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역사 백년전쟁(2) - 기사들의 황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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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504회 작성일 16-02-07 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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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2세가 지켜보는 가운데 참수되는 와트 타일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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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표


백년전쟁 개요

전쟁주체


잉글랜드(부르고뉴, 포르투갈, 독일 등의 지원) VS 프랑스(스코틀랜드, 웨일스, 카스티야 등의 지원)

전쟁시기


1337년-1453년

전쟁터


프랑스, 벨기에-룩셈부르크 등 저지대

주요전투


슬로이스 해전, 크레시 전투, 푸아티에 전투, 아쟁쿠르 전투, 오를레앙 전투, 카스티용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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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전쟁(1)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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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족의 반역과 농민의 반란



전쟁에 역병, 기근과 도적떼들이 프랑스의 농촌을 생지옥으로 만들었고, 이를 견디다 못한 농민들은 자크리의 난(1358년) 같은 반란과 폭동으로 체제에 저항했다. 잉글랜드도 그리 좋은 형편이 아니었는데, 프랑스에서 약탈한 물자로 지배계층은 윤택해졌지만 병사로 징집되고 무거운 세금까지 물어야 했던 농민은 살 길이 갈수록 막막해졌기 때문이다. 전쟁보다 무서웠던 페스트의 악몽도 있었다. 그래서 1376년에 에드워드 흑태자가 사망하고, 이듬해에 에드워드 3세가 죽은 후 흑태자의 아들인 리처드 2세가 10세의 나이로 즉위하자, 1381년에 와트 타일러 난이 일어나는 등 정세가 불안해졌다. 당시 “아담이 밭을 갈고 이브가 베를 짤 때, 어찌 귀족 따위가 있었겠는가?”라며 농민들을 이끌고 런던까지 행진하여 “왕에게 개선을 직접 요구”하려 했던 존 볼 같은 혁명지도자가 나오기도 했는데, 비록 그런 목소리는 잔인한 진압에 묻혀버렸지만 중세적 기존 질서가 여러 모로 흔들리고 있었음은 분명했다.

여기에 전세도 잉글랜드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다. 1364년에 브레타뉴 계승전쟁에서 프랑스 왕이 후원하던 샤를을 꺾고 몽포르를 새로운 브레타뉴 공으로 세우는 데 성공했지만, 이후 몽포르가 프랑스 쪽에 충성을 맹세하면서 “죽 쒀서 개 준” 꼴이 되었다. 또한 프랑스의 베르트랑 뒤 게클랭은 마치 한니발에 맞섰던 파비우스처럼 잉글랜드군과 정면대결을 피하며 측면에서 기습하거나 치고 빠지는 전술을 구사하여 잉글랜드군을 괴롭혔고, 프랑스를 돕던 카스티야가 내전에 빠지자 달려가 잉글랜드의 개입을 물리쳤다. 무엇보다도 1372년, 라로셀 앞바다에서의 해전에서 잉글랜드가 패배함으로써 슬로이스 해전 이후 가지고 있었던 제해권은 다시 프랑스에게 넘어가 버렸다. 바다를 건너 군대를 보내고 끊임없이 대륙과 무역을 해야 했던 잉글랜드에게 이것은 심각한 사태였다.

상황이 점점 나빠지자 잉글랜드는 부득이 전쟁을 중단했으며, 1389년에서 1411년까지 이 전쟁 중 가장 긴 휴전이 이루어진다. 리처드 2세는 불만에 찬 귀족들의 공세를 막아내지 못해, 1399년에 폐위되고 랭카스터 가의 헨리가 새로 왕위에 오른다(헨리 4세). 프랑스로서는 한숨 돌릴 듯 했지만, 귀족들의 암투는 이쪽에서도 치열했다. 부르고뉴 공을 중심으로 하는 독립적 대영주 중심의 ‘부르고뉴파’와 주로 왕실을 편들었던 ‘오를레앙파(또는 아르마냑파)’사이의 당쟁은 갈수록 거칠어졌다. 마침내 1407년에 오를레앙 공 루이가 부르고뉴파에게 암살되자, 프랑스는 내전 상태에 들어갔다. 1413년에는 시몽 카보슈가 이끄는 민중반란이 파리에서 일어나 오를레앙파가 학살되는 사태가 벌어졌는데, 이는 얼마 뒤 뒤집혀 오를레앙파가 부르고뉴파를 내쫓고 파리를 장악했다. 하지만 다시 4년 뒤에는 부르고뉴파의 천하가 되었고, 마침 잉글랜드에서 새로 왕이 된 헨리 5세가 침공을 재개하자 부르고뉴와 오를레앙 사이의 대타협이 이루어지는 듯했으나 회담장에서 “오를레앙 공 루이의 복수”라며 오를레앙파가 부르고뉴 공 장을 암살하는 사태가 빚어졌다. 이를 계기로 부르고뉴파는 잉글랜드와 결탁했고, 전쟁이 끝나기 직전까지 프랑스 왕과 싸우는 입장에 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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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 전쟁 발발시의 영국령(1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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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레타니화약 후의 영국령 (1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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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9년과 전쟁종료 후(1453년)의 영국령





