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역사 ‘오랑캐’, 중원의 주인이 되다 - 명청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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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381회 작성일 16-02-07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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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표


명청전쟁 개요

전쟁주체


명 vs 후금(청)

전쟁시기


1618~1662

전쟁터


랴오둥 반도, 중국 내륙

주요전투


사르후 전투, 영원성 전투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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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삼계의 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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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삼계는 명나라 말기의 무장으로 청나라의 중국 본토 진출을 돕는다.



숭정제의 명령을 받고 북경을 지키러 가던 산해관 총병 오삼계(吳三桂, 1612~1678)는 도착하기도 전에 북경은 이미 함락되었고 숭정제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오삼계는 어려운 선택을 하여야 했다. 일단 오삼계는 다시 산해관으로 왔지만 그의 군을 가지고 홀로서기를 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산해관에 근접한 두 세력, 즉 이자성의 반란군과 청나라 중 하나를 택하여야 했다.

이자성은 그나마 한인이었고 이미 새로운 왕조(大順, 대순)를 건립한 상태였다. 아울러 이자성은 화북지방 인민의 지지를 받고 있었고 명 왕조를 어지럽혔던 모든 난정(亂政)과 부정(不正)을 바로 잡을 것을 약속하였다. 물론 이자성의 반란군이 오삼계의 아버지를 인질로 잡고 있어 만약 아버지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서라면 오삼계는 당연히 이자성에게 항복해야 했다. 그러나 이자성의 반란군은 규율이 잡힌 정규군이 아니라 농민이었고 그들이 북경에 난입할 때 행한 대규모 약탈, 그리고 사대부들의 가족을 잡아 몸값을 요구하는 등의 행위가 오삼계같은 고위 사대부에게 좋게 비쳤을 리 없다. 비록 이자성이 스스로를 대순의 왕이라 칭하기는 하였지만 그 휘하 반란군의 고삐 풀린 행동은 이자성이 반란군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자신의 군도 제어하지 못하는 이자성이 새로운 왕조를 효과적으로 다스릴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이에 비하여 만주인들은 한인들이 천시하던 변방의 야만인들이었다. 오삼계같은 사대부에게는 야만인들에게 항복한다는 사실이 거부감이 들만도 하였다. 그러나 일단 홍타이지는 이미 나라를 세우고 이를 6부의 조정을 통하여 통치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물론 만주군이 화북지방을 휩쓸었을 때 자행한 대규모 학살이 마음에 걸렸으나 청의 조정에는 수많은 한인들이 관리가 되어 일하고 있었다. 아울러 스스로 굽히고 항복한 한인 관료들이 후대(厚待)받는 것을 볼 때 자신이 항복해도 자신의 지위와 부를 보장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결국 오삼계는 청나라에 항복하기로 한다. 결국 북경을 무너뜨린 데 이어 청병(淸兵)을 중원으로 들인 것도 만주인이 아닌 한인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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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삼계가 지키던 산해관(山海關). <출처: (CC)Daniel Ng at Wikipedia.org>



한편 청에서는 1643년 9월에 태종 홍타이지가 죽었고 오삼계가 청군과 접촉할 때는 홍타이지의 아들 푸린[福臨]이 순치제(順治帝, 1638~1661)로 등극한 뒤였다. 그러나 순치제는 아직 나이가 어려 실권은 홍타이지의 동생인 황부섭정왕(皇父攝政王) 도르곤에게 있었다. 이자성은 오삼계의 군을 제거하기 위하여 두개의 부대를 산해관 쪽으로 보내지만 5월 5일과 5월 10일에 오삼계군에게 패한다. 결국 이자성은 5월 18일에 본군을 이끌고 북경을 나온다. 이자성의 군은 5월 22일에 영평(永平)으로 나와 5월 25일에는 산해관 근처에 도착하였다. 오삼계는 청군의 도움을 요청하였는데, 오삼계가 전령을 보냈을 때 도르곤은 이미 서진(西進) 중이었고 오삼계에게 도움을 원한다면 청(淸)의 관리가 될 것을 종용하였다. 이 시점에서 오삼계에게 다른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도르곤이 거느린 청군은 약 5만, 오삼계의 정규병은 약 4만정도였고 이와 더불어 주변의 장정들을 동원하여 수를 불렸다. 이자성의 대순군은 약 10만 정도였다고 한다. 이자성은 도착하자마자 산해관으로부터 수 리(理)떨어진 사하(沙河, 사허)에 군을배치하였다. 오삼계는 부하들에게 수비병력을 주어 산해관의 방어를 맡긴 뒤 군을 이끌고 나와 이자성군과 맞섰다.

