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역사 불 런 전투의 참패와 긴 전쟁의 시작 - 남북 전쟁, 장기전에 돌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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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505회 작성일 16-02-07 0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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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방에 잔류할 것인가 남부에 재편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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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1년 미국 각 지역의 상황. 노예주와 자유주, 그리고 노예제를 승인하는 테리토리와 반대하는 테리토리로 각각 나뉘어 있다.


섬터 요새가 넘어간 후 워싱턴의 연방정부와 몽고메리의 남부 정부는 본격적으로 전쟁에 돌입하였다.

이 시점까지 남부는 각 주의 민병대에 의존하였으나, 연방정부가 대규모로 병력을 모으기 시작하자 소위 아메리카 연합국(Confederate States of America)군의 정규군(남군)을 창설하기로 하였다.

이 과정에서 과거 연방군의 장성들이 연방군 직위를 사임하고 새로이 창설된 남군에서 지휘를 맡게 되었다.

섬터 요새가 남부에 넘어가자 링컨은 본격적으로 병력을 소집하기 시작하였고, 어느 쪽을 선택할지를 놓고 눈치를 보고 있던 버지니아, 테네시, 아칸소, 노스캐롤라이나 등 4개의 경계주(border states)들은 같은 남부인들과 싸우기를 거부하며 미합중국 탈퇴를 선언한다.

버지니아가 탈퇴하자 몽고메리의 아메리카연합(남부) 정권은 수도를 버지니아주의 리치먼드로 옮긴다. 이는 버지니아의 ‘용기’를 보상하는 동시에 워싱턴에서 가까운 곳을 수도로 선택함으로써 워싱턴 정부에 대한 본격적인 도전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모든 버지니아인들이 주 정부의 결정에 찬성한 것은 아니었다. 버지니아 서부 애팔래치아 산맥 지역의 주민들은 탈퇴를 거부하였고, 워싱턴 정부는 이 지역을 분리시켜 웨스트버지니아주(州)를 새로 만든다.

노예제도를 유지하면서도 남부의 분리 결정에 찬성하지 않은 주들도 있었는데 델라웨어, 켄터키, 메릴랜드와 미주리였다. 물론 메릴랜드같은 경우는 반 강제적이었다.

만약 메릴랜드가 남부로 넘어갈 경우 수도 워싱턴이 적지(敵地)에 둘러싸이게 되는 것을 우려한 링컨 대통령이 수천 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메릴랜드 의회 내 친(親) 남부 인사들을 모조리 체포하였고, 친 남부 인사들이 빠진 메릴랜드 의회가 미합중국 잔류를 결정한 것이다.

미주리주의 경우 주민들은 대부분 중립이었으나 미주리 주지사인 잭슨(Claiborne F. Jackson)과 주의회 의원 대부분은 남부 지지자들이었다.

이에 노예제 폐지론자이자 미군장교였던 나다니엘 라이언(Nathaniel Lyon)은 재빨리 자신의 사병 조직을 의용군으로 편성하고 휘하에 있던 정규군과 힘을 합쳐 세인트루이스에 있던 연방군 무기고를 장악해 이를 북부의 일리노이로 보냈다.

아울러 미주리주 방위군이 주둔하고 있던 캠프 잭슨 요새를 재빨리 점령해 주 방위군 병력을 포로로 잡았다. 이에 친 남부였던 인근 주민들이 소요를 일으키자 군중에 총격을 가하여 28명의 사망자가 발생하였다.

그리고 병력을 지휘하여 주지사와 함께 그를 따르고 있던 주 방위군 부대를 남쪽으로 몰아낸다. 이리하여 남부로 넘어갈 뻔하였던 2개의 주가 연방에 남아 있게 되었고, 이후 전쟁에서 북군이 남부로 진격하는 발판이 되었다.


