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역사 진주만 공격 (3) - 진주만공격의 결과 - 진주만을 기억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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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30회 작성일 16-02-07 0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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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모 아카기에서 발진하는 제2파 공격대



일본 기동 함대는 제1파 공격대를 발진 시킨 후 한 시간 15분만인 7시 15분 하와이에서 200마일 떨어진 해상에서 제2파 공중 공격대를 발진시켰다.

진주만 기습의 두 번째 공격파는 시마자키 시게카즈(村田重治)소좌가 지휘하는 171기였다. 편성을 보면 36기의 영식(제로)전투기, 54기의 97식 공격기, 54기의 99식 급강하 폭격기 들이었다.

4기는 역시 기계 고장으로 출격 하지 못하였다. 하와이 오하우 섬에 진입한 2파 공격대장 시마사키는 오전 8시 54분 제2파 공중 공격대에게 전군 돌격의 내려졌다.

미군의 각 포대에서 쏘아 올리는 대공 포화는 그 강도가 무척 높았다. 1 파가 누렸던 기습의 효과는 2파에게는 주어지지 않았다.

1파의 주요 목표가 함내의 전함들이라면 2파는 육지 여러 항공기지의 항공기들이었다.

2파 171기의 공격기들은 카네오헤의 부근의 벨로우 육군 항공대 기지와 포드 섬의 히캄 비행장, 휠러 비행장, 그리고 좌초한 네바다 함을 공격하였다.

2 파 공격대는 치열해진 대공 포화에 피해가 아주 컸다. 가장 피해가 컸던 항공대는 항모 가가에서 출격한 공격대로서 영식 함상 전투기(제로) 9기, 99식 함상 폭격기 26기중 영전 2기와 함폭 6기를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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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파 공격대가 파괴한 히캄 비행장의 격납고





진주만 공격의 미군측 피해



공격개시 90분이 지난 뒤에 공격은 끝이 났다. 2,386명의 미군이 전사했다. 48명에서 68명의 민간인들이 공중에서 폭발하지 않고 주택가에 떨어져 폭발한 대공 포탄에 희생되었다.

1,139명의 장병이 부상을 입었다. 18척의 각종 함선이 침몰하거나 좌초되었다. 이중에는 일본이 최우선의 목표로 하던 8척의 전함들이 모두 포함되어 있었다.

전함 애리조나에서만 진주만 공격에서 입은 피해의 절반에 해당하는 사망자인 1,177명이 발생하였다.

역시 앞에서 소개했지만 전함 네바다는 이미 어뢰와 폭탄에 맞아 화재가 발생하고 있음에도 진주만 밖으로 탈출하고자 몸부림을 쳤다.

그러나 네바다의 움직임은 일본 공격기들의 주의를 끌어 많은 일본기들의 폭탄 세례를 당했다. 일본기들의 목표는 외항으로 나가는 네바다를 진주만 입구에서 좌초시켜 항을 봉쇄해버리는 것이었다.

99식 함상 폭격기가 투하한 249 kg의 폭탄은 화재를 유발하였다. 네바다는 결국 외해로 빠져 나가는 것을 포기하고 항로에서 벗어나 좌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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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함 네바다가 항내 탈출을 시도하고 있다.



전함 캘리포니아는 두 발의 폭탄과 두 발의 어뢰를 두들겨 맞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마 노력했으면 이 전함을 구해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함이 해수의 배출을 위해서 동력을 높이던 중 배를 퇴함하라는 긴급 명령이 내려졌다.

인접 애리조나와 웨스트 버지니아에서 유출한 불타는 기름들이 캘리포니아 쪽 수면으로 흘러와 캘리포니아의 상황이 더 나쁘게 보였을 가능성이 있었기에 그런 명령이 나왔을 것이다.

비무장 표적함 유타는 두 발의 어뢰 공격을 받았다. 웨스트 버지니아는 7발의 어뢰들에게 두들겨 맞았다. 7번째의 어뢰는 함의 항타를 날려버렸다.

오클라호마는 4발의 어뢰를 맞았는데 두 발은 측면 장갑 벨트 위에 명중하였다. 결과 물이 배의 상부로 흘러 들어와 배가 전복하였다.