한편 도르곤은 산해관으로 진격하고 있던 중 명 조정의 장수였다가 이자성군에 속하여 싸우고 있던 당통(唐通)의 부대와 맞닥뜨린다. 당통은 이자성의 명령으로 사하를 우회하여 오삼계군의 뒤를 치기 위하여 이동하고 있던 중에 청군을 만난 것이다. 갑작스럽게 나타난 청군에 당황한 당통의 부대는 도르곤의 청군에게 전멸 당한다. 5월 27일에 산해관 근처에 도착한 청군은 오삼계군의 항복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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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친왕(睿親王) 도르곤. 일명 황부섭정왕(皇父攝政王)이 되어 나이 어린 순치제 대신 정치를 장악하였다. 산해관에서 이자성을 격파한 후 청군을 이끌고 북경에 입성한다.



5월 27일의 전투에서 이자성은 군을 거대한 학익진형으로 배치하고 오삼계의 산해관군의 돌격을 맞았다. 비록 이자성군의 포진이 조밀하지 못했지만 산해관군을 맞아 의외로 잘 싸웠고 산해관군은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고전하고 있었다. 그때 강한 바람이 불면서 엄청난 먼지구름이 이자성군을 덮쳤고 이를 틈 타 도르곤의 청군 기마대가 대순군의 좌익을 강타하였다. 사실 이자성은 청군이 근방에 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였고 당통의 부대가 갑자기 사라진 사실에 의아해했다. 그러던 와중에 먼지 속에서 변발을 한 대규모 기마병들이 뛰쳐나오자 대순군은 혼비백산하였다. 오삼계군과 싸우느라 지친 대순군은 강력한 청의 기병들에게 공격당하자 진형이 그대로 허물어졌다. 후퇴하는 대순군은 앞다투어 영평으로 달아났고 이 과정에서 수천이 밟혀죽고 또 수천이 청군의 칼에 죽었다. 이 공으로 청에 협력한 오삼계는 평서백(平西伯)에서 평서왕(平西王)이 된다.

전투에서 패한 대순군은 다음 날 북경으로 후퇴하고 5월 31일에 북경에 재입성한다. 이자성은 그의 군이 청군의 공격에 견딜 수 없음을 알고 북경 안 관리들의 집을 약탈하라고 한 다음 6월 3일에 대순의 ‘황제’로 등극한다. 그리고 자금성에 불을 지르고 서쪽으로 탈출한다. 한편 이자성군을 무찌른 ‘승자’들을 맞으러 성밖으로 나간 북경의 유력자들과 관리들은 승리한 군이 명군이 아니라 청나라의 ‘오랑캐’라는 사실에 경악한다. 황부섭정왕 도르곤은 이에 신경쓰지 않고 자금성으로 직행하여 금군(禁軍)의 호위를 받는다. 이들은 이자성군의 난행을 보고 이자성을 섬기기를 거부했던 자들이었는데, 어디로 갔는지도 모르는 명 황실의 잔당들 대신 청나라와 순치제를 모시기로 합의한 상태였다. 순치제는 수 개월후 10월 19일에 북경에 도착하였고 11월 8일에 중원의 황제로서 등극한다.



명 황실의 마지막 저항과 멸망



새로이 북경의 주인이 된 청나라는 명분을 세우는 데 상당히 신경을 썼고 이자성의 반란군에 몰려 자살한 명의 마지막 황제 숭정제를 위하여 성대히 국장(國葬)을 치러주었다. 청군이 통치의 명분을 세우는 데 있어 명을 무너뜨린 ‘반란군’들을 토멸하는 것만큼 좋은 구실은 없었다. 그리고는 반란을 일으킨 이자성을 멸하기 위해서 들어왔노라고 선포하고 대순군을 추격한다. 홍타이지의 동생들인 아지게[阿濟格]와 도도[多鐸]가 이끄는 청군은 산서와 섬서성 등지에서 대순군을 연파하고 서안(西安, 시안)에 둥지를틀고 있던이자성은 뒤쫓아 오는 청군을 피하여 1645년 2월에 서안을 떠나 서쪽으로 도피해 호북성 무창(武昌, 우창)을 거쳐 강서성(江西省, 장시성) 북부까지 달아났다. 쫓기는 이자성은 끼니마저도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고 일설에는 같은 해 9월에 민가에서 먹을 것을 훔치다가 성난 백성들의 손에 맞아 죽었다고 한다.

