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역사 '프랑스 사상'과 독립 투쟁 - 라틴 아메리카 독립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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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12회 작성일 16-02-07 0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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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목차

1. 라틴 아메리카의 건설과 식민 사회의 갈등

2. ‘프랑스 사상’과 라틴 아메리카의 독립 투쟁

3. 빛을 잃어가는 투쟁

4. 브라질의 독립

5. 에스파냐 식민지의 독립

6. 에스파냐 세력의 최후

라틴 아메리카 전쟁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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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표
전쟁 주체 에스파냐/아메리카 왕당파 vs 각국 독립세력/공화주의 세력
전쟁 시기 1804-1825
전쟁터 멕시코, 중앙아메리카, 남미 각 지역, 카리브해 일부
주요 전투 마이푸 전투, 카라보보 전투, 보야카 전투, 살타 전투, 카르타헤나 공방전, 오악사카 공방전, 아카풀코, 차카부코 전투, 구아나후아토 전투, 깔데론 전투

계층 간의 갈등




라틴 아메리카의 독립의 동인(動因)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즉 유럽 출신들과 아메리카 태생의 엘리트간의 갈등, 유럽 대륙의 정세, 그리고 프랑스 혁명이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에스파냐 식민사회에서 많은 특권을 누리고 있던 아메리카 태생의 끄리올로들은 부르봉 왕가의 ‘개혁’으로 인하여 불만을 품게 되었다. 결국 이들 끄리올로들은 ‘자유무역’의 과실은 누리면서 왕가의 간섭을 물리칠 방법을 찾게 되었다.

그러나 라틴 아메리카의 다른 계층들도 불만이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우선 라틴 아메리카 사회의 바닥에서 노예나 하층 노동자로 살고 있던 흑인들의 불만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들은 한 마디로 인간 취급을 받지 못했다. 에스파냐인이나 프랑스인, 또는 포르투갈인들을 막론하고 식민사회의 상류층은 흑인이나 그들의 후손들에게 노동력 이외의 아무런 가치를 부여하지 않았다. 노예였다가 자유민으로 풀려난 흑인들이나 흑/백/원주민 혼혈인 ‘파르도(pardo)’들도 마찬가지였다. 자유민 흑인들과 파르도는 아무리 노임을 많이 준다하여도 농장이나 끄리올로 귀족들의 장원에서 일하기를 거부하였다. 이들은 도시로 몰려 대장장이, 은(銀) 세공, 목수, 재단사, 석공, 신발제조, 푸줏간 등의 업종에서 기술자나 자영업자가 되었다. 그러나 이들이 아무리 돈을 많이 벌어도 말을 타거나 비단 옷을 입고 칼을 차고 신학교에서 수업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다. 이들은 모두 상류층만이 할 수 있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1790년에 에스파냐 정부가 파르도들에게 법적으로 ‘백인’ 신분을 획득할 수 있는 ‘면허’를 판매하려 했을 때 베네수엘라 카라카스의 끄리올로 상류층은 이에 대한 대대적인 반대운동을 일으켜 좌절시켰는데 이 반대운동을 주도한 것은 카를로스 팔라치오스, 후일 누에바 그라나다에서 독립군을 이끌게 되는 시몬 볼리바르의 숙부였다.

파르도들의 운명은 대다수의 다른 메스티조들에게도 적용되었다. 이들은 명목상으로 중간계층이었지만 아무리 노력을 해도 ‘사회적 명예’를 획득할 수 없었다. 라틴 아메리카의 상류층들은 사회적인 명예란 ‘고귀하게 태어나’ 제대로 교육을 받은 자신들만이 가질 수 있는 것이었다. 자신들을 제외한 노예들이나 하층민 농부, 또는 중간계층 파르도나 메스티조들은 ‘주제’를 알아야 하고 주어진 자리에 만족해야 한다는 차별의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를 당연시하였다.