우리 군에 애매한 사람은 필요 없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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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발발했을 때 미합중국 최고사령관직에 있었던 윈필드 스콧. 노쇠한 그는 자신을 대신해 연방군을 이끌어줄 인물을 찾고 있었다.


남북 전쟁은 미국 영토만 남북으로 갈라놓은 것이 아니라 젊은 시절 미 육군사관학교 웨스트포인트에서 한솥밥을 먹으면서 교육을 받고 동료로서 미국-멕시코 전쟁(1846~1848)에 참전하였던 군의 선후배들 역시 갈라놓았다.

남북 전쟁이 발발하였을 때 북군의 수장은 미국-멕시코 전쟁에서 미군을 지휘하였던 노장 윈필드 스콧(Winfield Scott, 1786~1866) 중장이었다.

물론 링컨에 의하여 임명된 것이 아니라 그가 군의 원로로서 총사령관을 맡고 있을 때 남북 전쟁이 발발한 것이었다. 스콧은 이때 74세로 매우 노쇠하였고, 때문에 자신을 대신해서 연방군을 이끌어줄 인물을 찾았다.

이윽고 스콧은 자신이 아는 부하 중에서 가장 뛰어나다고 생각한 로버트 리(Robert E. Lee, 1807~1870)에게 군을 맡기려고 하였다.

그러나 버지니아 출신이었던 리는 비록 남부의 분리독립에는 반대였지만, 연방군의 지휘를 맡을 경우 고향인 버지니아를 공격할 수도 있다는 점 때문에 스콧의 제안을 매우 부담스럽게 여겼다.

리는 군의 대선배였던 스콧에게 전쟁에 참여하지 않고 근신하겠다고 했지만, 스콧은 ‘우리 군에 애매한 사람은 필요 없다네(I have no place in my army for equivocal men)’라고 극언하며 리의 요청을 일언지하에 거절하였다.

결국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리는 연방군 장교 직위를 사임한 후 남군에 가담하게 된다. 후배에 대한 스콧의 태도가 다소 매정하게 보일 수도 있지만, 스콧 역시 버지니아 출신이고 남부인이라는 점에서 리와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노예제 폐지론자였고 어떠한 이유로도 주(州)들의 연방 탈퇴는 용인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이런 그였기에 리의 애매한 태도가 못마땅했고 결국 리를 내치고 말았던 것이다.

공교롭게도 스콧의 결정은 이후 남군에 날개를 달아주는 결과를 낳게 된다. 리가 사령관직을 고사하고 남군으로 가면서 미합중국 수도인 워싱턴 DC를 지키는 미 육군의 동북 버지니아군(Army of Northeastern Virginia)은 비록 직업군인이기는 하지만 한 번도 야전에서 군을 이끌어본 적 없는 어빈 맥도웰(Irvin McDowell, 1818~1885)이 맡게 되었다.


스콧의 대전략, 아나콘다 작전




남부의 대통령이자 통수권자인 제퍼슨 데이비스는 웨스트포인트 출신이고 연방군에 다년간 복무한 적이 있는 전직 군인이었다.

그와는 달리 새로이 미합중국의 대통령이 된 링컨은 군 경력이 전무한 변호사 출신이어서 전쟁에 대하여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링컨은 자신의 무지를 깨닫고 의회도서관에서 전쟁사 서적들을 대출받아 벼락치기 공부를 하였지만, 오히려 이 때문에 군통수권자로서 많은 시행착오를 거치게 된다.

전쟁이 터졌을 때 전쟁에 무지한 것은 대통령인 링컨뿐만이 아니었다. 북부의 많은 유력 인사들과 시민들 대부분이 남부 ‘따위’가 연방정부의 상대가 될 리 없다며 연방군의 압도적인 승리를 예측하였다.

연방군이 몇 번 출동하여 위력을 보여주면 남부의 반란 세력은 그대로 항복하리라 생각한 것이다. 이 때문에 작전 짜기에 고심하고 있는 군 수뇌부와는 달리 그들은 남부를 서둘러 공격할 것을 종용하였다.

