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역사 마쟈르의 서유럽 침공(2) - 유럽 전역을 휩쓴 마쟈르 족의 맹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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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11회 작성일 16-02-07 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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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쟈르와 싸우는 하인리히군이 묘사된 중세 기록화 <출처:Wikipedia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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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표


마쟈르의 서유럽 침공 전쟁 개요

전쟁주체


마쟈르족, 동프랑크 (바이에른/슈바벤), 이탈리아

전쟁시기


890년대~1050년대

전쟁터


현재의 독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프랑스, 발칸반도

주요전투


프레스베르크, 아이제나흐, 리아데, 레흐펠트, 빈 포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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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쟈르의 서유럽 침공(1)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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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쟈르의 군사 시스템



중기병과 보병 위주로 싸우는 프랑크에게 있어 마쟈르는 전혀 보지 못한 전략을 구사하고 있었다. 마쟈르족이 오기 전에도 서유럽은 이슬람군의 대대적인 침공을 맞았으며 북쪽에서 몰려오는 바이킹들과의 전투를 경험한 적이 있다. 마쟈르 침공보다 약 150년전의 투르 전투에서 도끼와 창을 든 프랑크 보병은 고지에서 밀집진형을 이루어 이슬람 중기병의 돌격을 막고 엄청난 병력 손실을 강요하여 이슬람군을 격퇴하였다. 이에 비하여 바이킹들은 대개는 소규모 기습을 위주로 하였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도끼와 검을 위주로 하는 보병이었기 때문에 대규모로 접전을 벌일 경우에도 프랑크군에게 익숙한 보병대 보병의 전투가 전개되었다. 바이킹들은 이전까지 유럽 전역을 공포에 몰아넣고 잉글랜드 대부분을 점령하여 영토로 삼았으며 지금의 네덜란드와 벨기에를 점령하였다. 내전에 바쁜 프랑크 왕들은 대개 바이킹들을 매수하여 물러나게 하였으나 그들의 요구가 지나칠 경우 싸울 수밖에 없었다. 중세의 기록인 “풀다 연대기(Annales Fuldensis)”에 의하면 동프랑크 왕 아르눌프(소년왕 루트비히의 아버지)의 프랑크군과 현 벨기에 로이벤 근처에서 격돌하였는데 이 전투에서 프랑크족은 바이킹들에게 대승을 거두었고 죽은 바이킹들의 시체가 강을 막을 정도로 많았다고 한다. 이로서 바이킹들은 결국 네덜란드와 벨기에 지방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그러나 익숙한 방식으로 싸우는 적들과는 달리 스텝 초원에서 기원한 유목민족인 마쟈르족은 경기병의 기사(騎射)를 중심으로 한 전술을 구사하였다. 적과 정면으로 싸우지 않고 화살로 괴롭히거나 적과 맞붙어 싸우는 척하다가 갑자기 후퇴하여 적이 대형을 풀고 추격하도록 유도하고 이후 적을 매복지로 끌어들여 포위한 후 섬멸하는 것이다. 또는 일부 부대로 하여금 적을 붙들어두고 기마의 기동성을 이용하여 멀리 우회한 후 적을 옆이나 뒤에서 들이치는 기동전 또한 마쟈르의 기본 전술 중 하나였다. 보병의 수비와 난전, 또는 중기병의 충파(衝破)와 난전으로 일관하던 프랑크군은 마쟈르의 유목전술에 고전할 수밖에 없었다. 앞서 언급한 브렌타의 전투는 소규모 부대의 유인과 매복 섬멸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프레스부르크의 전투에서도 강을 거슬러 올라가던 보급선단을 불화살로 공격하여 불태운 다음 흙으로 벽을 쌓으려고 하는 적을 사방에서 화살로 공격하여 멸살하였다. 만약 적이 후퇴할 경우 기마의 기동력으로 퇴로를 막아 전멸시키는 방법을 택하였다.

