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역사 아편 전쟁과 난징 조약 - 중국의 문을 열어라!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댓글 0건 조회 512회 작성일 16-02-07 08:42

본문















14548021541020.png




14548021555440



천비(穿鼻) 해전에서 격파되는 청 군함. E. 던컨이 1840년에 그렸다.



아편 전쟁 개요
14548021569899.jpg
개요표
전쟁 주체 청 vs 영국
(2차는 청 vs 영국, 프랑스, 미국, 러시아)
전쟁 시기 1839~1842(1차), 1856~1860(2차)
전쟁터 중국
주요 전투 천비 해전, 광동 전투, 태고 전투
관련 링크 지식백과 결과보기


동떨어진 세계에서 일어난 비극




“중국의 군민(軍民)은 호문, 삼원리, 영파, 진강 등지에서 영국군에게 용맹하게 저항했다. 그러나 정치의 부패와 낙후된 군비 때문에 실패했다. 1842년 8월 29일, 중국은 불평등한 난징 조약 체결을 강요받았다......”

아편 전쟁과 난징(남경) 조약의 결과로 영국의 것이 되었던 홍콩이 157년 만에 중국에 돌아간 것을 기념해 만든 1997년도의 중국 영화, [아편전쟁]은 이런 엄숙한 내레이션과 함께 당시의 황제였던 도광제(道光帝, 1782~1850)가 역대 청황제의 초상화들 앞에 엎드려 통곡하는 장면으로 끝을 맺는다.

그러나 실제로 도광제가 그토록 원통해 했던지, 정말 중국 군민은 일부 부패한 정치인을 제외하고는 일치단결하여 영국 침략자에게 맞섰던지는 의문이다.

당시의 중국은 당시 영국 등의 서구와는, 그리고 어쨌든 다분히 서구의 손으로 틀이 잡힌 지금의 세계와는 온갖 면에서 동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생활문화, 사고방식, 정치철학, 군사기술에 이르기까지. 그것은 단지 부패했거나 낙후되었다는 말로 설명하기 힘든 동떨어짐이었다.



청을 잠식한 아편 문제의 심각성




일찍이 매카트니 사절단에게 “중국은 물자가 풍부하여 무역을 할 필요가 없다”고 했던 건륭제(乾隆帝, 1711~1799)의 말은 결코 호언이 아니었고, 그것은 약 50년이 지난 아편 전쟁 전후 시기에도 마찬가지였다.

전쟁(1차) 직후인 1842년의 통계를 보면 청은 영국에서 면제품을 비롯한 각종 상품 960만 달러어치를 수입했는데, 영국에 수출하는 상품은 차 1500만 달러, 비단 920만 달러어치를 비롯해서 총 2570만 달러에 달했다.

차와 비단이 당시 영국인들의 식생활과 의생활에 거의 필수적이었던 데 비해 영국의 상품은 중국인들에게 그리 절실하지 않았으니, 중국이 “외국과 무역을 하는 것은 오랑캐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이라고 거들먹거릴 만도 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중국이 결코 여유를 부릴 수 없는 현실이 있었다. 1842년 당시 공식 통계에는 잡히지 않는 상품, 즉 아편의 중국 수입액이 약 2400만 달러에 달했기 때문이다.

공식 무역수지는 청나라가 영국에 대해 1610만 달러 흑자였으나, 아편을 계산하면 오히려 800만 달러에 가까운 적자인 셈이었다. 그것은 청나라의 관과 민 모두에 큰 부담일 수밖에 없었다.

당시의 청나라는 쇠퇴기에 접어들고 있었고, 조정의 권위와 기강이 허물어지는 틈에 백련교의 난, 천지회, 삼합회 등의 암약, 소수민족들의 봉기 등이 잇달아 일어나면서 시정이 불안하고 재정 부담이 늘어나는 처지였다.

또한 외국에 지불하는 상품 대금은 은으로 결제되었는데, 은은 납세 수단이기도 했으므로 매년 아편 때문에 중국의 은이 외국으로 새어나가는 상황은 은의 가격 상승, 나아가 정해진 세금액의 실질적인 상승으로 이어지기 마련이었다.

때문에 세금 부담을 견디지 못해 농토를 버리고 유민이 되는 농민이 늘어갔고, 그들은 대개 백련교나 천지회 등에 가입해서 반정부 활동을 했다.

그러므로 아편이 많은 중국인들의 건강을 해친다는 점을 접어두고라도, 청왕조는 아편 문제를 반드시 해결해야만 하는 입장이었다.



14548021582998



청 말기 아편굴의 모습. 쇠퇴기에 접어들고 있던 청나라 말기 아편의 소비 증가는 관과 민 모두에 큰 부담이 되었다.


1773년에 처음 영국제 아편이 들어올 무렵에는 판매량이 1천 상자였던 것이 1839년에는 4만 상자까지 늘어나 있던(그에 미루어, 아편에 중독된 중국인은 약 4백만 명으로 추정되었다) 아편을 두고 청 조정에서는 ‘이금론(弛禁論)’과 ‘엄금론(嚴禁論)’이 부딪쳤다.

