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역사 에스파냐의 잉카제국 정복 전쟁(1) - 남아메리카 거대 제국의 몰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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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05회 작성일 16-02-07 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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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루 남부 쿠스코시 북서쪽에 위치한 잉카의 마추피추 유적.
<출처: (CC)S23678 at Wikip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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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표


에스파냐의 잉카 정복 전쟁 개요

전쟁주체


에스파냐 (피사로), 잉카 제국

전쟁시기


1528년-1572년

전쟁터


현재의 페루, 에콰도르, 칠레 일부

주요전투


코스코 전투, 올란테이탐보, 카하마르카






관련링크

에스파냐의 잉카 정복 전쟁(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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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파냐의 콘키스타도르(정복자)들에게 현재 멕시코의 아즈텍 제국이 멸망한 후에도 황금과 땅과 노예에 눈이 먼 에스파냐인들의 ‘탐험’은 계속되고 있었다. 코르테스이전에도 후안 폰세 데 레온, 발보아 등이 아메리카 대륙 인근을 기웃거리고 있었고, 코르테스가 오아차카(Oaxaca)의 총독이 된 후에도 바스케스 데 아이욘은 북미대륙을 들쑤시고 다녔으며 코르테스의 부장이었던 알바라도는 과테말라의 총독이 되었다가 ‘화끈한 모험’을 찾아 남미대륙으로 향했다.결국 남미대륙에서 번성하고 있던 잉카도 에스파냐인들에게 ‘발견’되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그리고 잉카 제국 역시 에스파냐인들의 손에 종말을 맞이하게 된다.



창조 신화와 선대문명



세계 역사 속에서 대제국을 운영했던 집단은 대개 나라의 신성성을 강조하는 건국신화를 가지고 있다. 우리나라의 환인-환웅-단군 이야기, 중국의 삼황오제, 로마의 로물루스-레무스, 수메르의 길가메시 서사, 인도의 라마야나 등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는 집단은 예외 없이 건국신화를 내세워 집단의 정체성을 강화하려 한다. 잉카제국의 황가(皇家)에는 많은 계파가 있어 서로 자신의 계파를 강조하는 신화를 내세웠다. 이후 잉카제국을 보다 객관적으로 바라보려 했던 에스파냐 또는 메스티소 사가(史家)들이 정리한 잉카의 건국신화들을 종합하여 보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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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머리모양의 모체 도자기. <출처: (CC)Patrick charpiat at Wikipedia.org>



세상은 처음에 어둠뿐이었고 아직 해와 달과 별은 생겨나지 않았다. 그 뒤로 세상이 생겨났으나 가장 처음에 생겨난 세상은 기독교 성경 중의 홍수와 비슷한 대홍수가 잃어나 멸망하였다. 이에 잉카의 창조주인 콘티티 비라코차(Contiti Viracocha, “알 수 없는 신”)는 “세상을 만든 자(Pachayachachic)”라는 별명에 걸맞게 세상의 각 족속들을 만들었는데 서로 다른 색으로 칠하여 구분할 수 있게 했다. 아울러 각 족속에게 각각의 성품과 의복과 언어를 주었고 그들을 땅속(또는 동굴, 호수, 높은 산, 샘)에 넣고 세상에 나올 때를 기다리게 하였다. 이후 콘티티 비라코차는 스스로 높은 지대의 길을 다니면서 인간들을 세상에 나오게 하였으나, 인간들이 언제나 그러하듯이 일부는 창조주에게 반항하였고그는 반항하는 이들을 돌로 만들어버렸다. 이후 신은 “안데스의 모든 길과 온 세상의 산 위를 돌아다는 일”을 그의 맏아들인 이메이마나-비라코찬에게 맡겼고 이메이마나는 인간들을 세상에 나오게 함과 동시에아버지 창조신의 명에 의하여 인간들에게 줄 온갖 나무와 꽃과 과실들의 이름을 지었다. 콘티티 비라코차는 둘째 아들 토카푸-비라코찬(세상 모든 것을 품은 창조주)에게 높은 땅 대신 “낮은 땅의 길”로 가게 하여 그곳의 강(江)과 나무의 이름을 짓게 하였으며 인간들에게 과실과 꽃을 주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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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리와 티와나쿠의 영역.