그러나 전쟁 분위기에 들떠 있는 북부민들과 달리 스콧은 의외로 전쟁이 오래갈 수 있음을 알았다. 그리하여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남부를 굴복시킬 대전략을 구상하였는데, 이름하여 아나콘다 작전(The Anaconda Plan)이었다.

물론 이 이름은 스콧 스스로가 붙인 것이 아니고 그의 작전이 언론에 흘려지면서 생겨난 것이다. 그러나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아나콘다 작전은 병력과 화력으로 남부를 직접 치는 것이 아니라 남부의 숨통을 조여서 말려 죽이는 개념이었다.

우선 해군력을 늘리고 함선들을 총동원하여 대서양과 멕시코만에 배치, 남부 해안을 봉쇄하고 물자의 유입을 막는다.

그리고 강력한 일군(一軍)을 미시시피강 유역으로 진격시켜 강 유역의 주요 도시들을 장악하여 텍사스 지역의 물자와 인력이 남부로 유입되는 것을 막고, 남부의 주요 항구인 뉴올리언즈를 북군의 거점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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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콧이 제안한 아나콘다 작전. 남부를 직접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해안을 봉쇄하고 물자와 인력의 유입을 막아 남부의 숨통을 조이는 전략이었다.


스콧의 계획은 빠른 전투와 승리를 기대하고 있는 여론의 반대에 부딪혔고 당장 실현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전쟁이 진행되면서 북군은 동부전선에서는 지지부진하였지만 서부에서는 연승을 거두었고, 우세한 해군력을 앞세워 비록 완전한 봉쇄는 아니지만 외부의 물자와 지원이 남부로 들어오는 것을 막았다.

즉, 남북 전쟁의 결과만 놓고 보자면 전쟁은 스콧의 작전대로 진행되었고 물자와 인구가 부족한 남부가 항복하게 된다.


우물쭈물 북군, 성동격서 전술을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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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 런 전투에서 북군을 이끈 사령관 맥도웰 소장.


새로이 북군을 맡게 된 멕도웰 소장은 부임 초기부터 빨리 남부를 공격하라는 여론의 재촉을 받았다. 맥도웰의 병사들은 소위 ‘의용군’이었으며 대부분 90일 복무 과정으로 들어온 단기 사병들이었고, 전투 경험은 물론 체계적인 훈련도 부족한 상태였다.

그러나 여론과 정치인들의 독촉에다 시달리다 못한 맥도웰은 결국 공격에 나서기로 하였다. 그들의 목표는 새로이 남부의 수도가 된 리치먼드였다.

버지니아에는 루이지애나 출신의 보우레가드(P.G.T Beauregard)가 이끄는 2만의 병력이 매너서스(Manassas)에 주둔하고 있었고, 버지니아 서부의 셰넌도어 밸리(Shenandoah Valley)에 존스턴(Joseph E. Johnston)이 이끄는 1만 2천의 병력이 있었다.

맥도웰이 세운 작전의 골자는 패터슨(Robert Patterson) 소장이 거느린 18,000의 병력으로 요충지인 하퍼즈 페리를 공격하는 듯한 행동을 취하여 존스턴의 병력을 묶어두고 보우레가드의 포토맥군(Army of the Potomac)과 합치지 못하게 한 다음, 35,000의 병력으로 보우레가드를 타격하여 수적인 우위로 격파하는 것이었다.

보우레가드의 군단을 무찌르고 나면 리치먼드로 곧장 진격하여 점령한다는 작전이었다.

1861년 7 월 16일, 찌는 듯한 더위 속에서 워싱턴을 출발한 맥도웰의 군은 그 미숙함을 여지없이 드러냈다.