한편 이자성과 비슷한 시기에 난을 일으킨 장헌충은 호북성에서 방어에 유리한 사천성으로 들어가 대서국(大西國)의 대순왕(大順王)이 된다. 그는 초기에는 사대부들을 강제로 동원하여 관료로 만들고 ‘조정’을 세우고 과거를 시행하며 화폐를 발행하는 등 나라의 기틀을 잡으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후기에는 망상에 빠져 전 아시아를 정복할 계획을 세우고 의심이 가는 모든 사람들을 죽이면서 전횡을 일삼는다. 그는 청의 공격에 밀려 1646년말 수도인 성도(成都, 청두)를 포기하고 동쪽으로 도주하였으며 도주하는 와중에도 학살을 일삼다가 1647년 1월 청군에게 패하고 죽임을 당한다.

청나라가 반석위에 서기 위해서는 반란군 토멸보다 큰 일이 있었으니 바로 전(前) 왕조의 잔당들과 ‘충신’들을 일소(一掃)하는 것이었다. 어떠한 왕조가 멸망한 직후에는 해당 왕조를 되살리려는 ‘부흥군’이 일어난다. 왕조가 수백년 지속된 경우 해당 왕조를 살리는 행위는 ‘대의’의 차원에서 상당한 명분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북경이 무너졌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남경에 있던 관리들과 유력자들은 숭정제의 아들들의 생존이 확실치 않은 상황에서 가장 황위에 근접한 황족이자 만력제의 손자인 복왕(福王, ?~1646) 주유숭(朱由崧)을 황제로 내세워 구심점으로 삼았다. 주유숭은 1644년 6월 7일에 남경에서 황제의 인(印)을 인수하고 6월 19일에 명(남명)의 홍광제(弘光帝)로 등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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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명의 네 임금(복왕, 노왕, 당왕, 계왕)의 주둔지와 활동을 표시한 지도.



그렇지만 남명의 관료들은 적을 앞에 두고 뭉치기보다는 서로 시기하며 반목하였다. 남경 정권의 양대 축이라고 할 수 있는 마사영(馬士英)과 사가법(史可法)은 화합하지 못하고 따로 세력을 유지하였다. 아울러 남명 정부는 기가 막히게도 북경을 점령한 청이 아니라 이자성과 장헌충 등의 반란군을 주적(主敵)으로 여기고 있었다. 특히 홍광제의 남명 조정은 ‘오랑캐와 손을 잡고 도적들을 평정한다(聯虜平寇)’를 구호로 내세웠다.

그러나 청은 이자성을 토멸하는 동시에 다른 일군(一軍)을 남쪽으로 보내어 남명을 공격하였다. 1645년 초, 예친왕 도도가 이끄는 청군은 소주(蘇州, 쑤저우)를 함락시키고 4월에는 사가법이 지키고 있던 양주(揚州, 양저우)에 이르렀다. 도도의 청군은 대포 등 가지고 있던 무기를 총동원하여 양주를 공격하였지만 성민(城民)들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양주는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마침내 힘이 다하면서 양주는 5월 20일에 함락되었고 성민들을 지휘하던 사가법은 자신의 목을 베어 자결하려 하였으나 미수에 그쳤다. 사가법을 사로잡은 도도는 사가법의 충직함이 가상하다며 살아서 자신과 함께 강남(江南)을 평정하자고 종용한다. 그러나 사가법은 자신의 몸이 천갈래로 찢겨도 협력할 수 없다고 답하였고 결국 죽음을 당하였다.

사가법의 충정에 대한 존경심과는 별도로 예친왕 도도는 양주에서 예상외로 큰 손해를 본 것에 몹시 분해하였다. 대부분의 경우 청군의 지휘관들은 약탈과 학살을 통제하였지만 예외의 경우도 있었는데 양주가 그러한 경우였다. 도도는 강남인들에게 만약 청군에게 항거한다면 이렇게 된다는 본보기를 보이기 위하여 양주의 성민들에 대한 학살을 명하였다. 다음 열흘 동안 양주에 대한 무자비한 살육이 자행되었고 수십만명이 목숨을 잃었으며 양주성과 그 주변은 피와 신체의 일부, 그리고 훼손된 시신으로 가득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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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성야(國姓爺) 정성공(鄭成功). 남명을 도와 복국운동에 참전하였으나 실패한다.



