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역사 에스파냐의 잉카제국 정복 전쟁(2) - 남아메리카 거대 제국의 몰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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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15회 작성일 16-02-07 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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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하마르카 전투에서 패배한 후 에스파냐인에게 사로 잡힌 잉카제국의 사파 잉카, 아타우알파. 존 밀레이의 [페루의 잉카를 잡는 피사로]




상품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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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표


에스파냐의 잉카 정복 전쟁 개요

전쟁주체


에스파냐 (피사로), 잉카 제국

전쟁시기


1528년-1572년

전쟁터


현재의 페루, 에콰도르, 칠레 일부

주요전투


코스코 전투, 올란테이탐보, 카하마르카






관련링크

에스파냐의 잉카 정복 전쟁(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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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에 비소설 분야에서 퓰리처상을 수상한 제레드 다이아몬드(Jared Diamond)의 저서 [총, 균, 쇠(Guns, Germs, and Steel)]에서는 1532년의 카하마르카 전투가 인류역사 상 매우 중요한 분수령으로 묘사되고 있다. 구대륙(유라시아)와 신대륙(아메리카)의 사회들은 환경적-지리적 요인들 때문에 서로 다른 방향으로 발전했고 카하마르카 전투는 서로 다른 방향으로 발전한 두 사회가 직접적으로 충돌한 사건이라는 것이다. 유라시아의 환경적-지리적 조건은 유라시아, 특히 유럽인들에게 아메리카에는 없는 것들(총, 균, 쇠)를 가져다 주었고 구대륙 사회(에스파냐)가 신대륙 사회(잉카)를 이기고 그 땅을 강탈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1521년에 멕시코의 아즈텍 제국이 에스파냐에게 멸망 당한 후 잉카제국마저 에스파냐에 무릎을 꿇음으로써, 신대륙에서 원주민이 이룩한 문명은 종적을 감추게 된다.



카하마르카로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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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레드 다이아몬드의 저서 [총, 균, 쇠]에서는 1532년의 카하마르카 전투가 인류역사 상 매우 중요한 분수령으로 묘사되고 있다.



피사로의 잉카 정복은 많은 부분에서 코르테스의 아즈텍 정복과 비교가 된다. 코르테스가 테노치팃란을 점령하기 위한 최후의 진격을 시작할 때 그는 에스파냐 병력 1100명에다 그가 우군으로 확보한 틀락스칼라의 5만 전사를 이끌고 있었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멀지 않은 베라크루즈에 기지를 확보하였으며 유사시에는 에스파냐의 카리브해 식민지로부터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이에 비하여 피사로가 파나마에 도착하였을 때 그의 휘하에는 병사 180명과 말 30필 밖에 없었다. 에스파냐 본국의 승인을 받았기 때문에 파나마 총독부의 방해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지만 이는 동시에 파나마 총독부로부터 어떠한 지원도 받을 수 없으며 병력을 모으고 자금을 확보하는 등의 모든 일을 피사로가 스스로 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그는 자신의 휘하에 있던 병력만을 거느리고 남미로 떠났다.

피사로의 탐험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고행길이 되었다. 항해 내내 위궤양으로 고생한 끝에 1532년 4월 겨우 툼베스에 도착했으나 상황은 한심했다. 그나마 에스파냐인들에게 우호적이었던 툼베스의 주민들은 주변의 사나운 족속인 푸니족에게 공격 당하여 뿔뿔이 흩어진 뒤였다. 결국 툼베스에 머물 수가 없게 된 피사로는 근처의 큰 섬인 푸냐섬에 가서 원정대를 재정비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푸냐섬은 사실 푸니족의 본거지나 다름 없는 곳이었다. 피사로가 도착했을 때 푸니족과 에스파냐군 사이에 긴장감이 돌기는 하였지만 큰 충돌은 없었다. 그러나 에스파냐군에 종군하고 있던 원주민 출신 통역들이 푸니족이 에스파냐군을 습격하려 한다고 하자 에스파냐군은 즉시 푸니족의 추장 몇 명을 사로잡아 고문한 뒤에 툼베스로 보냈다. 결국 이 추장들은 툼베스의 잉카인들에게 학살당하게 된다.

