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역사 에스파냐 무적함대의 패배 - 에스파냐 잉글랜드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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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15회 작성일 16-02-07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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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표


에스파냐 잉글랜드 전쟁 개요

전쟁주체


에스파냐, 잉글랜드, 네덜란드

전쟁시기


1580년대

전쟁터


현재의 에스파냐, 네덜란드, 프랑스 북부, 잉글랜드, 아일랜드, 대서양 일부지역

주요전투


아조레스, 에디스톤 암초, 그레이브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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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적함대의 항해, 리스본에서 잉글랜드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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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타크루즈의 사망 이후 그의 뒤를 이어 함대의 사령관이 된 메디나-시도니아 공작.



카디스에서 입은 손해를 만회하고 드디어 잉글랜드 공격을 위한 준비가 완료된 것은 다음 해인 1588년이었다. 물질적인 손해도 손해였지만 에스파냐의 공격이 1년 연기됨으로써 에스파냐가 입은 가장 큰 타격은 경험 많고 유능한 해군사령관인 산타크루스 후작의 사망이었다. 산타크루즈 후작은 평생을 바다에서 보낸 진정한 ‘뱃군’으로 산티아고 기사단(Orden de Santiago)의 일원이었다. 1564년에 모로코의 바데스를 오스만군으로부터 빼앗는 것을 시작으로 역시 모로코의 테타웬에서 해적들을 소탕하는 작전에 참여하였다. 1571년에는 레판토 해전에서 일단의 함선을 지휘하게 되었는데 신성동맹(Holy League)함대의 우익을 파고든 오스만의 울룩-알리 선단을 격퇴하여 신성동맹함대의 붕괴를 막고 레판토의 승리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는 이듬해 레판토의 사령관인 돈-후안(리터-요한 폰 오스트라이히)을 따라 튀니스를 점령하는 활약을 하였다. 그의 가장 통쾌한 승리는 1582년 포르투갈 계승전쟁때 대서양 항로의 중요한 기항지라고 할 수 있는 아조레스 제도의 전투였다. 산타크루즈는 프랑스/잉글랜드/포르투갈/네덜란드, 그리고 국적불명의 사략함들이 포함된 60척의 적 연합함대를 맞아 불과 28척의 함선으로 단 한 대의 함선도 잃지 않으면서 적함 6척을 파괴하고 4척을 나포하였으며 아울러 적함 7척은 행방불명이 되었다. 적의 사상자는 3천이 넘는 데 비하여 산타크루즈의 함대는 8백명 내외였다.

사실 산타크루즈의 사망은 펠리페 2세가 산타크루즈에게 카디스 패전의 책임을 물어 강하게 질책한 것이 간접적인 원인이었다. 질책으로 인한 심리적 스트레스로 병을 얻어 사망한 것이다. 산타크루즈의 뒤를 이어 알론조 구즈만, 즉 메디나-시도니아 공작이 에스파냐 함대의 총사령관이 되었다. 시도니아는 궁정에서 일하던 귀족 문관에 가까웠으며 특히 해전에는 경험이 전무하였다. 그러나 아무리 작전능력이 뛰어나더라도 이 당시에는 일군의 수장을 맡으려면 그에 걸맞은 지위가 있어야 했다. 특히 작전계획의 중요한 부분을 담당하게 되는 파르마 공작과 비슷한 지위의 귀족이어야만 했기 때문에 그나마 지위가 높았던 메디나-시도니아가 선택되었을 뿐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해전에 경험이 많은 후안 마르티네즈 데 레칼데란 인물이 메디나-시도니아를 보좌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1588년 4월 25일 축성식을 마친 함대는 마침내 5월 28일에 잉글랜드를 향하여 발진하였다. 함대는 총 132척의 함선, 선원 8766명, 병사 21556명, 그리고 일부 갤리선의 노를 저을 죄수 노꾼 2088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특이한 점은 무적함대(Spanish Armada)에는 180명의 가톨릭 수사와 사제가 동승하고 있었는데, 이는 독실한 가톨릭이었던 펠리페 2세가 혹시 자신이 준비 못하고 빠뜨린 것이 있을지라도하나님의 적절한 개입(?)으로 승리를 보장받을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펠리페 2세에게는 잉글랜드 원정이 과거의 성전(聖戰,crusade)과 맞먹는 대역사(大役事)였고 이 때문에 그는 심지어 병사들에게 이 원정에 참여하면 죄사함을 얻을 수 있다고 하면서 면죄부를 발행하였다. 기본적인 전술은 영국해협의 잉글랜드 함선들을 거대 함선들로 견제하면서 파르마 공작의 3만 대군에 의한 잉글랜드 상륙을 엄호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함대 자체에 승선한 병사들도 상륙케 하여 거의 5만의 병력으로 빈약한 잉글랜드 육군을 무찌르고 런던으로 진격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무적함대의 문제점은 여러 곳에서 배를 끌어 모은 탓에 함선들의 성격과 질(質)이 제 각각이라는 것이었다. 원양항해에 맞도록 빠르게 만든 함선이 있는가 하면, 그 당시여전히해전의 주요 전술로 자리하고 있던승선(Boarding)전투를 위하여 최대한 많은 병사들을 태우게 고안된 갤리온들도 있었고 아울러 대양과 비교하여 풍랑이 심하지 않은 지중해를 다니던 상선들과 노선(櫓船)들도 포함이 되어있었다. 이 함대가 모두 리스본을 출항하는 데만 이틀이 걸렸고 500km를항해해 에스파냐 서북단의 피니스테르 곶까지 가는 데만 3주일이 걸렸다. 많은 수병과 선원들이 질병과 굶주림에 지쳐있었기에 메디나-시도니아는 인근의 코루나에 입항하여 휴식과 재보급을 받으려 하였으나 갑자기 폭풍이 몰아쳐 함대가 흩어져 버리는 바람에 함대소속의 정찰선들이 비스케이만(灣) 전역에 걸쳐 흩어진 함선들을 다시 모으는 데만 1개월이 걸렸다. 심지어 잉글랜드 서남단 콘월인근의 실리(Scilly) 제도까지 밀려간 배들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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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파냐의 무적함대.