메릴랜드는 애리조나와 같이 40센티 구경의 함포탄을 개조한 폭탄에 맞았지만 별다르게 큰 피해는 입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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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12월 7일 피격 당한 진주만. 앞에 전함 메릴랜드와 뒤에 뒤집힌 오클라호마가 있다.



일본 공격대는 주목표를 전함에 두었으나 더 작은 함들에게도 관심을 두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경순양함 라리와 경순양함 헤레나는 어뢰에 명중했었고 헤레나의 거센 폭발력은 바로 옆에 정박한 기뢰 부설함을 전복 침몰하게 하였다.

선박 수리소의 드라이 독(dry dock)에 있었던 두 척의 구축함 카신과 다우니스는 폭탄이 유류 탱크에 명중되어 불타버렸다.

이 구축함들에서 누출한 기름에 불이 붙었다. 진화하기 위해서 퍼 넣은 해수 덕분에 수위가 올라가며 불길은 두 구축함 위아래 구석구석을 불타게 하였다. 구축함 카신은 선거(船渠)에서 미끄러지며 다우니스를 들이받아 더 큰 피해를 입게 하였다.

경순양함 랄리는 어뢰에 명중하여 측면 큰 구멍이 생겼었다. 경순양함 호놀룰루도 대파되었으나 수리 후 다시 현역으로 복귀하였다.

대파 침몰된 애리조나 함의 옆에 계류 중이었던 공작선이 대파되었다. 수상기 모함 커티스도 크게 부서졌다. 구축함 쇼는 두 발의 폭탄이 전부(前部) 탄약고를 관통하여 함을 대파시켰다.

하와이 비행기지에 있던 미군 비행기중 188기가 격파되었고 159기가 손상을 입었다. 피해기들 중 155기가 지상에서 공격을 당한 것이다.

공습하는 일본기들을 요격하기 위해서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출격 대기 상태에 있었던 미군 전투기는 한 대도 없었다.

하지만 하와이 8공군의 일부 조종사 중에 일본의 공격이 한참 진행 중에 출격을 시도한 용감한 사람은 14명이 있었다.

이들 용사들 중에 6명의 조종사가 적어도 한 기 이상씩의 일본기를 격추하는 전과를 올렸다.

루이스 M. 샌더스 소위, 필립 라스무센 소위, 그리고 조지 S. 웰치 소위, 케네스 M. 테일러 소위, 헤리 W. 브라운 소위, 고든 스털링 소위 등이 그들이다.

조지 S. 웰치 소위는 일본기 4기의 확인 격추했었고 동료인 케네스 M. 소위는 2기의 확인 격추와 2기의 추정 격추(전후 격추로 확인)의 공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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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네스 M. 테일러 소위(좌)와 조지 S. 웰치 소위(우). 두 소위가 조종했던 모델인 P-40 전투기.



미군 조종사 중에 전사자도 발생했다. 고든 스털링 소위는 카네오헤 기지 부근 바다 상공에서 일본 전투기 조종사 후치다 대위에게 격추 당해서 그 유해는 발견되지 않았다.

쟈니 데인스 소위는 카아와 상공에서 적기를 격추하고 귀환 도중 우군 측의 오인 사격에 격추 당했다.

33기의 PBY 수륙 양용 비행정들이 하와이에 있었는데 일본기들이 휩쓸고 나간 뒤 점검해보니 24기가 완전 격파 되었고 6기는 수리불능으로 대파되어 있었다.

진주만 기습 때 해상초계에 나가 있었던 3기만 무사했다. 항모 엔터프라이즈에서 이륙하여 하와이로 돌아오던 다섯 기의 함재기가 미군측의 오인 사격으로 격추되었다.

군사적 표적의 피해를 들자면 미군 막사에 가한 일본기들의 기총 소사로 죽은 소수의 미군들도 빼놓을 수는 없다.



일본측의 피해



미군이 입은 인명손실에 비하면 일본군은 아주 가벼운 인명피해만 입었다. 55명의 일본군 조종사들과 9명의 잠항정 승무원들이 죽었고 한 명이 생포되었을 뿐이다.

