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역사 개혁하며 전쟁하다 - 북방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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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26회 작성일 16-02-07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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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표


북방 전쟁 개요

전쟁주체


러시아, 폴란드, 덴마크, 노르웨이, 작센, 프로이센, 영국 vs 스웨덴, 오스만튀르크

전쟁시기


1700~1721

전쟁터


러시아, 스웨덴, 폴란드 등 북동유럽

주요전투


나르바 전투, 프라우슈타트 전투, 골로프치노 전투, 폴타바 전투, 항코 해전





러시아의 역습



나르바 전투 이후, 표트르 1세는 와신상담(臥薪嘗膽)의 세월을 보냈다. 하지만 마냥 누워서 곰쓸개나 핥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군사력을 재건하기 위해 밤낮으로 신료들을 몰아치고, 교회의 종까지 녹여 대포를 만들 정도로 온 힘을 다 기울였다. 원래 인구는 차고 넘치는 러시아인지라, 최고통치자의 의지만 확실하다면 병력을 재건하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표트르의 군대는 1701년부터 잉그리아와 리보니아에서 작전을 개시했다.

1702년에는 러시아군이 네바 강 어귀의 요지인 뇌테보리를 점령했고, 표트르는 이곳을 '도시를 여는 열쇠'라는 뜻의 실리셀부르크라고 개명했다. 이듬해에는 네바 강 하류의 요새 니엔솬츠를 점령하고 '도시를 닫는 열쇠'라는 뜻의 실로트부르크로 개명했으며, 인근의 자이츠 섬에 새로 요새를 지었는데 이것이 바로 상트페테르부르크였다. 또 코틀린 섬에 크론슈타트를 건설해서 스웨덴군이 다시 쳐들어왔을 때 서로 도우며 방어할 수 있게 배치했다. 그리고 마침내 1704년에는 7월에 타르투를 점령해 나르바를 고립시킨 뒤, 8월에 나르바 점령에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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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테보리를 포위한 러시아군.



표트르의 역습은 내정개혁과 동시에 진행되고 있었다. 1705년에는 턱수염을 깎는 조치를 모든 공직자에게 확대 적용했으며, 예배를 포함한 공식석상에서는 누구나 서구식 의상을 입도록 했다. 또한 중앙관료제를 서구식으로 개편해 나가면서, 그만큼 각 지방에 관습적으로 허용되던 자치권을 축소했다. 또한 1700년에 사망한 아드리안 총주교의 후임자를 계속 선발하지 않음으로써 왕권을 견제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세력이었던 종교계를 분열시키고, 차차 순치시켜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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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트페테르부르크의 건설 예정지에서 발트 해를 바라보는 표트르 1세.



하지만 이는 자연히 불만과 반발을 불러왔다. 1705년에는 아스트라한에서 해체된 옛 근위병대의 잔당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볼가 강 유역의 바슈키르인들도 봉기했다. 1707년에는 돈 강 유역의 카자크들이 불라빈의 영도 아래 반란을 일으켰고, 얼마 후에는 우크라이나의 카자크들도 일어섰다. 모두가 오랜 전통을 깨고 서구화를 강요하는정책과 자치권 축소 움직임에 반발하여 일어난 반란이었다. 전쟁을 벌이는 중에 여러 반란까지 처리해야 했던 표트르의 입장은 얼핏 난처해 보였지만, 반란군은 대체로 숫자, 무기, 훈련 수준 등에서 정규군의 상대가 아니었고 모스크바의 술책으로 자중지란(自中之亂)까지 일으켰으므로 큰 위협이 되지 못했다. 하지만 멀리 떨어진 곳에서 폴란드와 싸우고 있던 카를 12세에게는 그 상황이 무척 고무적이라고 전해졌던 것같다. 그것은 나중에 그의 중대한 실책으로 이어진다.



‘이제 적은 하나만 남았다’



러시아에서 회군한 카를 12세는 1701년에 리보니아의 리가를 점령하고 있던 폴란드군을 대패시켰고, 견디지 못한 아우구스투스가 본국으로 후퇴하자 그를 쫓아 폴란드로 침입했다. 1702년에는 수도 바르샤바가 카를에게 함락되었고, 뒤이은 클리소프 전투에서 1만 6천의 스웨덴군은 2만 3천의 폴란드군을 분쇄하고 카르코프를 점령했다. 당시 폴란드군은 늪지대의 지리적 이점을 활용하여 한동안 잘 방어했으나, 결국 전투 중에 자유자재로 병력을 나누고 합치는 솜씨에서 카를 12세를 당할 수 없음을 증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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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우슈타트 전투에서 이기고 목사의 축복을 받는 스웨덴 병사들.



1703년에도 폴란드의 무운은 좋아지지 않았으며, 아우구스투스는 작센으로 도망친 상태에서 평화협상을 제의했다. 하지만 카를 12세는 폴란드를 확실히 꺾어 놔야 안심할 수 있다고 여겼고, 레시친스키(Stanisław Leszczyński, 1677~1766)라는 폴란드 귀족을 새로운 왕으로 내세웠다. 이를 받아들일 수 없던 아우구스투스는 러시아와 다시 연대하여 스웨덴에 저항했으나, 1706년에 작센에 침입한 카를 12세는 프라우슈타트 전투에서 9천의 병력으로 2만의 작센군 및 러시아의 지원군을 공략, 적이 1만의 사상자를 내며 완패하도록 만들었다. 이때 카를이 펼친 ‘이중 포위 작전’은 기원전 216년에 한니발칸나에 전투에서 펼친 작전과 더불어 전쟁사에서 가장 모범적인 포위섬멸전 사례로 손꼽힌다. 이로써 그는 결국 아우구스투스의 항복을 받아낼 수 있었다. 알트란슈테트 조약의 결과 아우구스투스는 폐위되고(다만 러시아와 절연한다는 조건으로, 작센 선제후 지위는 유지했다) 레시친스키가 새 폴란드 왕이 되었으며, 폴란드는 사실상 스웨덴의 속국이 되어버렸다. 이제 남은 적은 하나뿐. 러시아만 쓰러트리면 북방전쟁은 카를의 승리로 끝나고, 스웨덴 제국은 전보다도 더 강력한 세력을 떨칠 수 있을 터였다.


참고문헌 :
버나드 몽고메리, [전쟁의 역사](책세상, 2004); P. R. 파머-J. 콜튼, [서양근대사](삼지원, 1985); 김용구, [세계외교사](서울대학교출판부, 2006); 윌리엄 위어, [세상을 바꾼 전쟁](시아출판사, 2005); 크리스터 외르겐젠 외, [근대 전쟁의 탄생: 1500∼1763년 유럽의 무기, 전투, 전술](미지북스, 2011); 이에인 딕키 외, [해전의 모든 것](휴먼앤북스, 2010); 제임스 크라크라프트, [표트르 대제: 러시아를 일으킨 리더십](살림, 2008); 박지배, [표트르 대제: 강력한 추진력으로 러시아를 일으키다](살림, 2009); 이길용, “스웨덴의 근대발전사” [유럽연구].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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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규진 | 서울교육대학교 교수/역사저술가
글쓴이 함규진은 여러 방면의 지적 흐름에 관심이 많다. 정치학을 전공하여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한편, 주로 역사와 관련된 책을 여러 권 썼고, 인물이나 사상에 대한 번역서도 많이 냈다. 동양과 서양, 전통과 현대, 보수와 진보 등 서로 대립되는 듯한 입장 사이에 길을 내고 함께 살아갈 집을 짓는 것이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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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2012.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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