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역사 1차 영국 내전, 의회파의 승리 - 영국 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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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17회 작성일 16-02-07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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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표


영국 내전 개요

전쟁주체


잉글랜드의 찰스 1세와 왕당파, 의회파

전쟁시기


1642~1651

전쟁터


그레이트 브리튼 섬(주로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지역)

주요전투


에지 힐 전투, 에드월튼 무어 전투, 뉴베리 전투, 마스턴 무어 전투, 네이즈비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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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부연합의 활약과 엄숙동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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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부연합군의 일원으로 기병대를 이끌고 참전한 크롬웰. 이후 정국을 장악하고 ‘공화국’을 이끄는 호국경(Lord Protector)이 된다.



북부에서는 왕당군의 헐 포위가 계속되었지만, 헐의 항구는 열려있었기 때문에 바다를 통한 보급을 받을 수 있었고 오히려 지쳐가는 것은 왕당파 군이었다. 왕당파가 헐에 묶여있는 동안 크롬웰과 토머스 페어팩스의 기병대는 링컨셔 지방을 휘졌고 다녔고 10월 11일에 윈스비에서 왕당파 군을 대파한다. 같은 날, 헐의 수비대는 갑자기 뛰어나와 포위군을 기습했고, 뉴캐슬 백작의 포위군은 호되게 당하여 결국 포위를 풀고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뉴베리에서 승리한 의회파군의 대부분을 형성하던 런던 부대는 뜻밖의 행동을 하였다. 레딩에 도착하자마자 스스로를 ‘소집해제’하고 귀향한 것이다. 사실 이는 뜻밖의 행동이 아니라 정규군이 탄생하기 전의 군대가 지닌 특성이었다. 일시적으로 동원된 인원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돈을 받고 싸우는 용병이 아닌 한 주어진 임무 이상의 것을 하지 않으려 했다. 이 때문에 에섹스는 레딩에서 물러나고 10월 3일에 왕당파가 다시 레딩을 점령한다. 레딩 점령소식을 들은 런던 시민들은 다시 몰려들었고 동부연합과의 교통로를 끊으려는 루퍼트의 기병대를 뉴포츠-파그넬에서 물리친다. 그러나 위험이 사라지자 또 집에 가는 등 전근대 군대의 고질적인 문제점을 노출시켰다.



스코틀랜드군, 잉글랜드에 뛰어들다



1643년 가을, 찰스는 전쟁을 통틀어 최대의 정치적 실수를 저지르고 만다. 9월 15일, 아일랜드 반군들과의 협상을 통하여 아일랜드에서의 전투를 종식시키고 아일랜드군을 잉글랜드에 불러오려고 한 것이다. ‘교황파’ 아일랜드인들이 잉글랜드에 들어온다는 소식은 잉글랜드인들을 단결시켰고 불과 10일 후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서약파간에 ‘엄숙동맹(Solemn League)’이 맺어진다. 이에 따라, 주교전쟁에서 잉글랜드군을 연파했던 알렉산더 레슬리 경과 정예 스코틀랜드군이 내전에 개입하게 된다.

장로교파의 사상적 경직성을 우려하던 스코틀랜드 ‘독립파(Independents)’의 몬트로즈 후작은 찰스에게 비밀리 사람을 보내 아일랜드인들을 끌어들이는 것은 경솔한 짓이라고 반대했지만 병력에 궁한 찰스는 그 조언을 무시했다. 내전에 스코틀랜드가 개입함으로써 전쟁의 균형추는 의회파쪽으로 기울었다. 반왕파의 우두머리였던 존 핌 의원이 12월에 암으로 사망하기는 하였으나 확실하게 우위에 서게 된 의회파는 전쟁을 계속할 것을 천명하였다.

1644년에 들어서, 잉글랜드 곳곳에서 왕당파와 의회파의 지리한 공방전이 계속되고 있었다. 이 상황을 바꾸어놓은 것이 스코틀랜드군의 본격적인 개입이었다. 뉴캐슬 백작은 몇 차례 스코틀랜드군이 잉글랜드에 들어오는 것을 막으려 했으나 실패하고, 요크로 후퇴해 그곳에서 농성하게 된다. 알렉산더 레슬리의 스코틀랜드군은 4월초 국경을 넘어 요크를 포위하고 있던 토머스 페어팩스와 군을 합치게 된다. 스코틀랜드군이 북쪽에 들어오면서 북방의 왕당군은 완전히 무너질 위기에 처했다. 만약 요크가 함락당한다면 북방에서 왕당파는 그 본거지가 없어지는 것이다.



