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역사 제임스 1세, 잉글랜드의 왕이 되다 - 영국 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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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386회 작성일 16-02-07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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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표


영국 내전 개요

전쟁주체


잉글랜드의 찰스 1세와 왕당파, 의회파

전쟁시기


1642~1651

전쟁터


그레이트 브리튼 섬(주로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지역)

주요전투


에지 힐 전투, 에드월튼 무어 전투, 뉴베리 전투, 마스턴 무어 전투, 네이즈비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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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의 죽음과 일인이왕(一人二王)



영국 내전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면 결국은 엘리자베스 1세(Elizabeth I, 1533~1603) 말년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영국 내전의 최초 시발점을 찾자면 이는 결국 엘리자베스가 죽은 이후 스코틀랜드의 왕이었던 제임스 6세가 잉글랜드의 제임스 1세(James I, 1566~1625)로 등극한 순간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제임스 6세가 잉글랜드의 왕이 된 것은, 1603년, 45년간 잉글랜드를 통치하며 강력한 왕권을 휘둘렀던 엘리자베스 1세가 자식을 남기지 못하고 사망하면서다. 제임스 6세가 스코틀랜드의 왕이었고 ‘대역죄인’으로 처형당한 메리 스튜어트(Mary Stuart, 1542~1587)의 아들이란 점이 장애물로 작용하였지만, 결국 엘리자베스는 제임스를 차기 계승권자로 인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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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 1세의 장례식 행렬.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두 나라를 지배하는 왕의 탄생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역사를 통틀어 극히 드문 일이었다. 하지만, 제임스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양국의 왕이 되었다고 해도,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가 통합된 것은 아니었다. 양국 모두 각각의 의회와 정부를 유지했고 각각의 군대도 유지했다. 제임스의 목표는 자신의 통치 하에서 자연스럽게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를 한 나라로 만드는 것이었다.

이때까지 잉글랜드나 스코틀랜드에서의 왕권계승은 일반적으로 전쟁이나, 적어도 정쟁과 암살로 이어지게 마련이었지만, 제임스의 왕권계승은 엘리자베스의 사망 당일에 선포되면서 폭력사태나 혼란 없이 매우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제임스의 장악력이 뛰어났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왕권교체기의 혼란을 두려워한 잉글랜드의 엘리트들 간에 제임스가 왕이 되는 것에 대한 공감대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가톨릭 교도들의 책동, 제임스 1세의 정치적 줄다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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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6년의 제임스 1세 초상



그러나 제임스의 재위가 순조롭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그의 재위 첫해(1603년), 그를 납치해 신앙의 자유를 용인 받으려는 가톨릭교도들의 음모가 있었다. 가톨릭 교도들은 제임스가 메리 스튜어트의 아들로서 영국을 다시 가톨릭국가로 되돌리기를 원했지만 제임스는 잉글랜드에서 가톨릭을 부활시키는 데 큰 관심이 없었다. 비록 어머니를 죽인 엘리자베스에 대한 개인적인 감정이 복잡하였을지는 몰라도 제임스는 확실한 성공회 교도였다. 게다가 종교적 문제를 떠나서 제임스의 가장 큰 목표는 자신의 왕위를 지키는 것이었고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왕으로서 두 지역의 통합을 촉진시키는 것이었다.

제임스는 가톨릭 교도들이 조용히, 그리고 몰래 신앙한다면 굳이 색출하지 않겠다고 하며 가톨릭을 박해하지는 않았지만, 공식적으로 용인하지도 않았다. 제임스는 자신이 스코틀랜드의 왕이라는 점이 잉글랜드에서의 왕권을 유지하는데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에스파냐와의 전쟁으로 인해 반(反) 가톨릭 정서가 팽배해 있는 상태에서 성공회청교도들을 자극하면 혼란이 올 수 있고 자신의 왕위가 위협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가톨릭교도들을 위해서 해줄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었다.