푸니족 전사들은 당연히 격분하였고 그들은 즉시 에스파냐군을 공격했다. 푸니족 전사들은 그 수가 수천 명에 달하였고 100명이 겨우 넘는 에스파냐군을 깔아뭉개버릴 기세로 미친 듯이 달려왔다. 그러나 유럽에서 에스파냐군에 수없는 승리를 안겨주었던 장창병(pikemen)들이 단단한 대형을 형성하여 푸니족의 돌격을 막았고 창병 옆에 서있는 화승총병들이 푸니족에게 사격을 가하면서 무수한 푸니족 전사들이 쓰러졌다. 유럽에서 그 진가가 발휘되었던 테르치오 전술의 재현이었다. 푸니족의 기세가 꺾인 것으로 판단한 프란시스코의 동생 에르난 피사로가 중기병대를 지휘하여 돌격하였고 푸니족 전사들은 에스파냐군이 휘두르는 강철검과 기병창(lance)을 막지 못하고 떼죽음을 당했다. 이후 푸니족은 에스파냐군에 이따금씩 소규모의 습격을 하는 것 외에는 싸우려 하지 않았다. 얼마 후 에르난도 데 소토(Hernando de Soto)가 병력 100명, 마필 50마리와 함께 도착하였고, 피사로의 원정대는 데 소토의 지원병력과 함께 푸냐섬을 떠나 1532년 5월에 페루의 툼베스로 돌아갔다. 그러나 이미 파괴된 툼베스에 머물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기에 피사로는 결국 안데스를 넘어 내륙으로 들어가기로 결정했다. 피사로는 페루 북부에 산 미구엘 피우라라는 마을을 세우고 이를 전진기지로 삼았다.

이때 그들을 지켜보고 있던 잉카인들은 피사로의 움직임을 카하마르카에 있던 아타우알파에게 낱낱이 보고했다. 일부 잉카 백성들은 에스파냐인들의 하얀 얼굴과 빛나는 갑옷을 보고 태양이 보낸 사람들이라고 하는 반면 일부는 에스파냐인들을 신이 보낸 악마라며 매우 두려워하였다. 이윽고 아타우알파와 피사로 간에 서로 탐색을 위한 몇 번의 사절이 오간 후 아타우알파는 그가 아끼던 전사인 신쿠인차라(Cinquinchara)라는 인물을 보내어 에스파냐군과 같이 움직이게 하면서 그들이 정확히 어떤 존재들인지 알아오게 하였다. 에스파냐군과 여러 날 같이 지낸 신쿠인차라는 아타우알파에게 돌아가 에스파냐인들이 음식을 먹고 물을 마시고 여자들과 방사(房事)를 하는 것을 볼 때 그들은 인간임에 틀림없다고 말했다. 동시에 그들이 인디오들을 쇠사슬로 묶어서 마구 부리는 탐욕스러운 인간들이며 이 때문에 그들이 밤에 자고 있을 때 불을 질러 태워 죽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아타우알파는 신쿠인차라의 공격제언은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이 때문에 에스파냐인들도 인간들이라면 인신(人神)인 자기를 어쩌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며 깔보기 시작하였다.

피사로는 데 소토를 11월 14일에 아타우알파에게 보내 자신들은 신(기독교의 하나님)의 사자로서 그 땅에 왔으며 그 진리를 전해주려 한다고 했다. 아타우알파는 데 소토를 무시하고 그의 정찰전사들이 전해준 소식을 토대로 에스파냐인들이 잉카인들을 마구 사로잡아 노예로 부리고 있다며 마구 따졌다. 그러나 에르난도 피사로는 헛소문이라며 극력 부인하였고 어쩐 이유에선지 아타우알파는 더 이상 따지지 않고 에스파냐인들과 다음 날 만나자고 한 후 헤어졌다.



