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역사 링컨의 승리와 남부의 연방 탈퇴 - 남부 연합, 연방 해체를 선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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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71회 작성일 16-02-07 0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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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대 대통령 선거가 시작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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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0년 대통령 선거에 나선 세 명의 후보자. 왼쪽부터 에이브러햄 링컨, 존 브레킨리지, 스티븐 더글러스.


1860년, 미국의 16대 대통령 선출을 위한 선거전이 시작되었다. 이 선거를 앞두고 민주당은 4월에 사우스캐롤라이나주의 찰스턴(Charleston)에서 후보 선출을 위한 전당대회를 열었지만, 남부 출신 노예제 지지론자 의원들이 당의 강령에 반기를 들고 나가버리는 바람에 반쪽짜리 전당대회가 되고 말았다.


어찌되었건 전당대회는 강행되었고 일리노이주의 상원의원인 스티븐 더글러스(Stephen Douglas, 1813~1861)가 후보로 선출되었다.

남부 출신 민주당원들은 6월에 버지니아주의 리치먼드에서 따로 전당대회를 열고 당시 부통령이었던 존 브레킨리지(John Breckenridge, 1821~1875)를 후보로 선출하였다.

한편 노예제 폐지론자들은 과거 자유토지당(Free Soil Party)의 당원들과 휘그(Whig)당의 진보론자들과 함께 새로이 생겨난 공화당에 입당하였고, 공화당은 노예제 반대를 공약으로 내세웠다.

공화당은 1860년 5월 전당대회에서 전직 일리노이주 하원의원이자 변호사인 에이브러햄 링컨(Abraham Lincoln, 1809~1865)을 후보로 선출하였다.

휘그당의 잔여 세력과 반이민 정책을 모토로 삼았던 노우-낫싱(Know Nothing) 운동의 잔여 세력들은 소위 헌정연합(Constitutional Union)을 결성하고 전직 테네시 상원의원인 존 벨(John Bell)을 후보로 내세웠다.

이해 미국 대선의 특징은 노예제에 대한 여론이 지역에 따라 그대로 드러났다는 것이다. 원래 남북을 막론하고 고른 지지를 받던 민주당은 분당 사태를 겪음에 따라 그 세력이 심각하게 약화되었고, 떨어져 나간 남부표는 물론 노예제에 대한 애매한 태도로 북부의 민심도 얻지 못하였다.

비록 더글러스가 전국적인 인지도가 있었다 하나 민주당은 시작부터 약점을 안고 선거에 뛰어들었던 것이다.

이에 비하여 신생 공화당은 노예제 반대를 명확히 함으로써 남부를 포기하는 대신, 기존 민주당의 북부표를 크게 잠식하였다. 이는 노예제 반대론자들의 표를 얻음은 물론 북부가 최근의 이민으로 인구가 많아졌다는 점에 착안한 일종의 도박이었다.

한편 민주당에서 떨어져나간 노예제 지지론자들은 브레킨리지를 전폭적으로 지지하였고, 존 벨은 남북 사이에서 승부를 보려 하였다. 특히 벨과 더글러스는 남부 분리주의자(Secessionists)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음을 감지하고 자신들이 선출되어야 연방이 해체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며 지지를 호소하였다.


링컨의 승리와 남부의 연방 탈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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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0년 미국 대선 결과를 나타낸 지도. 각 후보가 승리한 주가 다른 색으로 표시되어 있다. 노예제 반대론자인 링컨이 북부의 주들과 캘리포니아, 오리건을 휩쓸면서 미합중국의 16대 대통령으로 당선된다.


예상대로 공화당은 북부의 주들을 휩쓸었고 링컨이 전체 선거인단(Electoral College) 총 303표 중 180개의 표를 얻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링컨은 새로이 생겨난 캘리포니아와 오리건주는 물론 북부주들을 거의 휩쓸었다. 더글러스는 주민투표에서 많은 득표를 했지만 미주리주에서만 승리하는 데 그쳤다. 벨은 비록 3개주를 이기기는 하였지만 당선권과는 애초부터 인연이 없었다.

이는 남부 의원들과 유권자들에게 크나큰 충격이었다. 브레킨리지에게 거의 몰표에 가까운 지지를 보냈지만 많은 인구를 가진 북부에 밀린 것이다.

더군다나 링컨은 남부에서 승리한 주가 하나도 없었지만, 순수하게 북부의 표만 가지고 남부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은 후보를 눌렀다.

이제 인구의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는 한 남부가 향후 대선에서 이길 가능성은 희박하였으며, 북부의 표는 언제나 노예제 반대론자 후보에게 돌아갈 것이 분명하였다.