제임스는 외교력과 정치력이 뛰어난 편이었고, 등극한 다음 해인 1604년에 에스파냐와의 전쟁을 종식시키는 데 성공한다. 에스파냐는 계속해 잉글랜드 내 가톨릭에 대한 완전한 자유를 요구했지만 잉글랜드의 추밀원(Privy Council)은 보다 강경히 가톨릭을 탄압하길 바랬고, 제임스는 이들 사이에서 교묘한 정치적인 줄다리기를 할 수 밖에 없었다.

마침내 1605년에 대내외적으로 모든 상황이 정리되었다고 생각한 제임스는 왕위에 오른 후 첫 의회를 소집했다. 그러나 의회의 소집일 하루 전인 11월 4일 밤, 의사당 지하에서 수십개의 화약통과 이에 불을 지를 장작이 발견되었고 의원들과 왕이 모이는 시각에 이를 폭파하려고 기다리고 있던 가이 포크스(Guy Fawkes, 1570~1606)가 체포되었다. 이는 후일의 역사가들에 의해 화약음모사건(Gunpowder Plot)이라 명명되었다. 많은 백성들이 왕이 무사함을 감사했고 다시 왕에게 우호적인 분위기가 조성되어 제임스는 엘리자베스 이후 최대 액수의 왕실예산을 의회로부터 확보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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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회를 폭파하려다 체포되고 있는 가이 포크스.



그전까지 가톨릭을 심하게 탄압하지 않았던 제임스는 폭파사건 이후 태도를 바꾸어 가톨릭들에 대한 본격적인 탄압에 들어갔다. 1606년에 통과된 ‘은신 교황파에 대한 법안(Popish Recusants Act)’은 영국 내 가톨릭들의 재산권, 민권에 대한 심한 제약을 가했으며, 특히 교황권이 왕권 위에 설 수 없음을 공개적으로 선언하고 국왕의 권위에 복종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충성맹약(oath of allegiance)’을 강요했다. 아울러 국왕의 사법관들은 무시로 가톨릭 교도의 집에 들어가 무기가 있는지 수색할 권한이 주어졌다. 심지어 가톨릭교도로서 국왕의 명령에 반하여 로마 교황의 명령을 따르는 자는 대역죄(High treason)로 다스릴 수 있는 조항도 삽입되었다. 잉글랜드를 가톨릭으로 만들려는 가톨릭 교도들의 책동은 오히려 제임스를 맹렬한 반가톨릭으로 만들어버렸다.



엄격한 국교 수호, ‘킹 제임스 바이블’ 편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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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1년판 흠정역 성경(킹 제임스 바이블) 표지.



그러나 가톨릭 교도들을 탄압한다고해 제임스가 종교적인 자유론자가 된 것은 아니었다. 그는 가톨릭이건 청교도이건 또는 당시 스코틀랜드에서 빠른 속도로 퍼지고 있던 장로파건간에 잉글랜드의 국교(國敎)인 성공회의 의례를 따르지 않는 자들 모두에게 철퇴를 가했다. 이러한 조짐은 그가 왕위에 오르기 위해 런던으로 오고 있던 중 청교도 1000명이 서명을 했다는 ‘일천의 탄원서(Millenary Petition)’를 받을 때 드러났다. 이 탄원서의 원본은 존재하지 않지만 청교도들은 잉글랜드에서의 종교개혁이 완성되려면 아직 멀었으며 견진성사(confirmation), 사제(priest)라는 명칭 자체, 그리고 성직자들의 중백의(中白衣, surplice) 착용 등 ‘교황파들의 오류’가 없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제임스는 청교도들의 탄원을 묵살하고 아예 종교적인 탄원을 금지시켰다. 그는 이듬해인 1604년에 햄프턴 회의(Hampton Court Conference)에서 ‘사소한 일에 의한 파문’을 금지시키는 등 어느 정도 청교도들의 주장을 수용했지만 교회는 ‘직분’이 있는 자들을 중심으로 움직여야 한다는 뜻을 끝내 굽히지 않았다. 이후 제임스는 성공회에서 예배 시에 읽을 성서를 만들라는 명령을 내렸고 이에 따라 라틴어 성경을 일반 영어로 번역하게 했다. 이 작업은현재에도 널리 쓰이고 있는 ‘흠정역(Authorized version)’ 성서, 즉 ‘킹 제임스 바이블(King James Bible)의 편찬(1611년)으로 결실을 맺는다.

