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역사 스웨덴의 사자왕 - 30년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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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24회 작성일 16-02-07 0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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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표


30년 전쟁 개요

전쟁주체


신성로마제국, 스페인 vs 보헤미아 등 반가톨릭연합, 덴마크, 스웨덴, 프랑스, 네덜란드, 튀르크

전쟁시기


1618~1648

전쟁터


중부 유럽(주로 독일)

주요전투


바이센베르크 전투, 루터 전투, 브라이텐펠트 전투, 뤼첸 전투, 뇌르틀링겐 전투, 로크로아 전투, 얀코프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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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자왕의 진면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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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스타프 아돌프.



1630년 당시 36세였던 스웨덴의 왕 구스타프 아돌프(Gustavus Adolphus, Gustavus II, 1594~1632)는 냉정하면서도 과단성이 있고, 다혈질이면서도 합리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1611년부터 재위하며 재정개혁을 단행해 스웨덴의 국고를 풍족하게 하고, 사법권을 일원화하고, 병원, 구호시설, 우편제도, 교육제도 등을 확충하는 등 내정에서 빛나는 업적을 이루었다. 그러나 그의 장기는 외교와 군사였는데, 특히 군사 면에서 구스타프 아돌프는 세계사를 통틀어 보기 드문 개혁을 달성했다.

1620년에 독일을 여행하다가 네덜란드의 마우리츠(Mauritz, 1567~1625)가 이룬 군사개혁을 알게 된 그는 거기에 심취했으며, 그것을 본받아 새로운 전술을 개발했다. 마우리츠는 창병(槍兵)의 규모를 줄이고 대신 당시로서는 신무기였던 머스킷 소총을 전문으로 쓰는 소총병을 늘렸으며, 한 번 발사하려면 수십 개의 준비 동작이 필요했던 머스킷의 단점을 보완하고자 제2열이 머스킷을 발사하고 뒤로 후퇴, 그 사이에 장전을 끝낸 제2열이 전진하여 발사하는 전술을 창안했다. 구스타프 아돌프는 머스킷을 개량해 준비 동작의 수를 줄이고 무게도 줄여 본래는 조준대에 거치시켜 발사하던 것을 손으로 들고 쏠 수 있게 했으며, 종이 탄약통을 보급해 보다 쉽고 빠르게 장전이 가능하게 했다. 그리고 3열을 1조로 하여 제1열은 무릎쏴, 제2열은 구부려쏴, 제3열은 서서쏴 자세로 동시에 발사하고, 후퇴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서 재장전하는 사이에 후속 4, 5, 6열이 그들을 앞지르며 연속 발사하도록 바꾸었다. 이로써 진격을 멈추지 않으면서 사격이 이어질 수 있었고, ‘탄막’이 이루어짐으로써 적에게 심각한 타격을 가할 수가 있었다.

또한 당시의 일반적인 군 편제는 1백~2백 명씩의 중대를 기본으로 하여 이들이 흩어졌다가 다시 모일 때는 그리스식의 밀집방진(팔랑크스) 형태를 취하는 것이었는데, 구스타프 아돌프는 4개 대대가 활 모양으로 배치되고, 1개 대대가 예비대대로 따르는 ‘여단’이라는 단위를 새로 창설해 기본단위로 삼았다. 1개 여단에는 창병과 소총병이 함께 있었고, 9문 이상의 화포가 따랐다. 종전까지 보병의 주병종이던 창병은 전방 사격에 열중하는 소총병의 좌우를 엄호하는 역할을 주로 맡았으며, 적진이 눈앞에 있을 때면 일제 돌격하기도 했다. 그리고 새로운 병종, 말을 타고 달리며 머스킷을 발포하다가 적진에 육박하면 말에서 내려 칼을 휘두르는 ‘드라군(용기병)’도 고안해냈다(프랑스에서 먼저 고안했다고도 하나, 그가 처음으로 이 병종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사실은 분명하다). 기동력과 화력을 결합한다는 이 개념을 그는 화포에도 응용하여, 종래의 둔중하고 발사에 오래 걸리던 화포를 보다 빠르게 쏘고 빠르게 굴러가는 화포로 개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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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0년경의 머스킷 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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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라시에(흉갑기병). 드라군과 비슷하게 운용되었으나 머스킷 대신 피스톨을 썼고, 총보다 검을 주무기로 사용했다.



그 밖에도 민간인 기술자를 포함하는 공병대와 군의관을 갖추고, 지도와 쌍안경을 표준 장비로 하여 부대의 독자적 작전능력을 높였으며, 보다 정교해진 전투 행동을 일사불란하게 실시할 수 있도록 병사들에게 철저한 훈련을 시켰다. 엄격한 군율과 정기적 종교집회가 군기를 엄정하게 했는데, 이 방식은 이십년쯤 뒤 영국에서 크롬웰(Oliver Cromwell, 1599~1658)이 ‘신모범군’에 적용한다. 이런 개혁의 효력을 떠나 구스타프 아돌프의 군대가 강했던 것은 그가 늘 진중에서 솔선수범하며 병사들과 동고동락하는 자세에서 우러난 자연스러운 존경심이었다.