많은 건국신화가 그러하듯이 잉카제국의 건국신화도 창조신에 의한 세상의 창조 이야기로부터 시작된다. 그러나 어떠한 신이 세상을 만들었던 간에 후일 잉카 지역의 역사는 잉카로부터 시작되지 않았다. 잉카제국의 중심이 되는 페루 지역에서 국가단계의 사회가 처음 나타나는 것은 1세기였다. 페루 북부에 여러 개의 도시국가가 생겨났고 이 국가들은 서로 밀접한 연계를 유지하면서 문화적 특징을 공유하였는데 현재 고고학계에서 흔히 ‘모체(Moche)’ 문화로 통칭되고 있다. 이 문화는 다신교적 종교를 믿었고 다른 중미/남미 문명과 마찬가지로 피라미드형의 신전을 짓고 종교행사를 진행하였다.이와 더불어조형물을 비롯한 많은 미술품을 남겼다. 도시국가들은 도시민들을 위한 식량을 생산하는 농지(農地)에 의하여 둘러 싸여 있었고 모체인들은 이 농지를 유지하기 위하여 관개수로를 만들기 시작하였고 시간이 지나면서 도시는 엄청난 규모로 늘어났다.

모체문화는 서기(西紀)로 약 800년까지 번성하다가 서서히 퇴장하고 대신 약 6세기경부터 페루 중부에서 세력을 키우고 있던 와리(Wari) 제국, 그리고 페루 남부와 칠레 북부를 차지한 티와나쿠(Tihuanaku) 왕국이 모체 문화의 쇠퇴를 틈타 안데스 지역을 남북으로 양분하였다. 한때 와리문화권이 진정한 ‘제국’의 단계까지 진입하였는지에 대하여 논란이 있었지만, 서로 떨어져 있던 와리의 도시들이 사실은 석축(石築) 도로에 의하여 서로 연결되어 있었음이 밝혀졌고 가장 큰 도시인 와리(후아리, 현재 페루 서북부 앙카시 지역)의 정치종교 유적이 다른 지역보다 월등하며, 와리를 지배하였던 왕족의 묘역으로 추정되는 거대한 유적 역시 발견되었다. 와리 왕국은 페루 북부와 중심으로 정복활동을 펼쳐 주변세력을 모두 복속시키고 멀리 떨어진 변경지역에 군사들을 주둔시키고 이를 공물과 세금 등의 공적 재원으로 유지하는 등 중앙집권적 세력의 면모를 보인다. 티티카카호를 기점으로 와리 제국의 남부에 있던 티와나쿠 왕국도 정치/경제/군사적으로 비슷한 양상을 보이고 있으며 이 두 세력은 서로를 두려워하며 일종의 냉전상태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대립하면서도 상당한 문화적 교류가 이루어져 와리와 티와나쿠는 문화와 예술, 건축에서 많은 특징을 서로 공유하게 되었다. 와리와 티와나쿠 역시 서기로 12세기경에 이르러 쇠퇴하고 이후 약 200년 간 범 안데스 지역에는 강력한 세력이 존재하지 않는 공백기가 도래한다.