마쟈르는 아울러 자신들이 확보한 영역 바깥을 황폐화시키고 보급이 불가능한 지역으로 만들고 소수의 복속민만 거주하게 하거나 약간의 경계병력만 주둔시켰는데 이를 ‘기예푸’라 하였다. 이는 현대에서의 ‘완충지대’와 비슷한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마쟈르의 영역으로 쳐들어오려는 적이 이 지대를 통과를 하게 되면 보급을 받지 못하는 것은 물론 복속민들이나 경계병력에 의하여 그들의 움직임을 파악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쳐들어 오는 적을 막기 위하여 마쟈르 전사들이 동원되는 경우 두 명의 사령관을 두게 되는데 작전과 야전에서의 지휘를 맡는 군사지휘관격인 ‘귤라(Gyula)'와 군의 행정관/’판관‘의 업무를 담당하는 하르카(harka)가 있어 역할을 분담한다. 마쟈르가 유럽에 진입한 초기에는 귤라가 하르카 보다 지위가 높았던 것으로 보인다. 마쟈르는 대개 봄에 초지의 풀이 나기를 기다려 말들을 먹인 다음 기마들의 체력이 충실하여 질 때 공격에 나섰으며 맞서 싸우는 적은 유목민의 특유의 유인 기동으로 섬멸하고 협상을 해오는 도시들은 공격하지 않는 대가로 엄청난 재물을 뜯어내었다.



무인지경으로 달리는 마쟈르



앞서 언급한 908년 아이제나흐의 전투에서 마쟈르군과 싸우러 나온 튀링겐 군대는 마쟈르에게 패하고 튀링겐 공작 에기노(Egino), 튀링겐의 귀족인 부르크하트와 부르츠버그 주교인 루돌프를 포함한 고위귀족과 사제 여럿이 싸움터에서 전사하였다. 이전에 프레스부르크에 패한 소년왕 루트비히는 다시 한 번 마쟈르군과 싸워서 이전의 패배를 설욕하고자 하였다. 루트비히는 군을 다시 모아 910년에 아우구스베르크 근처에서 마쟈르군과 싸웠으나 결과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대패였다. 이 와중에서도 동프랑크의 귀족들은 마쟈르족에서 맞서 싸우기보다는 서로와의 싸움에 힘을 낭비하였고 마쟈르족에 대한 통일전선을 구축하지 못하였다. 서유럽의 최강자인 프랑크가 분열하면서 마쟈르는 거의 유럽 전역을 휩쓸었다.

911년에는 튀링겐을 포함한 현재 독일 서부와 벨기에, 알자스-로렌 지역을 휩쓸었고 다른 부대는 부르군디아(부르고뉴 남부)와 르와르 강 인근까지 쳐들어갔다. 913년에는 다시 독일 서부를 거쳐 프랑스 북부까지 거친 뒤 르와르강 유역과 아퀴타니아를 쳐서 많은 노획물을 획득하였다. 이어 915년에는 독일 북부와 동부를 휩쓸었고 920년대에는 이탈리아를 다시 침공하여 921년에는 이전에 평화협약을 맺었던 이탈리아왕 베렌가리오의 군과 다시 싸웠고 베로나 인근의 전투에서 이탈리아군을 여지없이 격파하였다. 베렌가리오는 이후 마쟈르의 침공과 약탈을 무력하게 지켜볼 수 밖에 없었고 마쟈르는 이탈리아 반도를 거침없이 내달릴 수 있었다. 마쟈르는 922년에 이탈리아 남부 타란토 인근까지 약탈하였지만 이를 막는 이탈리아 병력은 거의 없었다. 924년에는 부유한 농업지대인 북부의 포(Po) 강 유역을 다시 치면서 헝가리 공국의 부(富)를 늘렸다. 포강을 휩쓴 마쟈르의 본대는 유목민족 특유의 기동력을 발휘하여 프랑스 남부로 진격하였고 현 프랑스 남부 지중해안을 거쳐 피레네 산맥 인근까지 진출하였다. 이 와중에서도 독일 지역에 대한 공격에 재개되어 926년에는 독일 남부 바이에른과 알사스-로렌, 그리고 룩셈부르크가 마쟈르의 제물이 되었다. 927년에는 다시 이탈리아로 쳐들어와 로마와 카푸아 인근까지 휩쓸었고 투스카니와 카푸아에서는 ‘조공’ 명목으로 많은 보물을 받아내었다. 약탈당하는 피해의 정도로 말하자면 바이킹들의 기습보다 그 정도가 더욱 심하였으며 유럽은 마쟈르의 기마군에 동서남북으로 사정없이, 그리고 정신없이 털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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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가리 유럽 침공지역