에스파냐의 무적함대가 잉글랜드를 향하여 오는 동안 잉글랜드 함대는 잉글랜드 서남부 플리머스에 정박하고 무적함대의 출현을 기다렸다. 잉글랜드 함대의 수장은 항해 경험은 있지만 전투경험이 많다고 할 수는 없는 노팅엄 백작 찰스 하워드였다. 다행히도 그의 휘하에는 항해와 해전에 있어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프랜시스 드레이크가 있었다. 드레이크는 하워드에게 무적함대를 마냥 기다릴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공략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여 잉글랜드 함대는 플리머스를 떠나게 되었다. 그러나 때마침 강하게 남풍이 불어 북상하고 있는 무적함대에 유리하고 잉글랜드 함대에 오히려 불리하였다. 하워드는 혹시라도 무적함대를 보지 못하고 놓치지 않을까 노심초사하였다. 이 때문에 원래 코루나까지 항해하여 무적함대를 공격하려던 잉글랜드 함대는 결국 무적함대를 요격하려는 시도를 중단하고 다시 플리머스로 복귀하였다. 이때 잉글랜드 함대는 34척의 군선과 사략선/무장상선 164척을 합하여 197척이었지만 대부분은 영국해협 곳곳에 흩어져 있어 전력의 집중을 이루지는 못하고 있었다.



영국해협의 무적함대



북상하던 무적함대가 잉글랜드 서남단 랜스앤드(Land’s End) 인근 실리제도에 도착한 것은 1588년 7월 19일이었다. 사실 펠리페 2세는 작전계획에서 메디나-시도니아에게 파르마 공작의 병력을 잉글랜드로 상륙하는 것을 도울 것을 명령하였지만 정확히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지는 명시하지 않았다. 메디나-시도니아는 펠리페의 명령을, 무적함대를 이끌고 잉글랜드 남부해안을 따라 항해하며 잉글랜드 동남단 마르게이트(Margate Point)에서 파르마의 상륙정들과 만나 파르마군의 상륙을 도와주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파르마는무적함대가 잉글랜드와 네덜란드의 함선들을 견제하는 것까지는 메디나-시도니아와 생각을 같이 하고 있었지만, 전투 이후에는무적함대가 네덜란드 해안까지 접근하여 상륙정들을 됭케르크에서 잉글랜드 해안까지 엄호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어 에스파냐의 육해군 사령관들간에 관점의 차이가 존재하고 있었다. 사실 펠리페의 명령을 보다 충실히 이행한 것은 메디나-시도니아였지만 펠리페의 명령서에는 파르마의 상륙군이 어떻게 마르게이트까지 가야 하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사안이 빠져있었다. 어찌되었건 에스파냐의 작전계획은 두 가지의 중대한 실책을 범하고 있었다. 첫 번째는 잉글랜드 해군 못지않게 네덜란드 해군도 그 전력이 만만치 않았다는 것이다. 플랑드르와 네덜란드 해안에는 약 67척의 네덜란드 군선이 오가면서 에스파냐군을 괴롭히고 있었는데 네덜란드 해군과 잉글랜드 해군이 연합작전이라도 편다면 아무리 강력한 무적함대라도 곤란을 겪을 수가 있었다. 만약 파르마가 네덜란드를 떠날 때 무적함대가 조금이라도 늦게 되면 에스파냐 상륙군은 네덜란드 군선들의 공격에 모두 물귀신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무적함대가 네덜란드 해안에 접근하거나 그 항구에 정박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었는데 이것이 바로 펠리페의 작전의 두 번째 문제였다. 네덜란드 해안은 수심이 특히 얕은데다가 크고 작은 모래톱이 해안을 가로막고 있어 무적함대의 커다란 함선들이 접근할 수가 없었다. 아울러 네덜란드 해안을 잘 아는 항해사조차 없어 네덜란드 해안에의 접근은 불가능해 보였다.

