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역사 7대한과 전쟁의 발발 - 명청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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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380회 작성일 16-02-07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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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표


명청전쟁 개요

전쟁주체


명 vs 후금(청)

전쟁시기


1618~1662

전쟁터


랴오둥 반도, 중국 내륙

주요전투


사르후 전투, 영원성 전투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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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의 눈을 가린 누르하치의 이중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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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 신종 만력제. 즉위 초반에는 의욕적인 모습을 보였으나 이후 정치에 대한 관심을 잃으면서 환관들의 득세와 명 말기의 혼란을 초래한다.



대야망을 품고 있던 누르하치였지만 그는 대원을 찾으려고 몸살이 난 몽골의 왕공(王公)들과는 달리 서두르지 않았다. 누르하치는 이미 1587년에 퍼아라[佛阿拉]라 불리는성채와 궁을 짓고 국도(國都)로서의 기틀을 마련하였지만 명나라의 신경을 크게 거스르지 않았고 정기적으로 조공도 바치면서 충성스런 오랑캐 신하로서 행세하였다. 1589년에 건주여진을 통일한 후 건주인들 사이에서는 임금을 칭하였지만 앞서 말한대로 1593년에는 명 왕조로부터 용호장군의 작위를 받는다. 그 와중에서도 여진 내부를 자신의 의도대로 다지는데 게으르지 않았다. 1599년의 만주문자 창제 역시 이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비롯된 것이다.

1601년에는 건주여진과 라이벌이었던 해서여진의 후룬 4부중 하다부까지 통합하면서 건주의 인구가 크게 늘게 되었고 이에 효과적으로 사회를 통제할 수 있는 체계를 만들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이에 누르하치는 여진족의 전통적인 수렵조직인 니루[牛菉]에 기반한 체제를 만들게 된다. 우선 기존의 니루 조직을 확대하여 300명을 하나의 니루로 편성하고 니루-에젠을 두어 각 니루를 통솔하게 하였다. 니루의 숫자가 늘어나자 유사시 군사동원과 작전의 효율을 기하기 위하여 구사[旗]라는 조직을 편성하고 이를 황홍람백(黃紅藍白)의 4색으로 나누었다. 이후 만주사회의 기본이 되는 팔기(八旗)의 태동이었다. 1603년에는 당시까지의 근거지였던 퍼아라를 떠나 허투알라[赫圖阿拉, 현재의 랴오닝성 신빈현] 지역을 새로운 중심지로 삼아 집단의 쇄신을 꾀하였다.

대국의 건설을 위한 기반을 다지고 있던 누르하치에게 있어 최악의 상황은 명 왕조가 알아채고 본격적인 견제, 또는 토벌을 하는 것이었는데 이를 방지하기 위해 명나라에 대한 조공에 열심이었다. 1590년에 부하 108명을 데리고 북경에 가서 명 신종 만력제(萬曆帝, 1563~1620)에게 조공한 후 3년마다 정기적으로 진공(進貢)하였다. 물론 중국의 조공제도란 것이 변방의 번국(藩國)들이 진공을 오면 천자의 체면상 진공한 것보다 많은 물건을 ‘선물’로 하사(下賜)해야 했다. 아울러 조공사신단을 따라온 상인들에게 장사할 기회도 허락하여 주었다. 누르하치는 많은 하사품과 함께 조공무역으로 얻는 이윤으로 여진사회의 경제를 성장시켰고 동시에 명 왕조의 내부를 돌아볼 수 있는 기회도 얻었다. 이러한 조공은 1611년, 기록에 따라서는 후금 건국 직전인 1615년까지 이어진다.

