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역사 불안한 평화, 그리고 협잡 - 임진왜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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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73회 작성일 16-02-07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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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표


임진왜란 개요

전쟁주체


조선, 명 vs 일본

전쟁시기


1592~1598

전쟁터


한반도

주요전투


탄금대 전투, 평양 전투, 행주산성 전투, 진주성 전투, 한산해전, 명량해전, 노량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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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채에 앉아 서로 노려보기



1593년 말에서 1596년 말까지 3년 동안은 두 진영 사이에 특별히 큰 충돌이 일어나지 않았던 시기이다. 하지만 경남 해안지대에는 일본군이 남아 있었고, 그들은 울산, 서생포, 동래, 구포, 마산 등등 수십 곳에 ‘왜성’을 쌓고 혹시라도 있을 공격에 대비했다. 조선 쪽에서도 성을 쌓았다. 피폐될 대로 피폐된 조선군은 일본군이 다시 전면 침공해 온다면 청야전술로 논밭을 불사른 다음(덕분에 백성은 더욱 피폐해겠지만), 산성으로 군민이 들어가 농성하는 식으로 싸울 수밖에 없다고 여겼다. 그래서 평안도에서 병력 모집과 훈련에 돋보이는 성과를 내었던 이원익이 우의정 겸 4도 도체찰사가 되어 금오산성, 용기산성, 부산(富山)산성, 공산산성, 황석산성, 화왕산성 등을 새로 쌓거나 개축했다. 한편 행주산성 전투의 주인공 권율은 도원수가 되어 육전 직접 지휘 책임을 맡았다.

수군은 삼도 수군통제사 이순신이 총괄했으나, 전쟁에다 전염병이 겹치며 수군에 충당할 인원이 현저하게 줄어 곤란을 겪었다. 식량 사정도 나빠서 그나마 병영에 있는 병사들도 하루 몇 숟가락의 밥이 고작이었으니 싸울 기력이 없었다. 이순신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둔전을 일구어 직접 식량을 조달하고, 무과를 독자적으로 시행해 무관들을 뽑았다. 또한 병사가 도망치면 그 친족을 강제로 끌어와 전장에 내보내는 방법을 썼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그런 연좌법은 국법에도 없고 너무 가혹하다 여겨 금지시켰는데, 이후로는 병력 충원이 더욱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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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선의 그림. <출처: (CC)PHGCOM at Wikipedia.org>



선조는 일본에 히데요시가, 남해안에 일본군이 아직도 버티고 있는 상황이 못내 불안한 나머지 ‘우리가 선제공격을 하면 어떤가’ 하고 비변사와 장수들에게 계속 탐문했다. 남해안의 근거지를 공략하거나 심지어 일본의 나고야로 쳐들어가는 방안까지 논의되었으나, 조선의 힘으로는 무리일뿐이었다.



강화교섭의 희비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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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력제. 명나라 황제로 가장 오래 재위했으나 그 후반기는 명왕조의 몰락을 재촉했다.



그러는 사이에 명과 일본 사이에는 강화 교섭이 이어지고 있었다. 일본은 평양에서 패배하고 남쪽으로 퇴각하던 시점에서 명나라 정복 목표는 포기할 수밖에 없음을 인식했던 것 같다. 1년 동안의 끊임없는 전투와 추위, 질병 등으로 일본이 투입한 병력은 절반 가량이 소모되어 있었고, 조선과의 협력이 불가능한 이상 대륙 공략은 아무리 과대망상의 히데요시라 해도 가망이 없음을 알 수밖에 없었다. 이제 문제는 얼마나 명과 조선에게서 많은 양보를 얻고 전쟁을 끝내느냐였다.