마스턴 무어(Marston Moor) 전투



찰스는 요크의 포위를 풀어주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해 언제나 전투에 나설 준비가 되어있는 루퍼트를 기용해 5월 16일 북방으로 파견한다. 루퍼트는 북쪽으로 향하는 도중에 각지에서 증원병을 모았고 기병 2천과 보병 6천을 보유하게 된다. 그는 볼튼(Bolton)을 공격해 1600의 의회파 민병대를 전멸시키고, 6월 6일에는 의회파 도시였던 리버풀을 공격해 5일의 포위작전 끝에 이를 함락시킨다.

그러나 루퍼트가 떠나있는 동안 (브랜트포드 외에는) 작전경험이 없던 루퍼트의 측신들은 레딩과 아빙던 등을 지키고 있던 수비병력을 빼서 서부에 대한 공격에 나설 것을 건의했고 찰스는 이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이는 중대한 전략적 오류였다. 이 때문에 본거지인 옥스퍼드가 에섹스와 월러의 병력 앞에 그대로 노출된 것이다. 결국 찰스는 옥스퍼드에서 쫓겨나 우스터로 도망하게 된다. 루퍼트는 이 때문에, 먼저 요크의 포위를 풀고 또 이후 왕을 구출해야 하는 이중의 부담을 떠안게 된다.

요크를 둘러싼 동부연합과 스코틀랜드의 연합군은 강을 사이에 두고 있었는데 만약 루퍼트가 공격한다면 상호구원이 어렵기 때문에 각개 격파 당할 수 있었다. 이를 우려한 연합군 지휘관들은 요크의 포위를 풀기로 결정하고 인근의 마스턴 무어로 가서 루퍼트의 도착을 기다리기로 했다. 의회군의 병력은 동부연합군과 스코틀랜드군을 합쳐 2만 8천에 이르렀다. 루퍼트는 요크에 도착해 수비병들을 만나 의회군이 완전히 사라진 것을 확인한 뒤 의회군의 뒤를 따라 마스턴 무어로 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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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스턴 무어전투 모습.



하지만, 루퍼트의 병력 역시 장거리 행군 때문에 몹시 지친 상태여서 7월 2일 마스턴 무어에 도착했을 때는 전투가 힘든 상황이었다. 또한, 루퍼트의 뒤를 따라야 했던 요크의 왕당군 병력은, 받지 못한 급여를 받기 전에는 싸울 수 없다며 전투를 거부했다. 뉴캐슬은 가지 않는 병력을제외하고 일부를 부하인 제임스 킹(James King, 1589~1652)에게 맡겨 보냈는데, 제임스 킹과 루퍼트는 과거 함께 참여한 전투에서의 악감정으로 사이가 좋지 않았다.

전투가 벌어지자, 왕당파군은 일단 주변에 있는 유일한 감제고지를 점령하고 포대를 설치해 의회군을 포격하려 했으나 올리버 크롬웰이 재빨리 기병을 움직여 왕당군을 격퇴했다. 왕당군은 지대가 낮은 황무지의 수로 뒤에 진을 쳤는데 요크에서의 병력이 늦은 데다 비까지 내리기 시작하여 제임스 킹은 본격적인 공격을 다음 날로 미루자고 루퍼트에게 건의했다. 왕당군이 저녁 식사를 준비하는 사이 연합군의 레슬리는 왕당군의 분위기가 흐트러져있는 것을 보고는 비가 소나기로 변하기 시작하는 초저녁 무렵에 기습공격을 명했다.

