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역사 무굴제국 건국전쟁(2) - 아크바르와 전성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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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515회 작성일 16-02-07 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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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리에서 왕으로 즉위하는 헤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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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표


무굴제국 건국전쟁 개요

전쟁주체


티무르 제국 후계세력, 로디 왕조, 라지푸트

전쟁시기


1520년대-1668년

전쟁터


현재의 인도 북부, 파키스탄 일부 지역, 벵갈

주요전투


1차 파니파트 회전, 칸와 전투, 2차 파니파트 회전, 치토르 가르 공방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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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와 전투와 바부르의 죽음



바부르가 로디를 죽이고 황제에 오르기는 하였지만 전쟁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힌두 세력들 중에는 ‘침략자’ 무슬림들을 쫓아 내고자 호시탐탐 기회만 보고 있는 군주들이 많았다. 그 중에는 오랜 전통을 지닌 무사들이자 호전적인 라지푸트인들이 있었다. 약 6에서 7세기 정도에 인도의 북부에 들어온 유목민들의 후예로 추정되는 라지푸트인들은 지금 인도의 서북부 파키스탄 접경지역에서 넓은 영토를 차지하고 강한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들은 인도의 카스트 제도상 ‘크샤트리야(왕족, 무사)’ 지위를 차지하고 강력한 왕국을 세워 원주민들을 다스리다가 내분이 생겨 11세기경 펀자브가 이슬람 교도들에게 점령당하고 12세기경 서쪽에서 들어온 델리의 지배자인 프리트비라지 차우한이 튀르크계 무함마드-고르에게 패하면서 힌두교를 믿는 인도인들은 무슬림들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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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7년 인도 지도



바부르가 이끄는 군대가 로디와 싸우기 위하여 인도 북부로 쳐들어왔을 때 라나-상가가 이끄는 라지푸트의 군주들은 바부르가 로디와 싸우기 전에 바부르에게 접근한 적이 있었다. 자신들이 군사를 이끌고 아그라로 진격하여 같이 싸워줄 것이니 로디를 이기게 되면 칼피(현재 인도 러크나우市 서쪽), 돌푸르(현재 인도 라자스탄州 서쪽 끝), 그리고 비아나(델리 북쪽지역) 지방을 라지푸트에게 넘겨달라고 하였다. 군사력이 열세였던 바부르는 그 요청을 받아들였으나 로디를 이긴 후 라지푸트 세력이 약속했던 데로 아그라로 진격하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다. 이에 바부르는 라나-상가의 신의없음을 책망하고 땅을 넘겨주지 않았다.

바부르에게 무시당한 라지푸트 세력은 일거에 자신들의 ‘고토’를 찾겠다며 군사를 일으켰다. 앞서 말한 메와르 지방의 라자(군주)인 라나-상가는 힌두교도로써 고토 회복의 명분을 내세웠지만 이를 뒤로 하고 무슬림인 메와트의 군주 하산-칸 메왓파티와 동맹을 맺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이에 그리고 몇몇 군소영주들이 라지푸트 동맹군을 이끌고 델리의 바부르와 싸우러 나섰다.‘바부르나마’에 의하면 바부르는 델리의 술탄을 무찌르고도 라지푸트 세력을 격파하기 전에는 그의 건국이 온전한 것이 될 수 없었음을 잘 알고 있었으며 싸움을 앞두고 고심(苦心)에 잠을 여러 번 설쳤다고 적고 있다.