이러한 상황은 멕시코에서의 민중봉기를 이끌게 되는 미구엘 이달고(Miguel Hidalgo) 신부의 친구이자 미초아칸(Michoacan)의 주교인 마누엘 아바드 이-퀘이포(Manuel Abad y Queipo)가 에스파냐의 국왕에서 올린 상소문에 잘 드러나 있다. 아바드 주교의 상소문의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누에바 에스파냐 인구의 9할이 인디오, 가난한 메스티조와 파르도들인데 이들은 지독한 가난 때문에 식민지에서 자신들의 지분(支分)이 거의 없다. 백인들이 거의 모든 것을 차지한데 비하여 자신들은 변변한 재산도 없기 때문에 백인들을 매우 원망하고 있다. 이와 더불어 인디오들은 자신들이 바쳐야 하는 조공에 심하게 반발하고 있고 메스티조들과 파르도들은 신분상승을 막고 있는 까스타 제도에 분노하고 있다. 따라서 에스파냐 정부는 인디오들의 조공을 없애고 ‘까스타’제도를 폐지하며 누에바 에스파냐에 있는 모든 공지(空地)를 무상분배 해야 한다. 그러나 이 상소문의 내용같이 지독한 불평등을 인정하고 있었던 아바드 주교 역시 에스파냐 지배 자체에는 반대하지 않았기에 작은 교구의 사제들에게 더욱 많은 권한을 허락하여 이들을 통하여 민초들의 (에스파냐 본국에 대한) 충성심을 유지하여야 한다고 보았다.


아메리카에 전해진 혁명의 메시지




이처럼 차별이 가득한 라틴 아메리카 사회에 충격을 가져다 준 두 개의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바로 프랑스 혁명과 아이티의 노예봉기였다. 라틴 아메리카 상류층은 그들의 자식들을 유럽으로 보내어 고등교육과 ‘교양’을 익히게 하였는데 프랑스 혁명 당시 유럽에 있던 많은 라틴 아메리카 젊은이들이 프랑스 혁명의 이념에 물들게 된다. 결국 이들이 라틴 아메리카로 돌아오면서 라틴 아메리카를 지배하고 있던 차별의식이 흔들리게 되고 많은 수가 라틴 아메리카 독립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1791년 루베르튀르가 아이티의 노예봉기를 주도하면서 프랑스에서 반혁명파들을 격파하였고 아이티에서는 노예 제도가 폐지되었다. 비록 루베르튀르가 1802년에 프랑스군에게 잡혀 투옥, 사망하지만 쟝-쟈끄 데살린에 의하여 독립운동은 계속되어 1804년 아이티의 독립이 선포된다. 이는 프랑스의 혁명사상이 라틴 아메리카로 퍼지는 또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일단 노예와 하층민들이 유럽인들에게 맞서서 승리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선례를 남겼고 라틴 아메리카 각지의 자유민 흑인들과 파르도들을 통하여 그 소식이 중남미로 전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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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4년 아이티의 독립 선포는 프랑스의 혁명 사상이 라틴 아메리카로 퍼지는 하나의 계기가 된다.



반란과 전쟁으로 치닫는 라틴 아메리카




그러나 라틴 아메리카의 독립을 부추긴 가장 결정적인 계기는 내부가 아니라 외부에서 왔다. 1807년에 에스파냐와 동맹을 맺은 나폴레옹의 프랑스 군대가 에스파냐를 거쳐 포르투갈을 침공한 것이다. 포르투갈 군대는 프랑스가 해안으로 공격해 올 것으로 생각하여 군대를 모두 해안가에 포진하였지만 이미 프랑스는 에스파냐의 총리대신인 마누엘 고도이(Manuel Godoy)와 포르투갈을 삼분(三分)하기로 협약을 맺은 상태였다. 포르투갈 수도인 리스본은 거의 싸움 없이 함락되었다. 프랑스와 에스파냐 동맹군이 목을 조여오는 상황에서 여왕 마리아 1세와 섭정인 조앙 왕자를 비롯한 포르투갈 왕가와 정부인사, 귀족 1만여 명이 50여 척의 배에 나누어 타고 1807년 11월 29일에 리스본을 떠나 브라질로 망명하게 된다.

그러나 에스파냐 왕가의 상황도 그리 좋은 것은 아니었다. 국왕인 카를로스 4세는 정치능력이 없어 무능의 극치를 달리고 있었고 정권은 고도이에 의하여 좌지우지되고 있었다. 그리고 아들 페르난도 왕자는 고도이의 비호 하에 부왕에게 양위(讓位)할 것을 압박하고 있었다. 프랑스의 황제인 나폴레옹은 이 부자간의 분쟁을 중재한다는 핑계로 카를로스와 페르난도를 프랑스로 불러들였고 그 틈을 타서 프랑스 주둔군에게 에스파냐의 주요 요새를 모두 점령하라는 밀명을 내린다. 프랑스 군대는 신속하게 에스파냐 각지를 점령하였고 국왕과 왕세자가 모두 없는 상태에서 에스파냐 군 수뇌부는 어떠한 결정도 내릴 수 없었다. 더군다나 에스파냐 군대는 각지에 분산되어 있어 전력을 집중할 수가 없었다. 이윽고 에스파냐의 왕좌에는 나폴레옹의 동생인 조셉 보나파르트가 앉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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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누엘 고도이의 초상화. 그의 실정으로 인하여 에스파냐는 프랑스에게 패망하고 에스파냐의 식민지에서 본격적인 독립 투쟁이 시작된다.