“그는 병사들과 함께 땀흘리고, 굶주리고, 추위에 떨고, 갈증에 시달렸으며, 열다섯 시간이나 말에서 내리지 않은 적도 있었다. 피와 오물 따위는 그에게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는 피가 발목까지 차오르는 전장도 마다하지 않았다.”
C. V. 웨지우드, [30년 전쟁]

이런 그에게 자연스럽게 붙은 “북방의 사자왕”이라는 별명, 이 사자는 이제 30년 전쟁에 개입하려 하고 있었다. 크리스티안과 마찬가지로 신교도에 대한 동정심과 발트 해의 패권을 독일에게 허용할 수 없다는 방어적 관점, 그리고 독일에 스웨덴 영토를 확보하겠다는 공격적 관점이 함께 작용했다. 다만 보급이 문제였는데, 프랑스의 리슐리외가 그에게 지원을 약속함으로써 마침내 주사위는 던져졌다. 1630년 7월 4일, 그는 포메른 항에 1만 3천의 병력을 이끌고 상륙했다.



드라군이 출동하다



구스타프 아돌프의 참전으로 마침내 30년 전쟁은 국제전의 성격을 뚜렷이 띠게 되었다. 크리스티안이 개입할 때는 신성로마제국 내의 한 영지의 영주 자격을 내세웠으므로, 1630년 이전까지는 독일의 내전이라고 봐도 무리가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스웨덴과 프랑스가 한 축을 이루어, 스페인과 독일에 맞서는 구도가 갖춰졌다. 하지만 페르디난트는 그런 사태의 급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발렌슈타인이 “스웨덴군이 상륙하지 못하도록 포메른을 봉쇄해야 한다”고 한 조언도 묵살했고, 얼마 뒤에는 아예 그를 사임시켜 버렸다. 그는 다시금 막시밀리안 직속의 틸리에게 황제군의 지휘봉을 맡겼는데, 틸리는 군대를 출동시키자마자 애를 먹을 수밖에 없었다. 앙심을 품은 발렌슈타인이 그동안 거의 전적으로 책임져온 군량 보급을 거절했기 때문이다. 황제군이 우물쭈물하는 사이에 사자왕은 포메른을 손에 넣고는 슈트랄준트에서 슈제친에 이르는 발트 해 연안을 완전히 장악했다.

하지만 독일 제후들은 크리스티안 때와 별 차이 없이 소극적인 자세로 구스타프 아돌프를 대했다. 그래서 보급이 원활치 않은데다 행군조차 지연되는 사이에 틸리의 군대가 신교파의 마그데부르크를 함락시키고 눈뜨고 볼 수 없는 학살과 파괴를 자행, 유령의 도시로 만들어 버리는 일도 생겼다. 하지만 이를 계기로 분개한 브란덴부르크, 작센 등이 구스타프에 대한 적극적인 지원으로 돌아섰으며, 1631년 9월 18일, 구스타프 아돌프와 틸리는 브라이텐펠트에서 대치했다. 구스타프 아돌프 군은 작센 군 1만을 포함하여 4만 7천이었고, 틸리의 군대는 3만 6천이었다. 틸리군이 밀집방어 대형으로 포진한 한편 구스타프군은 왼쪽에 작센군, 오른쪽에 스웨덴군이 자리했으며 스웨덴군은 전방에 포병대를 배치하고, 그 뒤에 T자 형태로 대형을 이룬 보병대가 왔으며, 그 양 옆을 기병대가 지켰다. 그야말로 몽고메리의 말처럼 “그리스의 밀집방진이 로마 군단의 도전을 받는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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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이텐펠트 전투 대치도.



구스타프군의 오른쪽에서 스웨덴군은 압도적인 화력을 퍼부어 틸리군의 좌익을 두들겨 부쉈다. 그러나 그 반대쪽에서는 틸리군의 우익이 작센군을 공격, 스웨덴군과는 달리 오합지졸이었던 그들을 30분 만에 뿔뿔이 흩어져 달아나게 했다. 틸리는 아마 회심의 미소를 지었을 것이다. 이것으로 병력은 거의 대등해졌다. 그리고 스웨덴군은 지금 우세하다고는 해도 좌익쪽의 공격에서 손을 뗄 수 없을 테니, 우리 우익이 빠르게 측면에서 공격하면 우리가 이긴다!

