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역사 역사의 교훈 - 동양의 굴욕은 통과의례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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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84회 작성일 16-02-07 0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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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편 전쟁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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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표
전쟁 주체 청 vs 영국
(2차는 청 vs 영국, 프랑스, 미국, 러시아)
전쟁 시기 1839~1842(1차), 1856~1860(2차)
전쟁터 중국
주요 전투 천비 해전, 광동 전투, 태고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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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의 굴욕은 ‘통과의례’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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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화단원들. 본래 “반청복명”을 내건 비밀결사였으나 서양의 침략이 심화되면서 “부청멸양(扶淸滅洋)”을 내세우게 된다.


난징 조약에서 베이징 조약에 이르는 22년 동안, 청나라의 위세는 날로 추락했으며 중국의 잠재력을 두려워하던 열강의 시선도 차차 오만과 경멸로 바뀌게 되었다.

난징 조약 당시만 해도 중국을 일종의 동반자나 피후견인처럼 여겼던 영국은 이제 다른 열강과 같이 ‘중국 뜯어먹기’에 바쁜 모습으로 변했다.

이에 비례하여 양인들에 대한 중국인들의 증오와 원한도 깊어갔고, 비밀결사들의 “반청복명(청나라에 반기를 들어 명나라를 회복한다)” 구호도 차차 “부청멸양(扶淸滅洋, 청나라를 도와 서양인들을 없앤다)”으로 바뀌어갔다.

물론 배외적인 민족주의만 태동한 것은 아니었다. 천하의 중심 국가라는 자만심에만 사로잡혀 개혁을 외면하고 실질을 숭상하지 않은 까닭에 이런 치욕을 당했다는 반성이 일부 정치인과 지식인들 사이에서 일었다. 그리고 비록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지만 서양을 따라 배우고 구체제를 개혁하려는 “양무(洋務)운동”과 “변법자강(變法自彊)운동”으로 이어졌다.

여러 차례에 걸친 개항장의 확대와 할양지 및 조차지의 확대로 이제 중국은 세계 자본주의 체제에 깊숙이 편입되었으며, 서양인과 서양 문물, 기독교 등도 흔히 눈에 띄게 되었다.

청 조정도 더 이상 천하에 군림하는 유일한 황제국으로서 서양 열강을 이번원(夷番院)에서 처리할 수 없었고, 외교담당 기구인 총리아문을 신설하고 국제법과 국제 외교관계를 익히게 되었다. 이것이야말로 선량한 서양 선교사들이 꿈꾸던 중국의 “개화”였다.

그러나 그것이 곧 “계몽”이었을까?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동양이 깨어나 서양과 하나의 세계를 이루는 길, 그 길은 그토록 많은 피와 원한과 불평등과 착취와 아편 냄새로 뒤범벅이 되어야만 했을까?

보다 좁은 범위에서, 도광제가 임칙서를 절대적으로 신임하고 중국 전체적으로 개혁과 반침략 투쟁을 추진해 나갔더라면?

또는 옛 당나라나 원나라 지도자들처럼 외국인과 외국 문물에 열린 태도를 갖고, 서양인들의 자존심과 이익을 최대한 배려하는 태도로 대했더라면? 과연 “역사상 가장 부당한 전쟁”과 “중국 최초의 불평등조약”이 있었을까?


조선과 일본




중국이 이렇게 어이없는 유린을 당할 즈음, 그 오랜 이웃 나라들은 그 상황을 어떻게 보고 있었던가. 조선에서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중국 관련 정보를 중국에서 자체적으로 제공하는, 공식 정보에만 의존하고 있던 조선은 “서양 오랑캐들이 아편 때문에 천조(天朝)를 침략해 왔으나 ......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는 것으로 아편 전쟁을 이해했다.

청 조정의 해석과 마찬가지로, 영토를 빼앗기지 않고(조선에서는 한동안 홍콩의 할양조차 몰랐다) 황제가 몽진에 나서지도 않은 이상 오랑캐의 침략은 실패했다고 본 것이다.

다만 이를 계기로 아편과 아편 상인들이 조선까지 들어올 가능성만 우려했으며, 그에 따라 서양인들에 대해 더 굳게 문을 닫아야 한다는 것이 조선의 조정이 내린 결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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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리 제독의 “흑선”을 묘사한 당시 일본의 그림.


반면 일본에서는 아편 전쟁의 정보를 비교적 정확히 확보했으며, 그에 따라 충격도 크게 받았다. “천지개벽 이래 처음 있는 대사건”이라고 평가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막부는 서양인들의 마수가 일본에도 뻗쳐올 가능성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화력의 차이가 중국이 패배한 근본 원인이라는 분석 아래 서양식 화포대와 총병대를 설치하고 증기선 수입을 검토했다.

또한 오랫동안 중국과 네덜란드 상인에게만 열어두던 교역권을 다른 나라들에게도 허용하여, 침략의 빌미를 미리 제거하려 했다.

이를 ‘덴포 개혁’이라 하는데, 비록 정치적인 이유로 중단되었지만 사무라이의 입장을 살려주려 화기의 사용을 금지하고 쇄국을 고수해온 것이 에도 막부의 오랜 정책이었음을 생각하면 놀랄 만큼 유연한 대응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처럼 “살기 위해서는 바꿔야 한다”는 강한 인식은 1853년에 미국에 의해 이루어진 개항 이후 막부 타도와 메이지 유신이라는 대개혁을 이끄는 원동력이 되었다.

참담한 역사는 그 교훈을 배우지 못하는 사회에 반복되며, 그것은 다른 나라의 역사에서 배우지 못하는 사회도 마찬가지다.

참고문헌


  • John Oughterlony, [THE CHINESE WAR], London, Sounders and Otley, 1844.
  • J. R. Fairbank, [CHINESE DIPLOMACY AND 'l'HE TREATY OF NANKING 1842], The Journal of Modern History, Vol. XII No.1, 1940.
  • 이에인 딕키 외, [해전의 모든 것](휴먼앤북스, 2010).
  • 김용구, [세계외교사](서울대학교출판부, 2006).
  • 임계순, [중국의 여의주 홍콩](한국경제신문사, 1997.
  • 이영옥, “아편전쟁 시기 도광제의 아편정책” [동양사학연구] 69집. 2000.
  • 이학노, “아편전쟁시기(1839~1842) 중국의 아편문제” [대구사학] 60집. 2000.
  • 방용필, “아편전쟁이후의 청영관계, 1842-51: 통상과 관세문제를 중심으로” [한양대학교 인문논총] 제16집. 1988.
  • 정성일, “아편전쟁전 도광제의 대영인식과 정책” [경북사학] 제19집. 1996.
  • 하정식, “아편전쟁과 조선·일본” [근대중국연구] 제2집, 2001.
  • 박지동, “영·미·일의 아시아 침탈과 민중 학살사 재고찰” [광주대학교 사회과학연구] 제9집. 1999.
  • 전형권, “임칙서의 정치관에 대한 소고” [창원대학교 논문집] 12권 1호.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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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규진 | 서울교육대학교 교수/역사저술가
글쓴이 함규진은 여러 방면의 지적 흐름에 관심이 많다. 정치학을 전공하여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한편, 주로 역사와 관련된 책을 여러 권 썼고, 인물이나 사상에 대한 번역서도 많이 냈다. 동양과 서양, 전통과 현대, 보수와 진보 등 서로 대립되는 듯한 입장 사이에 길을 내고 함께 살아갈 집을 짓는 것이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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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2013.0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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