양쯔강 유역과 강남에 있던 남명의 도시들은 연이어 청군앞에 함락되었고 6월 1일 청군이 진강(鎭江, 전장)에서 양쯔강을 대대적으로 건넜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남경에 있던 남명의 황제 홍광제는도주하였다. 청군은 6월 8일에 남명의 수도인 남경에 무혈입성하였고 6월 15일 홍광제는 청군에게 잡힌다. 홍광제는 북경으로 보내지고 연금상태에 있다가 1년 후에 죽는다.

홍광제가 청군에 잡히자 명의 당왕(唐王, 1602~1646) 주율건(朱聿鍵)이 황제가 되었다. 주율건은 일찍부터 정치에 재능과 관심을 보였고 이 때문에 의심많은 숭정제에 의하여 투옥되기도 하였다. 이후 홍광제에 의하여 풀려난 주율건은 남경 함락 당시탈출하여 그의 영지로 향하고 있었는데 7월 6일에 항주(杭州, 항저우)가 함락되자 길이 막힌 그는 강서(江西)를 통해 복건성(福建省, 푸젠성)의 복주(福州, 푸저우)에 이르렀고 8월 18일에 융무제(隆武帝)로 등극한다. 융무제는 한때 해적연합 십팔지(十八芝)의 우두머리로서 중국 남동해안을 주름잡다가 명의 관리가 된 정지룡(鄭芝龍, 1604~1661)의 후원으로 정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정지룡은 해적질과 무역으로 많은 부를 축적하였고 융무제를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심지어 정지룡의 아들인 정삼(鄭森)은 아들이 없던 융무제의 양자가 되었고 성공(成功)이라는 이름을 받는데 황성(皇姓)을 받았다하여 후일 국성야(國姓爺)로 불리게 된다. ‘국성야’의 복건식 발음이 서양에 와전되어 그는 역사에 ‘콕싱가’로 알려지게 된다.) 그러나 청의 군대가 1646년 여름에 복건성을 들이쳤을 때 정지룡은 청군에 그대로 항복하였고 같은 해 10월 6일에 도주하던 주율건은 청군에 붙잡혀 거의 즉시 처형되었다.

융무제 주율건이 죽은 직후 남명 정권에서는 잠시 왕위다툼이 벌어졌다. 스스로를 ‘소무제’라 칭한 주율건의 동생과 ‘섭정’이었던 계왕(桂王, 1625~1662) 주유랑(朱由桹)이 서로 황제라고 칭하였다. 주유랑이 이 계승전에서 이기고 영력제(永曆帝)가 된다. 그러나 청군의 맹공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이 싸움은 무의미하였고 새로운 정권은 복건성을 떠나 보다 남쪽으로 도망해야 했다. 영력제 정권은 강서(江西), 호남(湖南, 후난)등을 거쳐 광서(廣西, 광시)의 남령(南寧, 난닝)까지 쫓긴다.

이 과정에서 1657년에 연평왕(延平王)의 작위를 받은 정성공이 10만의 병력과 290척의 함대를 모아 남명의 수도 남경을 회복하려 하였다. 정성공이 숭명도(崇明島, 충밍다오)와 천주(泉州, 취안저우)를 수비하던 청군을 격파하고 양쯔강에서 장황언(張皇言)을 만나 군을 합칠 때 청군의 저항은 미미했다. 양 군은 남경을 포위하였으나 이는 반대편 군세가 모이기를 기다린 청의 계략이었다. 이윽고 사방에서 청군의 공격이 시작되었고 정성공과 장환언의 군은 완전히 무너지고 지휘관의 대부분이 목숨을 잃었다. 정성공은 겨우 탈출하여 본거지인 하문(夏門, 샤먼)으로 후퇴하였다. 정성공은 전력의 대부분을 잃고 이후 반청전쟁을 할 힘을 잃어버린다.