그는 국교회의 수장으로서 백성들이 올바르게 신을 믿어야 한다는 생각에 교회의 의례와 교리에 대해서 매우 엄격하였고 이를 어기는 자들에 대해서는 가혹한 처벌을 내렸다. 1611년에는 삼위일체설을 부정하고 소리 높여 기도할 필요가 없다는 교리를 설파하는 바르톨로뮤 레거트(Bartholomew Legate, 1575~1612)란 인물과 그의 동생을 잡아들였다. 이들 형제는 이단(Heresy) 혐의로 종교재판을 받게 되고 이단으로 확정된다. 성공회 재판부는 레거트에게 그의 교리를 부정하고 오류를 인정하면 살려주겠다고 하였지만 레게이트는 거부하고 1612년 3월에 화형 당한다.

다음 달인 4월에는 유아세례를 부정하는 ‘재세례파(Anabaptist)’ 교인인 에드워드 와이트먼(Edward Wightman, 1566~1612)역시 종교재판에서 이단판결을 받고 화형을 당한다. 이러한 분위기속에서 청교도들 역시 불안함을 느낄 수 밖에 없었고 일단의 청교도들이 이를 피해 1620년에 메이플라워호(號)를 타고 북아메리카 대륙으로 향했. 이들은 지금의 미국 매사추세츠 주 플리머스(Plymouth)에 정착하게 된다.

한편, 제임스는 1560년에 교황청과 공식적으로 단절하고 후일 장로교가 되는 스코틀랜드 교회에도 개입하여 과거의 사제 중심 교회 조직을 다시 세우려 했다. 1610년에는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으로 인해 없어졌던 과거의 교구(敎區)를 복원하고 1618년에는 퍼스(Perth)에서 성공회 의례를 골자로 한 5조항을 강제했다. 5조항은 후일 ‘퍼스 5조항(Five Articles of Perth)’으로 알려지게 되며 많은 진통과 저항을 무릅쓰고 스코틀랜드 교회 총회,1621년에는 스코틀랜드 의회를 통과했지만 대부분의 장로파 교인들은 이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다. 이는 이후 영국 내전의 전초전격인 1639년의 ‘주교전쟁(Bishops War)’의 주요 원인이 된다.



왕권은 신에게서



왕정국가의 역사에서 흔히 등장하는 테마는 바로 왕권과 신권 간의 대립이다. 왕은 최고 권력자로서 자신의 권력기반을 다지고 국정을 좌지우지 하려 한다. 그러나 왕권이 강하면 대개 귀족 엘리트 계층을 형성하는 신하들은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못하기 때문에 왕의 권력에 제도적·관습적인 제한을 두려한다. 이런 면에서 제임스 1세 역시 다르지 않았다. 학문을 좋아하고 문약한 왕으로 알려졌으나, 제임스는 누구보다도 강력한 왕권을 추구한 왕이었다. 따라서 제임스 1세의 치세는 ① 왕권 강화 시도, 그리고 ② 왕과 의회와의 대립으로 점철되었다. 결국 이는 제임스 1세의 아들인 찰스 1세까지 이어져 결국 영국 내전의 결정적인 원인이 된다.

제임스 1세는 자신의 학적인 능력으로 신학과 정치에 관한 논고를 여럿 저술했는데 가장 잘 알려진 것이 1598년에 익명으로 출판한 [자유로운 군주국의 진법(眞法, True Law of Free Monarchies)]이다. 여기에는 제임스 1세가 왕권에 대하여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지가 잘 드러난다.



이미 드러났듯이 임금이란 나라 전체의 지배자이며 그 나라 안에 사는 모든 백성의 주인이고 그 하나 하나의 생(生)과 사(死)를 결정할 권리가 있다.

