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역사 후다이비야 조약 - 한 발짝 뒤로 물러나 열 걸음 앞서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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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511회 작성일 16-02-07 0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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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알라)께서는 그대들에게 확실한 승리를 베푸셨다. 하나님께서는 그대들의 지난 과오를 용서하시고, 그대들에게 그분의 은혜로 넘치게 하시고, 그대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시고, 강력한 권능으로 그대들을 도우셨다.”


[코란] 제48장 1~3절의 내용이다. 이 장은 그 이름인 ‘알 파트흐’, 즉 ‘승리’라는 뜻에서도 알 수 있듯, 이슬람교의 승리와 영광을 벅찬 가슴으로 이야기하는 내용으로 시작된다. 그러나 정작 그 이야기의 대상이 되는 628년의 후다이비야 조약 당시에는 반대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원수 같은 메카인들에게 바야흐로 복수를 하려는 시점에서, 무함마드의 결단으로 적에게 상당한 양보를 하며 뒤로 물러서는 조약이었기 때문이다.



칼을 든 예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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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천사 지브릴에게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무함마드. 평범한 목동이었던 그는 지브릴에게서 하나님의 목소리를 들은 이후 예언자가 되었다. 작자미상의 그림으로, 14세기 초반의 작품.



610년, 평범한 목동 출신인 무함마드는 40세의 나이로 “대천사 지브릴(가브리엘)에게서 하나님의 목소리를 들었다.” 이것이 오늘날 세계 4대 종교 중 하나로 불리는 이슬람교의 시작이다. 이슬람교는 다른 세계 종교와는 사뭇 다른 환경에서 출발했다. 예수와 석가모니는 모두 기성 종교(유대교/브라만교)와 지배계급의 세력 기반이 튼튼한 세상에 나타나서 기성 종교 교리의 상당 부분을 본뜨되 핵심적인 점에서 혁신적인 가르침을 펴는 일종의 분파를 창시했다. 반면, 무함마드는 종교적으로는 기독교나 유대교, 조로아스터교 등의 영향이 없지 않지만 대체로 아랍 고유의 다신교가 지배하고, 정치적으로는 여러 부족들이 할거하는 사회에서 절대적 일신교와 초부족주의를 내세우며 출발했다. 그래서 예수와 석가모니의 가르침은 한동안 속세를 멀리하는 소수 수도자 집단들을 중심으로 이어진 반면, 무함마드는 처음부터 종교 지도자인 한편 정치ㆍ군사 지도자로서 교단을 이끌며 다른 부족 내지 이교도들과 싸워 나가야 했다. 한편으로는 당장 사방에서 적들이 덤벼드는 일을 피할 수 없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런 적들과 맞서는 일이 세상의 질서를 뒤집어엎을 정도로 강력한 힘과 기회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메카에서 시작된 무함마드의 전도 활동은 쿠라이시 부족을 중심으로 하는 반대자들의 박해 끝에 622년에 메디나로 도피하는 상황에 이르렀고, 이것이 나중에 ‘헤지라(Hegira)’라 하는 이슬람력의 기원 연도가 되었다. 그 뒤에는 624년의 바드르 전투, 625년의 오호도 전투 등 메카군과의 싸움이 이어졌으며 특히 오호도 전투에서는 무함마드 본인이 부상을 입고 한때 전사했다는 소문이 나도는 위기에 빠지기도 했다. 그러나 무함마드는 놀랄 만한 카리스마로 교도들을 이끌며 메디나의 사실상 지배자가 되고, 최대의 적이던 쿠라이시 부족 중에서 세력이 상당한 마하즘 가문, 우마이야 가문 등을 회유하고 그들 집안의 여자들과 결혼함으로써 배경 세력도 늘려 나갔다. 그는 유대교도와 기독교도 집안에서도 아내를 얻으며 자신의 가족과 세력 범위를 동시에 확장시켰다.

627년에는 메카군이 1만 명의 대군을 동원해 메디나를 포위 공격함으로써 무함마드는 헤지라 이래 최대 위기에 부딪쳤지만, 그를 따르는 3천의 병력은 참호를 파고 악착같은 방어전을 펼쳐 마침내 메카군을 후퇴시켰다. 이 ‘참호의 싸움’ 이후 메카와 메디나의 세력 관계는 역전되기 시작, 이슬람 진영의 힘과 사기는 날로 강력해졌다.