일단 50파운드(22kg)라는 무거운 짐을 지고 행군한 적이 없는 병사들은 끊임없이 불만을 토로하였고 선봉대를 맡은 병사들은 숲 속을 지나면서 약간의 소리나 움직임에도 적들이 숨어있을 지 모른다며 멈추기 일쑤였다.

선봉대가 멈추면 연쇄반응으로 후발 대열들도 멈출 수밖에 없었고, 후발의 병사들은 장교의 눈을 피해 갈증을 덜어줄 물을 찾거나 산딸기를 따러 흩어지는 등 군기가 엉망진창이었다.

7월 18일에 매너서스 인근 센터빌에 도착하였을 때는 식량도 떨어져 워싱턴에 추가로 군량을 요청해야 했다.

불 런 전투에서 맥도웰이 세운 계획은 셰넌도어 방면을 맡았던 패터슨의 행동으로 인하여 처음부터 흐트러졌다. 패터슨은 일단 남군을 과대평가하고 있었다.

90일짜리 단기 사병들로 구성된 자신의 군이 적장 존스턴이 이끄는 15,000명의 ‘베테랑’들과 싸우기에는 불리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사령부로부터 내려온 애매모호한 명령은 패터슨의 우유부단함을 더욱 부추겼다. 즉 존스턴의 움직임을 막기 위하여 기동만 하는 것인지, 아니면 실제로 공격까지 해야 하는지의 여부가 확실치 않았던 것이다.

패터슨은 존스턴이 혹시라도 워싱턴으로 진격하지 않을까 우려하여 군을 약간 뒤로 물렸는데, 존스턴은 이를 틈타 근처 피드몬트(Piedmont)에서 병사들을 기차에 태워 보우레가드가 있는 매너서스로 향하였다.

이들이 거의 모두 7월 20일에 매너서스에 도착하면서 맥도웰의 수적 우위는 사라졌다.

매너서스에 있던 보우레가드의 계획은 북군의 좌익을 들이치고 북군의 전진기지인 센터빌을 직접 타격하여 북군을 무너뜨린 후 워싱턴을 위협하는 것이었다.

그는 상관이었던 존슨에게 계획을 설명하였고 존스턴은 보우레가드의 계획을 승인하였다. 보우레가드는 매너서스 인근의 좁은 강인 불 런을 따라 군을 배치하였고 북군이 군량을 조달받기를 기다리는 동안 자신의 오른쪽에 병력을 집중하였다.

그쪽에 철로가 있기 때문에 만약 북군의 공격이 있다면 철로를 따라 이어지리라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북군의 공격이 없자 7월 21일 아침에 북군의 좌측을 공격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기습을 당한 것은 보우레가드였다. 제대로 된 기병이 없어서 자신이 직접 말을 타고 전선을 정찰한 맥도웰은 병력이 상대적으로 적은 남군의 좌측, 불 런이 좁아지는 지점에 10,000명의 병력을 집중시켰다.

그리고 7월 21일 새벽 2시에 병사들을 깨워 공격 대형으로 포진시킨 후, 동이 트기 시작할 때 남군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였다.

이와 동시에 철로가 있는 방향으로는 요란한 포격을 가하여 남군의 시선을 돌렸다. 전형적인 성동격서(聲東擊西)였다.

그러나 불 런 근처에서 많은 먼지가 일어나고 있음을 감지한 남군의 에번스(Nathan Evans) 대령은 기습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직감하고 휘하 병력을 동원하여 불 런을 도강하는 북군을 막으려 안간힘을 썼다.

에번스가 북측 기습군을 막는 사이 주변에 있던 2개의 남군 부대가 추가로 달려왔다. 그러나 여전히 불 런 방면 남군은 4,500에 불과하였고 중과부적으로 밀리기 시작하였다.

남군은 강 건너 헨리하우스 언덕(Henry House Hill)으로 밀려났다. 만약 북군이 이곳을 돌파한다면 남군의 후방이 노출되는 것이었고 전세는 남군에게 불리하였다.