일본군의 출격 1 파 2파 출격 항공기중에 29기가 격추 당했다. 9기가 1파 공격 때 격추당했었고 20기가 2파 공격에서 격추 당했다. 74기가 대공포화에 크고 작은 피해를 입었지만 무사히 항모로 귀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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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놀룰루 시가에 격추 된 일본기





제 3 차 공격대 요청과 나구모의 거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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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구모 주이치 (1887-1944) 중장. 유능한 지휘관으로 인정되어 진주만 기습에서 산호해 해전을 거쳐 미드웨이 해전까지 일본 기동부대를 지휘했지만 운도 따르지 못했고 미군의 공세에 밀려 별다르게 호평을 받는 전공을 내지 못했었다. 1944년 3월 중부 태평양 방면 방어 사령관의 직책을 받고 사이판 섬에 부임했다가 그 해 7월 미군 상륙후 자결하였다.



2차 공격대가 출격할 때부터 기함 아카기 함교에서는 겐다 미노루 대좌와 일차 공격에서 돌아온 일차 공격대장 후치다 미쓰오 중좌는 하와이에 대한 3차 공습이 절대 필수적이라고 건의했다.

뿐만 아니라 호위 전함 히에이와 기리시마를 끌고 출동했던 호위함대 사령관 미카와(三川)중장이 3차 공격을 강력히 주장했었고 항모 히류와 소류를 지휘하는 야마구치 소장도 이에 동조하였다.

3차 공습으로서 파괴하고자 했던 것은 1,2차 공격 때 전함과 항공기 섬멸에 집중하느라 미처 손을 보지 않았던 진주만의 유류 저장소와 어뢰 저장소였다. 그리고 항만 시설과 각종 선박 수리 공작소, 수리 조선소의 드라이 독이었다.

1, 2차에서는 계획대로 함선과 항공기들을 만족할 만큼 부수었으니 3차 공격으로 함대 운용 관련 시설도 깨끗이 청소해버려 진주만 기습을 완벽하게 성공한 작전으로 종결하자는 의견이었다.

이 의견에 다른 5척의 항모 함장들도 이 추가 공격을 적극 찬성하며 3 차 공격대를 출격시킬 준비가 다되어있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조심성 많은 나구모는 심사숙고 끝에 1,2파 공격으로 목표는 달성되었고 더 이상 모험을 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고 철수에 들어갔다.

다음 날 연합함대 사령관 야마모토와의 통신에서 야마모토는 일단은 나구모의 결정을 지지했다.

그러나 후에 그는 나구모 기동부대가 유류저장소나 선박 수리 시설 등은 그대로 둔 것이 미군의 빠른 반격을 가능케 했다고 말하면서 그의 결정이 유감이었다는 것을 피력했다.

후세의 전사가들은 만약 이 3차 공격이 성공적으로 수행되었더라면 일본의 공격대가 주목표인 전함들에게 입힌 손해보다 훨씬 더 심각한 타격을 태평양 함대의 향후 작전 활동에 가했을 것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만약 오하우 섬의 해군 시설들이 모두 파괴되었더라면 미군이 일본에게 행한 본격적인 반격 작전은 일 년 이상 연기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또 미국의 태평양 함대 사령관 니미츠 제독은 이렇게 말했다. “그랬다면 전쟁은 2년 이상 더 끌었을지도 모른다”.



미군에게 준 피해는 보기보다 크지 않았다



야마모토가 야심을 가지고 미국 해군에게 일격을 가한 진주만 공격은 오늘날 실패한 작전으로 평가된다. 먼저 군사적인 측면을 살펴보자.

일본 해군은 최대의 목표로 삼았던 항공모함은 한 척도 격침하지 못했다. 전함의 시대는 가고 항모의 시대가 왔던 후의 전쟁 전개를 보면 이의 실수를 절감할 수가 있었다.

진주만 기습 후 전함 없이도 미국이 항공모함으로만 반년간 버티다가 산호해와 미드웨이 해전에서 일본 함대에게 큰 타격을 준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살아남은 항모들은 1942년 B25 폭격기를 싣고 와서 도쿄를 맹폭했는데 이 폭격의 결과로 야마모토는 미드웨이 공략을 결심하게 된다.

이후 미드웨이 해전에서 진주만을 기습했었던 항모 네 척이 격침되어 일본 해군의 몰락이 시작되었다.

일본이 모두 격침했다고 하던 미 전함부대가 얕은 진주만에 좌초 수준으로 가라앉아 있던 것이 공격 작전의 전과를 크게 감소시키고 말았다.