에스파냐 왕실의 불행은 에스파냐 식민지의 독립파들에게는 매우 좋은 기회였다. 에스파냐 정부와 총독부들은 식민지에 퍼지고 있었던 소위 ‘프랑스 사상’을 경계하면서 혁명 사상을 지닌 인사들을 탄압하였고 모든 집회를 면밀히 감시하였다. 그러나 프랑스의 침략으로 총독부에게 명령을 내릴 정부가 없어지면서 라틴 아메리카 각지의 독립파들은 열심히 집회를 열고 스스로 무장하기 시작하였다. 프랑스에 잡혀있는 페르난도 왕세자를 위하여 무기를 들고 아울러 새 땅에 임시정부를 세워야 된다는 명목 하에 독립파들의 본격적인 움직임이 시작된 것이다. 에스파냐에는 서로 임시정부를 칭하는 위원회(훈타, junta)들이 생겨났지만 프랑스군에 진압되거나 살아남더라도 해당 지역을 통치하는 데 그쳤다. 1809년에야 소위 중앙 최고위원회(Junta Suprema Centrale) 생겨나면서 나폴레옹군에 대한 조직적인 저항을 꾀했지만 에스파냐군은 속절없이 밀리면서 1810년에는 가데스(카디즈)를 제외한 에스파냐 전국이 프랑스에게 점령되었다.

이에 따라 에스파냐의 아메리카 식민지 각지에서도 훈타가 조직되었고 그 아래 민병대가 꾸려졌다. 명목상으로 페르난도의 복위를 위한 ‘근왕 세력’이었지만 이들은 사실상 해당 지역을 장악하고 총독부의 명령을 벗어나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1809년 말에는 차키사카, 라 파즈, 키토등 안데스 지역에서 봉기가 일어났다.독립세력이라기 보다는 총독부의 강압적인 통치에 반발하여 일어난 민중봉기였고 곧 페루 총독부에 의하여 진압되었지만 이러한 봉기는 다른 지역에서도 무장봉기가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1810년에 누에바 에스파냐, 즉 현재의 멕시코 지역에서 발생한 민중봉기는 그 군세만 10만을 넘는 대규모 봉기였고 향후 정치에 미친 파장도 엄청났다.


괴짜신부 미구엘 이달고와 멕시코의 민중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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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코 민중봉기를 주도한 미구엘 이달고(Miguel Hidalgo) 신부. 그의 봉기는 실패로 돌아갔지만 멕시코 독립의 시발점이 되었으며 이후 멕시코의 국부(國父)로 추앙을 받는다.


이 봉기를 주도한 미구엘 이달고는 현 멕시코 구아나후아토(Guananhuato) 출신의 끄리올로로서 멕시코 시티의 왕립대학교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한 후 사제의 길을 걸었다. 그러나 1790년에 산 니꼴라스 대학의 학장이 된 후 프랑스와 유럽에서 유행하고 있던 계몽주의와 자유주의 사상에 경도되어 에스파냐 왕실의 정당성과 교황의 절대성에 대하여 공공연한 의문을 제기하고 파격(破格)과 기행(奇行)으로 일관하였다. 심지어 그는 처녀잉태설과 사제 독신까지 부정하기에 이르렀다. 심지어 그는 여러 명의 여인과 같이 살면서 자식을 보았고 그의 집에 사람들을 모아서 밤새 춤추고 도박하는등의 행위로 결국 종교재판을 받게 된다. 다행히 파문당하지는 않았으나 학장자리를 박탈당하고 조그마한 산 펠리페와 돌로레스 교구의 일반 신부로 전출된다.