타완틴수유, 카팍, 그리고 사파 잉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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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카의 창건주인 망코카팍 묘사도



잉카 제국이란 이름은 잉카인들이 스스로 붙인 것이 아니다. 실제로 잉카인들은 그들의 땅을 ‘타완틴수유’라고 불렀다. 잉카 제국의 공용어인 케추아(Quechua)어로 ‘네 개의 땅이 합쳐진 땅’이라는 뜻이다. 자신들이 살던 나라가 친차이-수유(북쪽 땅), 안티-수유(동쪽 땅), 쿠야-수유(남쪽 땅), 쿤티-수유(서쪽 땅)가 모인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는 일반적인 명칭인 잉카 제국과 고유명칭인 타완틴수유를 같이 사용할 것이다). 지금의 우리에게 보다 잘 알려진 잉카제국이란 이름은 타완틴수유를 다스리는 최고군주를 뜻하는 명칭인 ‘사파-잉카(Sapa Inca)’에서 비롯된다. 일반적으로 사파는 ‘크다, 위대하다’라는 뜻이고 잉카는 ‘군주’라는 뜻이니 한국어로 번역하자면 ‘대왕(大王)’정도 된다. 잉카제국은 약 1300년경에 초대 잉카인 망코-카팍에 의하여 건국이 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잉카의 사관들이 늘 암송해야 했던 건국신화에서 망코-잉카는 잉카 신화에 나오는 태양신인 ‘인티’의 아들이 지상에 내려온 것으로 묘사된다. 즉 태양자(太陽子)인 것이다. 이 때문에 망코-잉카 이후의 잉카들도 모두 태양의 아들로서 자임(自任)하였다. 스스로를 하늘의 아들(天子)라고 하며 하늘 아래(天下)모든 것을 다스린다고 생각했던 중국의 황제들과 인식이 크게 다르지 않다. 타완틴수유의 첫 잉카인 망코-잉카는 대략 1200년경의 인물로 추정된다. 비록 스스로를 태양의 아들이라고 했지만 망코-잉카를 비롯하여 초기 잉카들은 완성된 ‘타완틴수유’가 아니라 쿠스코 지역을 중심으로 한 조그마한 왕국의 군주였다. 이 당시의 잉카제국은 소규모 왕국과 도시국가들이 난립한 안데스 지역의 고만고만한 왕국에 지나지 않았다.

쿠스코 왕국의 본격적인 팽창은 제8대 잉카인 ‘비라코차-잉카’의 치세 때 시작되었다. 서기로는 1400년대 초중반에 해당된다. 이때 쿠스코 왕국은 주변의 여러 도시국가들과 전쟁 중이었으며 그중 가장 강력한 세력은 쿠스코 동남쪽 현재 아푸리막 지역의 ‘창카’족이었다. 비라코차-잉카와 그의 장자(長子)인 잉쿠르콘이 쿠스코 주변의 세력들을 정리하고 영역을 넓히면서 쿠스코 왕국은 작은 왕국을 탈피하여 대국(大國)이 되는 첫 발걸음을 뗐다. 그러나 창카족은 녹녹치 않은 상대여서 비라코차-잉카는 창카족과 싸우다가 도리어 그들의 반격에 밀려 쿠스코를 버리고 달아나려 하였다. 그러자 비라코차의 둘째 아들인 잉카-유판키가 쿠스코의 병사들과 백성들을 모아 창카족을 훌륭하게 격퇴하였고 그 과정에서 아버지의 왕위를 차지하고 9대 잉카인 ‘파차쿠티’가 되었다. 파차쿠티의 치세에 쿠스코의 군대는 현재의 페루 남부 고원지대와 함께 티티카카호 지역까지 모두 점령하였고 고원지대를 나와 현재 페루의 중부해안지대까지 진출하였다. 1438년에 왕위에 오른 파차쿠티는 1463년에 군령권(軍令權)을 아들 투팍-잉카 유판키에게 넘기고 왕국의 수도인 쿠스코를 장엄하게 만드는 데 힘을 기울였다. 쿠스코는 잉카의 신화체계에서 이미 ‘세상의 중심’이었지만, 파차쿠티는 쿠스코에 세상의 중심이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실제 규모를 부여하려 했던 것이다. 파차쿠티가 쿠스코에 거대한 건축물을 만드는 동안 군대를 맡은 투팍-잉카 유판키는 적극적인 영역확장에 나섰다. 투팍-잉카 유판키의 지휘하에 쿠스코의 군대는 안데스 산맥을 타고 올라가 북쪽으로 현재의 에콰도르 중부까지 쿠스코의 영토로 편입하였다. 아울러 페루의 해안지역 전체를 점령하고 안데스의 고산을 넘어 동쪽 기슭 정글과 맞닿은 지역까지 이르렀다. 파차쿠티 사후 10대 잉카가 된 투팍-앙카 유판키의 장군들은 볼리비아 고원지역, 현재 아르헨티나 서북부, 칠레 북부까지 왕국의 영토로 만들었고 정복지에서 일어난 반란을 모두 효과적으로 진압하였다. 이제 쿠스코 왕국은 더 이상 왕국이 아니었다. 사방의 땅을 망라한 ‘타완틴수유’, 즉 현재의 우리가 알고 있는 ‘잉카 제국’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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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완틴수유’를 구성하는 각 지역.



