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역사 제네바 협약 - 전쟁을 승인하며 평화를 꿈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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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36회 작성일 16-02-07 0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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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로 가죠? 당신은?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야 하나요?”

“제네바......”

“.......우리는 지금 제네바로 가야 해요.”



전쟁에 시달리고, 전쟁과도 같은 일상에 지친 외로운 남녀가 1987년의 한국 영화 [우리는 지금 제네바로 간다]에서 나누는 대화다. 여기서 ‘제네바’란 스위스에 실재하는 도시라기보다 꿈의 세계에 존재하는 평화와 안식의 이상향이지만, 그 이름이 뉴욕도 아니고 모스크바도 아닌 ‘제네바’인 까닭은 19세기 후반부터 제네바에서 이루어진 여러 차례의 협약과 의정서들이 전쟁의 폐허에 인도주의와 평화주의를 꽃피워보려는 인류의 꾸준한 노력의 상징인 까닭이리라. 인류의 꾸준한 노력. 그러나 그것은 모순을 품은 노력이기도 하다. 제네바 협약은 전쟁 자체를 없애려는 것이 아니라, 전쟁을 최대한 덜 비참하게 만들려는 협약이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이상이 인류의 협약이 되다





“......이런 힘든 일을, 유급 직원들로 담당케 하는 일은 한계가 있다. (......) 야전병원의 인력은 언제나 부족하며, 그 숫자를 두세 배로 늘린대도 여전히 부족할 것이다. 따라서 이 일은 공적인 일이 되어야만 한다. 모든 사람의 관심과 협력만이 이 일을 해낼 수가 있다. 모든 나라의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이 문제에 관심을 갖고 나서야 한다. 세상의 강자들에서 어려운 서민들까지. (......) 남자들만 이 문제에 열성적이어서는 안 된다. 유력한 남자들에게는 그 배우자들의 의견이 중대한 영향을 주지 않던가? 불쌍한 고아들에게 헌신하는 여성들이 있지 않던가? (......) 자선가들만이 아니라, 조용히 자기 일에 몰두하는 작가들도, 인류를 위하여 이 주제로 글을 써야 한다. 모든 민족, 모든 고장, 모든 가정을 위하여 그리해야 한다. 그 어떤 사람도 미래에 전쟁의 위협을 당하지 않으리라 장담할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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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년의 앙리 뒤낭.



이탈리아의 통일을 놓고 사르데냐-프랑스 연합군과 오스트리아군이 격전을 벌인 1859년의 솔페리노 전투의 모습에 충격을 받았던 프랑스의 청년 사업가, 장 앙리 뒤낭 (Jean-Henri Dunant, 1828~1910)이 [솔페리노의 회상] 말미에 쓴 말이다. 그는 아무리 숭고한 대의를 위해 치러지는 전쟁도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참상을 낳음에, 특히 부상병들과 병에 걸린 병사들이 변변한 치료도 받지 못한 채 죽어가고 썩어가는 실상에 가슴이 미어졌다. 그리고 한탄만 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뭔가를 해야 하며, 전쟁 자체를 없애기란 어렵더라도 적어도 병사들이 더 나은 의료지원을 받게끔 힘을 모아야 한다고 부르짖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회상]에서 그가 제시한 두 가지 구상은 첫째, 병사들의 구호를 위한 자원봉사 인력을 양성하고 그것을 관리할 중립적 민간단체를 만드는 것, 둘째, 그런 민간단체의 활동을 뒷받침하기 위해 각국 정부의 협약이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자국의 이익 때문에 상대국의 국민을 최대한 많이 죽이려 하면서, 동시에 그 죽이는 수를 줄이기로 국가끼리 약속한다? 앞뒤가 안 맞는 것처럼도 보이지만, 뒤낭의 아이디어는 의외로 빠르게 긍정적인 반응을 얻었다. 갈수록 기계화되는 전장에서 급속도로 늘어나는 인명 피해, 그에 따라 인도주의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많아서만은 아니었다. ‘쉽게 대체하기 힘든 군사 자산’인 병력의 소모율을 줄이고, 전투력에 짐이 되는 부상병 돌보기를 민간 인력에게 맡겨 버리는 대안은 각국의 군사 참모들에게도 솔깃했기 때문이었다. 자기 사업도 팽개치고 유럽 각국을 돌며 구호책 마련을 역설했던 뒤낭의 정성도 한몫하여, 1863년 2월에 제네바에서 뒤낭의 구상을 실현하기 위한 위원회가 결성되고, 일주일 만에 국제적십자회가 창립되었으며(당시는 ‘국제 부상자구호협회’라는 이름이었다), 11월에는 제네바에서 14개국 대표들이 회담을 열어 부상병 구호 국제규약을 마련하기 위해 힘을 모으는 데 합의했다.