비록 이 당시 마쟈르가 약탈과 기습을 통하여 획득하는 노획물도 상당하였지만 마쟈르 사회에는 중대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마쟈르가 차지한 카르파티아 분지는 말을 먹일 초지도 상당했지만 동유럽 최대의 농업지대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넓은 평원이 펼쳐져 있었다. 마쟈르의 귀족들은 이전에 이 곳에 살고 있던 슬라브인들을 노예로 부리는 것과 동시에 유럽을 휩쓸면서 잡아온 포로들의 노동력을 이용하여 카르파티아 평원 곳곳에 대장원(大莊園)을 만들었다. 이 때문에 헝가리도 완전히 같지는 않지만 유럽과 비슷한 봉건체제로 변하고 있었다. 비옥한 지역에 나오는 농업생산물에다 전쟁과 약탈로 벌어들이는 엄청난 약탈물은 헝가리를 부유한 지역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정착사회로 변하고 있음에도 마쟈르의 공격과 기습은 멈추지 않았다.



뭉치는 독일인들과 마쟈르의 패배



마쟈르의 대군이 유럽을 제 집안처럼 휘젓고 다니는 그 순간에도 프랑크의 왕들은 두려워서 성문을 닫거나 돈을 주어 약탈을 피하기로 일관하였다. 심지어 마쟈르인들을 매수하여 자신과 라이벌 관계에 있는 귀족이나 왕족의 영역을 유린하도록 유도하는 경우도 있었다. 900년도의 브렌타 전투에 앞서 동프랑크 왕 아르눌프가 마쟈르와 밀약을 맺고 라이벌이자 이탈리아왕인 베렌가리오를 공격하게 한 것이 좋은 예이다. 명목상 신성로마 황제이자 동프랑크 왕인 소년왕 루트비히는 생전에 프랑켄 공작 대(大) 콘라트를 죽이고 그의 아들 소(少) 콘라트를 세우는등 제국 내에서 자신의 권위를 확보하려 하였으나 마쟈르에게 연거푸 패하고 동프랑크가 황폐화되면서 그의 권위는 추락하고 왕국을 제대로 다스려보지도 못한 체 죽고 만다. 루트비히가 죽은 후 소콘라트는 911년 동프랑크 귀족들에 의하여 동프랑크의 왕으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그도 귀족들의 세력을 누를 수가 없었고 권위를 회복하고자 과거 제국의 수도였던 아헨을 차지하려고 하였으나 실패로 끝난다. 소년왕 루트비히가 마쟈르의 공격 때문에 결국은 죽었듯이 동프랑크에 대한 마쟈르의 계속되는 공격과 이로인한 왕국의 참상으로 인하여 콘라트 역시 그 권위를 제대로 세울 수가 없었다.

