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역사 미국독립전쟁 - 13 식민지의 불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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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17회 작성일 16-02-07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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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렌턴 전투를 위해 델라웨어 강을 건너고 있는 조지 워싱턴.




미국독립전쟁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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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표
전쟁주체미국(13주), 영국,
프랑스, 헤센(용병),
에스파냐, 네덜란드
전쟁시기1775~1783
전쟁터현재 미국 동부,
캐나다 온타리오/퀘벡,
서인도 제도 일부
주요전투렉싱턴/콩코드, 벙커힐, 롱아일랜드,
트렌턴, 사라토가, 몬마우스,
캠든, 사바나, 길포드 코트하우스,
요크타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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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목차
1. 13 식민지의 불만2. 프렌치 인디언 전쟁과 식민지 억압
3. 미합중국의 탄생4. 연이은 전투
5. 유럽의 지원과 남부의 격전6. 요크타운의 승리
7. 전쟁의 여파

동조동근의 두 나라, 과거에는 무슨 일이



1992년 영국이 EU 가입문제를 놓고 투표를 할 때 반대자들의 구호는 ‘An Island we must stay (영원히 섬으로 남아야 한다)’였다. 비록 EU의 회원국이 되기는 했지만 영국은 유럽 대륙(Continent)과는 다른 존재로 스스로를 인식하고 있다. 오히려 대서양 바다건너 미국과 더 가까운 모습을 보일 때가 많다. 이 때문에 ‘영미권(英美圈)’이라는 단어가 생겨났다. 영국과 미국의 언어적 문화적 유사성을 들어 두 나라를 통칭할 때 쓰는 단어이다. 2차대전 때 같이 싸웠던 데다 서로를 배신할 수 없는 진정한 우방이라는 인식은 영국과 미국을 단단히 묶어주고 있다. 현재 미국의 공용어는 영어이고 정치제도와 법률, 문화적 관습에서도 영국의 문화를 이어받은 것이 많아 우리식의 표현으로 동조동근(同祖同根)이라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역사를 아는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미국은 영국의 식민지였다 독립한 나라이다. 그것도 평화로운 방법이 아니라 영국의 식민통치를 방해하고 결국 영국 왕이 보낸 영국 군대와 3년을 치열하게 싸워 이들을 몰아내고 국제적으로 조약을 승인 받았다. 물론 영국의 통치를 유지하자는 사람도 없지 않았으나 영국의 식민통치는 식민지에서 독립강경파의 입지를 높여주었고 결국 현재 미국은 영국에서 떨어져나갔다. 한때는 부조(父祖)의 나라였으나 미대륙에 살던 사람들은 결국 ‘못 살겠다’ 면서 총칼을 들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


잉글랜드인, 신대륙에 식민지를 세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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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미국에 영국의 식민지를 세운 월터 롤리.


콜럼버스에 의해 유럽인들에게 새로운 땅의 존재가 알려진 후 유럽인들은 끝없이 이 새로운 땅으로 몰려들었다. 먼저 새로운 땅에 대한 야망과 황금에 대한 탐욕에 사로잡힌 에스파냐인들은 아즈텍과 잉카제국을 멸망시키고 그 땅을 누에바-에스파냐(新 에스파냐)라는 거대한 식민지로 만들었다. 잉글랜드인들이 에스파냐인들의 뒤를 이어 바다로 나왔을 때는 이미 에스파냐인들이 지금의 멕시코에서 칠레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 선점하고 있었고 하는 수 없이 잉글랜드인들은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새로운 대륙에서 잉글랜드인들이 처음으로 닻을 내린 곳은 지금의 미국 동부 노스캐롤라이나 해안이었다. 1584년, 월터 롤리(Walter Raleigh, 1552?~1618)가 엘리자베스 여왕(Elizabeth I, 1533~1603)으로부터 ‘버지니아’라고 불리는 땅에 식민지를 세우는 조건으로 개발허가를 얻어낸 것이다. 1584년 4월에 롤리는 함대를 보내 지금의 미국 동부를 탐험하게 했고, 1585년에는 로어노크(Roanoke)에 107명의 잉글랜드인들이 상륙하면서 북아메리카 최초의 잉글랜드(영국) 식민지가 세워졌다. 그러나 곧이어 잉글랜드-에스파냐 전쟁이 발발하면서 식민지에 대한 보급이 끊기고 존 화이트(John White)가 1590년에 로아노크를 다시 찾았을 때 마을은 버려진 후였고 사람들은 온데간데 없었다.