“헨리 6세,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왕”



1413년에 즉위한 헨리 5세는 프랑스의 내분이 심각함을 보고 1415년에 노르망디로 대거 침공을 시도한다. 아르플뢰르를 함락한 다음 칼레로 진군했는데, 적군의 추격을 피한답시고 큰길 대신 시골길을 택해 행군하다 보니 진군 속도가 느려졌고 보급이 원활하지 못했다. 게다가 폭우까지 연일 쏟아져서 병자와 낙오자가 속출, 1415년 10월 25일에 아쟁쿠르 평야에 닿았을 때는 원래의 1만 2천 병력이 6천으로 줄어 있었다. 그들을 맞이한 것은 1만 5천의 프랑스군이었다. 크레시 때와는 정반대로 고지를 점령하고 오래 행군해온 적군을 내려다보던 쪽은 프랑스군이었으며, 잉글랜드군은 지칠 대로 지치고 병자도 많아 실로 절망적인 상태였다.

그러나 변하지 않은 게 하나 있었다. 바로 잉글랜드의 장궁이었다. 돌격하는 프랑스 기사들은 전보다 훨씬 두터운 갑옷으로 무장하고 있었음에도, 장궁에는 당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무거운 갑옷과 비가 내려 진창이 된 땅이 그들의 신속한 전진을 방해했으므로, 잉글랜드 궁수들은 더욱 여유 있게 표적을 노려 쏠 수 있었다. 프랑스군 지휘관 샤를 달베르는 “용기를 잃지 말고, 전속력으로 진격하라”고 외쳤으나, 그때 날아온 화살이 그의 심장을 꿰뚫었다. 결국 프랑스군은 1만 명에 달하는 전사자를 내고 퇴각했으며, 잉글랜드군의 전사자는 113명에 그쳤다(다만 그 숫자에는 이설이 많으며, 실제로는 잉글랜드군이 수적으로 프랑스군에 밀리지 않았다는 최근의 주장도 있다). 시인으로 유명했던 오를레앙 공 샤를 도를레앙도 이때 포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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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쟁쿠르 전투



스코틀랜드에서 보내온 지원병에도 불구하고, 프랑스군은 연패하여 1419년에 노르망디 전역을 잉글랜드에게 내주고 말았다. 1420년에는 화친이 추진되었고, 트루아 조약으로 헨리 5세는 프랑스의 섭정을 맡을 뿐 아니라 발루아 왕가의 카트린과 결혼하게 되었다. 병이 심하던 샤를 6세가 죽으면 프랑스 왕위를 계승한다는 조항도 빠지지 않았다. 마침내 에드워드 3세 이래의 숙원을 달성하는가 했던 헨리 5세는 1422년에 사망하여 뜻을 이루지 못했지만, 같은 해에 샤를 6세도 죽자 부르고뉴파 등은 헨리 5세와 카트린의 아들인 헨리 6세를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왕”이라고 선포했다. 드디어 서유럽 최강의 나라였던 프랑스의 왕권이 잉글랜드에게로 돌아가는 듯했다.



오를레앙의 처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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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를 7세 대관식의 잔 다르크], 앵그르의 1851년 작



그러나 문제점은 “이중의 왕관”을 쓴 헨리의 나이가 이제 겨우 두 살이라는 사실, 그리고 그의 왕위를 인정하지 않으며 샤를 6세의 아들 샤를 7세를 옹위하던 오를레앙 파가 저항을 계속하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샤를 7세는 프랑스 귀족의 대다수에게 외면된 채 랭스에서 대관식을 치르지 못한 “국왕 서리” 상태였으며, 헨리 5세를 대신해 프랑스 주둔 총사령관이 된 베드퍼드의 존이 계속해서 저항 세력을 무찌르고 있었으므로 상황은 곧 종료될 것처럼 보였다.