카하마르카: 전투인가, 학살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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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트루히요에 세워진의 프란시스코 피사로의 동상. <출처: (CC)David Jones at Wikipedia.org>



그 다음 날인 11월 15일에 카하마르카에 나타난 에스파냐 병력은 겨우 168명(보병 106명, 기병 62명)에 지나지 않았다. 이들은 뒤에 지원군도 없었고 지원을 해줄 수 있는 에스파냐의 식민지(파나마)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다. 만약 잉카군의 장군이 있어 카하마르카에 모인 에스파냐의 병력을 보자면 참으로 가관이었을 것이다. 다소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이때 아타우알파는 유사시에 쿠스코에서의 싸움이 잘 되지 않을 경우 투입할 계획이었던 예비병력을 모두 거느리고 있었고 그 수가 8만에 달했다고 한다.

사실 피사로와 에스파냐 병력은 이미 하루 전에 카하마르카에 도착하여 그 요새를 먼저 차지했다. 카하마르카 요새는 한쪽에 거대한 신전이 있고 마찬가지로 거대한 건물들이 삼각형의 넓은 광장을 둘러싸고 있는 형태였다. 피사로는 자신의 원정대가 처한 상황을 잘 알고 있었다. 전날 들어오면서 카하마르카의 성벽 밖에 끝없이 펼쳐진 잉카군의 천막을 보면서 아타우알파가 엄청난 병력을 거느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파나마의 식민지는 말할 것도 없고 내륙 깊숙이 들어온 탓에 전진기지로부터도 멀리 있었기 때문에 자신들이 어떤 형태의 지원도 바랄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이 때문에 피사로는 아타우알파를 요새 안의 광장으로 끌어들이려 했다. 우선 요새 안의 광장으로 수만의 병력이 들어올 수 없었기 때문에 잉카군의 병력을 수천 정도로 제한할 수 있었다. 물론 광장 안으로 끌어들이더라도 잉카군은 여전히 수적우위를 지니게 되겠지만 2백이 채 안 되는 에스파냐군에 비하여 닫힌 공간 안에서 원활히 움직일 수가 없을 것이다. 아울러 아타우알파가 스스로 요새로 들어온다면 아타우알파를 습격하여 죽이거나 포로로 잡을 수 있으리라 계산한 점도 있다. 피사로는 코르테스가 테노치팃란에서 모크테주마를 인질로 잡아 상황을 주도하였음을 알고 있었고 잉카에서 같은 작전을 쓰려한 것이다. 만약 일이 틀어져 잉카군과 정면으로 싸우게 된다면 피사로를 포함한 에스파냐인들이 살아 돌아갈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자신들의 수십배의 병력과 싸워야 하는 에스파냐 병사들은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에스파냐 병사들에게 11월 15일에서 16일로 넘어가던 밤은 매우 길었다. 대부분의 병사들이 잠을 설쳤고 일부 병사들은 공포를 못 이겨 바지에 소변을 지리기도 했다고 전한다. 다음 날 아침, 피사로는 광장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는 신전에 병사들을 배치하고 아타우알파의 진영을 바라보면서 그가 도착하기만을 기다렸다. 잉카 진영은 오전 내내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다가 이른 오후가 되어서야 아타우알파의 행렬이 시작되었다. 아타우알파는 가마에 타고 6000명의 전사들과 함께 화려한 행렬을 이루면서 카하마르카 요새로 접근해왔다. 그러나 카하마르카 요새로부터 1km 조금 못 미치는 지점에 이르자 아타우알파는 행렬을 갑자기 멈추고 피사로에게 전령을 보냈다. 이미 오후가 되었으니 늦게 만나기 보다 다음날 만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미 오전 내내 긴장을 풀지 못하고 거의 노이로제 상태에서 보낸 에스파냐 병사들은 폭발 직전이었다. 만약 아타우알파가 다음 날까지 오지 않는다면 병사들은 요새를 뛰쳐나가 공격할 수도 있었고 이는 에스파냐군의 가장 큰 전술적인 잇점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했다.

