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역사 비스마르크 해전의 결과 - 비스마르크 해전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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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70회 작성일 16-02-07 0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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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해군 PT 정. 비스마르크 해전에서 미군은 PT정을 동원, 표류하는 일본군을 섬멸했다.


 


 


목차


목차

1. 비스마르크 해전 (1943)

2. 비스마르크 해전 전투 전개

3. 비스마르크 해전의 결과

지옥의 밤 - 3월 4일




일본 선단에게 지옥의 밤이 다가왔다. 그날 밤에 10척의 미 해군 어뢰정(PT정)들이 밤 귀신처럼 다가왔다. 그러나 두 척은 전투에서 파생한 대형 부유물과 충돌되어 파괴되는 바람에 기지로 되돌아가고 나머지 8척이 항진해서 3월 4일 아직도 캄캄한 새벽 라에 앞바다까지 접근했다. 어뢰정대는 검은 밤바다 해상에서 불타고 있는 수송선 한 척을 발견하고 어뢰를 발사해서 격침시켰다. 수송선 오이가와마루였다. 날이 밝아 오자 다시 나타난 B-17 한 기가 침몰하는 구축함 아라시오에서 생존자를 구조하고 있던 네 번째의 구축함 아사시오를 500파운드 폭탄 투하로 격침시켰다.

2,700여명의 일본 표류자들이 구조되어 구축함으로 라바울로 되돌아 왔지만, 그래도 3월 4일에는 아직 1,000여명이나 되는 생존자들이 해상에서 표류하고 있었다. 3월 4일과 5일 PT 정들과 항공기들이 해상의 표류자들을 발견과 동시에 사살했다. 연합군측의 논리는 이들이 살아서 뉴기니 섬에 상륙하게 되면 연합군의 병사들을 죽이는 위협적인 존재가 되기 때문에 모두 멸살해버려야 한다는 비정한 것이었다. 3월 6일 급거 출동한 일본 잠수함 I-17과 I-26이 170명을 더 구조하였다. 이틀 뒤에는 I-26이 다시 54명을 구조해서 라에에 상륙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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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잠수함 I-26



표류자들의 운명




표류하는 수많은 일본 병력들은 뉴기니 해안 여러 곳에 표착하였다. 키리위나에 상륙한 18명의 병력들은 미국 PT정에게 포로가 되었다. 이들은 수송선의 민간인 선원들이었기에 학살을 면했었다. 일부 표류자는 과달카날 섬까지 흘러가서 상륙했다가 미군 순찰대에게 죽임을 당했다. 굿인업 섬에서는 호주군 47사단 순찰대가 거의 죽다시피 한 상태로 표류해온 일본군들을 발견하였다. 호주군들을 일본군이 항복을 거부하자 72여명을 사살하고 42명을 포로로 잡았다. 일본 표류자들이 설사 연합군에게 발각되지 않았더라도 야만적인 원주민들에게 발견되면 학살과 약탈을 면치 못했다.

호주군 순찰조가 두 개의 구명 뗏목을 타고 표류해온 일본군 8명을 사살하고 전리품을 포획하였다. 이 전리품 중에서 최고의 정보 가치가 있는 비밀문서가 발견되었다. 밀봉된 통조림 캔에 들어있던 전 일본 육군의 조직체계도와 각 직책에 있는 장교들의 명단을 손에 넣은 것이었다. 이 정보로 모든 일본군의 부대들과 배치 장교들이 파악되었고 이 중에는 전에는 전혀 알려지지도 않은 것도 있었다. 태평양 전쟁 중에 연합군이 입수한 가장 중요한 정보중의 하나였던 이 비밀 문서는 영어로 번역되어 태평양의 각 부대에 배포되어 군사 작전에 유용하게 사용하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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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침 당하는 일본 구축함. 마지막 몸부림으로 회피 기동을 하고 있지만 곧 침몰되었다.



일본의 해전 피해




이번 비스마르크 해전의 결과로 파견된 일본 육군 51사단 6,900명의 병력 중에 무기와 장비를 모두 잃은 1,200명만이 라에에 도착하였고 2,700명은 구축함과 잠수함 등에게 구조되어 라바울로 다시 돌아갔고 나머지 2,890명의 일본 육군 병사들과 수병들, 민간 선원들은 죽임을 당했다. 연합군은 단지 전사 10명, 사고사 3명의 피해를 입었을 따름이다.

