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역사 제1차 아편 전쟁 - 거대한 중국, 실패를 거듭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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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510회 작성일 16-02-07 0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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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편 전쟁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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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표
전쟁 주체 청 vs 영국
(2차는 청 vs 영국, 프랑스, 미국, 러시아)
전쟁 시기 1839~1842(1차), 1856~1860(2차)
전쟁터 중국
주요 전투 천비 해전, 광동 전투, 태고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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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을 수 없는 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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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문에서 아편을 폐기하는 임칙서.



이처럼 막강한 위력의 영국(그 사실은 이미 어느 정도는 알려져 있었다. 1834년, 새로 부임한 영국의 공사 네이피어는 중국의 위압적 태도에 불만을 품고 영국 전함 두 척을 불러와 위력시위를 했는데, 중국의 수군도 해안 포대도 그들을 결코 저지할 수 없었던 것이다)을 상대로 임칙서는 정면 대결을 시도했다.

광동에 도착하자마자 아편 밀수업자들을 본보기로 처형하고 중국인들이 거래하던 아편을 몰수하더니, 3월에는 외국 상인들에게도 보유한 아편을 내놓으라고 통보한 것이다.

영국 상인들은 무역감독관 찰스 엘리어트를 중심으로 한 상관에서 농성하며 버텼으나 결국 물과 식량 공급이 끊긴 가운데 48시간 만에 굴복, 2만 여 상자의 아편을 내놓았다.

임칙서는 몰수한 아편을 호문에 모아놓고 폐기한 다음, 외국 상인들에게 위로 선물로 대량의 차를 제공하는 한편 앞으로 아편 거래를 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제출하게 했다.

미국, 프랑스 등 다른 외국 상인들은 순응하는 가운데 영국 상인들만은 차도 받지 않고 서약서도 제출하지 않은 채 마카오로 퇴거했으나, 임칙서는 일단 일이 마무리되었다고 보고 무역의 재개를 허락했다.

그러나 찰스 엘리어트는 본국에 급보를 보내 무력 지원을 촉구하는 한편, 7월에 ‘임유희 사건’이 일어나자 임칙서에게 협조를 거부하며 맞섰다.

임유희라는 중국 선원을 영국 수병이 구룡에서 살해하였는데, 엘리어트는 범인을 인도하라는 임칙서의 요구를 거부하고 스스로 그 병사를 처벌함으로써 ‘치외법권’을 행사했던 것이다.

이에 임칙서는 영국의 무역을 다시 한 번 금지하고, 마카오에 틀어박힌 영국인들에게 식량과 물의 공급을 중단시켰다.

그러나 마침 인도에서 군함 볼리지 호와 히아신스 호가 엘리어트에게 오자, 고무된 그는 물과 식량을 내놓으라며 구룡 앞바다에서 포격을 가했다. 이것을 아편 전쟁의 첫 적대행위로 보는 경우가 많다.

구룡 포격은 별 의미 없이 끝났으나, 무역 금지를 견디다 못한 일부 영국 상선들이 ‘아편거래 포기 서약서만 쓰면 된다’는 임칙서의 말에 따라 개별적으로 서약서를 쓰고 광주에 입항하는 일이 벌어졌다.

분노한 엘리어트는 군함을 동원해 영국 상선들을 가로막으려 했다. 그러자 광동제독 관천배(關天培)가 수군을 이끌고 영국 군함의 행패를 저지하려 나섰다.

여기서 ‘제1차 천비 해전’이 벌어진다. 영국 군함은 2척뿐이니 29척의 청군 함대에 대해 전술이고 포진이고 쓸 수가 없었으며, 포문을 모두 열고 쉴 새없이 쏴댈 뿐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믿기지 않는 일이 일어났다. 그런 사격 앞에 청군 군함이 연달아 박살이 나버렸던 것이다! 그것은 마치 인해전술과도 같았다.

기관총을 난사하는 적에게 맨주먹으로 달려들다 계속해서 쓰러지는 병사들처럼, 청나라 군함은 하나씩 둘씩 불을 뿜으며 무너져 내렸다. 청국 군함도 발포했으나, 당치도 않는 거리에 헛되이 떨어질 뿐이었다.