이때 피사로는 전령을 보내 요새 안에 식사와 유흥거리가 마련되어 있으니 들어와서 같이 즐길 것을 청하였고 이에 아타우알파가 행진을 재개하여 요새 안으로 들어왔다고 하는데, 사실 에스파냐인들을 깔보고 있었고 누릴 만한 것을 모두 누리던 아타우알파가 단순히 ‘유흥거리’를 보기 위하여 카하마르카로 갔을 리는 만무하다. 이 전령은 보다 급박한 메세지, 또는 아타우알파에게 약간 무례한 메세지를 전달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물론 기록이 전해지지 않아 정확히 어떤 말로 아타우알파를 움직였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아타우알파는 행렬을 다시 움직여 요새 안으로 진입하였는데 대부분의 기록은 아타우알파의 행렬이 비무장이었다고 적고 있다. (현재인의 관점으로 이해가 되지 않을지 모르지만 과거의 전투에서는 지휘관들이 전투 전에 만나 어디에서 싸울 것인지, 심지어 어떻게 싸울 것인지 알려주는 일이 드물지 않았고 이를 예의로 여기는 경우도 있었다.) 아타우알파가 과연 피사로에게 예의 차원에서 그랬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분명한 것은 아타우알파는 “싸움”을 예상하고 카하마르카에 온 것은 아니다. 에스파냐인들이 정확히 어떤지 파악하고 만약 도움이 된다고 생각할 경우 에스파냐인들을 자신의 군대에 편입시킬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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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하마르카 전투 상상도.



광장에 들어온 잉카의 전사들은 아타우알파의 가마가 지나갈 수 있도록 둘로 갈라져 도열하였다. 아타우알파가 나오자 에스파냐측에서는 도미니코 수도회의 빈센테 데 발베르데(Vincente de Valverde) 신부가 통역을 데리고 나왔다. 발베르데 신부는 성경을 들고 아타우알파에게 그리스도의 구원에 대하여 이야기했다. 그러나 아타우알파는 무심히 듣기만 하였다. 그러다가 아타우알파는 발베르데 신부가 들고 있던 성경책을 보면서 그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 지를 물었다. 발베르데 신부는 이 책 안에는 ‘신의 말씀’이 담겨있다고 했는데, 아타우알파가 갑자기 책을 빼앗아 들어 펼쳐보고는 귀를 대 보더니 ‘왜 아무소리도 들리지 않는가?’라고 반문하면서 책을 던져버렸다고 한다. 사실 잉카제국에는 종이에 쓰는 서책 같은 것에 대한 개념이 없어 ‘신의 말씀’이 음성으로서 실제로 들려와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다른 한 편으로는 발베르데가 신은 오직 하나라는 것만 강조하면서 사파-잉카의 신성성을 인정하지 않아 화가 난 아타우알파가 책을 빼앗아 내동댕이쳤다는 해석도 있다.

그러나 이 성경책 사건이 실제로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긴장감을 견디지 못한 에스파냐군이 잉카군을 공격하는 신호가 되었기 때문이다. 발베르데 신부가 책을 들고 달아나기 시작하자 주변의 골목에 배치되어있던 에스파냐의 소형포 세 문이 일제히 불을 뿜었다. 잉카 전사들이 이때 좁은 지역에 밀집되어있던 까닭에 3문만으로도 광장 안의 잉카군은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포들이 불을 뿜은 후 주변 건물에 숨어있던 68기의 기병이 세 갈래로 나누어 포격에 정신을 못차리고 있는 잉카군을 공격하였다. 사실 잉카 전사들은 창과 팔매를 들고 있어 완전히 비무장은 아니었다. 그러나 잉카의 돌창과 팔매로 갑옷 입은 에스파냐 중기병의 돌격을 막을 수는 없었다. 에스파냐 기병들은 강철검과 창으로 잉카전사들을 도륙하였고 이에 신전에서 대기하고 있던 보병들도 일제히 싸움에 뛰어들었다. 대포의 사격 역시 간간히 이어졌고 잉카 전사들은 포격과 함께 기병의 갑작스러운 돌격에 질려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였다. 아타우알파는 에스파냐군에 사로잡히고 광장에서 온전히 탈출한 잉카전사는 거의 없었다. 이에 비하여 에스파냐군의 피해는 부상 5명에 불과했다. 그 중 하나가 피사로 자신이었는데, 무리하게 아타우알파를 사로잡으려고 하다가 어느 에스파냐군 병사가 휘두른 칼에 다친 것이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대기하고 있던 7만이 넘는 잉카 대군은 전투에 개입하지 않았다.