하지만 드라군이 출동하면 어떨까? 질주하는 말 위에서 머스킷을 쏘아대는 모습이 마치 날면서 불을 뿜는 용과 같다고 드라군(용기병)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 새로운 병종은 스웨덴군 진영에서 쏜살같이 달려나와 자신들을 공격하려는 틸리군 우익을 습격했다. 뜻밖의 공세에 틸리군이 미처 전열을 정비하지 못하는 가운데, 스웨덴군의 화포는 기민하게 방향을 바꿔가며 적진을 맹폭했다. 병력이 비슷해봤자, 기동력과 돌파력, 그리고 훈련과 사기에서 상대가 되지 않는 스웨덴군을 이길 수는 없었다. 틸리군은 2만 명의 전사자를 내었고, 7천 명은 포로가 되었다가 구스타프군에 흡수되었다. 나머지는 화포와 물자를 모두 버리고 정신없이 퇴각했다. 틸리도 온몸에 부상을 입은 채 간신히 달아났다. 이 승리로 북부와 서부 독일이 황제의 영향권에서 벗어났다. 30년 전쟁의 13년째에 비로소 신교 진영이 승기를 잡았으며, 드레스덴에서는 백 년 뒤까지 브라이텐펠트 전투를 기념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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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이텐펠트에서 승리한 구스타프 아돌프. <출처: (CC)Rama at Wikipedia.org>





뤼첸 전투



이제 사색이 된 황제가 꺼낼 카드는 하나밖에 없었다. 발렌슈타인이었다. 구스타프가 곧바로 황도 빈(Vien)으로 진격하지 않고 먼저 라인란트를 점령하여 스페인군이 혹시라도 지원해올 통로를 끊는 사이에, 발렌슈타인은 다시 황제군의 총사령관이 되었다. 구스타프 아돌프에 비해 전술의 재능은 떨어졌으나 전략적 두뇌는 매서웠던 그는 스웨덴 왕의 최대 약점은 보급이 원활치 않은 독일 땅에서 싸우고 있다는 점임을 간파했다. 그래서 속전속결을 바라던 구스타프를 이리저리 피해다니며, 마치 한니발(Hannibal, BC 247~BC183/182)을 상대하던 파비우스(Quintus Fabius Maximus, BC275~BC203)처럼 적군이 제풀에 지치기를 노렸다. 그리고 구스타프를 돕는 작센 등을 먼저 치면서 스웨덴 왕을 점점 더 고립시켰다. 그러다가 결국 구스타프 아돌프는 1632년 11월 16일, 뤼첸에서 발렌슈타인의 목덜미를 잡았다. 황제군은 병력과 장비에서 모두 열세였다. 그러나 브라이텐펠트에서와는 다르게, 이를 악물고 악착같이 싸웠다. 그래도 사자의 이빨과 발톱을 당할 수는 없었고, 발렌슈타인은 다리에 총을 맞고 절뚝이며 전장에서 달아났다. 나머지 병력도 패주했다. 하지만 스웨덴군은 승리의 기쁨에 채 취하기도 전에, 적진 한가운데까지 돌진했다가 쓰러진 왕의 시신을 보았다. 그의 시신을 가운데 두고, 돈밖에 모른다고 소문이 난, 유럽 각지에서 온 용병단도 통곡을 했다. 소식을 들은 페르디난트 황제까지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이 무시무시한 적은 동시에 그 생애에서 유일하게 존경스러운 남자였기에.

발렌슈타인은 존경스럽지 않은가? 황제의 눈에는 그렇지 않았던 것 같다. 그는 유능했으나 충성스럽지 않았고, 배포가 컸지만 비열했다. 거의 밑바닥에서 올라와 공작이 된 그는 독일이 스페인과 영영 손을 끊고 독일인만의 독일이 되어야 한다고 역설했으며, 그 말이 황제에게는 발렌슈타인 자신이 황제 자리를 노린다는 말처럼 들렸다. 사자 사냥까지 끝난 이 마당에 못 믿을 사냥개를 키울 이유가 무엇인가? 1634년, 그는 발렌슈타인을 두 번째로 해임했다. 그리고 아마도 그의 손에, 이 희대의 풍운아는 암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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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렌슈타인의 암살.





참고문헌 : 버나드 몽고메리, [전쟁의 역사], 책세상, 2004; C. V. 웨지우드, [30년 전쟁], 휴머니스트, 2011; 메리 풀브록, [분열과 통일의 독일사], 개마고원, 2000; P. R. 파머-J. 콜튼, [서양근대사], 삼지원, 1985; 김용구, [세계외교사], 서울대학교출판부, 2006; 이동언, “30년 전쟁과 합스부르크 왕가”, 조선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8; 송요태, “30년 전쟁의 영향에 관한 연구”, 영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1; 송요태, “30년 전쟁과 구스타프 아돌프”, 육군제3사관학교논문집.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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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규진 | 서울교육대학교 교수/역사저술가
글쓴이 함규진은 여러 방면의 지적 흐름에 관심이 많다. 정치학을 전공하여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한편, 주로 역사와 관련된 책을 여러 권 썼고, 인물이나 사상에 대한 번역서도 많이 냈다. 동양과 서양, 전통과 현대, 보수와 진보 등 서로 대립되는 듯한 입장 사이에 길을 내고 함께 살아갈 집을 짓는 것이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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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2012.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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