그러나 이달고가 춤추고 노는 것은 사실 사람들과 어울리기 위한 과정이었다. 그의 집은 누구라도 드나들 수 있었고 까스타들 사이에 차별을 두지 않았다. 아울러 신부로 재직하면서 인디오들과 메스티조들의 지독한 가난을 목격하고 올리브와 포도나무를 심고 도자기를 만드는 기계를 제작하여 주변의 시장에 판매하는 방식으로 인디오와 메스티조들의 자립을 도왔다. 사실 정부가 에스파냐 본국의 산업을 보호하기 위하여 올리브와 와인을 포함한 온갖 물품에 대한 판매권을 독점한 상황에서 이는 불법에 해당하는 일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기행으로 뻬닌술라레스 상류층에게 평판이 좋지 않았던 그는 생산과 판매를 공동으로 하고 수익을 나누어 가지는 방식으로 가난한 자들을 도우려 하였다. 그러나 1807년과 1808년에 극심한 가뭄이 멕시코 지역을 강타했고 이에 가난한 민중들은 총독부 저장고에 있는 곡물이 풀리기를 기대하였지만 총독부와 결탁한 에우로페오(Europeo, ‘유럽출신’을 뜻하는 말. 뻬닌술라레스와 동의어) 상인들은 저장고의 문을 닫고 곡물값을 폭등시켰다. 결국 그는 1809년 9월 16일에 ‘돌로레스의 외침’이라고 알려진 공개 미사를 열어 민중들에게 봉기를 촉구한다.

약 5천으로 시작한 그의 봉기는 농민들과 함께 진보적인 지식인들과 끄리올로들의 지지를 받아 기세 좋게 진군하면서 도시 여럿을 함락시키고 15000까지 불어난다. 1810년에는 구아나후아토를 점령하면서 더 큰 세력으로 성장하지만 그의 군대는 기강이 해이하여 도시를 함락시킨 다음에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살해하고 약탈하는 등의 행위로 끄리올로들의 지지를 잃는다. 1810년 10월에는 멕시코 시티를 포위하였으나 왕당파들의 저항으로 실패하고 결국 1811년 1월 17일에 현재 멕시코 할리스코(Jalisco)주에 있는 깔데론 다리에서 총독부군과 싸워 (La Batalla del Puente de Calderón) 크게 패한다. 그는 이후 총독 펠릭스 마리라 깔레하가 지휘하는 총독부군에 잡혀 1811년 7월 30일에 치와와주에서 총살을 당한다.


훈타들의 설립과 들끓는 라틴 아메리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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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누엘 벨그라노. 부에노스아이레스 훈타(junta)의 중심인물이며 아르헨티나의 국부 중 한 명으로 추앙된다.


미구엘 이달고 신부의 봉기가 실패하기는 하였지만 멕시코의 봉기는 여전히 끝난 것이 아니었다. 농민군은 다시 호세 모랄레스를 중심으로 뭉쳐 봉기를 이어간다. 아울러 라틴 아메리카 곳곳에 훈타들이 우후죽순격으로 생겨난다.

1810년에만 카라카스(Caracas, 현 베네주엘라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 보고타(Bogota, 현 콜롬비아 수도), 산티아고 (Santiago, 현 칠레 수도)에서 훈타가 생겨났고 페르난도 7세의 복위를 돕는다는 명분하에 사실 상의 지역정부로 기능하였다. 이중 리오 델 플라타 총독부가 무력화되자 현재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 지역의 개혁세력이 모여서 설립한 부에노스아이레스 훈타는 우루과이와 파타고니아 지역을 장악하면서 기세를 떨쳤다. 부에노스아이레스 훈타는 그 영향력과 함께 독립세력의 기반을 넓히고자 이후 아르헨티나의 국부(國父) 중 한 명으로 추앙 받게 되는 개혁가 마누엘 벨그라노(Manuel Belgrano)를 1810년 8월에 훈타 병력의 총사령관으로 임명한다. 벨그라노는 부에노스아이레스군을 이끌고 에스파냐의 세력이 약한 현 파라과이와 볼리비아 일대를 점령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개혁적 인사들이 많고 민중들이 총독부에 불만이 많은 데다 총독부 세력은 약하니 쉽게 점령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썩어 보이는 왕조라도 실제로 맞닥뜨려보면 만만치 않은 경우가 많다. 반란세력이나 소위 혁명세력들은 자신들의 정당성만을 믿고 아무런 준비 없이 기존 체제에 도전하는 경우가 많은데 당시 라틴 아메리카의 ‘혁명가’들이 그랬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훈타는 그나마 준비가 잘 된 편이었지만 보급과 작전에 대한 면밀한 준비 없이 파라과이 지역으로 진격한 벨그라노의 군대는 페루 총독이 모은 에스파냐 정규군과 왕당파들의 혼성군에 대패한다. 앞서 말한 대로 페루에서는 이미 몇 차례 봉기가 일어났고 1809년에는 라파즈와 키토에 소규모 독립파 훈타들이 조직되었으나 당시 페루 총독이 파견한 병력에 의하여 철저히 진압당했다. 이를 반면교사로 삼지 못하고 단순히 그 지역 독립파들의 내응 약속만을 믿고 안이하게 접근한 까닭이었다. 무엇보다도 페루의 총독 호세 페르난도 아바스칼(José Fernando de Abascal y Sousa)은 라틴 아메리카에 남아있는 에스파냐의 총독들 중에서는 가장 유능한 인물이었다는 것도 독립파에게는 불운으로 작용하였다. 파라과이와 페루 공략실패는 이후 에스파냐 식민지 각지의 독립파 ‘훈타’들에게는 재앙이 되었다. 이를 기점으로 페루는 에스파냐 정부와 왕당파들이 본격적인 반격을 개시하는 거점이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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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주의자이나 혁명가인 프란시스코 미란다. 1811년에 베네주엘라 공화국을 선포한다. 시몬 볼리바르는 미란다의 뒤를 이어 독립운동을 주도하게 된다.