예기치 않은 기습에 왕당군 좌익은 삽시간에 허물어졌다. 왕당군 기병지휘관 바이런은 급하게 반격을 명했는데 이로 인해 의회군과 왕당군 기병이 뒤섞이게 되고 뒤에 있던 왕당군 총병은 우군을 쏠 것을 두려워해 사격을 하지 않았다. 결국 바이런의 부대는 무질서하게 물러났다. 루퍼트는 즉시 예비대를 동원하여 전선을 안정시키고 반격을 가하기 시작했지만, 이때 레슬리가 그의 본대에 총공격을 명하였고 왕당군의 우익 역시 측면돌파를 허용해 궤멸당했다.

이 전투에서 의회군의 피해는 5백도 채 되지 않았지만 왕당군은 4000이 전사하고 1500이 포로로 잡히면서 군 자체가 와해되었다. 이로써 왕당군은 북방에서 더 이상 세력을 유지할 수 없었다. 요크는 의회파의 수중에 넘어갔으며 루퍼트는 다시 수천의 병력을 모았지만 이미 전세가 기울었음을 인정하고 북방에서 버티기 보다는 왕이 있는 남쪽으로 힘없는 발걸음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루퍼트는 이때까지 무패(無敗)의 용장으로서 이름이 드높았는데 마스턴-무어의 대패로 그의 위명은 땅에 떨어졌다. 그리고 반대로 아마추어 군인으로서 전쟁에 참가한 크롬웰의 이름은 높아지면서 의회파에서의 영향력 역시 높아지게 되었다.

남부에서 찰스의 본군이 로스트위델(Lostwithiel)에서 의회파군을 격파하면서 콘월에서의 우위를 재확인하였지만, 이는 사실상 왕당군이 큰 전투에서 거둔 마지막 승리였다. 무엇보다도 찰스가 거병한 북방지역이 의회파에 넘어간 것은 돌이킬 수 없었다. 즉 뉴베리 이후로 균형을 이룬 전세는 마스턴-무어를 거치면서 확실하게 의회파쪽으로 넘어간 것이다.



스코틀랜드 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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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약파에 가담하였다가 이를 배반하고 왕당파가 된 몬트로즈 백작.



의회파가 승기를 잡은 것처럼 보였을 때 의회파의 편에 서서 싸우던 스코틀랜드에 문제가 생겼다. 찰스가 후작직을 약속하면서 새로이 후작이 된 몬트로즈가 서약파에 반대해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몬트로즈는 독립파로서 과격파 서약파들을 매우 못마땅하게 여겼고 신정(神政)으로 흘러가고 있던 종교적 분위기도 불편하게 생각하였다.

또한, 스코틀랜드에서는 서약파의 득세 속에서 숨을 죽이고 있지만 여전히 왕을 지지하던 왕당파 세력이 온존하여 있었다. 이러한 왕당파 중에는 고지대에 살고 있던 하이랜더(Highlanders) 가문이 많았는데 이들은 저지대 도시 출신들인 서약파들이 스코틀랜드를 주도하고 있는 사실을 상당히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다. 물론 최대의 하이랜더 가문인 아르가일 후작의 캠벨 가문이 서약파이기는 하지만, 하이랜더 가문들 사이에서도 누대를 거치면서 쌓인 원한이 있었다. 캠벨 가문이 서약파에 가담하면 원수 가문들이 반대쪽인 왕당파의 편을 들것임은 불문가지(不問可知)였다.

몬트로즈는 이미 1644년 초반에 왕당파로 편을 바꾼 뒤 한 번 서약파에 대한 반란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한 적이 있었다. 반란에 실패한 몬트로즈에게 아일랜드에서 도움의 손길이 왔다. 아일랜드 독립군의 동맹세력인 아일랜드 연합(Confederate Ireland)의 병력이 아일랜드로부터 건너온 것이다. 물론 병력을 보내는 아일랜드 측에서도 정치적인 계산이 있었다. 아일랜드군이 브리튼 섬에서 스코틀랜드군을 붙들고 있으면 스코틀랜드 병력이 아일랜드에게 자치를 약속한 왕을 치러 잉글랜드에 가지 못하게 되고, 나아가 아일랜드로도 건너오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몬트로즈가 새로이 거느리게 된 군은 1500명이었는데 그 중에는 캠밸 가문의 원수라 할 수 있는 맥도널드 가문의 500명도 포함이 되어있었다. 이들은 하이랜드 차지(Highland Charge), 즉 적들을 향하여 사거리 내에서 총을 한 번 쏘고 그 다음 검을 뽑아들고 돌격하는 방식으로 서약파의 허약한 징집군을 여러 차례 격파했다. 몬트로즈는 1500병력을 핵심으로 하여 맥도널드 가문과 캠벨의 적대가문들로부터 추가로 병력을 모았다.