여기서 그 유명한 잔 다르크가 등장했다. 대천사 미카엘과 성 카타리나, 성 마가리타의 계시를 받았다는 그녀는 패색이 짙은 샤를의 거처에 나타나서 자신이 포위당해 있던 오를레앙을 구하고 랭스에서 샤를이 대관식을 올리도록 하겠다고 장담했다. 그리고 1429년 4월, “기적과도 같이” 잉글랜드군의 포위를 뚫고 오를레앙을 구하는 데 성공한다. 과연 그것이 “기적”이었는지는 오랫동안 의견이 분분했는데, 당시 오를레앙의 수비대장은 이미 사로잡힌 상태였고 적장이 없는 성을 공격하는 것은 기사도에 어긋났으므로 잉글랜드군은 뭔가 꺼림칙한 느낌을 지우지 못했다, 그러던 중에 신의 계시를 받았다는 처녀가 나타나니 사기가 크게 저하되어 패배했다는 분석이 있다. 또한 잔 다르크의 실제 기여는 별로 없었으며, 실제로 활약한 것은 그녀를 뒤따랐던 고성능 대포였다고도 한다. 심지어는 잔 다르크를 대포 기술자라고 기록한 당시의 어느 문헌을 근거로, 오를레앙의 처녀는 전혀 기술적인 쪽으로 백년전쟁에 기여했을 것이라는 추정도 있다.

아무튼 그녀의 도움으로 1429년에 랭스에서 샤를의 대관식이 치러졌고, 이후 그녀는 부르고뉴파에게 붙들려 1431년에 화형에 처해졌으나 승리의 바람은 확실히 프랑스 쪽으로 불고 있었다. 1435년에 잉글랜드군의 베드포드가 죽고, 부르고뉴파의 수장인 필리프 공이 샤를에게 항복했다. 이듬해에는 파리가 프랑스 왕에게 되돌아갔다. 이후 샤를 7세는 삼부회에서 “영구적 인두세” 부과를 이끌어내 전쟁을 수행할 재원을 갖춘 반면 잉글랜드는 재력도 병력도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대포를 쏴라!



군사기술에서는 대포가 본격적으로 위력을 발휘했다. 전쟁 중반까지는 적을 놀래키는 효과 정도밖에 없던 대포는 개량을 거듭한 끝에 무서운 살상력을 가진 무기로 거듭났고, 이는 결국 장궁을 든 잉글랜드군을 압도했다. 장궁을 제대로 쏘려면 십 수 년이 넘는 훈련이 필요했는데, 오랜 전쟁 끝에 그런 인력이 고갈된 점도 잉글랜드군의 우세를 열세로 바꿔갔다. 1450년의 포르미니 전투, 1453년의 카스티용 전투에서는 모두 대포가 승리를 이끌었으며, 특히 카스티용에서는 250문의 대포가 양쪽에서 십자포화를 퍼부어 잉글랜드군을 섬멸하는 무시무시한 광경이 연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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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전쟁 당시 사용되던 대포의 모습



한때 프랑스를 발 아래 두었던 헨리 6세는 이제는 거꾸로 프랑스에게 고개를 숙여야 하는 입장이 되었으며, 1445년에 앙주의 마그리트와 결혼하는 등 여러 외교적 수단을 써서 전쟁을 그만두려 했으나 쉽지 않았다. 그는 결국 1449년에 그때까지 버티고 있던 노르망디를 프랑스에 반환한다는 조건으로 화친조약을 끌어냈지만 잉글랜드 본국 귀족들의 반발로 조건을 이행하지 못했다. 그러자 분노한 프랑스는 공격을 재개해 노르망디를 짓밟았으며, 1453년에 가스코뉴까지 침공해 유서 깊은 잉글랜드의 보유지를 빼앗음으로써 백년전쟁에 종지부를 찍었다.



전쟁이 남긴 것



1453년은 영불해협을 사이에 두고 전쟁이 벌어진 마지막 해가 결코 아니었으며, 잉글랜드 왕실은 그 이후에도 프랑스의 왕위를 주장하곤 했다. 하지만 이후 두 진영의 싸움은 잉글랜드 대 프랑스라기보다, 또는 프랑스 내전이라기보다 영국과 프랑스의 싸움이 되어 갔다. 이 전쟁으로 두 나라 모두 민족의식을 고취하게 되고, 왕을 중심으로 국가권력이 강화되면서 근대국가의 모습이 차차 갖춰졌기 때문이다.