싸움이냐, 휴전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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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드르 전투에서 병사들을 지휘하는 무함마드.



헤지라 6년, 서력으로는 628년, 무함마드는 ‘꿈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다’고 신도들에게 말했다. 메카의 카바 신전에 참배하라는 것이었다. 카바 신전은 아득한 옛날부터 있던 아랍인들의 성역으로, 그들의 다신교에서 신앙의 중심지로 자리매김한 곳이었다. 무함마드는 다신교를 부정하면서도 카바 신전에 대한 아랍인들의 숭배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아랍인이 ‘성스러운 달’을 맞이하여 관례적으로 행하는 순례를 그동안 전쟁 때문에 하지 못했으나, 계시가 내린 만큼 이번만은 반드시 해야겠다면서 메카로 출발했다. 약 2천 명의 신도들이 그를 따라 하얀 순례복 차림으로 아무런 무장도 하지 않은 채(기록상으로는 그런데, 나중에 메카 쪽의 정찰대를 무장해제시켰다고 하는 걸 보면 어느 정도의 무장은 했을 듯하다) 길을 나섰다. 이 성스러운 달에는 전통적으로 분쟁을 멈추고, 평화롭게 순례할 수 있도록 모든 적의(敵意)를 잠시 잊는 법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사정이 달랐다. 몇 년 동안의 싸움으로 메카인들은 메디나인들과 원수가 다 되어 있었고, 아무리 ‘비무장’이라 해도 수천 명의 ‘적’들이 자신들의 본거지로 당당히 걸어 들어오는 일을 용납할 상황이 아니었다. 결국 그들은 2백 명의 기병대를 보내 무함마드 일행을 가로막으려 했다. 그러나 그들이 보낸 정찰대를 붙잡아 사실을 탐지한 무함마드는 메카에서 십여 킬로 떨어진 후다이비야(Hudaybiyyah)에서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야영을 하며 메카 쪽에 사절을 보내 ‘우리는 오직 순례를 하려 할 뿐이다. 어떤 유혈사태도 일으키지 않을 것이고, 겪지도 않을 것이다. 전통에 따라 순례의 자유와 평화를 보장해 주기 바란다’는 뜻을 전달했다.

무함마드가 보낸 사절은 훗날 제3대 정통 칼리프가 되는 우스만 이븐 아판으로, 쿠라이시 부족의 우마이야 가문 사람이면서 무함마드의 사위이기도 했다. 무함마드의 측근이자 메카의 호족 출신인 그는 중재역에 적합하리라 여겨졌으나, 메카 쪽에서는 그를 억류하고는 넌지시 ‘우스만이 살해되었다’는 소문이 퍼지게 했다. 무함마드가 어떻게 나오는지를 보고 행동을 결정하려 했던 것이다. 예상대로 무함마드 일행은 격앙되었고 복수를 부르짖는 사람도 있었는데, 무함마드는 그들을 달래되 ‘만약 하나님의 뜻이라면 우리 모두 여기서 목숨을 바치자’고 맹세했다. 이에 너도 나도 무함마드의 손을 잡으며 목숨을 바치겠다는 맹세를 하니, 분위기는 비장하기 그지없었다. 이 맹세 이야기를 들은 메카 쪽에서는 몹시 두려워하며 살육전을 포기하고 타협하기로 결정했다고 하는데, 아마도 오랜 휴전 관습을 깨는 일이 못내 부담되어서, 또는 실제로는 메디나 쪽의 무장 수준이 상당한데다 사기가 드높은 걸 보고 그랬으리라 여겨진다.

메카의 사절로 온 수하일 이븐 아미르는 크게 일곱 가지 조항의 휴전 조약(후드나)안을 제시했다. 그 내용에는 긴 안목에서 보자면 이슬람에 도움이 될 점이 많았으나(따라서 전해지는 것처럼 메카 쪽의 일방적 조약안을 무함마드가 가감 없이 받아들인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당장 보기에는 불공평하고 불만스러운 부분이 있었다.



무함마드, 불평등 조약을 받아들이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무함마드 이븐 압둘라와 메카의 쿠라이시 부족을 대표하는 수하일 이븐 아미르는 다음과 같은 사항에 합의하였다.”


• 앞으로 10년 동안 전쟁을 하지 않는다.


• (메카 쪽에서)무함마드에게 귀의하려는 사람은 막지 않는다


• (무함마드 쪽에서)쿠라이시의 보호를 받으려는 사람은 막지 않는다.