라지푸트 동맹군은 10만이 넘었고 바부르는 싸움이 시작되기 전에 적들의 세력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하여 같은 무슬림이자 인도에 있는 무슬림들에게 영향력이 큰 하산-칸 메왓파티에게 접근하였다. 바부르는 파니파트에서 포로로 잡힌 하산-칸의 아들에게 좋은 옷을 입히고 준마에 태워 풀어주었다. 이는 하산-칸의 마음을 푸는 동시에 무슬림으로서 같은 무슬림과 맞서 싸울 수 없으니 동맹에서 이탈하기를 종용한 것이었다. 하산-칸은 매우 흡족해하였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동맹을 풀지 않았고 분노한 바부르는 그를 ‘배교자’로 규정하고 펄펄 뛰었다. 그러나 여전히 2만 5천의 군사로 10만 대군과 싸워야 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바부르는 1527년 2월에 라지푸트군과 싸우기 위하여 아그라를 출발하여 약 60km 떨어진 칸와로 향하였다. 전투에 앞서 군진 설치에 필수적인 식수가 나오는 곳을 차지하기 위하여 매우 빠르게 진군하였고 선봉부대 앞에 정찰대를 내세워 라지푸트군의 동태를 파악하도록 하였다. 이 과정에서 정찰대가 라지푸트 기마대를 만나 여러 차례 패하였고 비록 소규모 전투이지만 패전이 계속되자 무굴군대의 사기가 떨어지기 시작하였다. 이에 바부르는 잔치에 쓰이던 금 술잔을 꺼내어 던지면서 다른 장군들과 귀족들도 그리할 것을 종용하였고 이 술잔들을 수피 이슬람 행자(行者)들에게 주어 가난한 자들을 돕도록 하였다. 그리고는 마치 이슬람의 창시자 무함마드가 메카 전투에서의 패전 이후 술을 금했던 것처럼 남은 평생동안 술을 마시지 않겠다고 맹세하였고 장군들과 병사들도 그 맹세를 따랐다. 그리고는 무슬림으로서 코란을 들고 같이 죽을 것을 맹세하여 사기를 고취시켰다. 이때 바부르는 페르시아의 문인(文人)인 페르다우시의 샤나마(帝王의 書)의 구절을 인용하며 병사들을 격려하였다.



“나에게 다른 것보다는 드높은 이름을 주시고 흡족한 마음으로 죽게 하소서.
그리고 그 명예가 나의 것이 된다면 죽음이 육신을 거두게 하소서”


라지푸트군과 바부르의 무갈군은 칸와의 벌판에서 격돌하였고 전투는 이른 아침에 시작되었다. 몇몇 소규모 전투에서 이긴 라지푸트군은 승리를 자신하고 있었다. 라지푸트군은 앞에 넓게 포진한 바부르군의 우익을 향하여 기마돌격을 시작하였다. 무굴군은 참호를 파고 토벽을 쌓은 후 그 뒤에 포와 총병들을 배치하고 있었다. 무굴군 진영 중간에서 포병/총병들을 지휘하고 있던 튀르크인 무스타파 라미가 일제사격을 명하였고 라지푸트 기마대는 큰 타격을 입었지만 압도적인 수를 앞세운 라지푸트군은 인해전술로 꾸역꾸역 밀려들었다. 라지푸트군의 공격으로 인하여 무굴군의 좌익도 압박을 받기 시작하였고 무굴군은 뒤에 대비하고 있던 기마 예비대를 보내어 여러 차례 라지푸트 기마병들을 격퇴하였지만 워낙 라지푸트군이 대군이었던지라 라지푸트군 공격의 기세는 수그러들 줄을 몰랐다. 바부르는 도박을 하기로 하고 좌우익의 기병과 중간의 총병을 동시에 내보냈다. 이후 중군의 기병도 돌격을 시키고 총병의 양 옆으로 돌면서 라지푸트 진영을 향하여 돌격하였다. 그리고 중간에서 진격하는 총병은 움직이면서 사격을 하였다. 이때 총소리와 대포소리에 놀란 라지푸트군의 코끼리 부대가 날뛰면서 라지푸트 병사들을 마구 짓밟았다. 라지푸트군의 대형은 엉망이 되었고 일부 라지푸트 지휘관들은 상황을 타개하고자 무굴 중군을 공격하여 전세를 돌리려 하였지만 이미 대형이 무너진 상태에서의 돌격은 각개격파 당할 뿐 전혀 쓸모가 없었다. 그러나 치열한 전투는 온 종일 계속되었고 해가 서쪽하늘로 넘어갈 때 즈음하여 들판은 시체로 뒤덮였고 라지푸트군은 거의 사라졌다. 동맹을 주도하였던 라나-상가는 도망가고 없었다. 총병의 저격을 받고 죽은 하산-칸을 비롯하여 라지푸트동맹군의 주요 수장들은 시체가 되어 전장에 꼴사납게 널브러져 있었다.