아타우알파의 죽음과 잉카제국의 쇠퇴



테노치팃란이 함락됨으로써 급속히 무너진 아즈텍 제국과는 달리 잉카제국은 바로 멸망하지 않았다. 에스파냐군은 황제를 사로잡았을 뿐 대부분의 지역은 에스파냐군이 온지도 몰랐고 168명의 병사로 어디를 점령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코르테스가 틀락스칼라를 비롯하여 아즈텍에 적대적인 세력을 규합하여 아즈텍을 무너뜨린 것에 비해 피사로에게는 변변한 동맹세력이 없었다. ‘3도시 동맹’의 연합형태로 나라를 다스린 아즈텍에 비해 잉카는 황제에 의한 중앙집권이 확실히 정립된 상태였기 때문에 지방에 대한 장악력이 아즈텍보다 높았다. 만약 아타우알파가 당장의 위기를 벗어날 수 있다면 제국의군사들을 동원하여 피사로군을 전멸시키는 것은 쉬웠다. 물론 피사로는 제국 전체를 놓고 생각하고 있던 것은 아니었겠지만 당장 카하마르카 근처에 있는 수만의 병력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이 때문에아타우알파를 인질로 잡아놓은 것이었다. 잉카의 군 통수권자는 사파-잉카였고 에스파냐군이 사파-잉카를 인질로 잡자 지휘체계가 일시적으로 마비되어 잉카군은 어쩔 줄 몰랐다. 자신들에게 명령을 내려줄 최고 지휘관이 적들의 포로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에스파냐군은 카하마르카에서 7천의 잉카군을 궤멸시킨 후 근처의 잉카 본영을 습격하여 차지했는데 그곳에서 많은 양의 황금과 은과 보석을 발견하고는 이를 약탈했다.

에스파냐군에 의하여 사로잡힌 아타우알파는 카하마르카에 요새에 있는 한 건물의 큰 방에 감금되었다. 그는 에스파냐인들이 그의 본영을 약탈하는 것을 보고 황금에 대한 욕심이 하늘을 찌르고 있음을 알고 자신이 머무르고 있는 크기(길이 7미터, 넓이 5미터, 높이 2.5미터)의 방을 황금으로, 같은 크기의 다른 방 두 개를 은으로 채울 수 있다고 했다. 아타우알파는 그 대가로 자신을 풀어달라고 했다고 전해진다. 피사로는 아타우알파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아타우알파는 신하들에게 명하여 제국 전역의 신전에서 보물을 가져오게 했다. 카하마르카의 큰 방들이 금은으로 가득 채워지고 있는 동안에도 아타우알파는 자신이 포로가 되었다는 소식이 비밀로 유지되기를 바랐다. 그러나 황위계승전쟁에서 패하고 감금되어 있던 와스카르를 따르는 자들이 아직도 남아있었고 이들에 의해 아타우알파가 포로로 되었다는 정보가 와스카르에게 들어갔다. 와스카르는 비밀리에 피사로와 접촉하여 자기 아버지인 와이나-카팍이 축적한 막대한 양의 보물이 있는 비밀창고의 위치를 알고 있다며 자신이 황위를 되찾는 데 도움을 줄 것을 청하였다. 그러나 아타우알파가 비록 패하였다고는 하지만 자신의 최대경쟁자에 대한 경계를 늦출 리는 없었으며 와스카르의 움직임은 곧 들통이 났다. 아타우알파는 더 이상 와스카르를 그냥 놔둘 수 없었고 결국 암살자들을 보내어 와스카르를 죽여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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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3년 8월 사파 잉카 아타우알파는 가톨릭 교도로 개종한 후 교형을 받아 죽는 굴욕을 당한다. 루이스 몬테로의 [아타우알파의 장례식]