더 이상 그들의 권리를 보장받을 수 없게 된 남부의 정치인들은 연방 탈퇴 여론을 부추겼다.

투표일 이전에 버지니아와 사우스캐롤라이나 등 남부 주에 주둔하고 있던 연방군 지휘관들은 군 내부에서 분리주의가 빠르게 번지고 있고 군 일각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음을 정부에 보고하였다. 그러나 링컨은 이를 선거판에서 흔히 있는 소문으로 치부하고 주목하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분리주의는 남부에서 대세로 굳어졌고, 링컨이 당선된 후 미국-멕시코 전쟁에서 미군을 승리로 이끈 전쟁 영웅이자 군 원로인 윈필드 스콧(Winfield Scott, 1786~1866) 중장은 당선자 링컨이 취임하기 전, 그에게 군의 통수권부터 인수할 것을 건의하였다.

물론 링컨도 이런 남부의 여론을 모르는 것은 아니어서 취임사에서부터 남부의 민심을 다독이는 데 노력을 집중하였다.


남부 주의 국민들 사이에서 이제 공화당 정권이 수립되었으니 그 재산과 안정과 개인적인 안위가 위협받을 것이라는 두려움이 일고 있는 듯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두려움은 근거 없는 두려움입니다. 지금까지 계속 있어왔고 누구라도 볼 수 있는 증거에 의하면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이러한 증거는 지금 여러분들에게 말을 하고 있는 이 사람이 지금까지 해온 연설과 출판한 모든 연설문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 중 하나를 인용하여 여러분께 다시 말씀 드립니다. “본인은 노예제가 현존하고 있는 모든 주에 그 어떤 방식으로도, 노예제도에 대한 직접ㆍ간접의 간섭을 할 의도가 없습니다.

저에게는 그리할 권리도 없다고 생각하는 바이며 또한 그리할 의향 역시 없습니다.”



Apprehension seems to exist among the people of the Southern States that by the accession of a Republican Administration their property and their peace and personal security are to be endangered.

There has never been any reasonable cause for such apprehension. Indeed, the most ample evidence to the contrary has all the while existed and been open to their inspection.

It is found in nearly all the published speeches of him who now addresses you.

I do but quote from one of those speeches when I declare that “I have no purpose, directly or indirectly, to interfere with the institution of slavery in the States where it exists. I believe I have no lawful right to do so, and I have no inclination to do so.”

이러한 연설을 두고 일부에서 링컨은 진정한 노예제 폐지론자가 아니었으며 당선을 위하여 폐지론을 이용했다는 수정론이 일부 등장하였으나 이는 올바른 견해가 아니다.

링컨이 노예제를 유지하려 했다는 발언은 여러 군데서 찾아 볼 수 있지만 이는 전 국민의 지지를 받아야 하는 정치인으로서, 그리고 연방을 유지해야 하는 행정부의 수장으로서 한 말일뿐이며, 링컨은 노예제를 직접적으로 찬성한 일이 없다.

그는 일생을 통틀어 노예제도 폐지론을 주장하였으며 이는 선거 당시의 풍자만화에서도 잘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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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0년 미국대선 풍자만화. 링컨이 다른 후보들을 제치고 백악관으로 달려가고 있다.


위의 만화에서 링컨을 제외한 세 명의 후보들이 링컨이 앞서가는 것을 보고 한 마디씩 하고 있다.


벨: 아이고 안되겠네. 난 포기하겠소.
(Bless my soul. I give up)

브레킨리지: 저 롱다리 폐지론자가 결국은 앞서가는구먼.
(That long-legged abolitionist is getting ahead of us after all)

더글러스: 내가 살면서 이렇게 빨리 뛴 적이 없었는데…….
(I never run so fast in my life)

이 가운데 남부 유권자들의 지지를 받았던 브레킨리지가 하는 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선거에 대한 신문 풍자만화에서 링컨이 노예제 폐지론자로 등장한 것은 당시의 유권자들과 기타 후보들, 그리고 언론 모두 그가 폐지론자임을 잘 알고 있다는 사실을 반영한다.

그러니 아무리 링컨이 당선 후에 ‘나는 노예제도에 간섭할 권리가 없다’ 운운해도 이를 믿어줄 리 없었다.

남부 주들은 링컨이 취임도 하기 전에 분리를 결정한다. 가장 먼저 분리를 선언한 것은 사우스캐롤라이나였다.