이러한 이중정책은 어디까지나 명 왕조의 눈을 가리기 위한 것이었다. 건주위와 하다부를 통합한 누르하치는 다른 부에 대한 통합작업에 나서 1607년에 해서의 후이화부, 그리고 1613년에는 우라부를 차례로 격파하고 통합시켰다. 이제 때가 무르익었다고 생각한 누르하치는 마침내 1616년, ‘칸’으로 등극하고 옛 금나라를 잇는다는 뜻에서 후금(後金)을 건국한다. 그리고 근거지인 허투알라를 정식으로 국도로 삼는다. 번신 신분을 벗어던지고 명 왕조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것이다. 이제 누르하치는 명 왕조의 눈치를 보지않고 여진전체의 통일에 나섰고 세 번에 걸쳐 동해여진을 정벌하여 자신의 왕권에 위협이 되는 세력을 제거하였다. 1618년에 이르러 숙적이던 해서여진의 예허부를 제외하고는 여진 전체가 누르하치의 손아귀에 들어오게 되었다.



7대한과 대명(對明)전쟁의 발발



1618년, 누르하치는 그 유명한 7대한을 하늘에 고하고 제사 지내면서 자신이 표면적으로 섬기는 명 왕조에 대하여 사실상의 선전포고를 한다. 그리고 곧바로 군사작전에 돌입하여 명나라 요동지방의 주요 성(城)중 하나인 푸순[撫順]성을 함락시킨다. 이어 7월에는 명나라의 요동의중요 요새인 청하보(淸河堡)를 공격하여 떨어뜨린다. 누르하치가 여진인들의 구심점으로 삼기 위하여 선포한 7대한은 다음과 같다.



1. 명나라에서 조부 기오창가와 타크시를 아무 이유없이 죽인 것
2. 명나라가 건주부는 차별하고 예허부와 하다부의 편의만 보아준 것
3. 명나라가 누르하치와 맺은 영토협상을 파기하고 여진을 침공하여 인민을 살해한 것
4. 명나라가 예허부에 원병을 보내 건주여진을 막으려고 한 것
5. 예허부가 같은 여진인으로서 명나라와 내통하여 그 앞잡이가 되었으며 누르하치의 약혼녀를 강제로 몽골인과 혼인시킨 것
6. 명나라가 누르하치의 영토인 차이허, 산차와 푸안을 강탈한 것
7. 명의 요동총독인 소백지(蕭伯芝)가 권한을 남용하여 건주여진을 비롯한 여진백성들을 마구 괴롭힌 것


비록 완전히 믿지는 않았지만 어느 정도 고분고분했던 누르하치에게 기선을 제압당한 명 왕조는 크게 동요하였다. 이에 즉시 누르하치를 토벌할 것을 선포하고 군병을 소집하였으며 임진왜란 당시 요동순무(遼東巡撫)였던 양호(楊鎬, ?~1629?)를 병부좌시랑겸우첨도어사요동경략(兵部左侍郞兼右僉都御史遼東經略)에 임명하여 토벌군의 수장으로 삼았다. 임명을 받은 양호는 광령에 도착하여 정벌준비에 착수하였고 1618년 8월에 황제로부터 상방검(尙方劍)을 받아 생사여탈권을 쥔 총사령관임을 확실히 하였다. 이후 보다 효과적인 준비를 위하여 요동으로 옮긴 양호는 맹장 두송(杜松)을 산해관총병에 임명하고 퇴임한 노장인 유정(劉綎)을 관전총병관에 임명하여 후방에서의 군량조달을 담당하게 하였다. 아울러 군비로 200만냥을 모으고 9월 17일에 조선국왕 광해군(光海君, 1575~1641)에게 서신을 보내 원조를 요청(사실은 강요)하였다. 이에 조선에서는 강홍립(姜弘立) 과 김응하(金應河) 휘하에 1만 3천의 병력을 파견한다. 양호는 누르하치에게도 서신을 보내어 항복과 함께 명 왕조에 다시 신속(臣屬)할 것을 요구하였지만 누르하치는 이러한 요구를 모두 거부하였다. 명나라 토벌군에게는 누르하치의 본거지인 허투알라로 진격하여 누르하치의 ‘반란’을 뿌리 뽑는 것 외에 다른 선택이 없었다.