그러나 아타우알파가 황금을 대가로 자유를 약속 받았다는 것은 전해지는 이야기일뿐 사가(史家)들과 현장에 직접 있었던 사람들의 증언에는 대가로 아타우알파가 풀려나기로 약속 받았다는 말이 없다. 그는 단순히 에스파냐인들에게 죽임을 당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그리했을 가능성이 가장 많다. 잉카제국의 막대한 부로도 아타우알파가 에스파냐인들에게 약속한 양을 채우는 데는 수개월 걸렸고 아타우알파의 충직한 장군인 루미나위가 보물을 가지고 카하마르카로 왔지만 에스파냐인들은 오히려 루미나위의 병력이 돌변하여 자신들을 공격할 가능성을 두려워하였다. 이에 피사로는 아타우알파를 약식 법정에 세워 우상숭배와 근친상간, 그리고 형 와스카르를 살해한 죄를 적용하여 화형에 처할 것을 명령했다. 잉카인들의 생사관에 따르면 불에 타 죽은 자는 무사히 저승에 가지 못하기 때문에 아타우알파는 화형만은 피할 방법을 물었고 카하마르카에서 그에게 기독교 교리를 설파했던 발베르데 신부는 만약 아타우알파가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여 개종한다면 화형은 받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다. 아타우알파는 발베르데의 제안을 받아들여 가톨릭 교도로 개종했고 후안 산토스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그는 1533년 8월 가톨릭 교도로서 교형(絞刑)을 받아 죽었다.



잉카인들의 저항과 식민세력의 내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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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타우알파의 충직한 장군이었던 루미나위는 아타우알파의 처형 소식을 듣고 북방의 잉카군을 모아 에스파냐군을 대적하려 한다.



일년 후 1533년, 피사로는 쿠스코로 진격해 그곳에 자리를 잡는다. 이때 에스파냐군은 식민정부를 세울만한 인원이 없어 꼭두각시 사파-잉카를 그들의 대리통치자로 내세웠다. 와이나-카팍의 아들이며 와스카르와 아타우알파의 동생인 투팍-왈파를 새로운 사파-잉카로 내세웠으나 그는 세운지 얼마 안되어 천연두에 감염되어 죽고, 뒤를 이어 와이나-카팍의 다른 아들인 망코-잉카 유판키가 사파-잉카로 즉위하게 된다.

사실 아타우알파가 죽은 후 잉카제국이 바로 망한 것은 아니었다. 제국의 영토와 군대는 그대로였다. 아타우알파의 죽음을 막기 위해 보물을 가지고 카하마르카로 오고 있던 루미나위는 에스파냐인들이 약속을 어기고 아타우알파를 죽이자 오던 길을 돌아가 도중에 있는 칼데라호(湖)에 보물을 쳐넣고는 키토에 도착하여 북방의 잉카군을 모아 에스파냐군과 싸우러 나섰다. 1534년에 페루의 에스파냐군에 대한 어느 정도의 증원이 이루어졌고 피사로는 그의 부하인 세바스티안 벨랄카자르를 보내 지금의 에콰도르에서 남하하고 있던 루미나위의 군단을 요격해 격파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루미나위의 잉카군과 벨랄카자르의 에스파냐군은 몬테 침보라조(Monte Chimborazo) 화산 인근에서 만났는데 잉카군은 무기의 열세에도 수적인 우위를 내세워 한동안 대등한 싸움을 벌였다. 이때 공교롭게도 침보라조 화산이 폭발했고 신들이 자신들에게 분노하고 있다는 것으로 본 잉카군이 무질서하게 후퇴하는 바람에 잉카군은 패하게 된다. 루미나위는 도망치면서 에스파냐군에게 제국의 주요도시 중 하나인 키토를 넘겨주지 않기 위해 키토를 불태워 잿더미로 만든다. 이후 에스파냐군은 루미나위를 사로잡았고, 버린 보물의 위치를 알기 위해 혹독한 고문을 가하였지만 그는 끝까지 그 위치를 말하지 않고 죽었다.