맥도널드 가문의 알라스데어 맥도널드와 병력을 공동지휘하게 된 몬트로즈는 1644년 8월에 티퍼뮤어(Tippermuir) 전투에서 2천의 보병과 150의 기병으로 적병 8000명을 대파하고 2천명을 죽인다. 9월 13일에는 급조된 서약파 민병대를 애버딘(Aberdeen) 교외에서 격파한다. 이에 놀란 서약파의 좌장인 아르가일 후작은 그의 가문에서 병력을 모아 몬트로즈의 군과 맞섰다. 겨울을 쉰 왕당군은 이듬해(1645) 2월 2일에 1500의 병력으로 인버로키에서 캠밸 가문의 서약파 군대 3000명을 상대하여 이를 대파한다. 계속되는 승리로 왕당파가 스코틀랜드를 장악하는 듯이 보였지만 왕당군은 스코틀랜드인들, 특히 적인 캠벨 가문에 대한 학살과 약탈, 강간 등의 행위로 민심을 잃게 된다.

민심이 적대적이었다 하더라도 왕당군의 승리는 계속되었다. 서약파들은 다시 병력을 급조하여 몬트로즈와 싸우러 보냈으나 1645년 5월 9일에 아울데언(Auldearn)에서 대패한다. 그리고 1645년에 왕당군은 스코틀랜드의 주요도시인 던디(Dundee)와 글래스고우를 점령한다. 8월 15일에는 킬사이드(Kilsyth)에서 다시 서약파의 군대를 무찌른다. 왕당군의 전쟁은 매우 성공적이었으나 이때 스코틀랜드 왕당군 내에서 다시 분열이 일어났다. 몬트로즈는 스코틀랜드 장악이 끝났으니 저지대에서 병력을 모아 왕인 찰스를 도우러 잉글랜드로 가야한다고 했지만 병력의 상당수를 제공한 맥도널드 가문은 숙적인 아르가일의 영지를 차지한 것으로 만족했다. 캠벨 가문과의 원한 이외의 사항은 관심 밖이었던 것이다. 그 외의 가문들도 모두 병력을 빼내서 왕당군에서 이탈하였다.

몬트로즈는 그에게 남겨진 병력으로 남진하려 하였으나 대규모 증원군을 기대하였던 국경지역에서 거의 병력을 얻지 못하였다. 한편 잉글랜드에 있다가 킬사이드의 참패 소식을 들은 스코틀랜드군 총사령관 알렉산더 레슬리 경은 부하인 기병대장 데이비드 레슬리(David Leslie, 1600~1682)에게 일군을 주어 몬트로즈를 상대하게 한다. 데이비드 레슬리 역시 30년전쟁에서 잔뼈가 굵은 직업군인이었고 스코틀랜드로 가는 길에 5000의 기병과 1000명의 보병을 모아 몬트로즈가 하이랜드 고원지대로 도주하는 것을 막았다. 킬사이드에서의 대승 이후 불과 1개월 후, 몬트로즈의 700병력은 압도적인 병력의 레슬리 군을 필립바우(Philipbaugh)에서 맞아 전멸하고 많다. 이로써 스코틀랜드에서 잠시 기세를 올렸던 왕당군 세력은 한 판 싸움에 소멸하고 스코틀랜드는 다시 서약파가 장악하게 되었다.



신군(New Model Army)의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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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군을 지휘하고 있는 토머스 페어팩스.



북방에서 크게 이긴 의회파는 1645년에 지역별로 나누어져 존재하던 군을 하나로 뭉치고 이를 정규화시키고자 했다. 새로이 생긴 군은 보병 14000, 기병 약 8000, 그리고 약간의 기총병(騎銃兵)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들은 모두 정기적인 급료를 지급받고 지속적인 훈련을 받으며 상시적으로 근무한다는 점에서 일시적으로 징집된 민병이나 귀족들의 사병, 또는 스스로 전투기술을 연마하여 전투에 나오는 의용병과는 달랐다. 그리고 북방에서 군사적인 능력을 증명한 토머스 페어팩스가 새로이 창설된 군, 즉 신군(신모범군, New Model Army)의 사령관이 되었다.