남군 병사들은 하나 둘씩 전장을 이탈하기 시작하였다. 전투가 이대로 진행된다면 남군의 패배가 확실해 보였다.


북군의 참패와 긴 전쟁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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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1년 7월 21일 하루 동안 벌어진 불런 전투. 초기에는 북군이 병력의 우위를 내세워 남군을 밀어붙였으나 남군의 반격에 밀리기 시작하면서 전투는 남군의 승리로 끝났다.


보우레가드는 아침을 먹다말고 뛰쳐나와서 헨리하우스 언덕 인근에서 패잔병들을 수습하고 기타 지역의 병력을 투입하여 북군의 공격을 막으려 하였다.

북군도 물러나지 않았고 후속 병력들이 달려오면서 7월 21일 내내 헨리하우스 언덕 인근에서 밀고 밀리는 전투가 진행되었다.

점심시간 즈음에 일단의 북군이 남군의 전선을 돌파하는 듯 하였으나 나는 듯이 달려온 스튜어트(J.E.B Stuart)의 기병대에 격퇴되었다.

북군은 병력의 우위를 내세워 계속해서 지친 남군을 밀어붙였지만, 버지니아 군사학교(Virginia Military Institute)에서 괴짜로 유명했던 전직 교관 토머스 잭슨(Thomas Jackson)의 부대가 끝까지 완강히 버텨 북군의 돌파를 막아내었다.

잭슨의 부대가 마치 돌벽(Stone Wall)처럼 버텨 북군을 막아냈다는 전설이 남군 사이에 퍼지면서 잭슨은 ‘스톤월(Stonewall)’이란 별명을 얻게 되었다.

이후 북군의 맹장으로 이름을 드높이게 되는 윌리엄 셔먼(William Tecumseh Sherman, 1820~1891)도 헨리하우스 언덕의 격전에서 연대장으로 참가하였다.

이 피 튀기는 격전은 의외의 실수에 의하여 결정되었다. 북군 포병대는 멀리 떨어진 곳에서 간접사격을 하다가 멕도웰의 명령에 의하여 인근의 도건스 릿지(Dogan’s Ridge)로 나와 근접지원사격을 하고 있었다.

오후 3시쯤 남군은 북군의 두 포대 중 하나를 공격했는데, 이때 포대를 지휘하고 있던 배리(William Barry) 소령은 푸른 제복을 입은 부대가 접근하는 것을 보고 북군의 증원군이라 생각하여 그들을 공격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들은 북군이 아니라 남군 잭슨 휘하의 33 버지니아 연대였고, 이들은 포병대 근처까지 온 다음 포병대와 그 수비 병력에 일제사격을 가하여 이를 궤멸시켰다.

잭슨은 여세를 몰아 2개의 연대로 근처에 있던 북군 리켓스(James Ricketts) 대위의 포대에 공격을 가하였고 이로써 북군의 포병 전력은 전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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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군의 공격에 무너지는 리켓스 대위의 포병 연대. 북군의 포병이 궤멸되면서 전세는 확실히 남군 쪽으로 기울었다.


북군의 포병들이 궤멸되면서 전세는 남군 쪽으로 기울어졌다. 북군이 14시간 동안 더위 속에서 진행되는 전투에 지쳐가고 있을 때, 마침 셰넌도어 방면에 있던 남군의 마지막 부대가 기차로 도착하여 오후 4시경에 전장에 투입되었다.

그러나 어떤 이유에선지 맥도웰은 2개의 여단을 예비대로 가지고 있으면서도 이들을 전투에 투입하지 않았다. 북군이 지쳐가고 있음을 감지한 보우레가드는 전군에 전면적인 반격을 명령하였고 지친 북군은 밀리기 시작하였다.

이미 몹시 지친 상태였고 부대간의 연락이 되지 않는 상태에서 일선의 북군이 후퇴하기 시작하자, 이를 본 제 2선의 북군 부대들도 뒤돌아섰고 곧 후퇴가 아닌 무질서한 도주로 변하였다.