이때 공화제 사상(Republican ideas)을 지니고 있다 하여 라틴 아메리카의 식민정부로부터 수배를 받고 피신하여 유럽에서 떠돌이 생활을 하고 있던 지식인이자 자칭 혁명가인 프란시스코 미란다(Francisco Miranda)가 1811년에 일단의 무장세력을 모으고 독립파 세력, 특히 파르도(pardo) 자유민들을 규합하여 누에바 그라나다에서 ‘베네주엘라 공화국’이 세워졌음을 천명한다. 그러나 자신이 장악하고 있던 카라카스와는 달리 코로(Coro), 마라카이보(Maracaibo), 기야나(Guyana)의 도시민들, 특히 에우로페오 엘리트들은 미란다의 공화정에 대한 반대를 분명히 하였고 처음에 미란다의 공화국에 참여하였던 발렌시아(Valencia)도 공화정에 대한 의구심을 떨치지 못하고 공화제의 대열에서 이탈하려 하였다. 이에 미란다는 소위 공화국군을 보내어 발렌시아를 공격하게 하였는데 이때 공화국군을 이끈 인물은 카라카스 출신의 젊은 개혁가 시몬 볼리바르(Simon Bolivar)였다.


1812년 헌법




페르난도 7세가 프랑스에 잡혀있는 상태에서 에스파냐의 합법적인 정부인 가데스 훈타는 1812년에 소위 ‘1812년 헌법’을 선포한다. 이 헌법의 제정과정에서는 에스파냐 각지와 에스파냐 식민지의 ‘대표’들이 참여하였는데, 총 303명이었고 상당수가 프랑스 혁명사상, 또는 계몽주의나 자유주의 사상을 배운 지식인들이었다. 이 헌법의 가장 큰 특징은 각 지방의 자치를 허용하는 연방 제도를 일부 받아들이고 있으며 아울러 에스파냐와 그 식민지에서 태어났거나 장기간 거주하였거나 귀화한 사람 모두를 ‘에스파냐 시민’으로 인정하고 있다.

이는 아메리카의 에스파냐 식민지에 크나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간접 투표방식을 통하여 각 지방의 대표를 뽑는 방식은 지방 유력자들에게 유리하게 작용하였는데 라틴 아메리카에서 유력자들이란 대개 땅을 가진 기존의 끄리올로들과 함께 새로이 부를 형성한 부르조아지와 도시 중상류층을 의미했기 때문에 라틴 아메리카에서 뻬닌술라레스(에우로페오)들의 힘을 약화시킬 수 있었다. 아울러 에스파냐 본국에서도 의회(코르테스)의 권한을 강화시켰다. 1812년의 헌법은 식민지에서의 갈등을 더욱 격화시켰다. 식민지 사회구조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였고 이 헌법을 근거로 보다 많은 사람들이 새로이 에스파냐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요구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헌법 제정과정에서의 문제점도 노출되었다. 우선 카디즈 코르테스에 참여한 에스파냐 본국 출신 대표들과 아메리카 출신 대표들 간 갈등이 불거지면서 에우로페오들과 아메리카노들간에는 메울 수 없는 간극이 있음을 보여주었다. 가장 큰 갈등은 역시 아메리카에 있는 흑인들과 흑인계열 혼혈인들에 대한 인정이었다. 다른 혼혈인들에게 시민의 자격을 인정하면서 흑인들을 제외하면 많은 수의 아메리카노들이 사실상 인구 집계에서 제외되는 것이며 향후 인구 비례로 선출될 입법기구는 에우로페오, 즉 에스파냐 본국 출신들과 뻬닌술라레스가 언제나 우위를 차지하게 되는 것을 의미하였다. 이외에도 협상과정에서 아메리카 출신들에 대한 차별적인 언사를 사용하면서 이를 당연시하는 것도 아메리카 출신 대표들을 자극하였다. 인종적인 차이가 없는 아메리카노들도 에스파냐 본국인들에게는 차별의 대상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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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2년 헌법을 선포하는 카디즈의 코르테스(cortes).