승기는 의회파가 잡았지만 의회파 내부도 상황이 정리되지 않은 상태였다. 많은 사람들이 이미 전쟁에 지쳐있는 상태였고 의회파 지지자들의 대부분은 왕이 의회의 권위를 인정하는 선에서 전쟁을 종식시키는 것에 찬성하였다. 이런 면에 있어 왕정을 폐할 때까지 전쟁이 계속되어야 한다는 강경 반왕파 의원들과 크롬웰은 오히려 의회파 내에서도 소수였다. 그러나 강경파는 신군을 비롯하여 의회파의 군사력을 장악하고 있었고 결국 전쟁은 왕이 없어질 때까지 계속될 수밖에 없었다.

왕당군의 사령관인 루퍼트는 북방에서 실추된 명예를 회복하고자 다시 북방으로 군을 몰고 갔으나 비스턴 캐슬 등 일부 소소한 전투 이외에는 공을 세우지 못하였고 그의 병사들이 주변의 민호들을 약탈하는 바람에 오히려 시민들을 왕당군에서 멀어지게 하는 결과만 낳았다. 루퍼트가 북방을 공격하는 동안 크롬웰 역시 왕당군을 공격할 작전을 세웠다. 그리고 옥스퍼드에 간신히 복귀한 왕을 뒤흔들어 놓기 위해 옥스퍼드 인근에 대한 공격을 개시하였다. 4월 23일 옥스퍼드셔 지방의 왓링턴(Watlington) 공략으로 시작으로, 5월에는 의회파 병력이 아예 옥스퍼드를 포위하게 된다. 그러나 페어팩스 군이 옥스퍼드를 포위하였을 때 이미 왕은 옥스퍼드에 없었다. 본군은 북부로 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의회파는 정규군을 만들었지만 이를 어찌 쓸 줄을 몰랐고 정작 상비군으로서 왕의 군을 쫓아야 할 신군은 옥스퍼드에서 허수아비 치기를 하고 있었다. 결국 루퍼트의 군이 중부를 마구 공격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다음에야 의회는 군 지휘권을 포기하고 페어펙스에게 군을 일임하였다.



네이즈비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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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즈비 전투가 일어난 브로드 무어 전장. 전투 기념비가 세워졌다.



왕당군은 빨리 북상하여 웨일즈 인근의 드로잇윗치(Droitwich)에 다다라 그 곳에 있던 의회파 윌리엄 브레레튼의 군을 공격했다. 브레레튼은 요크셔와 스코틀랜드의 병력을 요청하였지만, 당시 스코틀랜드에서 내전이 벌어지는 바람에 스코틀랜드 군은 잉글랜드에서의 전투에 개입할 수 없었다. 한편 옥스퍼드의 포위가 풀리지 않는다는 소식을 들은 찰스가 루퍼트의 반대를 묵살하고 군을 남쪽으로 돌렸다. 이에 페어팩스는 얼른 옥스퍼드의 포위를 풀고 북진했고, 결국 왕당파와 의회파의 병력은 6월 중순 노스햄턴 근처의 네이즈비에서 만나게 된다.

왕당군은 삼중의 보병 전열을 중간에 배치하고 기병을 양 옆에 두었다. 그러나 이들을 지휘하여야 할 루퍼트는 왕의 총신인 딕비 경(Lord Digby)와 논쟁을 벌이다 크게 화를 내면서 지휘를 포기하고 대신 우익의 지휘를 맡았다. 의회파 지휘관은 페어팩스는 가장 신참 보병들을 최전방에 배치하였다. 그래야 이들이 목숨을 걸고 싸울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고참 보병들은 그 뒤에 서고 우익에는 크롬웰의 아이언사이드(Ironsides) 기병, 그리고 좌익에서는 아이어턴이 지휘하는 기병이 포진하고 있었다.