역사상 모든 ‘제국’의 건설자들은 언제나 자신들의 목표가 단순히 땅을 뺏고 보물과 황금을 차지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였다. 그들이 제국을 세우는 이유는 부강(富强)함을 과시하는 것이 아니라 질서가 무너져 혼란스러운 세계를 다시 안정시켜 사람들이 편하게 살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 이런 측면에서 ‘쿠스코 왕국’을 크게 키워 거대한 잉카 제국(타완틴수유)을 만든 사파 잉카들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잉카제국이 멸망한 후 에스파냐의 사가(史家)들을 만난 구 잉카 왕족들은 그들이 안데스 지역을 점령하여 타완틴수유로 편입시킨 이유를 설명했는데 역사를 공부한 사람이면 그 이유가 상당히 익숙하게 들릴 것이다. 즉 선대 잉카들이 타완틴수유를 건설한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혼란이 난무하는 세상의 질서를 바로잡고 태양을 중심으로 한 ‘진정한 신앙’을 퍼뜨리기 위해서 였다는 것이다. 아울러 이들은 자신들만이 최고의 문명인이고 주변의 무지한 족속들에게 문명의 혜택을 가져다 주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결국 타완틴수유를 건설한 잉카인들도 로마인들이나 페르시아, 또는 한인(漢人)들과 다르지 않은 제국의 건설자였으며 ‘제국’의 논리는 지역과 문화를 막론하고 동일하다는 것이 드러난다.

비라코차-파차쿠이-유판키 3대에 걸쳐 급격한 팽창을 한 타완틴수유(잉카제국)는 1527년에 그 영토가 2백만 평방 km에 달하였고 그 수도인 쿠스코에는 거대한 석축(石築) 건물만도 4000개에 달하였다. 아울러 당시 대다수의 유럽도시들은 하수설비도 제대로 되어있지 않아 전염병이 쉽게 퍼졌지만 쿠스코의 도시설계자들은 돌을 깎아 상수도를 만들고 폐수와 오물을 흘려보낼 복개(覆蓋) 하수도까지 만들어 유럽의 도시에서 흔히 맡을 수 있던 오물냄새는 어디에도 없었다. 제국의 수도인 쿠스코는 1대 망코 카팍이 왕국을 세울 당시 인구가 500명 밖에 되지 않았지만 1500년대에 이르러 쿠스코와 그 주변지역의 인구는 25만으로 늘어났다. 아울러 건국 초기에 1만을 넘지 않았던 잉카 제국은 전성기에 이르러 그 인구가 크게 늘어난다. 물론 연구자마다 수치가 다른데 다소 적은 6백만으로 보는 학자도 있지만 많게는 3750만까지로 보는 사람도 있어 큰 편차가 존재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1400만으로 보고 있다. 참고로 후일 대영제국을 세우게 되는 잉글랜드의 이 당시 인구는 260만에 지나지 않았으며 유럽의 인구대국이라는 프랑스도 1500만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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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페루의 쿠스코 시 전경. <출처: (CC)Martin St-Amant at wikipedia.org>





