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역사 전쟁의 결산 - 7년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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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15회 작성일 16-02-07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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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표


7년 전쟁 개요

전쟁주체


프로이센, 영국, 포르투갈 vs 오스트리아, 프랑스, 러시아, 스웨덴, 스페인, 작센, 무갈제국

전쟁시기


1756~1763

전쟁터


독일, 북아메리카, 서인도 제도, 남아메리카, 인도, 아프리카

주요전투


로스바흐 전투, 로이텐 전투, 쿠네르스도르프 전투, 퀘벡 전투, 아바나 전투, 라고스 해전, 키브롱 해전





누구를 위한 전쟁인가?





전쟁이란 얼마나 비참한가? 저 처참한 병사들을 보게! 훈련 중에는 먹는 빵보다 맞는 매가 더 많고, 전투가 벌어지면 매를 맞지 않는 대신 죽거나 다치거나가 아닌가. 농민들의 고통은 그보다 더 심하다네. 인간이 견딜 수 있는 최대한의 고통을 견디다가, 결국 굶어 죽게 되지. 마리아 테레지아와 나의 개인적 고집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불행해져 버렸네. 우리가 지금 수행하고 있는 이 전쟁, 이보다 더 참혹한 전쟁은 아마 없을 거야.

소년 시절에는 ‘군인정신’만 강조하는 부왕이 싫어서 ‘가출’하려다 실패한 적도 있었고(함께 도망치려던 친구는 프리드리히의 눈앞에서 목이 잘렸다), 왕위에 오른 뒤에도 철학과 예술을 좋아해서 스스로 플루트를 연주하며, 볼테르(Voltaire, 1694~1778)를 비롯한 철학자들을 상수시 궁에 불러모으기도 했던 ‘철인왕’ 프리드리히 2세는 7년 전쟁 도중에 자신의 비서에게 이렇게 말하며 탄식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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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루트를 연주하는 프리드리히 2세. 멘첼의 1852년도 그림.



그러나 대외관계에서 그는 외교와 타협으로 일을 원만히 처리하는 일은 드물었다. 아니, 그러고 싶었어도 그쪽의 재능은 모자랐던 걸까? 그에게 뒷날의 비스마르크(Otto Eduard Leopold Bismarck, 1815~1898)처럼 유럽 여러 나라와의 관계를 능수능란하게 엮는 능력이 있었다면 그처럼 동분서주하며 전쟁으로 날을 지새지는 않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어쨌든 그는 전쟁의 참상에 몸서리를 치면서도 전쟁을 피하려 하지 않았고, 오히려 자기 편에서 선제공격에 나서기를 잘했다. 전쟁철학에 있어서도 그는 일사불란한 군기야말로 전투력을 높이는 최대 요소 중 하나라고 믿었고, “명령이 떨어지기 전까지는 단 한 방의 총도 쏘는 병사가 있어서는 절대로 안 된다”고 휘하 장성들에게 누누이 시달했다. 그리고 그런 군기를 잡기 위해 병사들에게 몽둥이 찜질을 하는 모습을 탄식하며 바라보았다.

이처럼 모순적인 존재였던 프리드리히 2세는 결국 증조부 이래의 독일 군국주의를 가장 훌륭하게 꽃피운 장본인이 된 한편, 그런 군국주의가 지도자 개인의 야심이나 소수 귀족의 이익을 위한 것이어서는 안 되며, “국가와 국민 전체”의 복지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는 굳은 신념 또한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평화시의 그는 국민 복지 증진에 힘을 쏟았는데, 사실 그가 보기에 영토가 넓지도 않고 자원도 식민지도 없는 프로이센이 복지를 누리려면 전쟁에 의존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 자신에게는 전쟁을 혐오하면서 늘 전쟁을 하는 일이 모순이 아니었던 것이다. 전쟁은 국민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한 고귀한 의무의 실천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과연 대포로 버터를 만들 수 있을 것인가. 그의 ‘생존과 복지를 위한 군국주의’ 이념은 결국 19세기 독일의 무리한 팽창 정책과 20세기 세계대전을 일으키게 되는 ‘독일 민족의 생활권’ 관념과 이어진다. “독일인이 사람답게 살려면 체코나 폴란드를 집어삼킬 수밖에 없다”는 아전인수식 논리는 프리드리히로부터 비롯된다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결국 슐레지엔을 병합하려는 그의 의지가 승리를 거둔 7년 전쟁은 독일 통일의 주역으로 오스트리아 대신 프로이센이 올라서고, 이후 빌헬름 2세, 히틀러로 이어지는 ‘영광스러운 파멸’의 전주곡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보다 더 참혹한 전쟁”으로도 이어지는.