• 만약 연소자나 아버지가 살아 계신 사람이 보호자 및 아버지의 허락 없이 무함마드에게 간다면, 그는 그의 보호자 및 아버지에게 돌려보내져야 한다.


• 쿠라이시에게 간 사람은 그 누구든 돌려보낼 필요가 없다.


• 무함마드와 그 추종자들은 올해에는 메디나로 돌아가며, 이듬해에 메카 순례를 하여 사흘 동안 머물 수 있다. 그동안 메카의 쿠라이시는 시 외곽의 고원지대로 물러나 있을 것이며, 양쪽은 피를 흘리지 않을 것이다.


• 메카 순례 때 무함마드와 그 추종자들은 칼집 있는 단검을 제외한 무기를 휴대하지 못한다.




10년의 휴전 기간(어디까지나 휴전이며, 완전한 화해와 종전은 아니었다)이 설정되고 메카 순례가 허용된 점은 이슬람 측에 무척 고무적이었으나, 이슬람에서 메카로 넘어간 사람은 연소자든 포로든 돌려보내지 않는다는 불공평한 조항은 무슬림들의 분노를 자아냈다. 수하일은 그들을 더욱 자극하려고 자신의 아들을 내놓으라고 했다고 한다. 그는 아버지의 허락 없이 이슬람교를 믿었다가 발각되어 고문을 당한 끝에, 도망쳐서 무함마드에게 피해 있었다. 조약문의 내용을 당장 이행하라고 을러대는 수하일에게 이슬람교도들은 분을 삭이며 소년의 등을 밀어낼 수밖에 없었다. “하나님의 계시”로 시작되었으며 목숨까지 걸 각오로 기필코 이루려 했던 메카 순례를 적어도 올해는 포기해야 한다는 점도 불만이었다. 게다가 내년에는 반드시 할 수 있다는 보장이 있는가? 그때 가서는 더욱 철저하게 무장한 메카의 군대가 약속을 어기고 ‘비무장’의 교도들을 살육하지 않으리라 누가 장담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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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탄불의 토프카프 궁전(Topkapi Palace)에 새겨진 이슬람교의 최고 신조. “신은 하나밖에 없으며, 무함마드는 그의 사도이다.” <출처: (cc) Ali Esfandiari at en.wikipedia.org>



무슬림들에게 이보다 더 굴욕적이었던 일은 조약문 자체가 아니라 공동서명에서 불거졌다. 조약안에 합의한 다음 수하일과 무함마드의 대리인인 알리(그도 무함마드의 사위였고, 나중에 우스만을 이어 제4대 정통 칼리프가 된다)가 서명함으로써 조약이 성사되려는데, 알리가 “하나님의 사도인 무함마드”라고 쓰려고 하자 수하일이 거부했던 것이다. 그는 자신들은 예나 지금이나 무함마드를 하나님의 사도라고 여기지 않으며, 앞으로도 영원히 그럴 것이다, 따라서 그런 서명을 용납할 수가 없다고 주장했다. 별 것 아닌 호칭 문제 같지만, 사실 이는 당시 메카와 메디나가 전쟁을 벌이게 만든 가장 중대한 문제일 수도 있었다. 무함마드라는 사람이 정말로 하나님이 보낸 사람인지, 단지 사기꾼일 뿐인지가 가장 근본적인 쟁점이었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도 이슬람의 기본적 신앙 고백은 “신은 하나밖에 없으며, 무함마드는 그의 사도이다”이다. 그런데 신도들 스스로 그것을 부정하는 표현을 쓸 수 있겠는가? 하지만 수하일 역시 그런 표현을 공동 명의의 문서에 허용한다는 것은 메카가 무함마드에게 무릎을 꿇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며, 절대로 양보할 수 없다는 태도였다. 조약 체결이 무산되려는 직전, 무함마드가 ‘무함마드 이븐 압둘라(압둘라의 아들인 무함마드)’라고 서명하라고 말했다. 그러나 알리는 “아무리 당신의 말씀이지만, 차마 제 손으로 그런 글을 쓸 수는 없습니다”라고 외쳤다. 그러자 무함마드가 그의 손에서 펜을 빼앗아, 자기 손으로 ‘무함마드 이븐 압둘라’라고 서명했다. 이것으로 후다이비야 조약이 체결되었다.