누르하치 역시 명군과 건곤일척의 승부를 준비하고 있었다. 비록 여진을 거의 통일하고 건국하기는 하였지만 아직도 국력과 병력에서 절대적인 열세를 면할 수 없었다. 명군의 목표가 허투알라인 것이 분명해진만큼 명군이 허투알라로 진격할 때 거쳐야 하는 길목인 자이판과 사르후[薩爾滸, 싸얼후] 일대에서 군마에게 풀을 먹이고 자이판 중턱에는 요새를 축조하게 하였다.



사르후 전투



1619년 2월 21일, 양호는 요양(遼陽)성에서 출정식을 가지고 10만의 대군을 후금의 도성인 허투알라를 향해 진격시켰다. 명의 토벌군은 4개의 부대로 진격했는데 진군의 신속함을 위하여 부대를 나누었다가 누르하치군이 포착되면 재빨리 군을 합하여 집중공격한다는 ‘분진합격(分進合擊)’의 원리를 따른 것이다. 명 토벌군의 각 부대와 지휘관은 다음과 같다.



1. 서로군: 산해관총병관 두송
2. 북로군+예허부 증원병: 개원총병관 마림
3. 남로군: 요동총병관 이여백
4. 동로군+조선군 원병: 관전총병관 유정, 조선군 사령관 강홍립(김응하)


전령들을 통하여 명의 토벌군이 진격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누르하치는 이들이 예상대로 쟈이휘안과 사르후 지역으로 오자 보병 1만 5천, 기병 400기를 그 지역으로 보내어 복병(伏兵)으로 토벌군을 요격하려 하였다. 누르하치는 명의 토벌군이 여러 부대로 나뉘어 있다는 점에 착안, 이들의 상호구원을 차단하고 자신의 병력을 집중하여 한 부대씩 각개격파할 계획을 세웠다.

각개격파의 첫 제물이 된 것은 두송의 서로군이었다. 누르하치의 군은 무순을 고의로 비워두었고 3월 1일에 무순을 떠나 사르후산 입구 길림애(吉林崖) 절벽 인근에 도착하였다. 지형이 몹시 험한 곳이었고 쑤쯔허[蘇子河]와 훈허[渾河]가 만나는 곳이어서 싸우기에 좋지 않은 곳이었다. 두송의 부관들은 일단 야영을 할 것을 건의하였으나 두송은 갈길이 급하다며 갑옷도 벗어버리고 강을 건너기 시작하였다. 이에 그의 군이 뒤따랐고 이때 누르하치는 그의 군사들이 상류에 만들어놓았던 둑을 트게 하였다. 두송군의 일부는 물에 쓸려 익사하고 그의 군은 일부만 건너게 되어 둘로 나뉘게 되었다. 두송은 나아가 길림애 위에 진을 쳤고 누르하치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병력의 대부분을 동원하여 사르후산 입구에 남아있던 명군을 쳤다. 사르후산 입구에 남아있던 명군은 전멸하고 누르하치군의 공격은 두송군에 집중되었다. 두송은 병사들에게 화포를 있는대로 발사하게 하고 선두에 나서서 후금군을 공격하였으나 그의 군은 겹겹이 포위된 상태였다. 두송은 누르하치의 13자인 리암부[賴慕布]가 쏜 화살에 목숨을 잃고 서로군은 궤멸되었다.

두송군의 전멸 소식은 뒤따라오던 마림(馬林)에게 전해졌고 마림은 두송군의 패잔병과 그의 부대를 합쳐 세 곳에 임시요새를 만들었다. 누르하치는 지체하지 않고 병력을 집중하여 요새를 하나씩 공격하였다. 명군 진영에는 화포가 많았고 일부 후금군이 피해를 입기도 하였으나 이 당시의 화포는 발사속도가 너무 느렸다. 결국 명군 포병들은 몇 번 발사하지 못하고 빠르게 돌진해온 후금기병들에게 제압당했고 다른 두 요새 역시 연이어 격파 당했다. 마림은 빠르게 도주하여 목숨은 건졌으나 그의 군 역시 후금군에게 전멸당하는 수모를 면치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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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후에서 명의 총병들을 공격하는 후금 기병.