영국 군함은 포탄이 다 떨어질 때까지 쏘고는 천천히 물러났는데, 이미 그 배를 쫓는 배는 없었다. 29척 중 26척이 격침 또는 대파되고, 겨우 3척만이 그럭저럭 제 모양을 유지한 채 불과 연기와 파편과 시체로 뒤덮인 바다 위에 흔들거리며 떠 있었으니.



임칙서의 절치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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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칙서. 그는 보기 드문 서양통이었으나, 서양의 중국 침략을 초래하는 원인을 제공하게 된다.



천비 해전의 결과를 보고 임칙서는 경악했다. 고민 끝에 조정에 올리는 보고서에는 “적을 물리쳤나이다”라고 쓰기는 했지만, 예상보다 훨씬 강력한 영국의 무력을 보고 잠이 오지 않았다.

사실 그는 청나라에서 보기 드문 서양통이었다. 서양에 가본 적은 없으나 일찍부터 서양의 정보를 널리 수집하여 스스로 몇 권의 책을 썼고, 친구인 위원이 나중에 펴낸 [해국도지(海國圖志)]는 한동안 동양인의 서양 관련 기본지침서가 되기도 했다.

당시 도광제 이하 조정 중신들이 까맣게 몰랐던 국제법 지식도 갖고 있어서, 엘리어트나 외국 상인들의 항의에 국제법 원칙을 들어 조목조목 반박하기도 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책으로만 배운 서양이 이렇게나 강력할 줄이야!

임칙서는 본래 서양 세력을 물리치기 위해 여러 가지 준비를 해왔지만, 이제 다시금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호문 등의 요새에 방벽을 늘리고 오문에 정병 1300여 명을 추가 배치했으며, 호문에는 포르투갈과 미국에서 수입한 대포 2백 문을 추가로 배치했다.

또한 서양 배 1척을 구입해 공략 연습을 실시했으며, 각종 선박 60여 척을 전함으로 개조하고, 100여 척의 소화선(小火船)을 배치해 전시에 적함에 돌입해 불을 붙이도록 했다.

또한 그는 무력에서의 열세를 ‘지리(地利)와 인화(人和)’로 극복하고자 했다. 적이 멀리 떨어져 있어 대규모 파병이 어려운데다 현지 사정에 어둡고 풍토가 맞지 않으리라고 내다보고(실제로 아편 전쟁에서 전사한 상당수의 영국 병사는 전투보다 전염병에 희생되었다), 군민이 단결하여 버틸 때까지 버티다가, 정 불리하면 항구를 태워버리고 내륙으로 단계적으로 후퇴한다는 작전을 세웠다.

그러면 대포나 철갑선은 몰라도 살과 피를 가진 적군은 오래 견디지 못하고 제풀에 물러가리라!

민심을 모으는 일에 발벗고 나선 그는 아편의 폐해와 서양인의 인면수심에 대한 고지를 거듭 내리는 한편, ‘백인을 죽이면 은 1백원, 흑인은 50원’의 상금을 약속하기도 했다.

그것이 적군의 수를 직접 줄이는 효과는 미미했지만, 그 사실을 아는 영국군이 몰래 자신들에게 협력하고 있던 중국인들, 이른바 ‘한간(漢奸)’을 불신하게 만듦으로써 적에게 귀중한 정보가 흘러가지 않게 만든 것이었다.



허를 찔리고, 실패를 거듭하다




임칙서가 이렇게 분골쇄신하고 있는 동안, 영국 런던에서는 파병 여부를 둘러싸고 격론이 벌어지고 있었다.

영국 내각은 이미 1839년 10월에 파병 방침을 세웠으나, 공식 결정은 1840년 2월에 내렸으며 이를 승인하느냐를 놓고 3월에서 4월까지 의회에서 공방이 펼쳐졌다.

“일찍이 이처럼 부당하고 조국에 불명예가 되는 전쟁은 없었다!”는 글래드스턴, “나는 중국에 꼭 가보고 싶다. 하지만 군함을 타고 가지는 않겠다”는 알렉산더 등의 연설과 “대영제국의 시민과 재산권이 이처럼 공공연히 위협과 치욕을 당했거늘, 참아야 한다는 말이냐?”는 웰링턴, “우리는 앞서 인도 캘커타에서 당한 야만 행위에 플라시 전투로 앙갚음한 적이 있다”는 매콜리의 연설이 좌중을 뜨겁게 달군 끝에 4월 10일 이루어진 표결은 271대 262로 파병 승인이었다.

