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역사 임진왜란 -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망상, 혹은 전쟁 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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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01회 작성일 16-02-07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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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의3대 대첩 중 하나인한산대첩을 그린 민족기록화. <출처: 전쟁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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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표


임진왜란 개요

전쟁주체


조선, 명 vs 일본

전쟁시기


1592~1598

전쟁터


한반도

주요전투


탄금대 전투, 평양 전투, 행주산성 전투, 진주성 전투, 한산해전, 명량해전, 노량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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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조-일 전쟁’, ‘임진전쟁’, 또는 ‘7년 전쟁’이라고 간혹 부르기도 하지만, 한국인들은 대부분 전근대적인 어법을 써서 이 전쟁을 ‘왜놈들이 일으킨 난리’라고 부른다. 그 치열함과 참혹함에서 한국전쟁에 필적하고, 일본에게 말도 못할 피해를 입었다는 점에서 일제강점과 짝을 이루는 역사적 대사건이기에, 감정을 빼고 객관적인 ‘전쟁’의 하나로 이를 취급해 부르기가 왠지 싫기 때문이다.

한편 일본 쪽에서는 임진년의 침공을 ‘분로쿠의 역(文祿の役)’으로, 정유재란까지 합쳐서는 ‘분로쿠-케이조의 역(文祿慶長の役)’이라고 부른다. 임진년과 정유년에 해당하는 일본의 연호를 써서, 이를 자신들이 성취한 ‘큰 사업(役)’의 하나로 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분명 전쟁의 잘잘못과 진영을 떠나 개인이 겪어야 했던 엄청난 희생을 논외로, 국가적으로 임진왜란은 조선, 그리고 명나라에게는 국세가 기우는 위기를, 일본에게는 새롭게 발전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문치주의’와 ‘천하포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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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의 필적.



1567년, 이 해에 조선에서는 새롭게 선조가 즉위했다. 그의 즉위는 오랜 훈척정치의 폐단을 마감하고, 사대부의, 사대부에 의한 정치가 본격적으로 펼쳐지는 시대를 열었다. 문정왕후와 윤원형의 파행적인 독단에 질려 재야에 묻혀 있던 이황이 조정에 복귀하고, 기대승, 이이 같은 뛰어난 학자들이 앞 다투어 나타남으로써 바야흐로 조선은 문치주의(文治主義)의 봄을 맞는 듯했다.

바로 그 해, 바다 건너 일본에서는 오다 노부나가가 본격적으로 세력을 확대하며 ‘천하포무(天下布武)’를 내세웠다. 압도적인 무력으로 오랜 전국시대를 마감하고, 일본을 하나로 통일하겠다는 뜻이었다. 그는 이듬해에 교토에 입성해 ‘노부나가 정권’을 수립하고, 가이(현재 야마나시 현)의 풍운아 다케다 신겐, 에치고(현재 니가타 현)의 용 우에스기 겐신, 혼간지(本願寺) 불교 세력 등과 치열한 항쟁을 거듭한 끝에 1580년 즈음에는 일본 통일을 거의 성취한다. 그러나 1582년에 아케치 미츠히데의 배반으로 혼노지(本能寺)에서 오다 노부나가가 자결하는 사건이 일어났으며, 이로써 아케치를 토벌한 오다의 또 다른 가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천하포무의 꿈을 계승하는 새로운 실권자로 떠오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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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시대의 전쟁도. 1561년에 다케다 신겐과 우에스기 겐신이 격돌하고 있다.



본명이 기노시타 토키치로라고 하며, 오와리의 보잘 것 없는 집안에서 태어난 히데요시는 오다 노부나가의 급사(고모노)로 출발했다. 하지만차차 공을 세워 29세에는 성주의 지위에 올랐으며, 이때부터는 하시바 히데요시라는 이름을 쓰기 시작했다. 이후 아케치를 토벌하고, 오다의 가신들 중 자신에게 적대하는 시바타 가쓰이에를 물리치고, 오다의 동맹자였던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굴복시킨 다음 1585년에는 간바쿠(關白), 1586년에는 태정대신(太政大臣)의 직함을 얻으며 일본 일인자의 자리를 굳혀갔다. 이때부터는 일왕에게 하사받은 도요토미라는 성을 써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되었으며, 1587년에는 마침내 사츠마의 시마즈 요시히사를 굴복시킨 다음 '병농분리령'을 내려 중앙집권을 강화하고, 1590년에는 간토의 호조 우지마사를 마지막으로 모든 반대자들을 무릎 꿇리고 일본을 통일, 120년 동안의 ‘전국시대’를 마감하고 ‘모모야마 시대’를 열게 된다.