적이 던진 올가미로 적을 묶다



일부 무슬림은 이 조약의 내용에 분개했다. 그동안 무함마드에게 불만을 품고 있던 사람들은 이 기회를 틈타 일을 꾸미려 하기도 했다. 메카 쪽에서도 조약에 대충 흡족해 했다. 아무튼 무함마드의 거침없는 행진을 일단 돌려세운 데다, 상당한 굴욕도 안겼기 때문이다. 그들은 한발 더 나아가 이 일을 계기로 교단에 내분이 일어나고, 무함마드에게 귀의했던 쿠라이시들이 메카로 되돌아오게 될지도 모른다고 점치고 있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 점은 반대로 맞았다. 이제까지 메카 사람들은 이슬람교 자체를 박멸한다는 자세로 전쟁을 해왔다. 그러나 이 조약으로 이슬람교에 ‘동조’하지는 않을지언정 그 존재를 ‘인정’한다는 뜻을 나타낸 셈이 된 것이다. 메카의 눈치를 보느라 그동안 무함마드와 교류하지 않았던 상인들과 호족들은 마음 놓고 교류를 시작했으며, 그러잖아도 상승세이던 이슬람의 교세는 급물살을 탔다. 메카 사람들은 자신들이 실수했음을 깨달았으나 이미 때는 늦었으며, 1년 뒤에는 약속대로 무함마드의 순례를 허용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다. 먼저 조약을 깨트렸다가는 아랍인들 사이에서 이슬람교에 대한 지지가 더욱 늘어날 것이고, 우세해진 적에게 공격할 명분이 생길 것이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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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의 가장 신성한 신전, 메카의 카바(Ka'aba) 신전을 참배하는 현대의 이슬람 교도들. <출처: (cc) Al-Fassam at en.wikipedia.org>



헤지라 7년의 순례. 무함마드는 또다시 2천 명의 신도들과 함께 메카로 향했다. 우마르(훗날 제2대 정통 칼리프가 된다) 등은 메카 사람들이 약속을 지킬 리 없다며 중무장을 하고 갈 것을 주장했지만, 무함마드는 조약문 그대로 작은 단도만을 찬 ‘비무장’ 순례를 고집했다. 그리고 마침내 메카의 카바 신전에 이르러, 그 주위를 돌며 2천 명이 하나 되어 소리쳤다. “신은 하나밖에 없으며, 무함마드는 그의 사도이다!” 그런 광경을 지켜보던 메카 주민들 중에는 적개심과 불신을 풀고 이슬람교에 귀의하는 사람이 점차 늘어났다.

무함마드는 몇 년 전에 그들의 박해를 피해 달아났던 목동 출신의 광신자가 아니었다. 원숙해진 카리스마와 청산유수 같은 설교. “우리는 모두 평등합니다. 하나님 앞에는 귀족도 노예도 없습니다.”라는 말에 감격하며 무릎을 꿇는 메카 시민들. 조약에 따라 인근 산지로 후퇴해 있었던 쿠라이시 족장들은 자신들이 또 한 번 실수했음을 알았다. 문제는 중무장이냐 비무장이냐가 아니었다. 무함마드는 그 어떤 무기보다도 강력한 무기를 가지고 메카를 침략했던 것이다. 사흘 뒤에 순례를 마치고 무함마드 일행이 물러가자, 1년 전 후다이비야에서 그들을 살육하려 했던 기병대장 칼리드 이븐 왈리드조차 이슬람교도가 되겠다고 선언하고 메카를 떠났다. 이슬람을 분열시킬 것으로 기대했던 조약의 조항이 거꾸로 쿠라이시를 분열시키고 있었다.



“마침내 거짓은 멸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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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카에 입성하여 신상들을 파괴하는 무함마드. 1808년의 그림이다.