한편 프란시스코 피사로는 칠레 방면으로 원정을 떠나면서, 쿠스코를 그의 동생들인 곤잘로, 후안, 그리고 에르난도에게 맡겼다. 꼭두각시인 망코-잉카 유판키는 처음에는 에스파냐인들을 거스르지 않고 오히려 환심을 사려고 보물을 모아 에스파냐인들에게 갖다 바쳤다. 그러나 곤잘로, 후안, 에르난도 피사로 삼형제의 횡포가 심해지자 그들에게 반감을 가지게 되었다. 결국 1535년 말 쿠스코를 탈출하려 했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했고 그에 대한 감시는 더욱 심해졌다. 이 와중에 프란시스코 피사로는 이후 페루의 수도가 되는 리마를 세우고 있었다. 재탈출의 기회는 없는 듯 했으나 그는 이듬 해 4월에 인근지역에서 벌어지는 축제를 주관해야 한다는 것을 핑계 삼아 쿠스코 밖으로 나갈수 있다는 허락을 받았고 쿠스코를 나오자마자 탈출해 20만의 대군을 모아 쿠스코에 있는 에스파냐인들을 공격했다. 1536년 5월에 시작된 쿠스코 공방전은 약 10개월간 계속되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망코-잉카의 군대는 천연두로 인한 사망자가 급증했다. 결국 이 공방전은 약 3만의 원주민 동맹군을 대동한 에스파냐군의 승리로 끝났고 에스파냐는 망코-잉카 유판키를 올란테이탐보 요새까지 추격했다. 여기에서 망코-잉카는 에스파냐의 추격군을 성공적으로 격퇴하였으나 올란테이탐보는 사실 군사요새에 가까워오래 머물만한 곳이 아니었다. 망코-잉카는 올란테이탐보를 떠나 안데스 고원지대의 빌카밤바로 수도를 옮겼다. 한편 쿠스코에서는 부황(父皇)을 돕지 않고 오히려 에스파냐군을 도와주었던 망코-잉카의 아들 파울루-잉카가 새로운 꼭두각시가 되었다. 이로써 제국은 공식적으로 쿠스코에 있는 에스파냐의 꼭두각시 정권과 빌카밤바에 있는 사파-잉카의 정권으로 사실상 양분되었다. 파울루는 1549년까지 쿠스코에서 에스파냐인들의 대리인 역할을 하다가 죽었고 쿠스코에 있던 잉카제국의 잔존세력들은 원래의 사파-잉카가 있는 빌카밤바로 옮겨 갔다. 빌카밤바의 잉카들은 계속하여 백성들과 군사들을 모아 싸우고자 했지만 이미 제국의 과거 영광을 되찾는 것은 불가능했고 날로 늘어가는 에스파냐인들에 비해 원주민 인구는 천연두가 번지며 계속해서 줄어들었다.

빌카밤바의 잉카 잔존정권이 심각한 위협이 되지 않자 후에는 오히려 에스파냐인들 간에 내전이 벌어졌다. 피사로 형제들과 과거의 동업자인 알마그로 사이에 벌어진 싸움은 처음에는 알마그로에게 유리하게 돌아갔으나 1542년의 추파스 전투를 전후해 피사로 형제들이 우위를 점하게 되었다. 이후 알마그로는 피사로 형제들에게 죽고 앙심을 품은 알마그로의 아들은프란시스코 피사로를 암살하면서 내부갈등은 극에 달한다. 1546년에는 새로 신설된 페루 총독부의 총독으로 임명된 누네스 벨라가 프란시스코 피사로의 동생인 곤잘로 피사로가 세운 식민지인 누에바 카스틸랴를 굴복시키려 했으나, 아냐키토의 전투에서 패하고 누네스 벨라가 죽는다. 에스파냐 왕실은 결국 잉카지역 전역에 대한 직접적인 통치를 결정하고 페드로 델라 가스카를 새로운 총독으로 임명하여 반독립적인 식민지들 위에 왕실의 권위를 확립할 것을 명한다. 1548년에 가스카가 새로이 총독부의 수도가 된 리마에서 이끌고 간 총독부 병력은 쿠스코 인근의 야키하와나에서 곤잘로 피사로의 누에바 카스틸랴군을 대파하고 누에바 카스틸랴를 페루 총독부에 편입시킨다.