물론 현실적으로 1812년 헌법이 당장 식민지에 미치는 영향은 적었다. 일단 프랑스 세력이 에스파냐를 여전히 장악한 상태에서 카디즈 의회에 에스파냐를 실질적으로 통치하지 못하고 있다는 문제가 있었다. 아메리카의 에스파냐 총독들은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어 카디즈 의회를 지지하기는 하였지만 근본적인 의미에서 왕에 대한 충성을 거두지 않았다. 즉 왕실과 의회의 갈등이 불거질 경우 이들은 지체 없이 왕실 쪽으로 택할 사람들이었다. 아울러 이들은 특권층이었기 때문에 헌법에 명시된 ‘자유주의적 조항,’ 예를 들어 집회와 출판의 자유같은 조항들을 식민지에 적용하는데 인색하였다. 자치단체에서의 투표도 마지못해 용인하는 정도였다.

그러나 식민지적 현실은 차지하고라도 카디즈 코르테tm에서 에스파냐 출신 대표들의 태도는 결국 아메리카 출신 대표들의 대거 이탈을 야기하였다. 영향력 있는 사제인 세르반도 테레사 데 미에르(Servando Teresas de Mier) 신부와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유력 가문 출신인 카를로스 알비아르(Carlos Alvear) 등 프란시스코 미란다의 독립파에 몸을 담고 있던 인물들이 이탈 대표들의 주축을 이루었다. 아메리카 대표로서 코르테스에 참여하였던 리오 델 플라타(아르헨티나) 출신의 호세 산마르틴(Jose San Martin)도 더 이상 에우로페오들과 상종하는 것이 어렵다고 생각하고 다른 아메리카노 대표들과 함께 카디즈를 떠나 런던으로 향하게 된다. 이때는 몰랐지만 호세 산마르틴의 이탈은 향후 라틴 아메리카의 역사를 근본적으로 바꾸어놓는 중대한 사건이 된다.

한편 멕시코에서는 이달고 신부의 죽음 이후 사그러져 가던 봉기가 모렐로스의 지휘 하에 다시 살아났다. 1811년에 아카풀코를 포위하였으나 함락에 실패한 모렐로스는 내륙 멕시코 시티 인근의 쿠아우트라(Cuautla)에 입성하여 이를 내륙공략을 위한 본거지로 삼고자 하였으나 총독 바네가스(Francisco Xavier Vanegas)와 군사령관 깔레하스(Calejas)의 총독부/보수파 병력에게 포위당한 모렐로스는 72일후 쿠아우트라를 포기하고 오악사카(Oaxaca)로 이동하여 보수파 병력에 수세에 몰려있던 독립파 동료인 트루한(Trujan)의 봉기군을 구원한다.

참고문헌

[The Cambridge History of Latin America Vol. 3], From Independence to 1870; Archibald Alison, [The History of Europe Vol. 14], From the Commencement of the French Revolution to the Restoration of the Bourbons; Timothy E. Anna , [Spain and the Loss of America]; John Charles Chasteen, [Americanos]; Paul K. Davis, [Besieged: 100 Great Sieges from Jericho to Sarajevo], [100 Decisive Battles]; Marc Ferro, [Colonization: A Global History]; J.B.Trend, [Bolivar and the Independence of Spanish America]





김성남 | 안보·전쟁사 전문가
글쓴이 김성남은 전쟁이 인간 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관심을 가지고 이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미국 UC 버클리 동양학과를 졸업한 후 연세대학교 국제대학원에서 국제학 석사를 받고 한국학중앙연구원 정치학과에 진학하여 정치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주요 저서로는 [전쟁으로 보는 한국사], [전쟁으로 보는 삼국지], [전쟁 세계사] 등이 있으며 공저로 [4세대 전쟁]이, 역서로 [원시전쟁: 평화로움으로 조작된 인간의 원초적인 역사]가 있다.


발행2013.0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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