‘버지니아’ 지역에 식민지를 세우려는 런던 버지니아 회사(The Virginia Company of London)의 노력은 계속되었고 1607년에는 영국 최초의 영구적 식민지라 할 수 있는 제임스타운(현재 미국 버지니아주 윌리엄스버그 시 인근)이 세워진다. 버지니아에는 잉글랜드인들의 유입이 계속되어 인구가 늘어났고 제임스타운은 1616년부터 1699년까지 버지니아의 ‘수도’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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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회사(빨간 부분)와 플리머츠 회사(녹색 부분)가 각각 제임스 1세로부터 승인 받은 식민지. <출처: (CC)Nicoray at Wikipedia.org>


한편, 1620년에 지금의 미국 북동부 매사추세츠에도 플리머스 식민지가 세워졌는데, 이것은 제임스타운 식민지와 그 성격이 완전히 달랐다. 제임스타운이 잉글랜드의 귀족과 기업가, 왕가의 지대한 관심과 지원을 받아 생긴 계획된 식민지였다면, 플리머츠는 당시 혼란스런 잉글랜드의 정세 속에 청교도에 대한 종교 탄압이 자행되자 이를 피해 새로운 땅에 온 ‘난민’의 성격에 가까웠다. 이들은 모두 청교도들이었는데 1607년에 성공회 요크 대주교가 교인들을 체포하기 시작하자 자신들의 고향인 노팅엄셔 지방의 스크루비(Scrooby)를 떠나 네덜란드의 레이덴(Leiden)을 거쳐, ‘메이플라워’라는 선박을 고용해 북미에 당도하게 된 것이다. 이때 현재 뉴욕 인근에는 네덜란드인들의 마을이 생긴 이후였고 만약 네덜란드인들과 같이 살게 된다면 새로운 땅에서의 정착이 보다 쉬웠겠지만, 자식 세대의 네덜란드화(化)를 피해 더 북쪽으로 올라가 결국 매사추세츠에 정착했다.

첫 겨울에 도착한 정착민의 반이 죽는 등 어려움을 겪었으나 새로운 삶을 찾는 사람들은 계속해 대서양을 건넜고 1620년에 약 2500명에 불과하였던 식민지 인구는 1770년대에 이르러 184만으로 늘어난다. 인구가 늘어나면서 영국정부는 미국동부해안을 13개의 지역으로 나누었는데 후일 이들이 독립하여 13개주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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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리머스 하버에 도착한 메이플라워호.



식민지의 정치와 경제



미국은 초기부터 의회민주주의를 기본으로 하는 공화제를 채택했다. 그러나 17세기 영국의 식민지가 세워지고 있을 때 건너온 사람들에게 ‘민주주의’란 개념은 생소했다. 따라서 후일 세워질 민주정을 만들겠다는 의지는 아직 없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영국 본국보다 경제 사정이 열악하고 소상인이나 자영농이 많은 식민지의 환경이 미국식 민주주의 발현과 성장에 유리하게 작용했음은 분명하다. 식민지의 정치체제는 기본적으로 ‘재산을 가지고 있는 자’들만이 투표를 할 수 있는 영국식의 제도에 기반하고 있었다. 비록 영국의 제도에 기반한 것이기는 하지만 투표에 의한 의원선출제도는 후일 독립전쟁에서의 승리 이후 서게 되는 민주공화정의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북미 식민지의 주요 경제적 기반은 농업이었지만 농업과 어업 등에서 얻어지는 산물이 매우 다양하였기에 식민지 각 지역간 교역이 활발하였고 영국 본국과의 교역량도 상당하였다. 그러나 영국의 식민지 운영은 중상주의(重商主義, mercantilism)를 기본으로 하고 있었다. 북미 식민지의 주민들은 영국 본국 및 기타 영국 식민지와 자유로운 교역을 할 수 있었으나 다른 나라 또는 그 식민지와의 교역에는 상당히 제약을 받았다. 본국과 식민지간 무역을 독점하면서 영국 본국에는 천문학적인 부(富)가 축적되었고 교역품에 대한 많은 관세와 세금을 매기면서 국가재정도 획기적으로 늘었다. 영국은 식민지 무역으로 확충된 재정으로 해군의 획기적인 증강에 나섰고 증강된 영국 해군은 다른 나라의 식민지를 공격하면서 동시에 타국의 공격으로부터 자국 식민지를 지켰다. 영국 중상주의 정책의 기조는 런던의 국고를 금은(金銀)으로 가득 채우는 것이었다. 다른 나라와의 교역에서 손해가 발생하면 ‘나랏돈이 세는’ 것으로 간주했고 이 때문에 수출은 장려했지만 수입은 억제하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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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지니아의 담배농장에서 일하고 있는 흑인 노예들. 북미 식민지의 팽창은 노예무역의 증가라는 불행한 결과를 가져왔다.