사우스캐롤라이나는 “연방으로부터 사우스캐롤라이나의 탈퇴를 유발하였고 이를 정당하게 만든 직접적인 원인들에 대한 선언(Declaration of the Immediate Causes Which Induce and Justify the Secession of South Carolina from the Federal Union)”이란 문서를 통하여 1860년 12월 24일에 미합중국에서의 탈퇴를 결정한다.

다음 해인 1861년 2월까지 미시시피, 플로리다, 앨러베마, 조지아, 루이지애나, 그리고 텍사스의 6개 주가 추가로 연방 탈퇴를 선언하였으며 이들 주의 대표자들이 모여 1861년 2월 4일 남부연합, 공식 명칭으로는 아메리카 연합국(Confederate State of America)의 건국을 선포하고 제퍼슨 데이비스(Jefferson Davis, 1808~1889)를 대통령으로 선출한다. 수도는 앨러배마주의 몽고메리로 결정되었다.

링컨은 취임하기 전인 2월에 북부 14개 주와 남부 7개 주 출신의 유력 정치인들과 전직 정부관료들을 모아 ‘평화회담’을 열었으나 소용이 없었다.

앞서 말한 대로 취임사에서 자신은 노예제에 간섭할 의도가 없음을 밝혔으나 이를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고하였다.

연방정부의 관점에서 연방의 분할은 결코 용납될 수 없는 사실이라는 것. 이에 정부는 연방으로부터 탈퇴한 모든 주가 ‘반란 상태에 있음(in a state of rebellion)’을 선언하기에 이른다.


섬터 요새를 둘러싼 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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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터 요새에서의 전투에서 연방군을 지휘한 로버트 앤더슨 소령(왼쪽)과 남부 연합군을 이끈 보우레가드 준장(오른쪽). 둘은 웨스트포인트 사관학교 재학 당시 스승과 제자 사이였다.


1860년 말 사우스캐롤라이나주가 연방에서의 탈퇴를 결정하면서 주(州) 내에 있는 연방 군사시설을 두고 주 정부와 연방군 사이에 갈등이 고조되었다.

사우스캐롤라이나의 입장에서는 주의 주요 항구이자 거점인 찰스턴 인근의 군사 기지에서 연방군을 물러나게 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찰스턴 항구에는 두 개의 주요 시설이 있었는데 몰트리 요새(Fort Moultree)와 섬터 요새(Fort Sumter)였다. 몰트리 요새는 미국 독립전쟁 시절부터 찰스턴 항구를 지키던 요새였고 연방군 수백이 주둔하고 있었다.

이미 남부가 탈퇴하기 전부터 남부인들은 연방군 요새들을 에워싸기 시작했고, 1860년 12월 몰트리 요새는 사실상 포위되었다.

사우스캐롤라이나 주지사 찰스 피켄스(Charles Pickens)는 더 이상 사우스캐롤라이나가 연방의 일원이 아니라며 연방군의 퇴거를 요구하였고, 찰스턴의 일부 신문은 사람들에게 요새를 공격할 것을 종용하기도 하였다.

몰트리의 연방군 지휘관인 앤더슨(Robert Anderson) 소령은 병력을 옮기기로 결정하고, 몰트리 요새의 대포에 말뚝을 박아 사용할 수 없게 만든 후 12월 26일에 휘하 병력을 보다 방어에 용이한 섬터 요새로 옮긴다.

섬터 요새는 새로이 지어지기는 했지만 그 등대를 지키기 위한 경비병 1명과 민간 관리인들 외에는 병력이 없었다.

그러나 위치상 찰스턴 항구로 들어가는 수로(水路)의 정중앙에 있어 만약 연방군이 이를 장악하게 될 경우 찰스턴을 드나드는 남부 함선들에 위협이 될 수 있었다.

비록 방어의 용이함 때문에 섬터 요새로 들어가기는 하였지만 연방군의 병력은 태부족이었다. 원래 135문의 대포를 설치하고 600명이 넘는 병사가 상주하도록 설계되었지만, 앤더슨 휘하의 병사는 68명뿐이었고 그 외 약 40명의 건설노동자들이 있을 뿐이었다.

앤더슨은 겨우내 악조건 속에서도 최대한 수비를 강화하였다. 아메리카 연합국(남부) 정부는 워싱턴의 연방정부를 도발하지 않으려는 정치적 고려 때문에 겨울 동안에는 공격을 자제하였지만, 링컨의 취임이 가까워오자 행동에 들어가기로 결정하고 보우레가드(P.G.T Beauregard) 준장에게 섬터 요새 공격을 명한다. 공교롭게도 웨스트포인트 사관학교 재학 당시 앤더슨은 보우레가드의 교관이었다.