누르하치는 이어 앞서 병사 몇 명을 전멸당한 두송의 전령들로 변장시켜 유정의 동로군이 오고 있던 방향으로 보냈다. 가짜 전령들은 두송이 이미 목표인 허투알라에 접근하고 있다며 동로군이 빨리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하였다. 동로군 사령관 유정은 지체없이 군의 진격속도를 높였고 아부달리(阿布達里)의 협곡을 지나게 되었다. 아부달리의 지형이 매우 좁아 유정의 군은 장사진(長蛇陣)으로 행군하게 되었는데 이때 누르하치의 차남 다이산이 거느린 부대가 매복하고 있다가 동로군을 급습하였다. 유정은 미첨도를 휘두르며 싸우다가 죽었고 동로군에 포함되어있던 정예 절강병들 역시 전멸하였다. 이 동로군에는 강홍립이 지휘하고 있던 조선군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강홍립은 싸울 마음이 없어 적극적으로 싸움에 임하지 않았고 바람의 방향도 사수(射手)와 포수(砲手)로 구성된 조선군에게 불리하였다. 그러나 강홍립과 달리 김응하는 열심히 싸우다 전사하였다. 전세가 불리하여지자 강홍립은 즉시 항복하였고 누르하치에게 조선이 처한 불가항력적인 상황을 설명하였다. 강홍립의 항복으로 광해군의 목적은 어느 정도 달성이 되었다.

한 편 북로군, 서로군, 그리고 동로군이 전멸했다는 소식을 들은 양호는 남로군 사령관 이여백(李如柏)에게 후퇴를 명하였다. 당시 누르하치의 본군은 남로군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었고 불과 수십명의 정찰대로 남로군의 행군을 감시하고 있었다. 남로군이 후퇴하기 시작하자 일설에는 이 정찰대의 대장이 마치 기습이 임박한 것처럼 뿔나팔을 불었고 이를 후금군의 공격으로 착각한 남로군 병사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아났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수천명의 명군이 동료들의 발에 밟혀 죽었다. 이로써 누르하치를 토벌하러 보낸 명의 토벌군은 전멸하였다.



참고문헌 : 김영숙, [조천록을 통해 본 明淸交替期 遼東情勢와 朝明關係], 인하대학교 사학과 박사학위논문, 2011; 김종원, [丁卯胡亂시의 後金의 出兵動機], 東洋史學硏究, Vol. 12·13, 1978; 남의현, [15세기 북방정세와 明의 邊境政策의 再檢討], 인문과학연구, Vol. 26, 2011; 남의현, [明末 遼東政局과 朝鮮], 인문과학연구, Vol. 26, 2010; 부남철, [조선시대의 대외전쟁과 유교적 和·戰論], 동양정치사상사, Vol.5 No.2, 2005; 서정흠, [明末淸初 누르하치의 대명관계와 그 성격], 역사교육논집, Vol.18 No.1, 1993; 유지원, [사르후(薩爾滸) 전투와 누르하치], 명청사연구, Vol.13, 2000; 蔡暻洙, [明淸交替期 海上權力의 動向 - 鄭成功 勢力의 反淸活動을 中心으로], 서울대 동양사학과 논집, Vol.29, 2005; Jonathan D. Spence, [The Search for Modern China], W.W. Norton & Company, New York, NY, 1990; [명사(明史)]; [청태조무황제실록(淸太祖武皇帝實錄)].






김성남 | 안보·전쟁사 전문가
글쓴이 김성남은 전쟁이 인간 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관심을 가지고 이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미국 UC 버클리 동양학과를 졸업한 후 연세대학교 국제대학원에서 국제학 석사를 받고 한국학중앙연구원 정치학과에 진학하여 정치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주요 저서로는 [전쟁으로 보는 한국사], [전쟁으로 보는 삼국지], [전쟁 세계사] 등이 있으며 공저로 [4세대 전쟁]이, 역서로 [원시전쟁: 평화로움으로 조작된 인간의 원초적인 역사]가 있다.


발행2012.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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