이금론은 아편에 빠진 사람을 되돌리는 일도, 아편 유통과 흡입을 완벽히 막는 일도 불가능하고 금지할수록 가격만 높아질 따름이므로 차라리 관리와 군인을 제외한 일반 백성에게는 아편 흡입을 허용하자, 그리고 아편 결제에 은을 쓰지 말도록 하고 국내에서 아편을 재배해 수입품을 대체토록 하자는 주장이었다.

나름 현실성이 있었으나, ‘만백성의 어버이로서 지극한 덕으로 다스려야 할’ 황제가 취할 정책은 아니라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이에 대해 황작자(黃爵滋), 임칙서(林則徐, 1785~1850) 등이 주장한 엄금론은 아편 흡입자에게 1년의 기한을 주어 아편을 끊도록 하고, 그래도 끊지 못하면 사형에 처할 것이며, 아편의 수입과 유통을 엄중히 단속하자는 주장이었다.

특히 임칙서는 호광성 총독을 지내며 독자적으로 아편을 근절시킨 업적이 있었고, 도광제에게 올린 상소에서 아편을 방치할 경우 “백성이 전멸하고 나라가 멸망할 것”이라고 토로한 인물이었다.

결국 도광제는 엄금론자들의 손을 들어 주고, 1839년 3월에 임칙서를 흠차대신으로 임명하여 외국의 수송선이 들어오던 광동으로 파견했다.

그리고 5월에는 [아편흡입엄금장정(嚴禁阿片烟章程)] 39조를 반포하고 전국적으로 강도 높은 아편 단속을 펼치도록 지시했다.



위대한 문화와 왜소한 군사력의 나라




그렇다면 영국의 입장에서는 어땠을까. 백 년 전까지만 해도 중국은 워낙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신비의 나라일 뿐이었다.

그러나 그 사이에 중국을 방문하거나 오랫동안 체류한 사람이 늘며 많아진 정보 덕에 영국의 일반인들에게도 어느 정도의 ‘중국관(觀)’이 생겨나 있었다. 그리고 그런 시각의 대부분은 혐오였다.

자신들과 워낙 다른 피부색과 언어, 몸차림은 그렇다 쳐도, 중국 상인과 관료들을 접한 경험은 불친절, 교만, 부정부패, 무사안일, 허례허식 등의 나쁜 인상을 길이 남겼다.

그것은 당시 영국의 시민문화가 틀을 잡아가면서 얼마 전까지는 자신들도 예외가 아니었던 무절제나 무교양 등을 혐오하는 사회의 분위기가 자리잡은 한편, 중국의 교양과 예의범절은 ‘복잡하기만 하고 이해할 수 없는 광대놀음’으로만 보였기 때문이었다.

물론 중국인의 눈에도 영국인의 행동거지가 야만적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서로 판이하게 다른 문화가 아예 서로를 모를 때보다 약간의 지식을 갖게 될 때 발생하는 혐오감의 전형이었다.

이와는 달리 소수의 지식인과 선교사들은 중국인과 중국 문화를 깊이 배우려는 자세를 가졌고, 따라서 그에 대한 존경심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도 헤겔의 말처럼 “오직 황제 한 사람만 자유롭고 모두가 노예인” 중국의 정치는 개혁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으며, 기독교 포교가 공식적으로 금지되어 있던 당시 ‘이 훌륭한 중국인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자유롭게 전할 날이 온다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영국의 일반인이나 지식인 모두, “다소 거친 방법을 써서라도” 중국인들을 ‘해방’시키고 ‘계몽’시킬 필요가 있다는 막연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14548021597779



아편 전쟁 직전 광동의 서양인 상관(商館) 모습.


물론 그런 막연한 생각이 전쟁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중국을 자국과 다를 바 없는 문명국으로 여기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면, 과연 전쟁이라는 결정이 쉽게 이뤄질 수 있었을까?

어쨌든 전쟁의 동기는 기본적으로 경제적인 이유였다. 인도와 영국 본토의 무역수지를 유지하려면 다소 떳떳하지 못해도 아편 무역에 기대야 했고, 또한 잠재력이 무궁무진한 중국 시장을 아편 이외의 영국 상품으로도 본격적으로 공략해야 한다, 그러려면 먼저 청나라의 관세가 제멋대로 정해지는 일, 무역항이 광주(廣州) 하나로만 국한된 일, 공행(公行)이라 불리는 상인조합이 무역의 전 과정을 장악하고 폭리를 취하고 있는 일 등을 반드시 뜯어고쳐야 한다,는 오랜 숙원도 있었다.