이제 무함마드로서는 조약을 지키는 일에 연연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힘의 균형이 완전히 기울어진 마당에 ‘10년의 평화’를 지켜나갈 까닭이 무엇인가? 다행히도 메카 쪽에서 조약을 파기할 빌미를 ‘제공’했다. 629년, 바누 바크르 유목 부족이 쿠자 유목 부족을 공격했는데, 쿠자는 이슬람교를 믿지 않았으나 무함마드와 동맹을 맺고 있었다. 그리고 바누 바크르는 메카의 동맹자였다. 메카에서 직접 손을 쓴 것도 아니고 무슬림이 직접 공격을 받은 것도 아니었건만, 무함마드는 이를 “무함마드에 귀의하는 자를 막지 않는다.”와 “10년 동안 전쟁을 하지 않는다.”의 조약 조항을 위반한 것으로 간주했다. 그리고 메카에 사절을 보내 삼자택일을 요구했다. ‘바누 바크르와의 동맹을 폐기하거나, 배상금을 내거나, 조약의 파기를 선언하라.’ 이에 메카 쪽은 오만한 자세로 조약 파기를 선언했다고 하는데, 실제로는 후다이비야 때와는 전혀 다르게 이슬람 쪽이 메카 쪽을 밀어붙인 게 아닐까 싶다. 그것은 그 직후에 메카에서 다시 사절을 보내 협상하려 했으나 문전박대를 당한 것에서도 엿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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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바 신전의 ‘성스러운 돌’을 다시 놓는 무함마드. 1315년 경에 그려진 작품이다.



마침내 그해 라마단의 달(9월), 무함마드는 메카를 상대로 최후의 ‘성전(지하드)’을 선포한다. 1만 명의 정예 병력이 기세등등하게 메카로 진군했다. 기가 질린 일부 쿠라이시 호족들이 달려나와 항복하자, 무함마드는 그들에게 도시로 되돌아가 “항복하면 아무도 죽이지 않는다고 약속한다.”는 말을 전하라고 했다. 오랫동안 예언자를 괴롭힌 이 도시는 흙더미가 무너지듯 항복했으며, 소수의 반대자들이 보잘것없는 저항 끝에 달아난 다음, 무함마드는 당당하게 메카에 입성했다. 그리고 카바 신전에 들어차 있던 다신교의 신상들을 모두 파괴하라고 지시했다. 가장 위대한 신으로 신봉되던 후발의 거대한 신상이 무너지는 모습을 보며, 예언자는 외쳤다. “이제 진리가 찾아왔고, 모든 거짓은 사라졌다. 거짓은 영원히 멸망했다!” 그리고 이제 자신의 새로운 수도가 될 도시의 주민들을 위로하고, 떨고 있던 쿠라이시 사람들의 손을 일일이 잡아 주며 용서와 화해를 이야기했다.

후다이비야 조약은 불평등 조약이었다. 그러나 그 조약이 맺어졌다는 자체가 일부 조항의 불평등함을 덮고도 남을 만한 가치를 무함마드에게 부여했다. 그리고 무함마드의 존재 자체가 곧 승리가 되었다. 뭔가를 놓고 협상을 벌일 때는, 특히 그 상대가 조금 전까지 서로를 잡아먹을 듯이 싸우던 상대라면, 자연히 상대의 선의를 믿지 않으며 조금이라도 더 유리하게 조항을 꾸미려고 혈안이 된다. 그리고 그것이 쉽지 않다 싶으면 곧바로 다시 칼을 빼 든다. 그러나 무함마드는 결정적 순간에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그것은 바로 얼마 후, 무려 세 걸음을 앞서가는 결단이었음이 드러났다. 그런 점에서 참으로 그는 ‘예언자’였다. 그리고 그가 [코란]에 남긴 말처럼, 후다이비야 조약은 참으로 이슬람의 ‘확실한 승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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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규진 | 서울교육대학교 교수/역사저술가
글쓴이 함규진은 여러 방면의 지적 흐름에 관심이 많다. 정치학을 전공하여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한편, 주로 역사와 관련된 책을 여러 권 썼고, 인물이나 사상에 대한 번역서도 많이 냈다. 동양과 서양, 전통과 현대, 보수와 진보 등 서로 대립되는 듯한 입장 사이에 길을 내고 함께 살아갈 집을 짓는 것이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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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간도서
조약의 세계사 2014.12.22
고대부터 현대까지 64개의 조약으로 읽는 화해와 배신, 강압과 화합 그리고 진보의 역사.

‘지뢰는 과연 쓸모 있는 무기일까?’, ‘난징 조약은 불평등조약인가?’와 같은 흥미로운 물음을 던지며 세계사의 이면을 파고들어 역사와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을 넓힌다. 강화도 조약과 같이 우리 역사 속 조약부터 마스트리히트 조약처럼 생소한 조약, 고대의 히타이트-이집트 조약에서부터 현대에 체결된 리우환경협약까지 역사의 흐름을 바꾸고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계를 형성한 조약을 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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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2013.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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