이로써 1840년 5월, 16척의 군함(보조함까지 합하면 총 44척)과 4천 명의 병력이 중국으로 출발했다.

그동안 임칙서가 애써 갖춰 놓은 방어책은 소용이 없었다. 일단 마카오 부근의 주강을 점령해 교두보를 마련한 영국 함대가 광동을 내버려둔 채 북상해 버린 것이다.

중국의 수도 북경이 해안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중국의 남쪽 끝에서 공방을 벌이느니 곧바로 황해를 거슬러올라 북경의 황제를 위협하려 했던 것이다. “적의 수가 많다면 그 머리를 바로 노려라”는 중국 병법을 응용한 셈이랄까.

적의 예상 밖의 움직임에 임칙서도 도광제도 당황했다. 다만 당시 최고 속력의 영국 증기선들도 4천 킬로미터가 넘는 거리를 한 달음에 항해할 수는 없었으며, 식량과 물을 조달하고자 양쯔강 하구 주산열도의 정해에 정박하려 했다.

식량과 물을 제공해 주면 순순히 물러가겠다는 영국군의 요구를 지현인 요회상(姚懷祥)은 거절했으며, 일방적인 전투 끝에 정해는 초토화되고 요회상은 자결했다.

영화 [아편전쟁]은 그의 죽음을 장렬히 묘사하며 “아편 전쟁에서 적에게 항복한 중국인은 한 명도 없다”는 내레이션을 덧붙였는데, 그게 사실이라면 항복하기에 앞서 병사라면 도망치기 바빠서, 일반 백성이라면 기회를 틈탄 약탈에 바빠서 그랬을 수도 있었다.

사실 제국의 말기에 목숨 바쳐 왕조에 충성하려는 관료는 많지 않았으며, 일반 백성의 입장에서는 “반청복명(反淸復明)”을 내세웠던 천지회나 의화단이 아니더라도 관군이든 영국군이든 똑같다고 보는 수가 상당했던 것이다.

물론 이후(1841년)에 영국군의 행패에 분노한 농민들이 ‘평영단(平英團)’을 조직, 호미와 곡괭이로 영국군에게 덤볐던 삼원리 투쟁 같은 사례도 있지만, 적어도 아직까지는 서양 열강의 침입에 ‘민족감정’을 가지고 맞서려는 의식은 일반적이 아니었다.

정해를 점령한 후 영국 함대는 병력을 나누어 일부는 나머지 주산열도와 내륙의 영파, 상해 등을 공략하고 나머지는 계속 북상하여 북경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항구도시 톈진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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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1년, 하문을 점령한 영국군.



혼비백산한 도광제는 “오랑캐들의 기세가 하늘을 찌르니 일단 좋은 말로 달래고 후일을 도모하자”는 말을 받아들여 임칙서를 해임하고, 기선(琦善)을 새 흠차대신으로 임명하고는 영국군과의 교섭에 들어가도록 했다.

기선은 평화 무드 조성을 위해 청 측의 방어체제를 자진해서 해체하고 해군을 후퇴시켰으며, 영국군도 이에 응하여 톈진에서 다시 남하하여 광동으로 내려갔다.

광동 교섭장에서 기선은 음식을 직접 영국 대표의 입에 넣어 주는 등의 저자세를 보이며 유리한 협상을 이끌어내려 했다.

영국은 영국에 대한 사죄 및 유사 사건의 재발 방지 보장, 몰수된 아편 대금과 원정 경비의 변상, 양국 관계의 평등성 확인, 아편 무역의 사실상 묵인, 6개 이상의 항구 개항, 주산과 홍콩의 할양 등 15개 요구조건을 내세웠다.

1840년 12월, 이는 기선에 의해 어느 정도 완화된 형태로(가령 6개가 아닌 3개항 개항, 영토 할양은 포기) 정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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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광제. 청나라 제8대 황제인 그의 시대에 청왕조는 결정적으로 기울었으며, 그것은 그의 리더십 부족에도 원인이 있었다.



하지만 도광제 등은 이 교섭 결과에 불만을 터뜨렸고, 영국 쪽에서도 불만은 남아서 1841년 1월에 전쟁은 재개된다.

광동 앞바다에 몰려든 영국 군함은 먼저 사각(沙角)과 대각(大角)의 요새부터 두들기기 시작했고, 그 방어는 원래부터 역부족이었지만 기선의 손으로 병력과 방비가 크게 삭감된 터였으므로 맥없이 격파되었다.