소년왕 루트비히의 죽음은 적어도 동프랑크에서는 카롤링거 왕조의 혈통이 단절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였으며 이로 인하여 지금의 독일 지역이 카롤링거 제국으로부터 멀어지게 된다. 콘라트가 918년에 카린티아와의 싸움에서 중상을 입고 사망한 후 독일 지역에서는 작센의 하인리히(매사냥꾼 왕)가 주도권을 잡고 919년에 동프랑크 왕이 아닌 ‘독일 왕’으로 등극한다. 하인리히는 921년부터 925년에 걸쳐 로렌 지방을 차지한 다음 서부 프랑크에 대한 독립성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하인리히 역시 마쟈르에 맞서서는 그리 성공적이 아니어서 몇몇 전투에서 승리하였음에도 마쟈르의 침공을 막을 수 없었다. 924년에는 헝가리의 초대 대공인 아르파드의 아들인 졸탄의 헝가리군과 부딪혀 완패를 하였지만 본대로부터 떨어져 있던 졸탄을 사로잡았고 졸탄을 풀어주는 대가로 926년에 마쟈르와 협약을 맺었는데 비록 연례 ‘조공’을 약속하기는 하였지만 10년의 평화를 얻을 수 있었다. 이는 사실 특별한 것이 아니라 마쟈르가 많은 공물을 약속받는 방법이기도 하였다. 이미 바이에른의 아르눌프 악공(惡公/ 동프랑크왕 아르눌프와는 다른 사람)도 각각 918년과 927년에 마쟈르에게 많은 공물을 약속하고 연례적인 약탈로부터 ‘면제’받은 일이 있다. 그러나 아르눌프가 단순히 공물을 바치는 데서 그쳤다면 하인리히는 공물을 바쳐 얻은 평화기간 동안 마쟈르에 맞서기 위한 기마군을 육성하였다. 이후 마쟈르가 932년에 하인리히로부터 조공을 받으려고 왔을 때 싸울 준비가 되었다고 생각한 하인리히는 조공을 바치기를 거부하였고 933년에 메르스베르크(리아데)에서 마쟈르의 대군과 맞닥뜨렸다. 마쟈르는 이 전투에서 전통적인 방식으로 화살을 날린 후 하인리히의 작센군을 유인하려고 하였으나 하인리히는 우선 경보병과 경기병만을 내보내어 마쟈르를 오히려 끌어들인 후 적절한 순간에 중기병으로 돌격하게 하였다. 경기병으로 구성된 마쟈르가 황급히 후퇴하는 바람에 양군에 피해는 많지 않았으나 조직적인 저항에 부딪힌 마쟈르는 작센지방에서 물러갔고 일설에는 전장에 모인 독일의 귀족들이 모두 하인리히를 그 자리에서 ‘황제’로 받들었다고 한다. 하인리히는 비록 영주들의 자치권을 인정하지만 귀족들 중 1인자일 뿐임을 계속 강조하였다. 그러나 그가 936년에 사망할 당시 독일의 영주들은 모두 하인리히를 왕으로서 인정한 상태였다. 하인리히가 죽자 그의 아들인 오토가 왕위를 물려받는다.



오토의 등극과 레흐펠트의 전투



일부 기록에는 하인리히 1세가 메르스베르크에서 마쟈르족을 격퇴하였을 때 적 36,000을 죽이는 대승이라 하고 있지만 이는 과장된 기록이며 실제 사상자수는 많지 않았다. 다만 독일(동프랑크)가 만만찮은 군세(軍勢)를 동원한 것을 보고 적극적으로 싸우지 않은 것뿐이다. 이후에도 마쟈르의 공격과 약탈은 계속되었으며 오히려 보다 심해졌다. 934년에는 그 말머리를 동쪽과 남쪽으로 돌려 불가리아와 동로마를 공격대상으로 삼았다. 마쟈르군은 한 때 콘스탄티노플의 성벽아래까지 이르렀고 동로마 황제는 독일의 영주들과 마찬가지로 15년간 일정금액을 ‘납부’하기로 약속하였다. 935년에는 다시 서부 유럽을 공격하여 부르군디아 북부를 휩쓸고 936년에는 하인리히 1세가 있는 작센으로 쳐들어가 약탈하였다. 지금의 프랑스 북동부의 레잉(Reims), 슈바벤, 프랑켄 지역을 횡행하였고 부르군디아를 습격하였다. 그리고는 다시 이탈리아 반도를 타고 내려가 남쪽 끝인 오트란토에 이르렀다.

937년에는 다시 이전에 휩쓸었던 독일로 쳐들어가 튀링겐과 작센지방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하인리히 1세의 뒤를 이은 오토가 강력히 저항하면서 예전과 같이 무인지경으로 내달릴 수는 없었다. 몇몇 소규모 부대는 독일군에게 패하면서 독일(아직 공식적으로는 동프랑크)에게 무시로 공물을 뜯어낼 수 있던 시절은 지나갔다. 944년에 독일을 재차 침공하였으나 카린티아의 베르톨트공(公)에게 격퇴당하였다. 독일 영주들은 마쟈르에 맞서 싸우기 시작했지만 다른 지역까지 그런 것은 아니었다. 서부 프랑크와 이탈리아, 그리고 동로마는 마쟈르의 기습에 대한 해법을 찾지 못하고 전전긍긍하였다. 942년에는 남부 프랑스와 지중해 연안을 휩쓸고 피레네 산맥을 넘어 아직도 이슬람 세력이 다스리고 있던 에스파냐를 약탈하였다. 일부 부대는 에스파냐 북부의 대서양 해안까지 이르렀다고 기록되어있다. 동부로 향한 마쟈르 부대는 943년에 불가리아를 통과하여 그리스 코린토스 인근까지 기습약탈하였다.