병사들은 식량과 배낭, 심지어 무기와 탄약까지 버리면서 도망가기 시작하였다. 만약 남군이 이때 전면적인 추격을 하였더라면 북군은 워싱턴까지 밀릴 수도 있었지만, 남군도 지친 것은 매한가지여서 매서운 추격은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아울러 전선이 워낙 넓어 보우레가드가 자신의 군 모두를 효율적으로 통제하는 것 또한 어려웠고, 북군의 셔먼이 자신의 부대와 일부 패잔 병력을 수습해 후위대를 형성하여 남군의 추격을 막았기 때문에 남군은 추격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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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 런 전투 이후 등장한 남부의 군기. 전쟁 내내 남부의 상징으로 쓰였고 현재도 미국 남부에서 찾아볼 수 있다.


비록 북군을 완전히 궤멸시키지는 못했지만 전투는 남군의 승리였다. 전직 군인이었던 남부 대통령 데이비스는 리치먼드에서 전장까지 달려오는 동안 후퇴한 남군 병력을 보고 불안감에 휩싸였지만, 막상 전장에 도착했을 때는 남군이 승리를 거둔 후였고 이에 남군의 지휘관들과 병사들을 치하하였다.

반면에 북군의 승리를 기대하면서 이를 ‘참관’하러 나온 북부의 국회의원들은 북군의 무질서한 패배를 지켜보면서 빠른 승리에 대한 기대를 접어야 했다.

불 런 전투에서 남군은 비록 승리하기는 하였지만 군복과 함께 아메리카 연합국의 국기(Stars&Bars)가 미합중국의 국기와 비슷하여 우군과 적군을 오인하는 경우가 많았음을 기억하고 전장에서 쓸 군기를 새로 만들었다.

이 군기(軍旗)는 아메리카 연합, 즉 남부의 새로운 상징으로 등장하였고, 현재도 미국 남부에서 심심찮게 볼 수 있다.

그러나 남군을 승리로 이끌었던 보우레가드는 전투 이후 자신의 완전한 승리를 전장에 나타난 대통령 데이비스가 막았다는 식의 발언을 하였고, 이 기사가 버지니아의 한 신문에 실리면서 데이비스의 미움을 사서 서부전선으로 전출되었다.

이때까지 북부에서는 기껏해야 90일이면 충분히 승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 차 있었으나, 이러한 자신감은 불 런의 패배로 인하여 사그라졌고, 결국 북부 미합중국은 장기전을 각오할 수밖에 없었다.

참고문헌〈단행본〉


  • Iver Bernstein, [The New York City Draft Riots: Their Significance for American Society and Politics in the Age of the Civil War]
  • Benjamin Franklin Cooling, [Counterthrust: From the Peninsula to the Antietam]
  • John William Draper, [History of the American Civil War]
  • Joseph E. Johnston, [Narrative of Military Operations during the Civil War]
  • James M. MacPherson, [Battle Cry of Freedom: The Civil War Era]
  • Louis P. Masur, [The Civil War: A Concise History]
  • William T. Sherman, [Memoirs of General William T. Sherman]

 


 




참고문헌〈인터넷〉





김성남 | 안보·전쟁사 전문가
글쓴이 김성남은 전쟁이 인간 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관심을 가지고 이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미국 UC 버클리 동양학과를 졸업한 후 연세대학교 국제대학원에서 국제학 석사를 받고 한국학중앙연구원 정치학과에 진학하여 정치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주요 저서로는 [전쟁으로 보는 한국사], [전쟁으로 보는 삼국지], [전쟁 세계사] 등이 있으며 공저로 [4세대 전쟁]이, 역서로 [원시전쟁: 평화로움으로 조작된 인간의 원초적인 역사]가 있다.


발행2013.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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