이로서 라지푸트의 세력은 완전히 꺾였고 무굴황제로서의 바부르에게 도전할 자는 없었다. 그러나 젊은 시절 장정 한 명씩 팔에 매달고 산을 예사로 오르내리던 강인한 체력의 소유자였던 바부르는 계속되는 전투와 함께 잦은 폭음의 영향으로 몸이 쇠약해져 있었다. 게다가 전투의 살육으로 인한 스트레스를 잊기 위하여 ‘마주드’라는 일종의 마약을 피우는 습관은 그의 체력을 더욱 더 고갈시켰다. 결국 무굴제국을 세운 위대한 정복자는 칸와에서의 대승 이후 불과 3년후인 1530년 12월에 47세의 나이로 병사하고 말았다. 그는 사후 아그라에 묻혔으나 9년후 그의 유언에 따라 그가 사랑했던 도시인 카불로 이장되었다. ‘바부르의 정원’이라 이름 붙여진 그의 묘에는 이러한 문구가 쓰여져 있다.



“만약 지상에 낙원이 있다면 바로 이 곳, 이 곳, 이 곳이로다!”

이로써 티무르의 후예이자 무굴 제국의 창건주는 세상을 떠나고, 그의 맏이이자 태자인 후마윤이 황제의 위를 물려 받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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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굴 제국의 5대 황제인 샤-자한이 세상을 떠난 왕비 뭄타즈-마할을 위하여 지은 타지-마할. 샤-자한의 재위 시절은 무굴제국의 전성기였으나 제국의 통치기반을 만든 것은 3대 황제인 아크바르(Akbar)였다.





건국 후의 위기와 아크바르의 등장



바부르가 세운 무굴제국은 17세기에 이르러 전성기에 이른다. 이 전성기의 제국을 다스린 것은 앞서 말하였듯이 타지-마할을 지은 샤-자한 황제이다. 샤-자한은 광대한 영토와 대군을 보유한 제국을 다스린 황제이지만 샤-자한의 통치기반은 모두 그의 조부(祖父)이자 인도 역사상 최고의 명군(明君)으로 꼽히는 무굴의 3대 황제 아크바르가 다져놓은 것이었다.

그 역할에 있어 중국 청나라의 강희제에 비교될 수 있는 인도사의 영웅인 아크바르는 그의 아버지인 후마윤의 뒤를 이어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1556년에 아크바르가 황제위에 올랐을 때의 상황은 그리 좋지 않았다. 아크바르의 아버지이자 무굴제국의 2대 황제인 후마윤은 바부르 황제의 죽음 이후 인도 북부의 세력이 다시 뭉치는 것을 막지 못하고 아프간 출신의 셰르-칸이라는 인물에게 패하였고 그 수도인 델리까지 빼앗긴 후 설상가상으로 그의 형제들에게 배신을 당했다. 결국 후마윤은 적들에게 쫓겨 페르시아로 도망치는 굴욕을 감수하여야 했다. 형제들과 셰르칸이 모두 죽은 후 인도로 돌아왔고 인도의 군소 군주들의 동맹을 격파한 후 1555년에 다시 델리를 탈환하였다. 다시 제국이 안정되는 듯하였으나 후마윤은 어느 날 그의 서재에서 나오다가 기도시간을 알리는 무에찐(이슬람 사원에서 기도시간을 알려주는 사람)의 목소리를 들었다. 독실한 무슬림이었던 후마윤은 황급히 몸을 굽히다가 계단에서 굴렀고 바닥의 돌에 머리를 부딪혀 죽고 말았다. 후마윤 황제의 어처구니없는 급사로 인하여 아크바르는 불과 13세의 소년으로서 제위에 오르게 되었다. 나이가 너무 어렸기 때문에 후마윤의 총리대신이었던 바이람-칸이 섭정으로서 제국을 다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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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 시절의 아크바르