그러나 뒤낭 등이 속한 제네바 위원회는 어디까지나 민간단체이며 민간단체의 발의로 국제조약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국제법 원칙에 맞지 않는다는 지적이 나왔다. 뜻밖의 난관에 부딪친 뒤낭은 파리로 가서 나폴레옹 3세에게 해결책 마련을 호소했으며, 그는 ‘스위스 정부가 위원회를 대신해 협약을 발의하고, 이에 각국 정부가 호응하는 형식’을 고안해냈다. 형식적인 문제라지만 인도주의를 위한 순수 민간 차원의 노력을 국가가 ‘접수’하고 ‘승인’ 또는 ‘주관’하는 모습은, 제네바 협약 또한 베스트팔렌 조약 이래 국제정치의 유일한 행위자로서 존립해온 주권국가의 ‘국익 추구’에 지나지 않음을 보여주는 셈이었다. 뒤낭 개인적으로도 이때를 전후해 자신이 시작한 국제구호운동에서 점점 소외되면서, 쓸쓸한 후반생을 살아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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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4년의 제네바 제1협정문. <출처: (cc) Kevin Quinn at en.wikipedia.org>



아무튼 스위스 정부가 1864년 6월 6일에 발의한 협약안을 놓고 12개국(스위스,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 덴마크, 이탈리아, 스페인, 포르투갈, 프로이센, 바덴, 헤센, 뷔르템베르크. 이후의 독일 통일을 생각하면 9개국) 대표들이 8월 8일부터 22일까지 제네바에서 회담을 갖고, 다음과 같은 10개조로 이루어진 협약을 타결했다(이하 협약 내용은 요약).


제1조. 부상병 호송 차량과 야전병원은 중립으로 간주, 공격하지 않는다.

제2조. 부상병 호송 차량과 야전병원의 근무자 및 군목도 임무수행 중에는 중립으로 간주한다.

제3조. 그런 인원은 설령 근무지가 적군에게 점령되더라도 그 자리에서 아군을 쫓아 철수하거나, 계속 임무 수행을 하다가 임무 종료 후 철수하는 것이 허용된다.

제4조. 야전병원의 물자는 점령군에게 귀속될 수 있다. 다만 호송 차량은 귀속되지 않는다.

제5조. 적대국의 부상당한 병사를 구호한 민간인은 그로 인해 불이익을 받지 않는다.

제6조. 부상병 또는 질환자는 국적을 불문하고 구호를 받는다. 지휘관은 전투 중에도, 사정이 허락하고 사전 협의가 있는 한, 적의 부상병을 적에게 송환한다. 회복되었다 해도 더 이상 전투가 불가능해 보이는 병사 역시 송환한다. 송환 임무 수행 중인 병력은 중립으로 간주한다.

제7조. 부상병 호송 차량과 야전병원, 송환 임무 수행 병력은 적십자를 표시한 흰 깃발을 자국 국기와 함께 든다. 같은 표시의 완장 역시 해당 인원이 착용할 수 있다.

제8조. 이 협약 내용은 각국 정부의 지침과 이 협약의 기본 원칙에 따라 해당 군 지휘관이 실행한다.

제9조. 가맹국들은 이 협약에 불참한 국가들에게도 가입을 권유하며, 그에 따라 의정서 체결의 여지를 남긴다.

제10조. 현행 협약 내용은 향후 4개월 내에 비준하여, 베른에서 비준서를 교환하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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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4년, 구호 활동을 펼치는 적십자 단원들.



이처럼 최초의 제네바 협약은 내용이 간단했고, 제한적이었다. ‘부상병을 구호하는 활동을 방해하지 않는다’가 핵심이었으며, 그 내용을 실천할 권한과 책임이 각국 정부의 지침을 따르는 군 지휘관에게 주어진 점은 경우에 따라서는 협약 내용이 무시될 수도 있음을 암시했다. 그러나 “부상병 또는 질환자는 국적을 불문하고 구호를 받는다. 지휘관은 전투 중에도, 사정이 허락하고 사전 협의가 있는 한, 적의 부상병을 적에게 송환한다”는 규정은 단지 냉정한 국익 차원으로만 풀이할 수 없는 인도주의를 담고 있었으며, 뒤낭이 솔페리노에서 몸소 실천하고 일관되게 강조했던 행동 강령이기도 했다. 그리고 각자의 속셈이 어찌되었든, 나폴레옹 전쟁을 수습하려던 빈(Wien) 회의 이래 모처럼 유럽 각국이 한 자리에 모여 협력안을 도출했으며, 앞으로도 여러 국가를 참여시키려 문을 열어 놓았다는 사실도 의미가 컸다. 이런 협력체제가 계속 강화되고 확대되어, 현대적인 국제협력체제로 발전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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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세계 각국의 제네바 협약 수용 정도를 나타낸 지도.