전투는 왕당파 포병대의 포격으로 시작되었다. 아이어턴의 의회파 기병이 적진을 향해 돌격했고, 아이어턴과 루퍼트의 기병대는 중간에서 격돌하였는데 전투중에 루퍼트의 기병대가 돌연 말머리를 돌려 달아났다. 이들이 도망하는 것으로 간주한 아이어턴은 왕당파 보병을 공격하려 방향을 틀었다. 이때 루퍼트는 2선에서 대기하고 있던 기병의 돌격을 명했고 난데없는 측면 기습을 받은 아이어턴의 기병은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한편, 의회파 보병은 기병과는 달리 자리를 지키고 있다가 왕당파 보병들이 사거리에 들어올 때서야 앞으로 나아갔다. 왕당파 보병은 의회파 신군 보병을 몰아붙였으나 2선의 고참 보병들이 완강히 버티면서 왕당파 보병은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이때 루퍼트가 방향을 돌려 의회파를 습격하여야 했으나, 그의 기병은 승리 대신 돈에 더욱 관심이 많았고 의회파의 보급품을 약탈하려 했다. 이마저도 신군 진지의 수비병들에게 막혀서 제대로 하지 못했다.

이때 크롬웰이 돌격해 왕당파 좌익을 몰아내었다. 일선은 혹시라도 적들이 다시 돌격해오는 것을 막기 위하여 놔두고 2선의 기병을 왕당파 보병들의 측면에 돌격시켰다. 왕당파 보병은 위기에 처했고, 만약 이때 찰스가 예비대를 동원해 크롬웰 기병의 측면을 쳤다면 크롬웰의 공격은 좌절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 신하가 “폐하, 정녕 죽음으로 들어가시옵니까?” 라고 하며 만류하니 왕은 주저할 수밖에 없었고 그 와중에 왕당파 보병은 철저히 짓밟힌다. 루퍼트는 빨리 본진에 돌아와 예비대를 출격시키려 했으나 무위로 돌아가고 찰스는 패배를 자인하고 도주한다. 왕당군은 1000명이 전사하고 5천이 포로로 잡히는 참패를 당한다. 이로서 왕당파의 본군은 완전히 붕괴되었고 찰스는 도망자 신세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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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즈비 전투 장면을 담은 그림.





네이즈비 이후



네이즈비는 왕당파에 있어 회복불능의 타격이었다. 왕당파는 다시는 예전과 같은 수준의 병력을 모으지 못하였다. 네이즈비에서 이긴 후 의회파 신군은 북방을 철저히 소탕했고, 스코틀랜드 내전 역시 데이빗 레슬리의 서약파 병력이 반대세력을 쓸어 없앴다. 아울러 네이즈비에서 발견된 왕의 기밀서류는 왕당파의 명분에 중대한 타격을 입혔다. 페어팩스의 군이 발견한 기밀문서에는 찰스가 아일랜드인들 뿐만이 아니라 어머니의 나라인 덴마크, 처가인 프랑스 등과 접촉하면서 영국에 외국군을 끌어들이려고 했던 정황이 적혀있었다. 이 기밀문서의 내용이 공개되자 왕에 대하여 유화적이던 세력들도 왕과의 타협을 포기하고 완전한 승리가 이루어질 때까지 전쟁을 계속할 것을 주문했다.

일단 북쪽을 정리한 신군은 서부에 남아있는 왕당파의 주요 병력 소탕을 목표로 삼았다. 찰스와 루퍼트는 각각 몬마우스와 브리스톨에서 병력을 모으려 하였으나, 신군의 진격 앞에서 왕당파들은 시간이 많지 않았다. 남쪽 도르셋 등지에서도 왕당파 잔군들이 남자들을 훈련시켜 병력으로 만들려고 하였지만 그들 역시 시간이 없었다. 그나마 왕당파 잔군 중에서 병력이 가장 많은 조지 고링은 부패하고 간교한 인물이었고 이 때문에 뜻을 같이하는 왕당파들도 그를 오히려 피해 다녔다.

6월 말에 페어팩스는 의회에 압력을 넣어 스코틀랜드군에 대한 전비지원 등 각종 사안들을 처리하게 했다. 스코틀랜드군은 알렉산더 레슬리의 지휘하에 다시 남진하였다. 의회군은 고링이 장악한 지역의 주요도시들을 점령하였고 7월 9일에는 페어팩스 휘하의 매시(Massey)가 고링의 주력을 아일민스터(Ilminster)에서 급습해 고링에게 중상을 입혔다.