잉카 내전과 아타우알파의 등극



각각 중미와 남미를 대표하는 문명인 아즈텍과 잉카는 에스파냐인들에게 멸망 당했다는 점 외에도 비슷한 점이 많다. 우선 나라 자체가 외부의 적이 치기 어려운 지형에 위치하여 있으면서도 뛰어난 인프라와 행정으로 인구와 생산력 측면에서 큰 발전을 이루었다는 것이다. 두 나라 모두 에스파냐인들의 도래 당시 세워진 지는 약 200년 가까이 되었지만 팽창하여 큰 나라가 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아즈텍의 경우 아직도 팽창과정 중에 있었으며 모크테주마 2세가 귀족연정에 가까운 권력구조를 뜯어고쳐 절대왕정으로 나아가고 있던 중이었다. 국력에 있어서도 전성기에 있었고 쇠퇴의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에스파냐의 콘키스타도르인 프란체스코 피자로 원정단의 도착 무렵 잉카제국도 마찬가지였다. 타완틴수유의 영토를 크게 넓힌 위대한 정복군주인 투팍-잉카 유판키가 죽은 지 불과 30년 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이어서 잉카제국은 여전히 전성기의 영토와 국력을 자랑하고 있었다. 투팍-잉카 유판키가 죽은 후 그의 아들인 와이나-카팍이 즉위하였고 와이나-카팍은 잉카 역사상 최대의 정복사업을 벌여 아버지가 넓힌 제국의 영역을 보다 크게 만들어놓았다. 그의 지휘 하에 타완틴수유의 제국군은 현재의 에콰도르를 완전히 복속시키고 콜롬비아의 일부까지 차지하였다. 아울러 남쪽 아르헨티나와 칠레 방향으로 보다 깊숙이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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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3년의 아타우알파 초상화



그러나 에스파냐인들이 현재 페루의 해안에 도착하였을 당시 타완틴수유(잉카제국)는 갑작스러운 혼란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북방 콜롬비아 방면에서 작전 중이었던 와이나-카팍 황제가 멕시코를 통하여 남미로 퍼지기 시작한 천연두에 감염된 것이다. 잉카인들을 비롯한 신대륙의 주민들은 구대륙의 질병에 대한 면역이 없었고 1527년에 와이나-카팍과 그의 장자(長子)인 니난-쿠요치까지 목숨을 잃는다. 와이나-카팍은 죽기 전에 제국을 둘로 나누라는 유언을 남겼고 새로이 정복한 북방영토는 삼남인 아타우알파에게, 쿠스코를 중심으로 한 남부영토와 황위 자체는 차남인 와스카르에게 주도록 하였다. 이로써 와스카르가 와이나-카팍의 뒤를 이어 사파-잉카가 되었고 황위계승문제가 해결이 된 듯이 보였다. 그러나 한 사람에 모든 권력이 집중된 왕권체제에서 나라를 나누어주고 ‘사이좋게 지내라’는 유언을 과연 두 아들은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아니나 다를까, 와스카르와 아타우알파 둘 다 제국의 반쪽으로는 만족할 수가 없었고 타완틴수유는 곧 치열한 내전에 휘말리게 된다.

사실 와스카르와 아타우알파는 배가 다른 이복형제였다. 와스카르의 어머니는 쿠스코에 있던 정통 왕족 출신이었고 무엇보다 와이나-카팍의 정후(正后)였기 때문에 적통왕자라고 할 수 있었다. 이에 비하여 아타우알파의 어머니는 와이나-카팍이 멸망시킨 키토(Quito)왕국 마지막 왕의 공주였으며 새로 정복된 지역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한 정책의 일환으로 와이나-카팍의 후궁이 된 여인이었다. 이 둘 사이에서 태어난 아타우알파는 장성한 후 와이나-카팍을 따라다니면서 전쟁에서 많은 공을 세웠기 때문에 황제는 정작 적통 왕자들인 두 형보다 아타우알파를 더 아꼈다. 와이나-카팍이 콜롬비아 지역에 간 이유는 앞서 말한 데로 그 지역을 정복하고 위무하고자 하는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정복민들로부터 이상한 족속들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그 ‘이방인’들을 찾으러 간 것이다. 와이나-카팍은 이 이방인들을 끝내 만나지 못하고 오히려 그들이 퍼뜨린 병에 걸려 죽었고 이방인들에게 제국이 멸망하는 결과로 이어지게 되었다.