전성기의 무굴제국은 인도 대부분을 차지하는 거대제국이었지만 이때의 무굴제국은 아직 그 영토가 북인도 일부와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정도에 머물러 있었다. 한 때 후마윤을 내어쫓고 북인도 대부분을 차지한이슬람 수리 왕조의 왕이었던 이슬람-샤가 죽고 그의 총신(寵臣)이었던 헤무가 권력을 장악하였다. 12세기 이슬람교와 함께 인도 북부에 들어온 아프간인들은 이때 ‘인도인’이 된 상태였고 힌두교도들도 비록 종교는 달랐지만 대대로 살아온 아프간인들을 이웃으로 여기고 있었다. 인도에 살고 있던 힌두-무슬림 ‘인도인’들은 이미 무굴(몽골)인들에 대하여 온갖 나쁜 소문을 뜯고 그들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무굴(몽골)족의 왕이 들어와 라지푸트와 델리왕국을 때려 부수고 병탄하자 ‘힌두교도들과 아프간인들은 종교가 다름에도 무굴인들을 몰아내는데 힘을 합쳤다. 라지푸트의 힌두교도들과 무슬림들이 힘을 합쳐 바부르와 싸운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후마윤을 축출하고 델리에서 권력을 잡은 아프간인 셰르-샤 수리밑에서 총리대신의 지위까지 오른 헤무의 본명은 “헴찬드라 비크라마디트야”이며 힌두교 사제의 아들이었다. 그가 섬기고 있던 셰르-샤가 죽자 셰르-샤의 12살난 아들이 왕위에 올랐고 머지않아 이 소년왕은 아저씨뻘인 아딜-샤 수리에게 죽었다. 아딜-샤 수리는 국정(國政)운영에는 관심이 없는 술꾼에다 난봉꾼이었고 이 때문에 그의 왕국에서는 반란이 그칠 날이 없었다. 아딜-샤는 결국 수리 왕조에 봉사하면서 능력을 검증받은 신하인 헤무에게 정부의 전권과 군대의 지휘권을 넘겨주었다. 헤무는 성공적으로 반란을 진압하고 왕국의 안정을 이루었으며 이후 아딜-샤가 정신착란을 일으킨 후에는 델리 왕국의 실질적인 통치자가 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무능했던 아딜-샤가 속된 말로 미쳐버리자 인도 서부에서 기회를 노리고 있던 후마윤은 군세를 모아 그가 잃어버린 영토를 찾으려 하였고 1555년에 아딜-샤의 동생인 시칸데르 수리를 완파하면서 잃어버렸던 펀자브와 아그라, 델리를 모두 되찾았다. 그나마 수리 왕조를 지켜낼 만한 능력이 있던 헤무는 벵갈의 반란을 진압하느라 델리에서 떠나있어 후마윤을 막지 못하였다.

그러나 무함마드-샤란 인물이 벵갈에서 일으킨 반란은 1555년 말에 헤무에 의하여 진압되고 반란을 진정시킨 헤무는 군을 다시 이끌고 무굴군과 싸우기 위하여 서진(西進)하였다. 수리 왕조의 대신으로서 북인도를 사실상 장악한 헤무는 군사정치적으로 상당히 뛰어난 인물이었고 무굴의 장군들은 헤무가 이끄는 힌두-아프간 혼성군을 이기기는커녕 막기에 급급하였다. 그리고 헤무가 본격적으로 힌두스탄(델리와 아그라를 포함하는 지역)으로 진입하려 할 때 무굴의 2대 황제 후마윤이 갑작스런 사고로 급사(急死)하는 일이 일어났다.

후마윤의 급사 이후 무굴의 황위(皇位)를 물려받은 13세의 아크바르는 아직 국정을 장악하기에는 너무 어려 아버지 후마윤 시절부터 무굴왕가를 섬기고 있던 대신인 바이람-칸이 섭정으로 나섰다. 선대 군주가 갑자기 사망하고 계승자가 어릴 경우, 대개는 주변의 신하들이 정권과 병권을 모두 장악하고 어린 임금을 허수아비로 만드는 경우가 많다. [삼국지]에서 후한 왕조가 망해가는 과정에서도 보였고 우리나라에서도 조선의 문종이 죽자 단종을 둘러 싼 대신들의 소위 ‘황표(黃標)’정치가 이러한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무굴 왕가로서는 다행히 바이람-칸은 충직한 인물이었다. ‘바부르나마’에 의하면 바이람-칸은 무굴인이 아니라 카라-코윤루 부족 출신의 튀르크인이었는데 그는 후마윤이 급사하고 왕권이 취약한 상황에서도 성심을 다하여 정권을 안정시키려고 노력하였다. 선대황제가 죽고 나라 안이 불안정한 상황에서 헤무 같은 강력한 적이 나타나자 바이람-칸과 무굴조정은 마땅한 해결책을 찾지 못하고 전전긍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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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그라 ‘붉은 요새’의 관문