하지만, 13개 주의 입장에서는 경제가 발전하면서 영국이나 영국의 기타 식민지에서 들여오는 수입품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더구나 가까이 있는 프랑스나 에스파냐의 식민지를 두고 멀고 먼 영국 식민지로부터, 그것도 높은 수송비용을 지불하면서 물건을 들여와야 하는 데 대한 불만이 쌓여갔다. 다른 나라와의 무역에 대한 제한보다 더 심각한 것은, 영국 본국이 식민지와 타국 간 무역의 중간 상인 역할을 하면서 추가적인 이득을 챙겼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매사추세츠의 상인이 네덜란드나 프랑스에서 물건을 수입하려고 하면 반드시 영국을 거쳐서 수입해야 했다. 이로써 영국 본국은 관세나 수입세 등을 챙김과 동시에, 외국 물건의 가격을 높였는데, 수입품이 영국 본국의 물품보다 싼 경우 영국 물품이 가격 경쟁에서 뒤쳐질 수 있기 때문에 이런 방법으로 가격을 높인 것이다. 13개 주 식민지 상인들이 가진 또 다른 불만은 본국의 항해조례(Navigation Act)에 따라 무슨 물건을 사고 팔 건 간에 영국 배에 실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보다 저렴한 운송료를 낼 수 있는 배를 찾아 물건을 실어 보낼 자유는 허락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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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상선단(merchant navy)의 문장(紋章). <출처: (CC)Nxn 0405 chl at Wikipedia.org>



누적되는 식민지의 불만, 독립전쟁의 싹이 되다



자유롭게 장사할 자유를 원하는 13 식민지 상인들과 무역으로 인한 이익은 국부(國富)로 전환해야 한다는 영국 본국의 이해는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독립전쟁은 어느 날 갑자기 발생한 것이 아니라 이러한 영국의 식민지 정책에서 이미 싹트고 있었다. 아직 전쟁은커녕 독립의 기미조차 보이지 않고 있던 1721년에 13개 식민지는 본국의 중상주의 정책을 공개적으로 비판하고 나섰다. 매사추세츠 대표로 영국에 가 있던 제레미아 더머(Jeremiah Dummer)는 영국 본국의 정책을 ‘억압’이라고 까지 표현하기에 이르렀다. Dummer에 의하면




이 세상 모든 것 중 억압만큼 상업에 반대되는 것이 없고 억압은 상업의 가장 파괴적인 적이라 할 수 있다. 시대와 나라를 막론하고 지배자들은 억압을 하고자 하는 경향이 매우 심하였다. 결국 스스로의 힘을 키우면서 인민들의 자유를 깎아 내리는 것이 국익(國益)을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없는 것이다.

1731년에 ‘Amicus Reipublicae’란 필명을 쓴 저자가 저술한 팸플릿에는 마치 45년 뒤 출판되는 [국부론]이나 후대의 경제학자인 리카르도를 베낀 것 같은 말들이 담겨있다. 이 저자는 “사람들이 세상에서 번영을 누릴 수 있는 필수조건으로서의 교역과 상업”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사람들의 부와 번영은 사람들의 근면한 노동이 동인(動因)이 되어 그 본질을 이루며 이를 거치지 않고는 이룰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상업의 유리함과 도움을 얻지 못하면 노동으로서 얻을 수 있는 부는 그리 많지 않다. 모든 노동에는 이익이 있어야 하며 이익은 노동의 최종적인 결과이기도 하다. 상업이 없고서는 노동의 이익이 많지 않을 것이며 이 때문에 상업은 이익을 이루기 위한 노동, 즉 부와 번영을 위한 노동의 근본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어떤 나라이건 간에 필요한 모든 것을 갖추고 있지는 않다] 그리고 각 나라마다 생산을 많이 할 수 있는 고유의 물품이 있다. 이를 적절히 유통시키고 소비하여 그 가치를 긍정하고 노동을 진작시키고 돕기 위하여 상업은 필수적이다.


타국과의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기 위하여 어느 정도 중상주의가 불가피한 면도 있었지만 13개 식민지 사람들은 자기들이 애써 벌어놓은 돈을 영국이 다 런던으로 가져간다며 불평하였고 본국을 원망하는 목소리가 높아갔다.

참고문헌: Paul K. Davis, [100 Decisive Battles],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2001); Alexander Keyssar, [The Right to Vote: The Contested History of Democracy in the United States], (Basic Books, 2001); Piers Mackesy, [The War for America 1775-1783], (Bison Books, 1993); John C. Miller, [Origins of the American Revolution], (Boston: Little, Brown, 1943); Maurice Matloff (eds.), [American Military History: 1775-1902 - Vol. 1], (Conshohocken: Combined Books, 1996); Thomas Paine, [Common Sense], (Dover Publications, 1997); Max Savelle, [Seeds of Liberty:The Genesis of the American Mind], (Kessinger Publishing, 2005); The Library of Congress 'America During the Age of Revolution, 1764-1775'; National Park Service 'Guilford Courthouse'; National Park Service 'Yorktown'; www.battleofcamden.org 'Documentary History of the Battle of Camden, 16 August 1780';





김성남 | 안보·전쟁사 전문가
글쓴이 김성남은 전쟁이 인간 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관심을 가지고 이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미국 UC 버클리 동양학과를 졸업한 후 연세대학교 국제대학원에서 국제학 석사를 받고 한국학중앙연구원 정치학과에 진학하여 정치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주요 저서로는 [전쟁으로 보는 한국사], [전쟁으로 보는 삼국지], [전쟁 세계사] 등이 있으며 공저로 [4세대 전쟁]이, 역서로 [원시전쟁: 평화로움으로 조작된 인간의 원초적인 역사]가 있다.


발행2012.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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