조선에서는 당쟁이 격화되면서 서인이 정여립 사건을 기화로 동인을 무섭게 박해하는 기축옥사가 일어나고(1589), 명나라에서는 명신 장거정이 죽은 뒤 만력제가 업무에서 손을 떼고 나라가 멋대로 돌아가도록 방치하는 ‘태정(怠政)’이 시작되며(1586), 만주에서는 누르하치건주여진을 통일하던(1588) 무렵이었다.



히데요시의 과대망상인가? 치밀한 계산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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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요토미 히데요시. 일본인에게는 천추의 영웅. 한국인에게는 만세의 흉적이다.



이리하여 겨우 피와 불과 연기가 끊이지 않았던 전국시대의 혼란이 멎고 안정되나 했는데, 히데요시는 곧바로 “조선을 거쳐 명나라를 정복하고 동양에 군림한다”는, 포부라기보다는 망상에 가까운 계획을 세우고 밀어붙였다. 왜 그랬을까?

일본에서 조선과 중국을 정복한다는 이야기가 나온 것은 사실 오다 노부나가 시절부터였다. 그러나 그것은 숙종 때의 ‘북벌’이나 이승만 시절의 ‘북진통일’처럼 실현 가능성은 염두에 두지 않은 말잔치의 성격이 짙었다. 그러나 히데요시는 일본 통일 대업이 성공하는 모습을 보면서 대외침략 계획도 실제적으로 검토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아직 오다를 섬기던 1577년에 처음 조선과 명나라로 출병하겠다고 밝혔고, 집권 후에는 1586년, 일본에 와 있던 예수회 신부에게 명나라를 손에 넣을 것이라고 밝힌다. 이 무렵 대마도주와 그의 측근들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그런 구상이 언급된다. 그리고 1591년에 어렵게 얻은 아들인 쓰루마쓰가 병사하자, 간바쿠 직위를 양자인 히데츠구에게 넘겨주고는 전국의 다이묘(大名)들에게 조선 출병을 지시함으로써 이 구상을 현실화한다.

히데요시의 공명심 내지 야욕이 임진왜란 발발의 원인이라는 설은 전부터 가장 많이 제기되었다. 당시 일본에 거주하며 히데요시를 옆에서 지켜보았던 선교사 그레고리 드 세스페데스, 루이스 프로이스 등은 “그는 자식의 죽음을 슬퍼한 나머지 조카 히데츠구에게 천하를 물려주고, 강대한 군대를 이끌고 중국으로 건너가 그 땅을 정복하는 과업에 여생을 바치기로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그런 위대한 업적을 세운 최초의 일본 지도자로 자신의 이름을 불멸케 하려는 뜻이었다”고 보았다. 히데요시 본인이 “일찍이 일본을 제패한 사람은 여럿이지만 대륙까지 손에 넣은 사람은 없다”며 자신은 아무도 이루지 못한 명성을 얻고야 말겠다고 부하들에게 여러 차례 언급했고, 조선 출병에 앞서 다이묘들에게 “나는 이 더 없는 명예를 얻기 위해 이미 손에 넣은 명예와 쾌락을 모두 포기했다. 너희가 이 계획에 동참한다면 설령 목숨을 잃더라도 나의 이름과 함께 영원히 남는 이름을 얻게 될 것이다”라고 연설하기도 했다. 또한 그는 고니시 유키나가의 군대가 한양을 점령했다는 소식에 기뻐하며 그에게 편지를 보내 “그대를 명나라의 간바쿠로 삼는다. 이제 명을 정복하면 지금의 천황을 북경으로 옮길 것이다. 일본 천황 자리는 지금의 황태자나 도시히토 친왕에게 주고, 조선 왕으로는 기후의 재상인 하시바 히데카츠를 앉히리라”고 호언하고 있는 것을 보면 히데요시가 정말로 조선뿐 아니라 명나라까지, 나아가 동아시아 전체를 정복할 수 있다고 믿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는 출병에 앞서 조선, 류큐, 필리핀에 두루 사신을 보내 자신에게 복종하고 조공을 바칠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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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니시 유키나가. 임진왜란 당시 침략의 선봉에 선 다이묘들은 정권에 불복할 가능성이 가장 높은 고니시 유키나가와 같은 서부의 다이묘들이었다.



하지만 단순히 히데요시 개인의 야망이 아닌, 보다 넓고 복잡한 차원에서 전쟁 원인을 찾으려는 시각도 있다. 가령 ‘경제원인론’에 따르면 히데요시 정권은 기나이(畿內) 지역의 상인들의 후원에 기대고 있었으며, 그들은 명나라에서 시행 중이던 무역 금지(海禁) 조치를 깨고 포르투갈 상인들 대신 동아시아 무역에서 우위를 차기하기를 바랬다. 그래서 출병을 결행했다고 하며, 그것은 일본이 전쟁 도중 명나라와 교섭하며 무역의 재개를 요청한 사실에서 뒷받침된다고 한다.

