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역사 2차 영국내전과 찰스 1세의 처형 - 영국 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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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388회 작성일 16-02-07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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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표


영국 내전 개요

전쟁주체


잉글랜드의 찰스 1세와 왕당파, 의회파

전쟁시기


1642~1651

전쟁터


그레이트 브리튼 섬(주로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지역)

주요전투


에지 힐 전투, 에드월튼 무어 전투, 뉴베리 전투, 마스턴 무어 전투, 네이즈비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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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돌이 왕과 2차 영국내전



전쟁에서 패하고 스코틀랜드인들에게 잡힌 신세가 되었지만 아직도 왕은 명분상으로 국가의 수장이었다. 아울러 전쟁 당시 동맹이었던 각 세력은 이제 치열한 정치적 경쟁에 들어갔다. 일단 왕의 신병을 확보한 스코틀랜드 서약파는 협상을 통하여 1647년에 찰스를 잉글랜드 의회에 넘겨주었다. 그러나 찰스는 스스로 자기의 신병을 확보하는 편이 정치적 우위를 점할 수 있음을 알고 각 정파의 인물들과 협상을 하려 했다. 물론 각 세력들도 찰스의 중요성을 알고 왕을 차지하려 했다.

의회가 신군 지도부를 두려워하여 그 힘을 제한하려고 하자 크롬웰 등의 신군 수뇌부와 의회 사이에는 심한 갈등이 야기되었고 신군은 장교인 조지 조이스(George Joyce, 1618~?)를 통해 노스햄턴에 있던 왕을 빼앗아 뉴마켓으로 옮긴다. 이로써 신군은 의회파와의 정치적 협상을 주도할 수 있게 되었지만 찰스는 이 사건을 통하여 신군과 의회 사이에 틈이 벌어졌음을 알고 다시 이를 이용하려고 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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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는 이중 삼중으로 술수를 부려 2차 내전을 일으킨다.



런던의 햄튼 코트(Hampton Court)로 옮겨져서 자신의 신병을 위한 협상을 하게 되었다. 찰스는 신군/의회와의 협상에서 와이트섬(Isle of Wight)의 지사인 로버트 해몬드(Robert Hammond, 1621~1654)에게 가있는 것이 편할 것이라는 말을 듣고 그대로 하였지만, 해몬드는 철저한 반왕파였고 찰스를 낡은 성에 죄수처럼 가두어놓았다. 그러나 찰스는 와이트 섬에서도 각 세력과 협상을 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1647년 12월 스코틀랜드 세력과 비밀 협약을 하기에 이른다. 스코틀랜드가 잉글랜드를 침공해 찰스를 왕위에 복귀시키는 대신 장로교파를 승인해주는 조건이었다.

동맹이었던 스코틀랜드가 적으로 돌변하면서 1648년 7월에 2차 영국내전이 발발했다. 남부 웨일스에서 존 포이어가 의회에 반기를 든 것으로 시작해, 켄트, 콘월, 웨일스 북주, 링컨셔 등 지역에 잔존한 왕당파들이 차례로 반기를 들었다. 그러나 2차 내전은 순전히 스코틀랜드의 병력에 의존하고 있었고 1차 내전만큼 왕당파에 대한 지지가 나타나지 않았다. 웨일즈에서의 세인트 페이건에서 왕당군이 신군에 패한 것을 시작으로 메이드스톤, 펨브로크, 콜체스터 등 주요 전투에서 왕당군은 패전을 거듭했다. 1648년 8월 19일에 해밀튼 공작과 마르마듀크 랭데일등이 이끄는 스코틀랜드-왕당파 연합군이 프레스턴(Preston)전투에서 크롬웰의 신군에게 패하면서 2차 내전 역시 의회파의 완전한 승리로 막을 내렸다.



찰스 1세, 사형 당하다



이후, ‘장기의회’가 주요 개혁법안에 대한 표결을 하면서 비록 실권은 박탈하지만 왕은 그대로두기로 하면서 의회와 신군간의 갈등이 재개되었다. 군부는 즉시 병력을 동원하여 왕의 복위를 허용하는 법안에 찬성한 의원들을 모조리 체포했다. 찰스는 의회와 신군의 처분만을 기다려야 하는 신세임에도 아랑곳없이 자신에게 계속 정통성이 있다고 주장하며 꼬장꼬장한 태도를 보였다.

의회는 1649년 1월에 찰스 1세의 재판을 위한 특별법을 통과시켰고 이를 위한 대법원(High Court)이 세워진다. 1649년 1월 20일에 시작된 재판은 약 일주일정도 소요되었고 27일에 왕은 외부 세력을 끌어들여 국가를 위협하고 두 차례에 걸쳐 내란을 획책한 혐의가 확정되어 사형을 언도받는다. 공개적으로 행하여진 판결회의에 앉아있던 67명은 모두 왕을 사형시킬 것을 주장하였고 59명이 왕의 사형집행장에 서명을 한다. 제임스 1세의 아들로서 절대 왕정을 꿈꾸던 찰스 1세는 1649년 1월 30일, 화이트홀 궁전에서 참수당하고 그 생을 마감한다. 영국의 내전은 결국 백성들의 대표자라는 의원들이 왕의 목을 자름으로써 끝이 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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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독일에서 그려진 찰스 1세 참수장면 판화.





참고문헌 : Barbara Donagan, “Atoricity, War Crime, and Treason in the English Civil War,” [The American Historical Review], Vol. 99, No. 4 (Oct., 1994) 1137-1168; Ian Gentles, “Why Men Fought in the British Civil Wars,” [The History Teacher], Vol. 26, No. 4 (Aug., 1993), 407-418; Leonard Hochberg, “The English Civil War in a Geographical Perspective,” [The Journal of Interdisciplinary History], Vol. 14, No. 4 (Spring, 1984), 729-750; Mark Stoyle, “English Nationalism, Celtic Particularism, and the English Civil War,” [The Historical Journal], Vol. 43, No. 4 (Dec., 2000), pp. 1113-1128; Charles Carlton, [Going to the Wars: the Experience of the British Civil Wars 1638-1651], (London: Routledge, 1992); Stanley D.M. Carpenter, [Military Leadership in the British Civil Wars 1642-1651], (London: Frank Cass, 2005); Anthony Fletcher, [The Outbreak of the English Civil War], (New York: New York University Press, 1981); John Kenyon and Jane Ohlmeyer (eds.), [The Civil Wars: A Military History of England, Scotland, and Ireland 1638-1660], (Oxford, UK: Oxford University Press, 1998); Conrad Russell, [The Causes of the English Civil War], (Oxford, UK: Clarendon Press, 1990); Paul K. Davis, [100 Decisive Battles: From Ancient Times to the Present],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2001).





김성남 | 안보·전쟁사 전문가
글쓴이 김성남은 전쟁이 인간 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관심을 가지고 이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미국 UC 버클리 동양학과를 졸업한 후 연세대학교 국제대학원에서 국제학 석사를 받고 한국학중앙연구원 정치학과에 진학하여 정치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주요 저서로는 [전쟁으로 보는 한국사], [전쟁으로 보는 삼국지], [전쟁 세계사] 등이 있으며 공저로 [4세대 전쟁]이, 역서로 [원시전쟁: 평화로움으로 조작된 인간의 원초적인 역사]가 있다.


발행2012.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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