그러나 940년대에 이르러 오토는 그에게 반기를 든 영주들을 모두 무릎 꿇리면서 왕으로서 권위를 확립하였고 950년에 아를르의 로타르가 독살당하면서 이탈리아의 왕위가 비게 되자 그의 아들인 류돌프와 하인리히가 로타르의 아내이자 계승자인 아들레이드(독일어로 아델하이트)를 차지하려고 하였으나 오토는 직접 이탈리아의 계승전쟁에 뛰어들어 아들레이드과 결혼하고 951년에 공식적으로 이탈리아의 왕좌까지 차지하였다. 앙심을 품은 류돌프는 로렌의 공작은 콘라트와 손을 잡고 아버지에게 반기를 들었으나 진압당하고 오토는 이전의 로타링기아를 포함한 독일과 이탈리아 중부까지를 그의 영토로 확보하였다. 오토의 등극과 이탈리아 확보는 마쟈르족에게 심각한 문제를 초래하였는데 강력한 독일왕국이 등장하면서 950년대 마쟈르가 독일로 침공하는 길이 막힘은 물론 오히려 바이에른이나 기타 독일의 영주들이 오히려 마쟈르의 영역에 공격을 가하기 시작한 것이다. 아울러 이탈리아 역시 오토의 손에 들어가면서 헝가리 공국에 엄청난 부를 가져다 주었던 이탈리아를 약탈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당시까지 헝가리 공국을 지탱하였던 생활방식이 위협을 받게 되었고 마침 953년에 독일에 내분이 발생하면서 마쟈르는 독일에 대한 대대적인 침공을 재개하였다. 만약 마쟈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힘들게 확보한 권위가 무너질 것을 잘 알고 있던 오토는 자신의 독일 영지 전역에서 군을 모아 마쟈르군과 건곤일척의 승부를 벌이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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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7년에 제작된 레흐펠트 전투도(뉴렌베르크, Sigmund Meisterlin' codex)



마쟈르는 ‘동맹’을 맺은 로렌의 콘라트를 위하여 참전한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진정한 목표는 작센지방을 황폐화시켜 그 세력을 꺾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마쟈르는 예전과 같이 전광석화같이 한 지역을 휩쓸고 사라지는 전술대신 작센에 오랫동안 머무르면서 파괴행위를 일삼았다. 그러나 마침 독일 동부의 슬라브족이 준동하면서 작센 왕당군의 주력은 동부에 주둔할 수 밖에 없었고 오토는 제후들로부터 군을 징발하여야 했다. 바이에른, 슈바벤, 보헤미아등지에서 군을 모았지만 약 1만에 지나지 않았다. 이에 비하여 마쟈르군은 약 5만이었다고 기록되어있지만 이는 오토의 업적을 높이기 위한 과장이 섞인 것이며 실제로는 2만 내외로 추산되고 있다.

오토가 진군을 시작하였을 때 마쟈르군은 이전에 소년왕 루트비히를 무찔렀던 아우구스베르크를 포위하고 있었다. 오토의 군이 다가오고 있다는 소식이 들리자 마쟈르군은 포위를 풀고 오토의 군을 맞아 싸울 준비를 하였다. 오토의 게르만 통합군은 마쟈르의 본대가 있는 슈무터강과 레흐 강 사이의 지역으로 빠르게 진입하였다. 오토는 마쟈르군이 있는 지역에 도착하자 전 군을 멈추고 상류지역에 진을 친 다음 하루 저녁 금식과 기도를 명하였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서 미사를 마친 후 군장을 갖추고 다시 마쟈르군이 있는 방향으로 빠른 속도로 진격하였다. 그러나 이 와중에 마쟈르군의 별동대가 레흐강 건너편에서 반대 방향으로 향하고 있었지만 독일군은 이를 전혀 눈치채지 못하였다.