또 ‘정치원인론’에서는 오랜 전국시대를 끝내긴 했어도 여전히 독립지향적인 다이묘들을 확실히 통제하고, 그 힘을 어느 정도 약화시켜야 했던 정권의 입장에 주목한다.옛날 원나라의 일본 침공은 최근 지배권에 편입된 남송과 고려의 군사력을 소모시키기 위한 계산에서 나온 것이라는 분석이 있는데, 그것과 마찬가지였다는 것이다. 실제로 조선 침략의 선봉에 선 다이묘들은 정권에 불복할 가능성이 가장 높은 고니시 유키나가(독실한 천주교도), 시마즈 요시히사(통일 과정에서 마지막까지 저항했었다. 조선에는 그 후계자인 시마즈 히사야스가 출정했다가 사망했다) 등의 서부 다이묘들이었으며, 히데요시는 전쟁 수행에 소극적이었던 다이묘들의 영지를 빼앗아 가신들에게 주기도 했다.

결국 히데요시 개인의 의욕에 정치적, 경제적 상황이 합쳐져 임진왜란이 결정된 것으로 여겨진다. 히데요시가 가지고 있던 특별한 입장도 고려될 수 있다. 앞선 미나모토, 아시카가 가문과 이후의 도쿠가와 가문은 모두 ‘세이이타이쇼군(征夷大將軍)’, 즉 일왕을 대신해 국토를 수호하는 총사령관의 명목으로 막부를 열고 다이묘들을 군령으로 다스렸다. 하지만 히데요시는 미천한 신분이었기에 쇼군이 될 수 없었으며, 궁정의 직책인 간바쿠, 태정대신 등의 직함을 내세울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실권 차원에서는 대장이나 대신이나 차이가 없어 보이지만, 오랜 법도와 관행상 쇼군이 아닌 이상 다이묘들에게 직접적인 명령을 내리는 데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여러 다이묘들이 히데요시의 위세에 밀려 조선으로 건너가 싸우기는 했지만 일일이 작전 지시는 받지 않았으며, 심지어 평양성 전투 후의 총퇴각도 본국의 훈령을 기다리지 않고 독자적 판단으로 실행했음을 보면 히데요시의 권력 기반은 완벽하지 않았다. 그 자신은 몰라도 그의 후계자들에게는 언제 모반이 일어날지 모르는 형편에서, 히데요시는 조선-명 정벌 같은 거창한 사업을 벌여 가장 불온한 자들을 제거하는 한편 해외 영지를 나눠줌으로써 가신 집단을 늘리고, 도요토미 가문에 역대 막부를 능가하는 권위를 덧붙이려고 했을 수 있다. 그럼 점에서 만약 오다 노부나가가 혼노지에서 살아남아 막부를 세웠더라면 과연 조선 출병이 있었을지는 의문이다.



참고문헌 : [조선왕조실록]; 이순신, [난중일기]; 조경남, [난중잡록]; 신경, [재조번방지]; 유성룡, [징비록]; 조원래, [임진왜란사 연구의 새로운 관점], 아세아문화사, 2011; 한일문화교류기금·동북아역사재단 편, [임진왜란과 동아시아세계의 변동], 경인문화사, 2010; 한일관계사연구논집 편찬위원회 편, [동아시아 세계와 임진왜란], 경인문화사, 2010; 최관, [일본과 임진왜란], 고려대학교출판부, 2003; 민승기, [조선의 무기와 갑옷], 가람기획, 2004; 이순신역사연구회, [이순신과 임진왜란], 비봉출판사, 2005; 황원갑, [부활하는 이순신], 마야, 2006; 송복, [서애 유성룡, 위대한 만남], 지식마당, 2007; 버나드 몽고메리, [전쟁의 역사], 책세상, 2004; 루이스 프로이스, 국립진주박물관 편, [프로이스의 <일본사>를 통해 다시 보는 임진왜란과 도요토미 히데요시], 부키, 2003; 中野等, [文祿ㆍ慶長の役], 吉川弘文館, 2008; 기타지마 만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 경인문화사, 2008; 최두환, [임진왜란 시기 조명연합군 연구], 경상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0; 김만호, “임진왜란기 일본군의 함경도 점령과 지역민의 동향”, 역사학연구, 제38집, 2010. 2; 민덕기, “임진왜란의 '전후처리'와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변동”, 한일관계사연구, 제36집, 2010.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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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규진 | 서울교육대학교 교수/역사저술가
글쓴이 함규진은 여러 방면의 지적 흐름에 관심이 많다. 정치학을 전공하여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한편, 주로 역사와 관련된 책을 여러 권 썼고, 인물이나 사상에 대한 번역서도 많이 냈다. 동양과 서양, 전통과 현대, 보수와 진보 등 서로 대립되는 듯한 입장 사이에 길을 내고 함께 살아갈 집을 짓는 것이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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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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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2012.0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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