잉카제국의 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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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카제국의 마지막 사파 잉카, 투팍-아마루.



한편 빌카밤바에서는 망코-잉카 유판키가 1544년에 사망하고 그 자리를 사이리-투팍이 이어받는다. 이때에 이르러 빌카밤바 정권은 잉카 제국의 후계세력이라기 보다는 단순히 독립왕국 정도로 위축되어 있었다. 에스파냐 세력이 계속 팽창하자 사이리-투팍은 1556년에 당시 총독인 멘도자와의 협상 끝에 빌카밤바에서 내려와 세례를 받고 에스파냐 왕실로부터 ‘사면’을 받음은 물론 에스파냐 왕의 후신(候臣)인 유카이후(候)로 자처하였다. 1561년에 사이라-투팍이 죽은 후 그의 동생인 티투-쿠시가 빌카밤바 정권을 인수하고 다시 에스파냐군에 강경노선을 펼쳤다. 그러나 이미 기울어진 국세를 되세우기는 어려웠으며, 티투-쿠시는 1571년에 사망하고 그의 자리를 마지막 사파-잉카인 투팍-아마루가 이어받는다. 한편 티투-쿠시가 죽은 것을 모르고 있던 에스파냐 총독부는 티투-쿠시와 연례협상을 하던 사절 두 명을 빌카밤바로 보냈는데 이들이 투팍-아마루의 전사들에게 살해되고 에스파냐인들은 이를 빌미로 원주민 동맹세력과 함께 빌카밤바 정권에 대한 총공격을 감행했다. 빌카밤바는 함락되고 투팍-아마루는 산달에 이른 아내를 데리고 탈출을 감행하였다가 다른 원주부족들의 배신으로 에스파냐인들에게 사로잡히고 만다.

사실 이때 에스파냐 총독은 에스파냐의 법대로라면 마음대로 투팍-아마루를 처형할 권리가 없었다. 그는 에스파냐왕의 대리인인데 비해 투팍-아마루는 국가의 수장이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에스파냐의 왕인 펠리페 2세조차 처형을 반대할 정도였다. 그러나 총독인 프란시스코 톨레도는 선대 잉카인 사이리-투팍이 이미 에스파냐의 신하로서 자처하였으며 이 때문에 투팍-아마루의 항전은 ‘반란’에 해당된다는 유권 해석을 내려 본국을 설득하고 투팍-아마루의 처형을 강행했다. 혹시라도 후대에 있을 수 있는 반란의 구심점을 제거하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결국 1572년 9월, 투팍-아마루는 에스파냐 집행인의 칼 아래 놓였다. 그리고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하면서 자신의 죽음을 아쉬워했다.



“어머니이신 대지(大地)여! 나의 적들이 나의 피를 어찌 뿌리는지 보게 하소서!”

집행인은 칼을 내리쳤고 마지막 태양자(太陽子)이자 사파-잉카는 이렇게 죽었다. 그리고 안데스 전역을 지배하며 찬란한 문명을 꽃피웠던 타완틴수유(잉카 제국)의 역사는 종언을 고하였다.


에스파냐의 잉카제국 정복 전쟁(1)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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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남 | 안보·전쟁사 전문가
글쓴이 김성남은 전쟁이 인간 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관심을 가지고 이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미국 UC 버클리 동양학과를 졸업한 후 연세대학교 국제대학원에서 국제학 석사를 받고 한국학중앙연구원 정치학과에 진학하여 정치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주요 저서로는 [전쟁으로 보는 한국사], [전쟁으로 보는 삼국지], [전쟁 세계사] 등이 있으며 공저로 [4세대 전쟁]이, 역서로 [원시전쟁: 평화로움으로 조작된 인간의 원초적인 역사]가 있다.


발행2012.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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