결국 백년전쟁은 귀족들의 땅따먹기 싸움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그 치열함과 오램 덕분에 귀족들은 이를 통해 상당히 몰락의 길로 들어섰다. 수적으로도 전장에서 수없이 많은 전사자가 나온 결과 양국 모두 전쟁 이전보다 반 이하로 귀족의 수가 줄었다. 게다가 크레시와 아쟁쿠르에서 콧대 높은 귀족들을 때려잡았던 사람들, 자크리나 와트 타일러의 난에서 정의를 요구하며 분노의 깃발을 들었던 사람들, 주인 잃은 농토를 차지해 농장을 경영하고, 전쟁에 필요한 대포나 화약 등을 고안하고 생산하여 판매했던 사람들은 모두 평민이었다. 아직도 시민혁명이 일어나려면 몇 세기가 더 필요했다. 그러나 이전처럼 귀족과 사제가 혈통과 신의 뜻을 내세우며 무조건적인 지배권을 휘두르던 시대는 서서히 물러나고 있었다.

전후 영국과 프랑스가 걸었던 다른 길도 이후 두 나라의 역사에 영향을 주었다. 패배한 쪽인 잉글랜드에서는 왕의 권위가 한동안 추락했고, 징세나 외교 등에 대해 의회의 동의가 필요하다는 원칙이 강력히 대두하여 이후 영국식 민주주의 발전의 토대가 마련되었다. 한편 프랑스에서는 전쟁을 이유로 상비군을 설치하고 인두세를 거두는 등 왕의 권한이 한껏 커졌으며, 큰 타격을 입은 귀족들은 이후 전개될 절대군주시대에 궁정을 드나들며 왕에게 아첨하는 궁정귀족들로 ‘전락’하게 되었다.

전쟁사적으로 백년전쟁은 '발사 무기'가 처음으로 서구 전쟁의 최종 병기로 등장한 전쟁이었다고 여겨지기도 한다. 당대의 최대 최강의 기사대가 잉글랜드 평민들이 쏘는 장궁 앞에 무력했던 것이다. 그나마 장궁도 사람의 근력과 기술로 쏘는 것이었지만 전쟁 말기에는 대포를 비롯한 화약무기가 위세를 떨치기 시작했고, 그리하여 사람의 힘과 용기가 아니라 과학기술이 전쟁의 주역이 되었다. 이제 전쟁은 사람과 사람이 맞부딪쳐 펼치는 드라마가 아니라, 원거리에서 적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소멸시키는 게임이 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물론 그것은 당시의 화약 무기 발달 수준을 볼 때 지나친 해석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이런 대규모 전쟁을 치르며 다소 낭만적이던 중세의 전쟁 방식이 오직 승리만을 노리는 근대전 방식으로 바뀌어간 점은 분명하다. 크레시에서 에드워드는 쓰러진 기사들을 포로로 해 몸값을 받는 데 시간을 쓰지 말고 적을 하나라도 더 죽이라고 명령했다. 오를레앙에서 잉글랜드가 진 원인은 기사도에 따른 체면에 연연했기 때문이라는 추정도 있다. 이래저래 백년 전쟁은 기사들의 시대, 중세가 청산되고 능률과 실질을 앞세우는 국가와 평민의 근대가 열리는 계기였다.


참고문헌:
버나드 몽고메리, [전쟁의 역사](책세상, 2004), 존 키건, [세계전쟁사](까치, 1996), 케네스 모건 편, [옥스퍼드 영국사](한울, 1997), 앙드레 모로아, [프랑스사](기린원, 1997), 어니스트 볼크먼, [전쟁과 과학, 그 야합의 역사](이마고, 2003), 피터 터친, [제국의 탄생](웅진지식하우스, 2011), 페르낭 브로델, [물질문명과 자본주의[(까치, 1995), 존 린, [배틀, 전쟁의 문화사](청어람미디어,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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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규진 | 서울교육대학교 교수/역사저술가
글쓴이 함규진은 여러 방면의 지적 흐름에 관심이 많다. 정치학을 전공하여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한편, 주로 역사와 관련된 책을 여러 권 썼고, 인물이나 사상에 대한 번역서도 많이 냈다. 동양과 서양, 전통과 현대, 보수와 진보 등 서로 대립되는 듯한 입장 사이에 길을 내고 함께 살아갈 집을 짓는 것이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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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2012.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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