영국은 1870년, 미국은 1882년에 협약에 가입했으며 대한제국도 1908년에 협약 가입과 함께 한국 적십자사 창설을 이루었다. 당시의 제네바 협약은 1906년의 “제2협약”을 추가한 보완본이었는데, 그 사이에 벌어진 청일전쟁(1894~1895), 미국-스페인 전쟁(1898), 러일전쟁(1904~1905) 등에서 갈수록 해전이 육전 못지 않게 중대하고 치열해지는 모습이었으므로 주로 육전을 염두에 두고 설정된 제1협약의 내용을 해전에도 응용하는 것(격침 후 표류하는 병사의 구호, 적십자 병원선의 도입 등)이 주된 보완이었다. 당시 제네바 협약은 유럽을 넘어 아시아, 아메리카 등에서 널리 통용되고 있었다.



세계대전과 제3협약



1910년대를 지나며 세련되고 안정되어 가는 듯했던 국제질서는 한편으로 큰 위기를 키워가고 있었다.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 사이의 경쟁과 서구 대 비서구 사이의 알력이 세계정세를 갈수록 긴장시켰기 때문이다. 그것은 결국 제1차 세계대전(1914~1918)이라는 사상 최대의 전란으로 귀결된다. 스스로의 손으로 이런 참극을 저질렀음에 망연자실하던 서구 열강은 1919년에 미국,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일본의 발의로 각국의 적십자사를 연합시킨 국제적십자사연맹(IFRC)을 창설하고, 1920년에 국제연맹을 창설했으며, 1924년에는 영국, 프랑스의 발의로 “국제분쟁의 평화적 타결을 위한 제네바 의정서”를 추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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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네바에 있는 옛 국제연맹 본부. 연맹은 평화와 인도주의를 위해 노력했으나 또 한 차례의 세계대전을 막지 못한 채 1929년에 해체되었다. <출처: (cc) Yann Forget at en.wikipedia.org>



이 의정서는 국제분쟁에서 침략자가 누구이고 피해자가 누구인지를 국제재판소의 결정에 따라 판정하며, 침략자는 집단적 제재를, 피해자는 원조를 받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또한 국제적 군축 추진도 규정해 두었다. 국민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주권의 유일한 집행자가 되었던 국민국가. 그 국민국가가 수없이 많은 국민을 파멸로 몰아넣었으니 이제는 강력한 주권 제한 장치를 인류의 이름으로 마련해도 되지 않겠는가? 하지만 이 의정서는 무산되었다. 미국의 반응이 차가웠고, 추진의 한 축이던 영국 역시 노동당에서 보수당으로 정권이 넘어가면서 반대 입장으로 돌아서 버렸기 때문이다.

그래도 1929년에는 제네바 협약이 추가되어 “제3협약” 시대가 열렸다. 143조에 달하는 추가 협약의 주요 내용은 부상자와 질환자만이 아니라 전쟁 포로에 대해서도 인도적인 조치를 취한다는 것이었다. 그에 따라 전쟁 포로에게 가능한 구호와 보호 조치를 하고, 비인도적 대우를 하지 않으며, 적대행위가 끝나는 즉시 본국으로 송환한다는 등등의 원칙이 세워졌다. 이것은 병력의 소모를 줄이고 부상병 구호에 대한 군 자원의 소모를 최소화한다는 애초 제네바 협약의 ‘국익 우선 논리’에서 크게 벗어난 것이다. 아군에게 돌아갈 자원을 건강한 적군을 구호하고 보호하는 데 소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세계대전의 참극이 인도주의에 대한 국제여론을 전보다 크게 환기시킨 덕분이었다.



