해 볼 도리가 없을 정도로 망가져 버리고 말았다. 로시니의 비판에는 웃음이 있지만, 큐브릭의 비판에는 웃음이 없다. 영화 속 알렉스의 웃음, 음악의 웃음은 일종의 역설이다. 웃기 때문에 더욱 소름 끼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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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살때의 스탠리 큐브릭. 1949년. <출처: Wikipedia>



이런 음악의 절묘한 활용은 알렉스가 즐겨 듣는 베토벤의 [합창 교향곡]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영화에 나오는 합창은 베토벤이 실러의 시 [환희의 송가]에 곡을 붙인 것으로 교향곡을 통해 설파하고자 하는 베토벤의 이상을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중심 악장이라고 할 수 있다. 곡은 오케스트라 악기들이 불협화음으로 무질서하게 하강하는 도입부로 시작한다. 이것은 일종의 카오스를 의미한다. 카오스가 끝나고 나면 오케스트라가 차례로 1, 2, 3악장의 주제 선율을 조심스럽게 연주하지만 모두 첼로와 콘트라바스에 의해 부정된다.

이렇게 여러 차례 거절당한 오케스트라가 드디어 조심스럽게 [환희의 송가] 주제를 연주하면, 그제서야 첼로와 콘트라바스가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다. 이렇게 해서 오케스트라 전체가 자신 있게 [환희의 송가]를 연주한다.

하지만 베토벤은 이에 만족하지 않는다. 오케스트라가 한창 기쁨의 멜로디를 연주하다가 마치 찬물을 끼얹듯 갑자기 처음에 나왔던 카오스를 재현하기 때문이다. 카오스를 의미하는 불협화음의 무질서한 하강이 있은 후, 웅장한 바리톤의 목소리가 등장한다. “오, 벗들이여! 이런 소리가 아닙니다. 우리 이보다 더욱 기쁨에 넘친 노래를 부릅시다.” 이런 외침과 함께 본격적인 기쁨의 노래가 시작된다. 그 후 음악은 독창, 중창, 합창 등으로 이어지는데, 결국 이 선율은 그 유명한 환희의 테마에 의해 절정에 달하게 된다. 그 절정에서 듣는 이는 모두 가슴 벅찬 환희를 경험한다. 인류가 추구하는 이상(理想)의 세계, 아름다움과 진실, 조화와 질서를 음악으로 보여주는 악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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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을 좋아하는 알렉스의 방



이렇게 인류에게 건강한 메시지를 던져주는 베토벤의 [합창 교향곡]을 알렉스가 좋아한단다. 천하의 악당이, 그렇게 잔인한 인간 말종이 그렇게 지고한 이상을 외치는 음악을 좋아하다니. 베토벤에 대한 모욕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여기에서 우리는 또다시 큐브릭의 역설과 만나게 된다. 천하의 악당도 베토벤을 좋아할 수 있다는 것. 인류에게 숭고한 이상을 전하는 음악을 들으며 살인을 할 수 있다는 것, 이 세상에 더 이상 숭고함이나 고상함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그렇게 큐브릭은 짐짓 웃음을 가장한 냉정함으로 우리에게 현실의 가혹함을 받아들일 것을 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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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회숙 | 음악 칼럼니스트
이화여대 음대 및 서울대 음대 대학원 졸업
현재 서울시립교향악단 월간지 SPO 편집위원이며, 서울시향 ‘콘서트 미리 공부하기’를 비롯한 여러 클래식 강좌의 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평화방송 FM 음악공감 ‘진회숙의 일요 스페셜’의 진행자이다. 저서로 <모나리자. 모차르트를 만나다> 외 여러 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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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Wikipedia





발행2015.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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