비록 와스카르가 적통 왕자였는지는 몰라도 군사적인 재능은 아타우알파가 월등하였으며 아울러 그는 아버지를 따라 북방의 정복전쟁에 종군하여 전쟁으로 잔뼈가 굵었고 언제나 부황의 곁에 있었다. 와이나-카팍이 키토에서 죽는 순간 임종을 지킨 것도 아타우알파였다. 이 때문에 황제를 섬겼던 제국군의 장군들의 신임을 얻고 있었으며 와스카르와의 전쟁이 벌어지자 전임 사파-잉카인 와이나-카팍을 따라 북방정벌에 나선 정예 병력은 모두 아타우알파의 휘하에 모여들었다. 이에 와스카르는 쿠스코 전통 귀족들의 병력을 모아 아타우알파와 싸웠다. 아타우알파는 성급하게 선봉군을 이끌고 싸우러 나섰는데 중간에 투메밤바 지역에서 벌어지는 축제에서 마음을 놓고 놀 정도로 와스카르를 과소평가하고 있었다. 첫 전투인 칠로팜파에서는 와스카르 곁에 남아있던 유능한 장군이자 왕자인 아토크의 활약으로 축제에 참여하고 있던 아타우알파군이 불시에 기습을 당하여 패하고 아타우알파는 포로가 되었다. 그러나 와스카르군이 승리를 자축하며 술에 취하는 바람에 아타우알파는 한 여인의 도움을 받아 탈출할 수 있었고 키토근처에 모인 정예병력을 모두 거느리고 반격에 나섰다. 평화로운 쿠스코 인근에서 모은 병력이 치열한 정복전으로 단련된 북방의 정예군을 이길 리가 없었다. 이후 벌어진 전투에서 아타우알파의 북방군은 장군인 차쿨치막과 키즈키즈 등의 지휘하에 쿠스코군을 연파하고 1532년에는 쿠스코를 점령하고 와스카르를 포로로 잡는다. 아타우알파는 전쟁에서 승리하자마자 와스카르의 일족을 멸살(滅殺)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와스카르를 제외한 가족들은 모두 살해당했다. 키토에 머물고 있던 아타우알파는 전쟁이 승리로 끝나자 즉위를 하기 위하여 쿠스코로 향하였다. 그러나 쿠스코로 가는 도중 아타우알파는 카하마르카 근처의 온천에 들러 휴식을 취하면서 전쟁으로 지친 몸과 마음을 추슬렀다. 이 와중에 근처에 수염난 이상한 족속들이 와있다는 말, 그리고 이들이 몇몇 사나운 부족들과 싸워 이겼다는 말을 듣고 그들을 만나게 된다.