8척의 피해 전함 중 6척은 모두 인양되고 완전 수리를 하여 전투에 재투입하였다. 만약 미 전함 함대가 원양에서 진주만 규모의 공격을 받았다면 문자 그대로 영원한 함대 손실로 이어졌을 것이다.

일요일 휴일에 기습을 했던 것은 영리한 결정인지는 모르지만 휴일이라 많은 승조원들이 상륙했었기 때문에 살아남았다. 이들 경험 많은 승조원들의 생존으로 새 함대를 편성하는 것이 가능했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일본의 진주만 기습은 미 함대에게 기대 이하의 피해 밖에 주지 못했다. 앞에서 설명했지만 항의 지원시설을 모두 온존시킨 것은 진주만 기습의 의미를 의심하게 한다.

이들 시설이 온존했었기에 그 다음해의 미드웨이 해전에서 승리가 가능했다. 산호해 해전에서 크게 파괴되어 돌아온 항모 요크 타운을 단 열흘 만에 수리해서 미드웨이 해전에 투입했던 것도 진주만의 수리 공창 시설이 온존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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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만의 유류저장시설과 인접한 잠수함 기지.





진주만을 기억하자!



야마모토는 태평양 함대의 심장부 진주만을 공격하면서 한가지 원칙에 매달렸다. 미 해군 전략가 알프레드 마한이 주장한 주력 함대 결전 사상이다.

적의 함대 주력을 격파해버리면 해상의 주도권을 잡을 수가 있다는 논리였다. 이 원칙에 매달린 그는 미 태평양 함대 주력함대를 격멸, 또는 감소시킴에 큰 무게를 두고 진주만을 기습했었다.

진주만 정도의 피해를 입고 미군이 당장 협상에 나오지는 않겠지만 앞으로 있을 함대 결전에서 일본이 크게 유리한 입장에 있을 것을 기대 했었다.

1905년 쓰시마 해전에서 러시아 함대가 일본 함대에 섬멸되자 러시아가 할 수없이 강화에 나섰던 승리의 추억을 맛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세월도 흘렀고 상대도 달랐다. 미국의 가공할 생산 능력은 이 함대 결전의 논리가 씨가 막히지 않게 만들었다. 미국같이 거대한 국가는 주력 함대 따위야 섬멸되어도 마구 생산해내서 다시 보유할 수 있었다.

개전시 단 6척이었던 미국의 항모는 생산에 박차를 가해 3년 뒤인 1945년 오키나와 작전 때 77척이나 되는 엄청난 규모로 커버린 세력을 동원하였었다.

일본은 정치적 측면에서도 진주만에서 중대한 실수를 하였다. 프로이센의 전략가 클라우제비츠는 [전쟁론]에서 ‘전쟁은 정치의 한 도구다’라고 주장한 적이 있다.

일본은 미국이라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여론’이라는 존재의 가공할 위력을 몰랐다. 이 점은 월남전 때 월맹이 교묘하게 미국의 여론을 조종해가며 반전 무드를 조성한 것과 대조가 된다.

선전포고 없는 기습을 당한 미국민들은 크게 분노했다. 미국민들은 일본 타도의 기치에 똘똘 뭉쳤다. 수많은 일본 규탄 시위가 있었고 언론들을 이런 분노를 증폭시켜 자원 입대자가 폭증했었다. 미군은 이 여론을 전쟁 수행의 자원으로 활용하였다.

“Remember Pearl harbor!”(진주만을 기억하자!)라는 구호로서 국민들을 단결시켜 전시체제 공고화와 전시 경제 확대를 일사불란하게 추진했던 것이다.

이로서 미국은 일본은 철저히 분쇄할 때까지 싸우는 외길로 달리게 되어 일본이 바라던 ‘일격 후 강화’는 어림없는 이야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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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진주만 공격의 생존자가 애리조나 기념관에 새겨진 전사자 명단을 바라보는 모습.



 




김창원 | 전사연구가
연세대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시라큐스 경영대학원에서 MBA를 취득했다. 장교로 군 복무, 기갑부대 전차 소대장을 지냈다. ‘울프 독’이라는 필명으로 전사와 역사를 다룬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다. 국방부 정책·정보 블로그(N.A.R.A.)에 기고하고 있으며, 저서로 [공격 마케팅]이 있다


제공

유용원의 군사세계
http://bemil.chosun.com/



발행2013.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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