한편 던캐스터로 간 찰스는 지역방백들이 병력을 모으겠다는 약속을 하자 한때 희망을 가졌지만 이마저도 알렉산더 레슬리 휘하 데이비드 레슬리의 빠른 남진으로 이루지 못하고 도망할 수밖에 없었다. 우스터로 옮긴 찰스는 그나마 믿었던 웨일즈에서도 병력이 오지 않을 것임을 깨달았다. 9월 8일에는 잔여 왕당파 도시 중 가장 큰 도시인 브리스톨이 떨어졌다. 이제 왕당파는 마음놓고 머무를 수 있는 곳도 얼마 되지 않았다. 왕의 총신인 딕비경이 병력을 몰고 북쪽을 회복하고자 떠났으나 10월말에 이르러서는 딕비의 병력도 거의 전멸하였다. 웨일즈 남부도 의회파에게 떨어지고 왕은 더 이상 물러날 수 없는 궁지로 몰리고 있었다.

고링에게 병력이 있다 해도 사실상 무질서한 오합지졸에 지나지 않았다. 고링은 홉튼에게 지휘권을 넘겨주었지만 의회파 정예 신군의 상대조차 되지 않았다. 다트머츠가 1월 18일에 신군에게 무너졌고, 홉튼은 2월 16일에 페이팩스에게 토링턴에서 대패한다. 마지막 남은 왕당군의 병력은 애스틀리경이 이끌었지만 이미 왕당군은 끝장난 것이나 다름없었고 이 마지막 병력마저 스토우온더월드(Stow-on-the-Wold)에서 윌리엄 브레레톤의 의회파군에게 패한다. 5월 5일에는 왕이 스코틀랜드군에게 항복하였고 5월 6일에는 뉴워크가, 6월 24일에는 왕당파의 ‘본거지’인 옥스퍼드가 의회파에게 항복하면서 소위 ‘1차’ 영국내전이 끝난다.


참고문헌 :
Barbara Donagan, “Atoricity, War Crime, and Treason in the English Civil War,” [The American Historical Review], Vol. 99, No. 4 (Oct., 1994) 1137-1168; Ian Gentles, “Why Men Fought in the British Civil Wars,” [The History Teacher], Vol. 26, No. 4 (Aug., 1993), 407-418; Leonard Hochberg, “The English Civil War in a Geographical Perspective,” [The Journal of Interdisciplinary History], Vol. 14, No. 4 (Spring, 1984), 729-750; Mark Stoyle, “English Nationalism, Celtic Particularism, and the English Civil War,” [The Historical Journal], Vol. 43, No. 4 (Dec., 2000), pp. 1113-1128; Charles Carlton, [Going to the Wars: the Experience of the British Civil Wars 1638-1651], (London: Routledge, 1992); Stanley D.M. Carpenter, [Military Leadership in the British Civil Wars 1642-1651], (London: Frank Cass, 2005); Anthony Fletcher, [The Outbreak of the English Civil War], (New York: New York University Press, 1981); John Kenyon and Jane Ohlmeyer (eds.), [The Civil Wars: A Military History of England, Scotland, and Ireland 1638-1660], (Oxford, UK: Oxford University Press, 1998); Conrad Russell, [The Causes of the English Civil War], (Oxford, UK: Clarendon Press, 1990); Paul K. Davis, [100 Decisive Battles: From Ancient Times to the Present],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2001).




김성남 | 안보·전쟁사 전문가
글쓴이 김성남은 전쟁이 인간 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관심을 가지고 이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미국 UC 버클리 동양학과를 졸업한 후 연세대학교 국제대학원에서 국제학 석사를 받고 한국학중앙연구원 정치학과에 진학하여 정치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주요 저서로는 [전쟁으로 보는 한국사], [전쟁으로 보는 삼국지], [전쟁 세계사] 등이 있으며 공저로 [4세대 전쟁]이, 역서로 [원시전쟁: 평화로움으로 조작된 인간의 원초적인 역사]가 있다.


발행2012.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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