에스파냐와 피사로



카하마르카 근처에 와있던 이방인들은 다름이 아니라 콘키스타도르인 프란시스코 피사로가 거느린 168명의 에스파냐 병사들이었다. 에스파냐 엑스트라마두라의 트루히요(Trujillo)에서 군인의 아들로 태어난 피사로는 또 다른 콘키스타도르이며 멕시코의 정복자가 된 에르난 코르테스의 6촌형 뻘이었다 (‘에르난 코르테스’는 줄인 이름이며 원래 이름은 Hernan Cortes de Monroy y Pizarro). 두 사람 다 콘키스타도르이고 가까운 친척이며 아울러 아메리카 대륙의 역사에 커다란 흔적을 남겼지만 피사로와 코르테스는 같은 점보다는 다른 점이 많다. 일단 출신부터 따지자면 코르테스는 중급 정도이기는 하지만 귀족 출신이고 어린 나이에 타 지역의 대학까지 다닌 엘리트였다. 코르테스의 부모는 그가 중급귀족의 신분을 넘어 출세하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러나 피사로는 가난한 군인의 아들, 그것도 적자가 아닌 서자였고 그나마 부모가 교육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아 청소년기까지 글을 알지 못하였다. 출신도 좋지 않고 교육도 받지 못한 청년 피사로가 에스파냐에서 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그는 에스파냐를 뒤로 하고 1509년에 신대륙으로 향하는 배를 타게 된다. 아메리카로 간 그는 1513년에 다른 콘키스타도르인 바스코 드-발보아의 원정대에 지원하여 파나마를 가로질러 ‘남쪽바다’, 즉 태평양을 발견하는 여정을 같이 했다. 발보아는 지금의 콜롬비아 북부 지역의 총독이 되었고 이후 다빌라란 인물이 자리를 물려받았다. 그러나 세상일이 그렇듯이 발보아 같이 획기적인 공을 세우면 시기하는 자가 있게 마련이었고 발보아는 그의 공을 시기한 다빌라의 모함을 받아 새로이 발견한 태평양 지역을 에스파냐의 왕실에게 바치지 않고 자신의 개인 왕국으로 만들려 했다는 누명을 쓴다. 이에 발보아를 체포하라는 명령이 떨어졌고 피사로는 다빌라의 편에 서서 발보아를 체포하여 법정에 세운다. 발보아는 결국 왕실에 대한 불충을 했다는 죄로 사형을 당하게 되고 피사로는 다빌라를 도운 대가로 시우다드 파나마(파나마 시티)의 시장이 된다. 에스파냐의 식민지들은 배신과 모략의 땅이었고 피사로가 이에 편승하면서 그의 인생 역시 배신과 모략으로 얼룩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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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피사로. 피사로가 카하마르카에서 아타우알파를 사로잡으면서 잉카제국 멸망의 도화선이 되었다



1522년에 안다고야라는 인물이 처음으로 남미대륙의 원주민들과 접촉하고 파나마에 돌아오면서 남미대륙은 ‘황금의 땅’이라는 소문을 퍼뜨렸고 이에 피사로는 가톨릭 신부인 에르난도 데-루케와 군인인 디에고 알마그로와 손을 잡고 1524년에 남미대륙을 향하여 떠난다. 80명의 병사를 이끌고 떠난 피사로의 첫 번째 원정은 완벽한 실패였다. 그의 병사들은 파나마를 떠나 현재 콜롬비아 북서부 해안지역에서 더 이상 나아가지 못했다. 날씨도 좋지 않았고 식량을 충분히 준비하지 못했으며 무엇보다도 내리는 곳마다 원주민들이 공격하는 통에 황금을 찾기는 커녕 싸우기만 하다가 지쳐버렸다. 결국 피사로는 포기하고 파나마로 돌아왔다. 2년 후에 다시 남미대륙으로의 원정을 계획하면서 총독인 다빌라에게 허락을 받으려 하였지만 다빌라는 북쪽으로의 원정을 원하고 있었고 피사로가 1차 원정에서 실패한 일도 있었기에 2차 원정계획에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이때 마침 페드로 델-리오스란 인물이 파나마의 새 총독으로 부임해왔고 델-리오스는 피사로의 원정을 흔쾌히 허락하였다. 2차원정은 훨씬 순조롭게 진행되었는데, 피사로의 원정대는 적도를 넘어 남쪽으로 항해하였고 툼베스(Tumbes) 지역에서 온순하고 우호적인 부족을 만나 옷감과 음식을 대접받으면서 쉴 수 있었다. 그는 이 부족민들 일부를 데려와 통역을 만들었고 이들로부터 내륙의 ‘황금이 넘치는 땅’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이야기를 듣게 된다.