헤무는 무굴조정이 불안정한 틈을 놓치지 않고 대군을 동원하여 무굴군을 거침없이 몰아붙였다. 현재의 비하르와 마디야 프라데시 방면의 무굴군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않고 황망히 물러났고 특히 수도인 델리를 제외하고 당시 무굴제국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하고 할 수 있는 아그라를 지키고 있던 이스칸데르-칸 우즈베크는 이후 헤무의 인도군이 진격해오자 두려워서 그대로 도망쳤다고 한다. 비록 한 쪽의 관점에서 하는 이야기라 어디까지 믿어야하는 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무굴군이 헤무의 인도군에 밀려 현재 우타르-프라데시 주(州)의 대부분을 내어준 것은 확실하다. 이에 델리지방의 총독이던 타르디-베크는 사태의 위급함을 섭정대신 바이람-칸에게 알렸고 바이람-칸은 휘하의 장군 중 가장 뛰어나다고 하는 피르-무함마드에게 군을 주어 타르디-베크를 돕게 하였다. 아그라를 점령한 후 델리 방면으로 진격하고 있던 헤무의 인도군은 1556년 10월 델리 인근의 투그루카바드에서 부딪혔다. 무굴군의 튀르크 기병대는 정면의 인도군을 일제 돌격하여 3천을 죽이고 코끼리 400여마리를 사로잡았다 한다.

그러나 수많은 전근대 군대의 고질병이었던 약탈의 습관이 다시 한 번 살아나면서 승리에 도취된 무굴군은 인도군 진영을 약탈하기에 바빴다. 바로 이 순간이 헤무가 노리던 순간이었다. 헤무는 근처에 매복군을 숨기고 있다가 무굴군이 약탈에 정신이 팔려있든 틈을 노렸고 그 때가 되자 정예 코끼리 부대와 기병대로 전격적인 기습을 가했다. 유능하다던 피르-무함마드는 전투가 불리하여지자 도주하였고 타르디-베크도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투그루카바드에서 무굴군이 크게 패하면서 후마윤이 되찾은 영토의 상당부분이 헤무의 통치하에 들어갔고 헤무는 델리에 입성하여 스스로 왕을 칭하고 왕위에 올랐다. 12세기에 북인도를 무슬림들이 차지한 후 처음으로 힌두교도가 델리의 왕좌에 오른 것이다.



2차 파니파트 전투와 반석위에 올려진 무굴제국



델리마저 헤무의 손에 떨어지자 현재 인도 하리아나 주 칼라나우르에 있던 무굴군은 헤무와 싸우기를 거부하고 황제와 섭정대신에게 수비가 용이한 카불로 후퇴할 것을 종용하였다. 그러나 만약 무굴군이 인도에서 물러난다면 창건주인 바부르의 업적을 무위로 돌리는 일이었기 때문에 바이람-칸은 장군들의 건의를 한마디로 일축하고 다시 싸울 준비를 하였다. 여러 차례 무굴군을 격파하고 델리까지 차지하여 왕으로 등극하는 헤무는 거칠 것이 없었다. 이에 비하여 무굴제국은 상당한 위기에 몰렸다. 만약 헤무를 꺾지 못한다면 무굴제국은 인도에서 불과 3대도 버티지 못한 단명왕조로서 끝이 날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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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그루카바드의 성벽



마침내 1556년 11월에 북인도의 힌두왕 헤무와 아크바르의 무굴군은 파니파트에서 격돌하게 되었다. 30여년전 무굴의 창건주 바부르가 이브라힘 로디를 무찔렀던 바로 그 현장에서 다시 신생 제국의 운명이 시험대에 놓이게 된 것이다. 헤무는 약 3만의 기병과 함께 1500마리의 코끼리 부대를 동원하였다. 이 코끼리들은 장갑과 함께 코에 칼날을 달고 있었다고 하며 그 등에는 활을 든 궁수들과 총을 든 사수들이 타고 있었다. 무굴군은 대부분 기병이었고 2차 파니파트 전투는 양군 모두 별다른 기교를 부리지 않고 정면대결을 하였다. 무굴군의 선봉군인 1만 기병대는 망설이지 않고 인도군에 돌격하였고 바이람-칸과 아크바르는 8km정도 떨어진 동산에서 전투를 지켜보았다. 사기가 떨어졌다던 무굴군은 의외로 선전을 하였고 헤무의 막강한 군세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았다. 전투는 치열하게 전개되었고 아크바르의 전기(傳記)인 ‘아크바르나마’에 의하면 ‘공기 자체가 선홍색의 칼날이 되고 병사들의 칼날이 루비빛이 되었다’고 할 정도였다. 인도군이 약간 우세를 점하는 싶었지만 쉽게 승부가 나지않았다.