해전의 피해는 한 달도 되지 않아 일본군의 작전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비스마르크 해전에서 수송선단에서 가장 작은 겐부마루(建武丸 950톤)의 격침은 연합군이 거둔 커다란 전과중의 하나였다. 이 선박에는 1,000여 드럼의 항공유가 실려 있었다. 일본 해군은 약 400기의 해군기를 집중해서 한달 뒤인 4월 1일부터 대대적인 항공 공격 작전인 이호 작전(い号 作戰)을 개시했었다. 그러나 겐부마루의 격침은 이 작전에 막대한 지장을 주었다. 중요한 전략 거점 라에의 해군 항공대가 연료 부족으로 맥을 못 추었기 때문이었다. 작전은 4월 16일 엉성하게 종료되었고 연합함대 사령관 야마모토 이소로쿠 대장은 작전 참가 부대를 치하하러 부겐빌 섬의 부인(Buin) 비행장으로 가다가 격추되어 사망했다.

이 비스마르크 해상 전투에서 일본군이 입은 피해는 엄청난 것이었다. 후에 유명한 전사가로 변신한 라바울 주둔 해군 항공대 참모 오쿠미야 마사다케(奥宮 正武)중좌는 이렇게 표현하였다.

“과달카날 섬 주변의 격심한 여러 해전들에서도 일본이 이렇게 혹심한 타격을 입은 사례는 없었다. 우리는 더 이상 화물선은 말할 것도 없고 빠르고 안전한 구축함이라도 웨왁 동쪽의 북 뉴기니 해변에는 파견할 수가 없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다.“


그 뒤의 뉴기니 전선




비스마르크 해전의 대참사 후에 열린 일본 육해군의 고위층 회의에서 그때까지의 솔로몬 군도 고수 중시 전략에서 뉴기니 섬의 방어 중시로 남서 태평양 전략을 변경했지만 이 조차 실행 불가능의 전략이었다. 비스마르크의 대참사를 입은 일본군은 과달카날에 이어서 뉴기니에서도 맥을 못 추고 완전히 수세로 밀리기 시작했다.

원인은 충분한 보급의 불가능 때문이었다. 비스마르크 해상 수송 작전이 실패로 끝난 뒤로 일본 대본영은 더 이상 뉴기니의 방어 거점 라에에 대규모 해상 보급을 하지 않기로 했다. 그 뒤의 보급은 과달카날에서 쓰라리게 피해를 보았으면서도 어쩔 수없이 실행할 수밖에 없는 방법, 즉, 잠수함과 대형 발동정, 그리고 구축함 등에 의한 야간 게릴라식 보급이 행해져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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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이 비스마르크 해전 전에 뉴기니 남단 밀른 만에서 공세를 취하다가 유기한 대형 발동정. 통상 오하쓰(大發)라고 불렸으며 태평양 전쟁에서 널리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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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기니 전선의 호주군. 들고 있는 무기는 호주제 오웬 기관단총이다.



3월 29일 야간에 네 척의 일본 구축함이 병력을 싣고 뉴기니 후온 반도 끝에 돌출한 핀샤펜(Finschhafen)항에 800명의 병력을 상륙시켰다. 이곳에서 병력들과 장비들은 야간마다 대형 발동정에 의해서 해안선을 따라 라에로 은밀히 남하 수송되었다. 비스마르크 해에서 섬멸되다시피 했었던 일본 51사단 병력의 잔여병력은 이렇게 라에에 증파되었다. 그러나 이런 수단으로 보급되는 군수품과 병력은 요구되는 수준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한 것이었다. 뉴기니의 중요한 거점인 라에는 비스마르크 해전 7주 뒤에 강력한 공세를 취하던 호주군의 차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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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기니 일본군 18군 사령관 아다치 하치조(安達 二十三)중장이 종전후 항복 식에서 호주군 6사단장 호레이스 로버슨 소장에게 군도를 바치고 있다.


라에 함락 후 일본군의 긴 패주가 뉴기니 북부 해안을 따라 계속되었다. 일본군은 동쪽으로 내몰리면서도 정글의 지형과 특유의 끈질김으로 1945년 8월 항복 때까지 저항을 계속해 나갔다. 뉴기니의 일본 18군 사령관 아다치 중장이 지휘하던 일본군 14만 명 중에 살아남아 항복한 병력 숫자는 불과 13,000명이었다.





김창원 | 전사연구가
연세대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시라큐스 경영대학원에서 MBA를 취득했다. 장교로 군 복무, 기갑부대 전차 소대장을 지냈다. ‘울프 독’이라는 필명으로 전사와 역사를 다룬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다. 국방부 정책·정보 블로그(N.A.R.A.)에 기고하고 있으며, 저서로 [공격 마케팅]이 있다


자료제공

유용원의 군사세계
http://bemil.chosun.com/



발행2013.0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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