제4협약에 제시된 ‘범죄적 전쟁’



그러나 국제연맹과 제네바 협약은 제2차 세계대전이 벌어지는 것을 막지 못했다. 전쟁 중 부상자들과 전쟁 포로들 역시 어느 정도 협약에 따른 대우를 받았으나 이를 무시하는 경우도 숱했다. 특히 미군, 영국군 포로에 대한 일본군의 가혹 행위와 소련군 포로에 대한 독일군의 가혹 행위가 유명했는데(그 사실 및 소문은 그만큼 ‘복수’를 유발했다), 전쟁이 워낙 총력전으로 치달으며 포로까지 챙겨줄 여유가 없어진데다 이데올로기가 적군을 “인간 이하”로 취급해버리는 사고방식을 퍼뜨렸기 때문이었다. 민간인에 대한 유례없는 가혹 행위 역시 세계인들을 전율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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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동군사재판의 피고석에 선 일본인 ‘전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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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뉘른베르크 군사재판의 피고석의 독일 ‘전범’들.



이에 따라 ‘전쟁범죄’라는 개념이 주목받았다. 아무리 전쟁 중이라 해도 제네바 협약을 비롯한 국제법을 위반하며 상대국 군인에게, 또는 민간인에게 비인도적인 행위를 했다면 인류의 이름으로 처벌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뉘른베르크 군사재판과 극동 군사재판의 주제였고(물론 전승국들의 전쟁범죄는 논의되지 않았다), 이를 아예 국제법상에 규정해 두기 위해, 1949년에는 제네바 협약에 “제4협약”이 추가되었다. 이것으로 1925년에 무산된 제네바 의정서에서처럼 국가 자체를 처벌할 수는 없어도, 전쟁범죄를 저지른 국가 지도자나 군 지휘관, 병사 등을 처벌할 수는 있게 되었다. 1950년의 한국전쟁부터는 ‘전쟁범죄조사단’이 설치되어 전쟁 중에 일어나는 범죄를 조사하고 필요한 조치를 취하는 것이 통례가 되었다. 제네바 협약을 비롯한 인도적 국제법도 비로소 “법”으로서 강제성을 띠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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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크 전쟁 당시 아부 그라이브 수용소에서 이라크군 포로들을 가혹하게 다루는 미군 병사들.



그것은 냉혹한 국제정치 현실에 대한 인도주의의 값진 승리였을까? 그렇게 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한편으로 미국 위주의 전후 국제 질서가 갖는 특성을 반영했다. 미국은 인권, 자유, 인도주의, 민주주의 등을 내세우며 공산권과 제3세계 국가들을 비난하고 때로는 공격할 명분을 마련했다. 그 가운데는 전쟁범죄 혐의도 있었으며,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된 전범 혐의자들은 대부분 미국과 적대했던 진영의 지도자들이었다. 반면 미군의 전쟁범죄는 거론되지 않았으며, 한국전쟁에서나 베트남전쟁에서나 미군이 조직한 전쟁범죄조사단은 적국의 범죄 혐의만을 조사했다.

최근에도, 1999년에 유고 내전 중의 범죄를 따지기 위한 법정이 세워졌을 때 소추위원장은 처음에 “제네바 협약을 위반한 자는 누구를 막론하고 엄중히 조사하겠다”고 선언했으나, 워싱턴의 압력 뒤에 그 발언을 철회하고 “나토 회원국들의 활동은 조사 대상이 아니다”라 밝혔다. 2003년의 이라크 전쟁에서도 미군 병사들의 가혹 행위 장면이 유출되면서 세계적으로 큰 이슈가 되었지만 극소수의 병사들만 법정에 섰고, 지도자급에 대한 사법절차는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과거에는 국가주권의 절대성 원칙이 보편적 인권과 인도주의를 압도했다면, 이제는 인권과 인도주의를 빌미로 일부 국가들이 적대국을 “불량국가”로 낙인찍고 그 주권을 무시하는 양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담쟁이가 담벼락을 무너뜨리는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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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적십자ㆍ적신월연맹(IFRC, International Federation of Red Cross and Red Crescent Societies)의 엠블럼. 적신월은 적십자 표식에 거부감을 가졌던 이슬람권 국가들 사이에서 널리 쓰이다 1929년 공식 표장으로 채택되었다. <출처: (cc) Julius.kusuma at en.wikipedia.org>



오늘날의 제네바 협약은 429개 조문과 11개의 부속서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것은 전쟁 관련 국제법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195개국이 가입해 있으며, 한국은 1966년 8월 16일에 가입했다. 또한 협약의 내용을 보다 상세히 규정하고자 1977년에 두 개의 의정서가 추가되었는데, 현재 국제분쟁을 다룬 제1의정서에는 173개국이, 국내분쟁을 다룬 제2의정서에는 167개국이 가입 비준을 마친 상태다. 또한 2005년에는 제3의정서가 추가되었다. 그 내용은 기존의 적십자와 이슬람교도들을 고려한 적신월을 대체하는 적수정을 국제 구호 활동의 단일 상징으로 삼는다는 것뿐으로, 그리 많은 가입국을 얻지 못하고 있다.