이에 덧붙여 ‘다른 열강과 식민지인들 앞에서 대영제국의 체면을 세워야 한다’는 정치적인 고려가, 그리고 막대한 부와 인구에 비하여 너무도 보잘것없어 보이는 중국의 군사력이 영국 정책결정자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이미 1720년에 [로빈슨 크루소]의 저자 대니얼 디포는 “80문의 포를 갖춘 영국이나 네덜란드, 프랑스의 전함 한 척이면 중국의 모든 배들을 격침시킬 수 있을 것이다”라고 호언했었다.

그것은 다소 과장이었을지라도, 다시 백 년 이상이 흐른 지금에는 결코 과장이 아닐 수도 있었다.

중국은 화약을 발명한 나라였지만 아직도 수백 년 전의 것과 큰 차이가 없는 흑색화약을 쓰고 있었고, 그것은 발화력은 있어도 폭발력이 부족해 오늘날의 포탄과 같은 작열탄을 만들 수 없었다.

즉, 대포는 적진에 불을 내거나 파편으로 인명을 살상하는 용도로 주로 쓰였다. 영국군이 쓰는 화약도 흑색화약이었지만, 꾸준한 개량을 거쳐 상당한 폭발력을 내는 수준에 이르러 있었다.

특히 나폴레옹 전쟁 이후 연구 끝에 1820년대부터 선보인 대포는 단 몇 발로도 적진에 치명적인 피해를 입힐 수 있었다.

또한 끊임없이 벌어진 전쟁의 경험과 최근의 산업혁명은 디포가 자신했던 전함보다 몇 배는 더 강력한 전함을 만들어냈다. 1839년에 건조된 네메시스호 같은 경우 무려 120문의 함포를 3단으로 갖추고, 철제 선체에다 증기기관을 씀으로써 중국의 목제 범선은 흉내도 못 낼 속력과 선회능력, 방탄력을 자랑했다.

그 함포들이 일제사격을 하면 선박이든 성벽이든 단지 불타는 정도가 아니라 우지끈 부서지고 와르르 무너졌으니, 그 이전까지의 전함은 주로 병력과 물자의 수송에 쓰이고 해전이란 그런 수송을 차단하고자 함선끼리 벌이는 전투였던 데 비해, 영국(그리고 다른 유럽) 해군은 육군의 도움 없이 자력으로 적의 성곽을 초토화할 위력이 있었다.

또한 영국군이 쓰는 머스캣 총은 중국군의 것보다 훨씬 사격이 빠르고 정확했으며, 군기나 훈련 수준에 있어서도 중국군은 한참 떨어졌다.

오랜 평화에다 기강 해이와 재정난이 겹치면서, 병력은 장부상으로만 있고 소집도 훈련도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가 태반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1796년에서 1804년까지 벌어진 백련교의 난만 해도 관병은 패배만 거듭했고, 각지의 부자들이 사재를 털어 모집한 향용(鄕勇)의 힘으로 가까스로 진압할 수 있었다. 결국 영국에 상대하는 청나라가 믿을 수 있는 것은 먼 거리와 많은 인구 정도였다.

참고문헌


  • John Oughterlony, [THE CHINESE WAR], London, Sounders and Otley, 1844
  • J. R. Fairbank, [CHINESE DIPLOMACY AND 'l'HE TREATY OF NANKING 1842], The Journal of Modern History, Vol. XII No.1, 1940
  • 이에인 딕키 외, [해전의 모든 것](휴먼앤북스, 2010)
  • 김용구, [세계외교사](서울대학교출판부, 2006)
  • 임계순, [중국의 여의주 홍콩](한국경제신문사, 1997)
  • 이영옥, “아편전쟁 시기 도광제의 아편정책” [동양사학연구] 69집. 2000
  • 이학노, “아편전쟁시기(1839~1842) 중국의 아편문제” [대구사학] 60집. 2000
  • 방용필, “아편전쟁이후의 청영관계, 1842-51: 통상과 관세문제를 중심으로” [한양대학교 인문논총] 제16집. 1988
  • 정성일, “아편전쟁전 도광제의 대영인식과 정책” [경북사학] 제19집. 1996
  • 하정식, “아편전쟁과 조선·일본” [근대중국연구] 제2집, 2001
  • 박지동, “영·미·일의 아시아 침탈과 민중 학살사 재고찰” [광주대학교 사회과학연구] 제9집. 1999
  • 전형권, “임칙서의 정치관에 대한 소고” [창원대학교 논문집] 12권 1호. 1990




14548021599324

함규진 | 서울교육대학교 교수/역사저술가
글쓴이 함규진은 여러 방면의 지적 흐름에 관심이 많다. 정치학을 전공하여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한편, 주로 역사와 관련된 책을 여러 권 썼고, 인물이나 사상에 대한 번역서도 많이 냈다. 동양과 서양, 전통과 현대, 보수와 진보 등 서로 대립되는 듯한 입장 사이에 길을 내고 함께 살아갈 집을 짓는 것이 꿈이다.

저자의 책 보러가기
|
인물정보 더보기


발행2013.07.18.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