한편 7월 19일, 잉글랜드 군선 골든 하인드號의 선장 토머스 플레밍이 순찰 중 무적함대를 멀리에서 발견하였고 그는 발견 즉시 플리머츠로 돌아가 공놀이를 하고 있던 부사령관 드레이크에게 적이 도래하였음을 알렸다. 드레이크는 즉시 하워드에게 무적함대를 추격할 것을 요청하였고 그날 저녁 썰물이 되자마자 하워드는 여섯 척의 함선을 이끌고 포구를 나섰다. 그 다음날에는 무적함대의 도착을 통보 받은 약 30척의 잉글랜드 군선이 그 뒤를 따랐다. 한편 육지의 잉글랜드 보초병들도 무적함대를 발견하였고 그들은 즉시 봉화를 올려 잉글랜드에 대한 위협을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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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 함대의 사령관, 찰스 하워드 (노팅엄 백작)



무적함대 사령관인 메디나-시도니아는 잉글랜드 남부해안을 따라 항해하면서 계속 연락선을 네덜란드를 보내어 파르마가 언제 올 것인지를 물었지만 파르마는 속시원한 대답을 하지 않았다. 펠리페의 명령서에는 무적함대가 잉글랜드 남부해안에 정박하거나 해안 마을들을 습격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적당히 닻을 내려 쉴 수도 없었다. 아울러 전투함들이 보급품을 적재하고 있는 상선들을 둘러싸고 호위하는 진형을 유지하여야 했기 때문에 수병들의 피로도는 급증하였다. 무적함대를 요격하러 나선 잉글랜드 함대는 플리머스 남쪽 에디스톤 암초 근처에서 무적함대와 조우하였다. 그러나 잉글랜드 함대는 보다 구경이 크고 강력한 함포를 지닌 무적함대와 정면충돌하기 보다는 잉글랜드의 함포가 보다 가볍고 사정거리가 긴 점을 이용하여 무적함대 함선들을 장거리에서 하나씩 사격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잉글랜드 함대가 너무 멀리서 사격하였기에 무적함대가 입은 피해는 거의 없었다. 잉글랜드 함대의 포격보다는 진형을 유지하기에 급급하던 무적함대 내의 사고에 의한 피해가 더 많았다. 안달루시아 선단의 기함인 누에스트라 델-로자리오號는 다른 함선과 충돌하면서 심각한 피해를 입어 승무원들이 배를 버리고 전원 이함(離艦)할 수 밖에 없었고 또 다른 군선인 산살바도르號에서는 화약이 폭발하는 사고가 발생하여 살아남은 승무원들이 사상자들을 내버려두고 배를 버렸다. 이러한 사고는 잉글랜드 함대와의 전투와 겹쳐 무적함대의 피해를 가중시켰다.

잉글랜드 함선들의 추격을 받으면서 항해하던 무적함대는 포틀랜드섬 인근에서 바람의 방향이 바뀌자 추격하던 잉글랜드 함대에게 역습을 가했다. 그러나 잉글랜드 함선들은 우수한 기동력을 이용하여 에스파냐 함대의 접근을 허락하지 않았고 양측 모두 의미없는 포격을 주고 받았다. 이 전투는 무승부로 끝났고 메디나-시도니아의 관점에서 마르게이트에서 파르마를 기다리라는 펠리페의 명령이 있었지만 파르마가 나타난다는 보장이 없는 상태에서 마르게이트로 가는 것은 의미가 없어보였다. 결국 메디나-시도니아는 참모들의 조언을 받아들여 네덜란드로 향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앞서 말한 모래언덕에 배가 걸리는 위험을 감수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플랑드르 해안의 칼레 항구로 들어가기로 하였다. 무적함대는 방향을 바꾸어 칼레로 향하였고 7월 27일에 칼레에 도착하였다.



그레이브라인 해전과 무적함대의 참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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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파냐 무적함대의 경로.