동남해안에서 정성공이 있었다면 내륙에 있는 영력제에게는 장군 이정국(李定國)이 있어 청군의 맹공을 잘 막아내었다. 한때 장헌충 밑에서 싸웠던 이정국은 이후 독립세력을 유지하다가 중원의 남서쪽 변경으로 밀려온 영력제의 군을 맡았다. 계림(桂林, 구에이린)에서 밀려나 난닝으로 후퇴하며 세력이 위축되어가던 남명정권은 이정국의 지휘에 힘입어 1652년에 계림을 탈환하는 등 기세를 올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홍승주(洪承疇)와 오삼계 등이 지휘한 토벌군에 밀려 1658년에는 운남(雲南, 윈난)의 곤명(昆明, 쿤밍)까지 후퇴하였으며 1661년에는 견디지 못하고 버마(미얀마) 북쪽으로 달아난다. 버마로 후퇴한 남명정권은 자치령을 만들어 일종의 복국(復國)을 위한 기지로삼으려 했으나 이를 불편하게 여긴 버마정권과의 갈등을 야기하였고 버마의 폐-민왕은 주유랑의 가족을 제외한 추종자들을 모두 죽인다.

1661년 12월, 오삼계가 2만군을 이끌고 버마경내로 돌아와서 주유랑의 신병인도를 요구한다. 폐-민왕은 1662년 6월에 주유랑의 가족을 배에 태우고 이정국(李定國)에게 돌려보낸다고 속이고 강물에 떠내려 보낸다. 주유랑이 탄 배는 오삼계의 진영에 이른다. 주유랑은 자신의 운명이 다했음을 알고 오삼계를 보자마자 역적(逆賊)이라 하면서 욕설을 내뱉는다. 오삼계는 친히 끈을 가지고 주유랑의 목을 졸랐다고 하는데 주유랑은 죽어가면서도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네 놈 같은 역적의 얼굴을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으니 좀 빨리 죽여다오.”

주유랑은 목이 졸려죽었고 1662년, 명 황조의 마지막 ‘황제’가 죽는다. 중원의 주인은 더 이상 한인(漢人)의 명(明)이 아니었다. 명의 한인들이 그리 멸시하고 야만시하였던 여진족, 즉 만주족이 중원 천하의 주인이 된 것이다. 이리 세워진 청나라는 18세기에 이르러 강건성세(康乾盛世)를 이루며 중국의 지경(地境)을 넓힌다. 근대 국가가 세워지기 전의 중국사를 장식하게 되는 마지막 왕조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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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대 최대로 확장된 영토의 모습. <출처: (CC)Jerrch and Nat at Wikipedia.org>





참고문헌 : 김영숙, [조천록을 통해 본 明淸交替期 遼東情勢와 朝明關係], 인하대학교 사학과 박사학위논문, 2011; 김종원, [丁卯胡亂시의 後金의 出兵動機], 東洋史學硏究, Vol. 12·13, 1978; 남의현, [15세기 북방정세와 明의 邊境政策의 再檢討], 인문과학연구, Vol. 26, 2011; 남의현, [明末 遼東政局과 朝鮮], 인문과학연구, Vol. 26, 2010; 부남철, [조선시대의 대외전쟁과 유교적 和·戰論], 동양정치사상사, Vol.5 No.2, 2005; 서정흠, [明末淸初 누르하치의 대명관계와 그 성격], 역사교육논집, Vol.18 No.1, 1993; 유지원, [사르후(薩爾滸) 전투와 누르하치], 명청사연구, Vol.13, 2000; 蔡暻洙, [明淸交替期 海上權力의 動向 - 鄭成功 勢力의 反淸活動을 中心으로], 서울대 동양사학과 논집, Vol.29, 2005; Jonathan D. Spence, [The Search for Modern China], W.W. Norton & Company, New York, NY, 1990; [명사(明史)]; [청태조무황제실록(淸太祖武皇帝實錄)].






김성남 | 안보·전쟁사 전문가
글쓴이 김성남은 전쟁이 인간 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관심을 가지고 이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미국 UC 버클리 동양학과를 졸업한 후 연세대학교 국제대학원에서 국제학 석사를 받고 한국학중앙연구원 정치학과에 진학하여 정치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주요 저서로는 [전쟁으로 보는 한국사], [전쟁으로 보는 삼국지], [전쟁 세계사] 등이 있으며 공저로 [4세대 전쟁]이, 역서로 [원시전쟁: 평화로움으로 조작된 인간의 원초적인 역사]가 있다.


발행2012.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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