한편 명나라의 사정도 좋지 않았다. 1594년에는 먀오족(苗族)이 사천(四川)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며, 누르하치의 건주여진은 물론 몽골, 티베트 등의 움직임도 심상치 않아 변방마다 불안하지 않은 곳이 없었다. 이후 1598년에는 요동을 침공한 타타르를 토벌하다가 이여송이 전사하기도 했다. 여기에 만력제의 ‘태정’은 계속되어 국가재정이 파탄에 이르고 관료들의 기강이 무너졌으며, 1596년부터는 전국의 광산에 환관들이 파견되어 가혹한 세금과 무자비한 착취를 가함으로써(광세의 화) 막 태동하던 상업자본이 된서리를 맞고 민생이 한층 불안해졌다. 이쯤 되니 명나라로서는 어떻게든 왜란이라도 빨리 마무리짓고 조선에서 손을 떼고 싶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처럼 양 측이 원하던 강화 회담은 웃지 못할 ‘협잡’의 연속이었다. 전쟁 이전과 마찬가지로 일본의 중국 인식과 중국의 일본 인식이 너무나 비현실적이면서 서로 동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심유경이나 고니시 유키나가처럼 중간에서 강화를 성사시키려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답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중간에서 적당히 내용을 조작하여 자신들의 주군을 속이려고 했다. 먼저 1593년 5월, 고니시는 명군 참장인 사용재, 유격장 서일관과 함께 나고야로 가서 히데요시를 만났다. 사용재와 서일관을 ‘명나라 사신’으로 위장시킨 것이었다. 히데요시는 그들에게 이른바 ‘화건칠조(和件七條)’를 내밀었는데, 강화하는 대신 명나라의 황녀를 일왕의 후궁으로 보내고, 명-일본간 무역을 재개하며, 조선 8도 중 4도를 일본이 차지하고, 조선의 왕자와 대신을 인질로 일본에 보낸다는 등이었다. 명나라는 체면상으로라도 들어줄 내용이 아니었고, 조선은 길길이 뛸 노릇이었다. 이를 곧이곧대로 명황제에게 올릴 수 없었던 심유경은 고니시의 가신인 나이토 조안을 ‘일본 사신’으로 위장시키고는 무역 재개와 히데요시의 책봉, 두 가지만 요구조건으로 들고 북경으로 보냈다. 그리고 히데요시의 오만불손한 화건칠조 대신 ‘관백항표(關白降表)’, 즉 그 두 요구가 허용되는 한 일본은 명나라에 항복한다는 내용의 표문을 만력제에게 올렸다. 1594년 12월, 만력제는 나이토 조안을 접견하고는 히데요시를 일본 왕으로 책봉하는 것은 허락하지만 무역은 허락하지 않으며, 점령한 조선 땅에서 물러나고 앞으로 영구히 조선을 침략하지 말아야 한다는 최종 입장을 내놓았다. 이번에는 히데요시가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전통의 일왕이 버젓이 있는 터에 자신이 따로 중국이 책봉한 일왕이 되어봤자 분란만 일어날 뿐이고, 겨우 그따위 것을 얻자고 전쟁을 벌였을 턱이 없었으니 말이다. 다시금 머리를 싸맨 심유경과 고니시는 일단 히데요시에게 명나라가 화건칠조를 받아들였다고 거짓 보고했고, 히데요시는 기뻐하며 대부분의 병력을 조선에서 철수시켰다. 한편 그러는 사이에 가토 기요마사도 나름대로 조선과의 강화 협상을 벌였는데, 유정(사명당)이 대표로 나섰지만 이야기가 겉돌 뿐이라 1595년 3월까지 네 차례나 만났으나 성과는 없었다.

마침내 올 것이 왔다. 명나라가 ‘히데요시의 항복을 받아들이고’ 그를 일본 왕에 책봉하기 위한 진짜 사신을 보낸 것이다. 난처해진 심유경과 고니시가 그들을 부산포에 묶어 두고 시간을 끌자, 정사 이종성은 그만 겁을 먹고 홀로 달아나 명나라로 돌아가 버렸다. 점점 더 곤란해진 심유경은 자신이 부사를 맡고, 부사 양방형을 정사로 올린 다음 마침내 바다를 건너갔다. 두 달 뒤에는 명나라의 압력에 못이겨 조선도 황신박홍장을 일본에 파견했다.

1596년 9월 2일, 히데요시는 의기양양한 자세로 명나라 사신을 접견했다. 조선 통신사의 접견은 거부되었는데, 자신이 요구한 7개조 중 ‘조선의 왕자와 대신을 볼모로 보냄’이 지켜지지 않았으므로 괘씸하여 만나 주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곧 나머지 조항도 전혀 지켜지지 않았음을, 아니 애당초 명나라에 통보도 제대로 되지 않았음을 알게 된다. 노발대발한 그는 가신과 다이묘들에게 다시 출병할 것을 명령했다. 정유재란이었다.



참고문헌 : [조선왕조실록]; 이순신, [난중일기]; 조경남, [난중잡록]; 신경, [재조번방지]; 유성룡, [징비록]; 조원래, [임진왜란사 연구의 새로운 관점], 아세아문화사, 2011; 한일문화교류기금·동북아역사재단 편, [임진왜란과 동아시아세계의 변동], 경인문화사, 2010; 한일관계사연구논집 편찬위원회 편, [동아시아 세계와 임진왜란], 경인문화사, 2010; 최관, [일본과 임진왜란], 고려대학교출판부, 2003; 민승기, [조선의 무기와 갑옷], 가람기획, 2004; 이순신역사연구회, [이순신과 임진왜란], 비봉출판사, 2005; 황원갑, [부활하는 이순신], 마야, 2006; 송복, [서애 유성룡, 위대한 만남], 지식마당, 2007; 버나드 몽고메리, [전쟁의 역사], 책세상, 2004; 루이스 프로이스, 국립진주박물관 편, [프로이스의 <일본사>를 통해 다시 보는 임진왜란과 도요토미 히데요시], 부키, 2003; 中野等, [文祿ㆍ慶長の役], 吉川弘文館, 2008; 기타지마 만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 경인문화사, 2008; 최두환, [임진왜란 시기 조명연합군 연구], 경상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0; 김만호, “임진왜란기 일본군의 함경도 점령과 지역민의 동향”, 역사학연구, 제38집, 2010. 2; 민덕기, “임진왜란의 '전후처리'와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변동”, 한일관계사연구, 제36집, 2010.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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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규진 | 서울교육대학교 교수/역사저술가
글쓴이 함규진은 여러 방면의 지적 흐름에 관심이 많다. 정치학을 전공하여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한편, 주로 역사와 관련된 책을 여러 권 썼고, 인물이나 사상에 대한 번역서도 많이 냈다. 동양과 서양, 전통과 현대, 보수와 진보 등 서로 대립되는 듯한 입장 사이에 길을 내고 함께 살아갈 집을 짓는 것이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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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2012.0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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