그러나 이 순간 헤무는 빨리 전투의 결말을 보고자 하였고 그의 코끼리인 ‘칼리-베크’를 몰고 그의 친위 코끼리 부대를 이끌고 전투에 돌입하였다. 그는 무굴군의 선봉군 1만이 사실은 무굴군 최정예인 것을 잘 알고 있었으며 만약 이들을 흩어놓는다면 전투를 결정지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최악의 상황을 제외하고 최고 지휘관이 전투에 직접 뛰어드는 것은 사실 삼가야 될 일이다. 병사들이 전투보다는 지휘관의 안위에 더 신경을 쓰게 되고 지휘관도 전투 자체에 매몰되어 상황을 통제하지 못하게 된다. 이러한 사실을 증명이라도 하듯 전투에 뛰어들어 치열하게 싸우고 있던 헤무에게 눈 먼 화살이 날아왔고 헤무의 눈을 꿰뚫고 화살촉이 머리 뒤로 나왔다. 화살에 격중 당한 헤무는 정신을 잃고 쓰러졌고 지휘관이 쓰러지는 것을 본 인도군의 사기는 급락하였다. 전투는 무굴 쪽으로 기울었고, 인도군은 대부분이 시체가 되었으며 살아남은 몇몇은 도망하기에 급급하였다. 무굴의 장군들은 정신을 잃고 쓰러진 헤무를 아크바르 앞으로 데려왔고 헤무는 바이람-칸의 손에 참수되었다. 참수된 헤무의 머리는 카불로 보내져 아크바르가 ‘힌두 왕’을 참수한 증거가 되었고 헤무의 몸통은 델리의 성 위에 매달아 본보기로 삼았다.

헤무가 죽은 뒤 아그라와 델리는 별다른 저항없이 무굴군에게 접수되었다. 델리를 다스리던 수리 왕조의 잔당인 시칸다르 수리가 펀자브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나 신속히 진압되고 시칸다르는 벵갈지방으로 유배되어 평생을 그곳에서 보냈다. 비록 헤무의 영향력은 죽지 않아 헤무가 차지하였던 땅을 온전히 제국의 영토로 만드는 데는 8년이라는 세월이 걸렸지만 아크바르가 2차 파니파트에서 헤무를 죽였을 때 이미 판세는 결정이 난 것이었다.

제위에 처음 올랐을 때 소년이었던 아크바르는 북인도를 완전히 평정하였을 때는 청년왕으로 성장하여 있었다. 아크바르는 이후 군사, 조세, 행정 등에 대한 전반적인 개혁으로 무굴정부의 체제를 굳건히 세우고 무굴제국을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 라지푸트를 비롯하여 이곳 저곳에서 크고 작은 반란이 일어났지만 아크바르는 군을 직접 지휘하여 이들을 진압함과 동시에 반란이 일어난 지역을 위무하여 제국에 원한을 품은 자가 없도록 하였다. 아크바르의 치세 하에 모든 종교에 대한 관용이 공식적인 정책이 되었고 이후 무슬림과 힌두교도들인 수세기 동안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었다. 자칫하면 단명왕조로 끝날 수 있었던 무굴제국은 명군인 아크바르의 등장으로 단단한 기반을 다지게 되었고 타지-마할을 지은 샤-자한의 치세에 이르러서는 전성기를 구가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수많은 인도인들이 종교에 상관없이 찬드라굽타-마우리야와 더불어 아크바르를 인도사 최고의 제왕으로 꼽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무굴제국을 세운 것은 바부르였지만 무굴제국을 완성시킨 것은 아크바르였다. 말하자면 바부르는 태조(太祖)였고 아크바르는 태종(太宗)의 역할을 한 것이다. 그러나 바부르와 아크바르는 조손(祖孫)이라는 것 이외에도 공통점이 있다. 두 사람 모두 파니파트에서 싸웠으며 파니파트의 벌판에서 승리함으로 무굴제국 3백년 사직의 시작을 알렸다는 것이다.





김성남 | 안보·전쟁사 전문가
글쓴이 김성남은 전쟁이 인간 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관심을 가지고 이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미국 UC 버클리 동양학과를 졸업한 후 연세대학교 국제대학원에서 국제학 석사를 받고 한국학중앙연구원 정치학과에 진학하여 정치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주요 저서로는 [전쟁으로 보는 한국사], [전쟁으로 보는 삼국지], [전쟁 세계사] 등이 있으며 공저로 [4세대 전쟁]이, 역서로 [원시전쟁: 평화로움으로 조작된 인간의 원초적인 역사]가 있다.


발행2012.0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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