제임스 1세에 의하면 왕은 국가의 전권자이며 의회는 오직 그 전권자의 결정을 보조하는 기능밖에 없다. 모든 궁극적인 명령권과 행정권은 국왕에게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어떠한 정치적인 요인이나 제도적인 권리가 아니다.



이 세상 어떤 곳에 살 건 간에 백성으로서 그들 사이에 세워진 정권, 특히 왕의 정권(고래(古來)의 모든 현인과 지자들이 동의하듯이 주님의 권좌와 닮아 완벽에 가까운 정권의 모습이다)을 기본으로 하면서 주님에 대해서 아는 것보다, 충성에 대한 올바른 앎을 지니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

제임스 1세에게 왕정이란 신의 권좌에 가장 가까운 정권이다. 따라서 신성성을 지니고 있다. 그가 1610년에 의회 앞에서 행한 연설에서는 보다 이러한 생각을 보다 직접적으로 표현한다.



왕정(王政)이란 이 세상에서 가장 제일의 것이며 이는 왕들이 주님의 대리자로서 주님의 권좌에 앉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주님 스스로 그들을 신성하다고 하기 때문이다.

제임스에 의하면 세상과 자연 자체가 신이 만든 것이기 때문이 왕정은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결국 왕은 신성한 존재이며 기독교의 신으로부터 통치권을 위임 받아 왕국을 다스리는 존재들이다. 나라에 존재하는 모든 것 중에서 왕의 위에 설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브리튼 땅에서는 왕이 곧 교황이요, 하늘의 부름을 받은 자였다. 바로 왕권신수설(王權神授論, divine right of kings)이다.



국왕과 의회, 바람 잘 날이 없도다



지금의 영국 의회는 상시적인 기관이지만 이때의 의회는 현재만큼의 의결권이 없었으며 상시적이지도 않았고 국왕이 소집해야 모일 수 있었다. 그나마 의회와 국왕의 대립이 심해지면 국왕은 의회를 강제로 해산할 수도 있었고 심지어 국왕의 명령에 의하여 의장을 맡았던 귀족이 처형당하는 경우도 심심찮게 있었다.

제임스 1세와 의회는 충돌하는 일이 많았다. 비록 폭파사건을 전후하여 의회로부터 많은 예산을 받아내기는 하였지만 의회는 제임스에게 돈을 고분고분 내주는 일이 거의 없었다.돈 문제외에도 여러 가지 충돌이 있었다.그 중 대표적인 사건이 1608년의 ‘굿윈 사건’이었다. 현재 잉글랜드 중남부에 있는 버킹엄샤이어(Buckinghamshire)에서 프랜시스 굿윈(Francis Goodwin)이란 사람이 의원으로 선출되었는데 왕의 영향력이 미치던 대법원의 법관들은 굿윈이 예전에 불법을 행한 일이 있다 하여 그의 당선을 취소했다. 이는 불법을 행한 모든 자들은 의원에 선출될 수 없다는 왕명이 사전에 선포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러나 의회는 의원에 관련된 모든 사항은 의회가 다루어야 한다며 굿윈에 대한 조사를 실시했고 그의 ‘불법’은 누명이라며 그의 당선이 정당하다고 결론내린다. 당연히 굿윈은 법원에 의하여 박탈되었던 의원직을 돌려받는다. 당연히 제임스는 격분하였지만 의원들이 단합하면서 사세는 왕에게 불리하게 돌아갔고 제임스는 일단 물러서기로 결정한다. 그렇지 않아도 돈 문제로 좋지 않던 제임스 1세와 의회와의 관계는 굿윈 사건으로 인하여 완전히 틀어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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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1세의 매관매직을 주도한 미들섹스 백작 라이오넬 크랜필드.



왕실재정을 알뜰하게 운영했던 엘리자베스와는 달리 제임스는 교회문제와 대륙에의 외교적인 개입으로 인하여 돈을 상당히 많이 썼고 이 때문에 왕실은 만성적인 부채에 시달렸다. 이에 1610년에 로버트 세실(Robert Cecil, 1608~1612)경이 의회에 왕실의 비상 징발권(purveyance)과 수입품에 대한 관세 등을 포기하는 조건으로 의회가 왕실에 연간 20만 파운드를 제공하는 ‘대계약(Great Contract)’을 의회에 상정했다. 그러나 세부조건을 놓고 왕실과 의회의 지리한 협상이 이어졌고 제임스는 화를 내면서 협상을 부결시키고 의회를 해산했다.