독일 통합군의 뒤쪽으로 돌아간 마쟈르군은 레흐강을 다시 건너 통합군의 보급품을 지키고 있던 수송부대를 덮쳤다. 수송부대를 구성하고 있던 보헤미아인들은 비오듯 쏟아지는 화살공격을 버티지 못하고 뿔뿔이 흩어졌고 이들을 도우러 온 슈바벤 군도 화살비를 견디지 못하고 무수한 사상자를 내고 달아났다.

이 순간이 독일 통합군의 최대의 위기였다. 후속부대가 먼저 격파당한 상태에서 앞뒤로 적을 두게 된 것이다. 이때 오토를 구한 것은 탁월한 전술이 아니라 마쟈르인들의 약탈습관이었다. 사실 이는 굳이 마쟈르인들의 습관이라기보다는 고래(古來)로부터 전쟁에서 나타나는 고질적인 문제였다. 대개의 병사들은 정식급료를 받는 것이 아니라 전장에서 빼앗은 전리품으로서 급료를 대신하였기에 일차적인 작전 성공이후 적이 가지고 물품을 약탈하는 것이 습관화되어 있었다. 마쟈르의 별동대 역시 보헤미아군과 슈바벤군을 격퇴한 후 바로 추격하는 것이 아니라 수송하고 있는 보급품에 눈이 팔려 각자 말에서 이를 약탈하기 시작한 것이다.

수송부대의 패퇴 소식을 들은 오토는 황급히 콘라트의 프랑켄군을 수송부대가 있던 곳으로 급파하였고 중무장한 프랑켄군은 마침 말에서 내려서 약탈에 정신이 팔려있던 마쟈르인들을 발견하였다. 프랑켄군은 지체없이 약탈자들을 공격하였고 무기대신 훔친 물건을 가득히 안고 있던 마쟈르 별동대는 프랑켄군에게 짓밟혔다. 결국 별동대는 모두 죽거나 겨우 목숨을 건져 달아나기에 바빴고 이후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하였다. 이로서 후방의 위협이 없어진 오토의 군은 마음놓고 마쟈르의 본대에 집중할 수 있었다. 마쟈르의 본대를 지휘하고 있던 ‘귤라’ 레헬(Lel)은 어떤 이유에선지 정면공격을 명하였고 오토 역시 선봉에 서있던 기사들을 일직선으로 배치한뒤 돌격하게 하였다. 마쟈르군같이 가볍게 무장한 군이 가장 피해야 할 것은 중무장한 병력과의 정면충돌이다. 레헬은 기사들에게 타격을 주기 위하여 일제 사격을 명하였지만 돌격하고 있던 기사들은 방패을 들어 화살을 튕겨내었다. 달려오는 속도가 있어 마쟈르군은 다시 사격기회를 잡지 못하고 통합군의 돌격을 맞았다. 비록 가죽갑옷을 입고 근접전에 필요한 곡도(曲刀)를 갖추고 있었기는 하지만 중무장한 기사들과 충돌은 재앙이었다. 마쟈르군의 전열은 깨지고, 난전(亂戰) 상황에 돌입하자 단단한 갑주를 입은 독일군에게 마쟈르인들이 살육당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마쟈르군의 일부가 거짓 후퇴하면서 독일군을 유인하고자 하였지만 오토의 아버지 하인리히 시절에 대오를 유지하여 이긴 적이 있는 독일군은 흩어지지 않았다. 결국 견디다 못한 마쟈르 전사들은 무질서하게 달아났고 많은 수가 레흐강을 건너려고 하다가 익사하였다. 나머지는 근처의 마을이나 숲에 숨어있다가 독일군 추격대와 주변 주민들에게 잡혀죽었다. 마쟈르가 카르파티아 분지에 자리를 잡은 이래 보기 드문 대패를 당한 것이다.

오토는 마쟈르에게 대승을 거두었지만 마쟈르인들을 쫓아 카르파티아 분지로 쳐들어가지는 않았다. 레흐강가에서 패한 전사들의 몇 배나 되는 수의 전사들이 아직도 그 본토에 남아있었고 제후들과 문제도 해결되지 않은데다가 슬라브족들과의 싸움에 전념하였기 때문이다. 독일지역의 병력을 통합하여 대항할 수 있는 군주가 있는 한 독일지역의 약탈이 어려울 것임을 깨달은 마쟈르는 방향을 돌려 다시 불가리아와 동로마 약탈에 집중하였다. 이로서 독일과 마쟈르간에는 불안하지만 평화가 지속될 수 있었다.