두 번째의 천비 해전이 벌어지고, 그 결과는 전보다 더한 최악의 패배였다. 도광제는 일단 4천 명의 지방 관군을 광동에 급파하고 각지에 격문을 띄워 향용을 모으는 한편, 조카인 혁산에게 1만 6천의 팔기군 병력을 이끌고 광동으로 가도록 했다.

하지만 그 사이에 기선은 영국군과 ‘천비 가(假)조약’을 맺어 홍콩의 할양 등을 약속해버렸는데, 그 사실을 안 도광제는 노발대발하여 기선을 파면했으나 이미 홍콩은 영국군에게 점령된 뒤였다.

그래도 보다 북쪽의 주산열도는 할양하지 않기로 한 점이 성과였으며 이 점이 영국 본국의 불만을 불러와 엘리어트를 해임, 보다 강경론자였던 헨리 포틴저로 대체하게 된다.

돌이켜보면 청의 입장에서는 영국군이 북경을 위협할 때 저자세를 취할 게 아니라 천도를 불사하면서도 끝까지 맞선다는 자세를 취하는 게 나았을 수 있다.

그러면 소수이고 지리에도 어두운 영국군이 넓은 중국을 헤매던 끝에, 전쟁을 지속하려는 의지가 사그라졌을 것이다.

아니면 차라리 처음의 교섭 과정에서 양보할 만큼 양보하고, 그 내용을 끝까지 지키려는 태도를 보였어야 했다.

그러면 ‘중국인들은 믿을 수 없다’는 생각에 따라 영국의 태도가 갈수록 강경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결국 임칙서와 기선을 충분한 고려 없이 그때그때 임명하고는, 끝까지 믿지 않고 모두 물리쳐버린 도광제의 리더십 부재가 아편 전쟁의 상흔을 더욱 깊이 남겼다고 할 수 있다.

1841년 4월, 마침내 광동이 영국군의 손에 떨어졌으며 직후에 ‘광동화약’이 맺어져 양군은 청 측이 일정한 배상금을 무는 조건으로 휴전하기로 했다.

하지만 양측의 적대행위는 산발적으로 이어졌고, 이에 ‘아예 본때를 보여 놔야 저들이 꼬리를 확실히 내릴 것이다’고 여긴 포틴저는 인도에서 증원군을 받고 양자강을 따라 진격, 진해, 영파를 차례차례 짓밟았다.

포틴저가 이끄는 군대는 1842년 5월에 사포에서 혁산의 팔기군을 격파했으며, 6월에는 상해와 진강을 손에 넣으며 대운하를 봉쇄하고, 8월에는 남경까지 도달했다.

이로써 대세가 기울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청왕조는 영국의 뜻에 따라 남경(난징)에서 조약을 맺기로 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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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J. R. Fairbank, [CHINESE DIPLOMACY AND 'l'HE TREATY OF NANKING 1842], The Journal of Modern History, Vol. XII No.1, 1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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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용구, [세계외교사](서울대학교출판부,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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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영옥, “아편전쟁 시기 도광제의 아편정책” [동양사학연구] 69집. 2000
  • 이학노, “아편전쟁시기(1839~1842) 중국의 아편문제” [대구사학] 60집. 2000
  • 방용필, “아편전쟁이후의 청영관계, 1842-51: 통상과 관세문제를 중심으로” [한양대학교 인문논총] 제16집. 1988
  • 정성일, “아편전쟁전 도광제의 대영인식과 정책” [경북사학] 제19집. 1996
  • 하정식, “아편전쟁과 조선·일본” [근대중국연구] 제2집, 2001
  • 박지동, “영·미·일의 아시아 침탈과 민중 학살사 재고찰” [광주대학교 사회과학연구] 제9집. 1999
  • 전형권, “임칙서의 정치관에 대한 소고” [창원대학교 논문집] 12권 1호.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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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규진 | 서울교육대학교 교수/역사저술가
글쓴이 함규진은 여러 방면의 지적 흐름에 관심이 많다. 정치학을 전공하여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한편, 주로 역사와 관련된 책을 여러 권 썼고, 인물이나 사상에 대한 번역서도 많이 냈다. 동양과 서양, 전통과 현대, 보수와 진보 등 서로 대립되는 듯한 입장 사이에 길을 내고 함께 살아갈 집을 짓는 것이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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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2013.0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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