향후 11년간 왕의 독재가 이어졌고 제임스는 대상(大商)이자 측근인 라이오넬 크랜필드(Lionel Cranfield, 1575~1645)를 귀족으로 만들어 그를 통하여 허울뿐인 작위를 남발하여 이를 많은 돈을 받고 팔았고 아울러 벼슬까지 팔아서 왕실재정을 충당했다. 한 마디로 말하여 매관매직(賣官賣職)으로 돈을 번 것이다. 제임스는 1621년에 그의 사위 라인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Friedrich V, 1596~1632)가 신성로마제국과의 전쟁에서 불리해지자 그를 도와주기위해 원정을 하려 했지만 그 비용을 감당할 수 없었다. 돈이 궁한 제임스는 의회를 소집하여 돈을 달라고 하였지만 의회는 원정 자체를 거부했다.

설상가상으로 1623년에 왕세자인 찰스 1세(Charles I, 1600~1649)와 에스파냐의 마리아 공주와의 혼담도 깨진다. 제임스는 에스파냐와의 전쟁을 피하기 위해 고의적으로 혼담을 지연시키고 있었는데 에스파냐가 비밀리에 방문한 찰스에게 영국에서의 가톨릭 탄압을 철회하고 에스파냐에서 1년 동안 인질이 될 것을 요구하면서 혼담은 깨진다. 혹시라도 마리아의 지참금으로 재정을 충당하려 했던 제임스의 계획 역시 자연스럽게 무산되었다(물론 마리아는 찰스를 혐오하였고 결혼할 마음이 전혀 없었다고 전해진다).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은 제임스는 술로서 말년을 보내고 결국 건강이 악화되어 1625년에 사망한다.



참고문헌 : Barbara Donagan, “Atoricity, War Crime, and Treason in the English Civil War,” [The American Historical Review], Vol. 99, No. 4 (Oct., 1994) 1137-1168; Ian Gentles, “Why Men Fought in the British Civil Wars,” [The History Teacher], Vol. 26, No. 4 (Aug., 1993), 407-418; Leonard Hochberg, “The English Civil War in a Geographical Perspective,” [The Journal of Interdisciplinary History], Vol. 14, No. 4 (Spring, 1984), 729-750; Mark Stoyle, “English Nationalism, Celtic Particularism, and the English Civil War,” [The Historical Journal], Vol. 43, No. 4 (Dec., 2000), pp. 1113-1128; Charles Carlton, [Going to the Wars: the Experience of the British Civil Wars 1638-1651], (London: Routledge, 1992); Stanley D.M. Carpenter, [Military Leadership in the British Civil Wars 1642-1651], (London: Frank Cass, 2005); Anthony Fletcher, [The Outbreak of the English Civil War], (New York: New York University Press, 1981); John Kenyon and Jane Ohlmeyer (eds.), [The Civil Wars: A Military History of England, Scotland, and Ireland 1638-1660], (Oxford, UK: Oxford University Press, 1998); Conrad Russell, [The Causes of the English Civil War], (Oxford, UK: Clarendon Press, 1990); Paul K. Davis, [100 Decisive Battles: From Ancient Times to the Present],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2001).





김성남 | 안보·전쟁사 전문가
글쓴이 김성남은 전쟁이 인간 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관심을 가지고 이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미국 UC 버클리 동양학과를 졸업한 후 연세대학교 국제대학원에서 국제학 석사를 받고 한국학중앙연구원 정치학과에 진학하여 정치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주요 저서로는 [전쟁으로 보는 한국사], [전쟁으로 보는 삼국지], [전쟁 세계사] 등이 있으며 공저로 [4세대 전쟁]이, 역서로 [원시전쟁: 평화로움으로 조작된 인간의 원초적인 역사]가 있다.


발행2012.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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