이후의 역사



레흐펠트의 승리는 당장은 아니지만 향후의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일단 레흐펠트에서의 승리로 인하여 오토는 왕권을 완전히 굳힐 수 있었다. 그리고 레흐펠트에서 승리한지 불과 2개월 후에 레크니츠의 전투에서 또 다른 위협세력인 슬라브족을 무찔렀다. 이제 감히 오토에게 반기를 들 영주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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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가리 초대왕 스테판 1세의 초상



몇 년 후 962년에 오토는 로마로 가서 교황 요한 12세가 집전하는 가운데 신성로마황제로 등극하였다. 신성로마황제가 되는 동시에 오토는 독일지역에서 있는 교회조직에 대한 인사권과 통할권을 인정받아 가톨릭의 주교와 수사들을 자신에게 종속시켰다. 즉 왕으로서 해당 국가의 교회조직에 대한 권위를 확립한 것이다. 그 대신 주교와 수사들에게 많은 영지를 하사하고 성당을 지어 그 조직을 크게 늘렸다. 혹시라도 자신에게 반기를 들 수 있는 영주들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서였다. 이로서 오토는 샤를마뉴가 얻었던 로마황제의 관을 받았고 비록 부침은 있지만 신성로마는 1808년까지 존속한다.

레흐펠트 이후 헝가리의 대공(大公)이 된 게자(Geza)는 더 이상 유럽인 기독교들로부터 야만인 취급을 받을 수 없다는 생각에 유럽문화와 함께 기독교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종교적인 이유가 전부는 아니었으며 기독교들로부터 이교도 취급을 받는 한 그들과의 전쟁이 끊이지 않을 것이라는 현실적인 계산도 깔려있었다. 게자 스스로 세례를 받고 교인이 되었으며 자신에게 세례를 내려준 베네딕토(Benedictines) 회를 위하여 판논할마에 큰 수도원을 건립하였다. 물론 스스로는 완전한 기독교인이 되지는 않고 이전의 무속숭배와 기독교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였지만 그의 치세 동안 헝가리는 빠르게 기독교화되었다.

그리고 그의 맏아들 바이크(Vajk)의 이름을 기독교식 이스트판(스테판)으로 고치고 바이에른 공작 하인리히 2세의 딸인 기젤라와 결혼시켰다. 게자가 죽은 후 스테판은 기독교를 장려하여 카르파티아 전역에 성당과 교회를 짓고 세례와 기독교 문화의 전파를 장려하면서 교황 실베스트르 2세에게 자신의 나라를 기독교 국가로 인정하여 줄 것을 요청하였고 스테판은 기독교 국가 ‘헝가리’의 초대왕 스테판 1세가 되었다.

헝가리는 무속숭배와 정교회가 뒤섞여 있던 동유럽에서 강력한 기독교 세력을 구축하였고 이후 유럽 기독교의 굳건한 방파제로서 유럽을 침략으로부터 지켰다. 이후 몽골 세력이 침공할 때 일선에 맞서 싸운 것도 헝가리이고 14세기말에 오스만의 튀르크 세력이 유럽방면으로 침공할 때에도 선봉에 서 있었다. 마쟈르의 유럽침공은 동프랑크인들의 통일의식을 자극하여 ‘독일’이라는 나라로 독립할 수 있게하는 원동력이 되었으며 헝기리가 세워짐으로 인하여 이후 헝가리가 기독교 국가로서 유럽을 지켰으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일원이 된다는 점에서 그 역사적 의미가 적지않다 하겠다.





김성남 | 안보·전쟁사 전문가
글쓴이 김성남은 전쟁이 인간 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관심을 가지고 이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미국 UC 버클리 동양학과를 졸업한 후 연세대학교 국제대학원에서 국제학 석사를 받고 한국학중앙연구원 정치학과에 진학하여 정치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주요 저서로는 [전쟁으로 보는 한국사], [전쟁으로 보는 삼국지], [전쟁 세계사] 등이 있으며 공저로 [4세대 전쟁]이, 역서로 [원시전쟁: 평화로움으로 조작된 인간의 원초적인 역사]가 있다.


발행2011.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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