보우레가드는 해안과 해상(海上) 이동포대에 수백문의 대포를 배치하고 찰스턴시 민병대를 포함한 6000명의 병력을 모아 한때 그의 스승이었던 앤더슨이 있는 섬터 요새를 향한 공격을 준비하였다.


울려퍼진 포성, 전쟁이 시작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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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1년 4월 12일 새벽, 섬터 요새에 대한 남군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1861년 3월 4일 대통령에 취임한 링컨은 남군에게 위협받고 있는 섬터 요새와 플로리다의 피켄즈 요새에 대한 보고를 받고, 이를 지원할 방법을 놓고 고심하고 있었다.

한편 남부 정부는 워싱턴 DC에 특사를 보내 연방시설에 대한 피해를 끼칠 경우 보상하겠다는 의사와 함께 평화조약을 제안했다.

그러나 링컨은 남부 주들은 현재 연방정부에 대한 반란 상태이며 반란군과의 협상은 없다는 말로 남부의 평화제의를 단칼에 거절하였다.

어떤 식으로든 협상을 하고 조약을 맺는다는 것은 남부를 합법적인 국가로 인정한다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링컨은 섬터 요새에 대한 지원을 결정하였고 섬터를 지키고 있는 앤더슨에게 이를 통보한다.

섬터 요새에 지원군이 온다는 소식을 들은 남부에서는 지원이 도달하기 전에 요새를 점령하는 것이 급선무라는 판단 아래, 마침내 4월 11일에 앤더슨에게 최후통첩을 보낸다.

그러나 앤더슨이 남부의 최후통첩을 거부하면서 남군은 4월 12일 새벽 4시, 섬터 요새에 대한 포격을 개시한다.

남군은 수백문의 포로 공격하였지만 병력과 장약이 부족한 앤더슨은 불과 6문밖에 사용할 수 없었다.

아울러 남군은 발사하기 전 뜨겁게 달군 소위 열탄(熱彈, hot shots)을 섞어 발사하여 요새 내부의 목재건물에 화재를 일으켰다.

결국 34시간 동안 쉬지 않고 이어지는 적의 공격과 물자 부족에 견딜 수 없게 된 앤더슨은 4월 14일 오후 2시경에 남군에 항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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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복하기 전 앤더슨이 연방정부에 보낸 전문(電文).





전쟁 내내 북부의 전쟁 의지를 고취하는 상징물로 쓰인 섬터 요새의 찢어진 성조기.




앤더슨은 퇴거하기 전 미국 국기에 대한 예포발사를 요구하였고 남군이 이를 수락하여 100발의 예포를 발사하던 중 대포가 폭발하여 연방군 병사 2명이 사망하고 4명이 부상한다.

남북 전쟁에서 북군 최초의 인명 피해였다. 남군은 요새를 접수하고 연방군 병사들은 인근에 대기하고 있던 북군 함선에 실려 철수한다.

앤더슨은 철수하면서 요새의 찢긴 성조기를 가지고 갔는데 이는 전쟁 내내 북부의 전쟁 의지를 고취하는 상징물이 되었다. 섬터 요새의 점령으로 미국은 남과 북으로 확실히 갈라지게 되었다.

노예제와 주의 권리를 포기하지 않으려는 남부와 연방을 유지하려는 북부 사이에는 이제 전쟁밖에 남은 것이 없었다.

참고문헌〈단행본〉


  • Iver Bernstein, [The New York City Draft Riots: Their Significance for American Society and Politics in the Age of the Civil War]
  • Benjamin Franklin Cooling, [Counterthrust: From the Peninsula to the Antietam]
  • John William Draper, [History of the American Civil War]
  • Joseph E. Johnston, [Narrative of Military Operations during the Civil War]
  • James M. MacPherson, [Battle Cry of Freedom: The Civil War Era]
  • Louis P. Masur, [The Civil War: A Concise History]
  • William T. Sherman, [Memoirs of General William T. Sherman]

 


 




참고문헌〈인터넷〉





김성남 | 안보·전쟁사 전문가
글쓴이 김성남은 전쟁이 인간 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관심을 가지고 이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미국 UC 버클리 동양학과를 졸업한 후 연세대학교 국제대학원에서 국제학 석사를 받고 한국학중앙연구원 정치학과에 진학하여 정치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주요 저서로는 [전쟁으로 보는 한국사], [전쟁으로 보는 삼국지], [전쟁 세계사] 등이 있으며 공저로 [4세대 전쟁]이, 역서로 [원시전쟁: 평화로움으로 조작된 인간의 원초적인 역사]가 있다.


발행2013.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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