칼레에 도착한 무적함대 지휘관들은 파르마 공작이 준비를 제대로 하고 있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작전입안 때의 적극성과는 달리 네덜란드와 잉글랜드 주둔군을 둘 다 상대하고 있는 파르마는 그리 많은 병력을 떼어주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파르마와 메디나-시도니아간의 논쟁이 계속되고 있는 동안 무적함대는 잉글랜드 함선들의 공격을 막기 위하여 밀집진형으로 정박하고 있었다. 잉글랜드에서는 밀집된 무적함대를 향하여 8척의 화공선을 내려보냈다. 에스파냐인들도 바보는 아니어서 화공선에 대비하여 항구 바깥에 방어선박을 포진시켰으나 불과 1척만 잉글랜드 화공선을 요격하여 밀어내는 데 성공하였다. 결국 나머지는 화공선들을 피하여 닻줄을 끊고 출항하는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무적함대는 잉글랜드 화공선들을 피하는 데는 성공하였지만 급하게 피하느라 대형이 엉망진창이었고 일부 선박은 서로 충돌하여 큰 피해를 입었다. 그리고 비록 화공선을 피하려면어쩔 수 없었지만,에스파냐 함선들이 닻줄을 끊으면서 이후 거친 브리튼 섬의 해안에서 배를 고정시킬 수 있는 수단이 없어지는 바람에피해가 가중되었다.

잉글랜드 함선들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바다로 나온 무적함대가 재결집하기 전에 공격을 가하였다. 그레이브라인 전투라고 알려진 싸움에서 양함대는 보다 근거리에서 포격전을 벌였고 전투를 벌인 잉글랜드 함대(500명)와 무적함대(1400명) 양쪽에 사상자가 발생하였으나 잉글랜드 함선들은 단 1척도 침몰하지 않은데 비하여 무적함대에서는 두 척이 격침되고 세 척이 나포 당했다. 나머지 함선들도 크고 작은 피해를 입은 상태에서 거친 북해로 물러나올 수밖에 없었다. 잉글랜드 함선들이 포탄에 격중 당하고도 침몰하지 않은 이유 중 하나는 에스파냐가 급하게 준비를 와중에서 포탄을 부실하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포탄을 만들면서 너무 급히 식혀 철포탄의 경도(硬度)가 너무 높아 발사할 때, 또는 적함의 단단한 부분에 부딪히면서 오히려 부서졌던 것이다.

이제 북해로 밀려난 무적함대가 잉글랜드와 네덜란드 군선들을 뚫고 파르마의 육군과 랑데부하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무적함대에게 남은 선택은 브리튼 섬을 돌아 에스파냐로 돌아가는 것뿐이었다. 잉글랜드 함대가 적극적으로 추격하지는 않았지만 에스파냐 함대는 잉글랜드 함대와의 전투에서 보다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를 돌아 에스파냐로 돌아오는 과정에서 더 많은 피해를 입었다. 어떤 배는 잉글랜드 함대와의 전투에서 입은 피해 때문에 거친 바다에서의 항해를 견디지 못하고 침수되어 침몰하는가 하면 엘-그란 그리핀(El Gran Grifin)호나 산 마르코스(San Marcos)호처럼 해안에서 암초에 부딪혀 침몰하고 산 에스테반(San Esteban)호의 경우는 아일랜드 해안에서 표류하여 잉글랜드군에 나포되고 승무원 전원이 교수형을 당하였다. 당시의 에스파냐 기록에 의하면 1588년 9월 11일에 무적함대가 패잔병꼴로 코루나항에 도착하였을 때 무적함대는 65척으로 줄어있었다. 다시 말하자면 잉글랜드 상륙은 시도도 못해보고 67척이나 되는 배와 수병, 그리고 병사들이 사라진 것이다. 하루에 무려 6만 듀카트의 돈을 잡아먹고 당시 사람들이 “세상이 생겨난 후로 가장 컸던 함대”라고 불린 무적함대의 잉글랜드 공격은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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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8년 8월, 잉글랜드와 대적하고 있는 에스파냐의 무적 함대.







김성남 | 안보·전쟁사 전문가
글쓴이 김성남은 전쟁이 인간 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관심을 가지고 이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미국 UC 버클리 동양학과를 졸업한 후 연세대학교 국제대학원에서 국제학 석사를 받고 한국학중앙연구원 정치학과에 진학하여 정치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주요 저서로는 [전쟁으로 보는 한국사], [전쟁으로 보는 삼국지], [전쟁 세계사] 등이 있으며 공저로 [4세대 전쟁]이, 역서로 [원시전쟁: 평화로움으로 조작된 인간의 원초적인 역사]가 있다.


발행2012.0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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