제네바 협약에는 전쟁 자체를 불법화하지 않고, 국가 자체도 처벌하지 못한다는 점, 협약의 준수 여부에 대한 조사와 처벌이 불공평하다는 점 말고도 또 다른 문제점이 있다. 협약에 가입하되 일부 조항에 대해서는 유보할 수 있으며, 의정서의 경우에는 아예 가입하지 않아도 별 문제가 없다는 점을 각국이 자기 입맛대로 이용한다는 사실이다. 가령 제1의정서는 적대국 국민의 기초 생활에 절실한 발전소, 댐, 식량 창고 등을 파괴하지 못하도록 규정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데,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미국, 이스라엘, 이란, 인도 등은 이 의정서를 비준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내전 진압이나 ‘테러와의 전쟁’을 하더라도 적대국 주민들이 기초 생활을 하는 데 필요한 식량이나 식수, 전기, 의약품 등의 공급을 차단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을 포함한 제2의정서에도 이들 국가와 북한, 이라크, 베트남 등은 비준을 거부했다.

한국의 경우에는 이 두 의정서에는 모두 비준했으나, 1966년에 제네바 협약에 가입하며 제3협약의 제118조 1항과 제4협약의 제68조 2항은 유보했다. 앞의 조항은 “전쟁 포로는 적대 행위가 끝나는 즉시 본국으로 송환한다”는 것이었는데, 당시 한국 정부는 한국전쟁 당시 ‘반공 포로’들이 북한으로 송환되기를 거부했던 점을 들어 포로의 송환은 포로 본인의 의사에 따라야 한다고 이 조항을 유보한 것이다. 또 제4협약의 조항은 “간첩행위자 또는 점령지의 비협조적 민간인을 자국의 법령만을 근거로 사형에 처할 수 없다”는 것으로, 간첩을 효과적으로 억제할 수단이 절실하다고 여긴 당시 한국의 상황과 맞지 않는다 여겨졌다. 그러나 이는 뜻밖의 비인도적 폐단을 낳고 있기도 하다. 지금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한국전쟁 당시의 국군 포로들은 북한이 “그들은 자발적으로 공화국에 충성하기로 결정했다”고 주장하며 수십 년째 송환을 거부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처럼 여러 한계가 있지만, 오직 힘만이 전부이며 약자는 강자의 밥이 되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이 수천 년 동안 지배하던 끝에 “그래도 최소한의 인정은 베풀어 가며 싸우자”는 생각이 비로소 실마리를 맺었다는 것. 그리고 그 실마리가 꾸준히 커지고 넓어져서 오늘날 전쟁의 무절제한 폭력을 어느 정도는 제어하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소중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뒤낭의 염원에서 자라난 제네바 정신은 오늘날 차갑고 두터운 회색 콘크리트 벽의 표면을 녹색으로 살짝 덮은 담쟁이덩굴과 같다. 과연 인류는, 우리는 그 덩굴을 더 크고 굵게 키워낼 수 있을까? 그래서 언젠가는 담쟁이 줄기가 담벼락을 무너뜨리는 날이 오도록 할 수 있을까? 지금 우리는 제네바로 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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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규진 | 서울교육대학교 교수/역사저술가
글쓴이 함규진은 여러 방면의 지적 흐름에 관심이 많다. 정치학을 전공하여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한편, 주로 역사와 관련된 책을 여러 권 썼고, 인물이나 사상에 대한 번역서도 많이 냈다. 동양과 서양, 전통과 현대, 보수와 진보 등 서로 대립되는 듯한 입장 사이에 길을 내고 함께 살아갈 집을 짓는 것이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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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간도서
조약의 세계사 2014.12.22
고대부터 현대까지 64개의 조약으로 읽는 화해와 배신, 강압과 화합 그리고 진보의 역사.

‘지뢰는 과연 쓸모 있는 무기일까?’, ‘난징 조약은 불평등조약인가?’와 같은 흥미로운 물음을 던지며 세계사의 이면을 파고들어 역사와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을 넓힌다. 강화도 조약과 같이 우리 역사 속 조약부터 마스트리히트 조약처럼 생소한 조약, 고대의 히타이트-이집트 조약에서부터 현대에 체결된 리우환경협약까지 역사의 흐름을 바꾸고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계를 형성한 조약을 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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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2013.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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