역사를 위하여, 주사위는 던져졌다



7년 전쟁이 오스트리아의 위상을 떨어트린 것 이상으로 프랑스의 위상도 떨어졌다. 이제 프랑스는 유럽 대륙의 균형자 지위를 잃었을 뿐 아니라, 아메리카와 인도에서 식민지 건설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그에 따라 바다 건너 섬나라에 대해 쌓인 울분과 원한은 곧 이어지게 될 미국 독립전쟁에서 미국을 전력으로 응원하도록 할 것이며, 그것은 심해지는 재정적자를 부추기며 구체제 몰락의 한 원인을 만들어낼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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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독립전쟁 후원을 의논하는 루이16세



영국은 캐나다와 인도에서 유아독존의 지위를 구축함으로써 장차 ‘해가 지지 않는 나라’를 만들어갈 기반을 닦았다. 하지만 북아메리카에서는 7년 전쟁 과정에서 식민지인과 본토인의 이해관계가 다르다는 사실을 각인시켰고, 나아가 막대한 전쟁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식민지에 부과하게 될 각종 특별세는 결국 그들의 분노를 촉발시켜 독립을 부르짖게 만들 터였다.

러시아는 북방 전쟁에 이어 다시 한 번 영광을 얻었다. 비록 걸출한 지휘관이나 탁월한 전술을 선보이지 못했지만, 러시아가 반 프로이센 진영에 섰을 때 프로이센은 휘청거렸고, 친 프로이센으로 돌아섰을 때 오스트리아가 손을 들었다. 이것으로 러시아의 막강한 저력이 똑똑히 확인된 셈이었다. 이제 세 번째로 갖게 될 또 하나의 영광, 즉 나폴레옹 전쟁에서 반프랑스 연합의 맹주 노릇을 하게 되면서 얻게 될 영광까지 더하게 되면, 이 나라는 대륙세력의 대표로서 해양세력의 대표인 영국과 대치하는 구도를 확실히 가져가게 된다. 전쟁기술에서나 국제관계에서나, “현대”를 위한 준비가 차차 진행되고 있었다.


참고문헌 :
버나드 몽고메리, [전쟁의 역사], 책세상, 2004; P. R. 파머-J. 콜튼, [서양근대사], 삼지원, 1985; 김용구, [세계외교사], 서울대학교출판부, 2006; 크리스터 외르겐젠 외, [근대 전쟁의 탄생: 1500∼1763년 유럽의 무기, 전투, 전술], 미지북스, 2011; 이에인 딕키 외, [해전의 모든 것], 휴먼앤북스, 2010; 앨런 브링클리, [있는 그대로의 미국사], 휴머니스트, 2011; 조길태, [영국의 인도 통치 정책], 민음사, 2004; 하마우즈 데쓰오, [대영제국은 인도를 어떻게 통치하였는가: 영국 동인도회사 1600~1858], 심산문화, 2004; 김형률, “7년전쟁(1756-1763)과 18세기 유럽의 세력 균형” [상명사학], 1995; 김상태, “프리드리히 2세의 외교정책의 이념과 실제” [서양사론],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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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규진 | 서울교육대학교 교수/역사저술가
글쓴이 함규진은 여러 방면의 지적 흐름에 관심이 많다. 정치학을 전공하여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한편, 주로 역사와 관련된 책을 여러 권 썼고, 인물이나 사상에 대한 번역서도 많이 냈다. 동양과 서양, 전통과 현대, 보수와 진보 등 서로 대립되는 듯한 입장 사이에 길을 내고 함께 살아갈 집을 짓는 것이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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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2012.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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