그러나 새로운 땅의 탐험은 쉬운 일이 아니었고 두 번째 시도 역시 만족할만한 결과를 가져오지 못하였다. 피사로의 동업자인 알마그로가 파나마에서 다시 80명의 병사를 증원군으로 데려와서 에콰도르 방면으로 가 보았지만 그 곳은 최근에 잉카 제국에 편입된 지역이었고 그 주민들은 에스파냐인들과의 협력을 거부하고 싸우려고 들었다. 이 과정에서 원정대원들의 피로는 쌓여가고 있었다. 결국 피사로는 페루 해안의 갈로섬(Isla de Gallo)에 머무르게 되었고 알마그로는 이번에는 툼베스에서 얻은 황금을 가지고 파나마로 가서 보다 많은 사람들을 끌어 모으려 하였다. 그러나 신임 총독인 델 리오스는 피사로의 탐험이 지지부진하고 원정대를 따라나선 사람들이 죽고 다쳤다는 것을 이유로 알마그로의 탐험신청을 거부하였다. 오히려 델 리오스는 두 개의 선박을 보내어 피사로를 포함한 원정대 전원을 송환하고 피사로의 원정을 중단시키려 하였다. 이 배들이 갈로섬에 도착하였을 때 원정을 중단할 의사가 전혀 없었던 피사로는 모래 위에 줄을 긋고 원정단원들에게 선택을 강요했다고 한다.



“저쪽에는 페루와 그 보물들이 있고 이쪽에는 파나마와 빈곤이 있다. 자, 한 사람 한 사람 용감한 카스틸랴인으로서 선택할 때이다.”

이때 열 세 사람만 선을 넘어 피사로와 함께 할 뜻을 밝혔고 나머지는 배를 타고 파나마로 돌아갔다. 이후 역사에 “이름난 13인”이라고 알려진 이 사람들은 배가 떠난 뒤 땟목을 만들어 약 15km 북쪽에 있는 무인도로 가서 새로운 지원대가 오기까지 일곱달을 머무르게 된다. 이때 도착한 알마그로와 루케는피사로를데려오는 동시에 원정을 완전히 중단시킨다는 조건으로 델 리오스에게 겨우 허락을 얻어내어 피사로에게 온 것이었다. 그들은 남은 인원으로 탐험을 계속하여 툼베스를 에스파냐의 교두보로 완전히 확보하고 1528년에 다시 파나마로 돌아가 델 리오스를 설득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델 리오스가 계속하여 탐험승인을 거부하자 피사로의 측근들은 파자로가 에스파냐로 돌아가 왕실을 직접 설득하여 승인을 얻을 것을 종용하였다. 피사로는 에스파냐로 가서 국왕인 카를로스 1세를 알현할 기회를 잡았고 자신들은 황금이 넘치는 땅을 에스파냐의 것으로 만들기 위하여 목숨을 걸고 탐험하였음을 역설하였다. 카를로스 1세는 흡족해하였지만 곧 이탈리아로 가야 했기에 대신 그의 왕비 이사벨(에스파냐를 통일한 이사벨 여왕의 외손녀)이 피사로의 원정을 최종 승인해주었다. 이로써 왕실의 직접적인 허락을 얻은 피사로는 이제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다. 그는 카나리아 제도로 가서 그의 동생인 에르난도를 데리고 파나마에 도착한 후 1530년 12월에 본격적인 남미원정을 떠나게 된다.


에스파냐의 잉카제국 정복 전쟁(2)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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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남 | 안보·전쟁사 전문가
글쓴이 김성남은 전쟁이 인간 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관심을 가지고 이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미국 UC 버클리 동양학과를 졸업한 후 연세대학교 국제대학원에서 국제학 석사를 받고 한국학중앙연구원 정치학과에 진학하여 정치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주요 저서로는 [전쟁으로 보는 한국사], [전쟁으로 보는 삼국지], [전쟁 세계사] 등이 있으며 공저로 [4세대 전쟁]이, 역서로 [원시전쟁: 평화로움으로 조작된 인간의 원초적인 역사]가 있다.


발행2012.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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