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역사 팔렘방 전투 - 팔렘방 전투(1) 유전을 확보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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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78회 작성일 16-02-07 0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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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총과 수류탄만으로 무장하고 공격하는 일본 낙하산병



인도네시아 최대 유전지대인 수마트라 섬의 팔렘방 유전과 보르네오 섬(카리만탄 섬) 바리크파판 유전 지대는 세계 유수의 유전지대로서 그 연간 생산량이 800만 톤으로서 1939년 당시 일본의 연간 석유 소비량 500만 톤을 훨씬 상회했다.

석유 때문에 태평양 전쟁을 도발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일본의 입장에서 이들 유전지대는 반드시 점령하여야 했다.

싱가포르의 영국군이 항복한 1942년 2월 15일, 일본의 침공 부대는 당시 네덜란드령 수마트라 섬 팔렘방 유전지대로 공격해 들어갔다.



팔렘방(Palembang) 공수 작전의 배경



인구 108,200명(1941년 집계)인 팔렘방은 수마트라 섬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로서 큰 유전이 있었다.

이곳의 원유는 경질유로서 아주 품질이 좋았고 이곳에서 생산된 휘발유는 일본군이 점령 후 일본 항공 부대에서 필요로 하는 연료의 78 %를 공급했다.

현대식 정유시설까지 갖춘 팔렘방의 유전지대는 일본군의 인도네시아 침공의 최대 중요 공략 목표였다. 이 점령 작전에서 태평양 전투 최초의 공수 작전이 감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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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마트라 섬의 팔렘방 시





일본군의 낙하산 부대 투입 결정



일본군이 공수작전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독일의 1940년 5월 벨기에 침공과 두 달 뒤 노르웨이 침공시에 공수 부대가 대활약을 한 것을 알게 된 뒤부터다.

1940년 12월 초 일본은 하마마쓰의 육군 비행 학교내에 정진 연습부(挺進演習剖)를 설치하고 육군 제 1 정진단부터 시작해서 낙하산 부대의 조직에 들어갔다(비슷한 시기에 일본 해군 육전대에서도 요코스카 기지에서 낙하산부대의 조직에 착수한다).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낙하산 부대를 투입할 기회를 노리던 일본군은 드디어 수마트라 섬의 팔렘방에 낙하산 부대를 투입하기로 한다.

태평양 전쟁 초기 일본의 기습적인 맹공에 철수를 거듭하던 연합국측은 일본이 탐내는 보물 창고들인 수마트라 유전지대 뿐만 아니라 보르네오(카리만탄)와 셀레베스(현재 술라바야시)정유 시설은 물론 유정(油井)도 파괴하고 떠났다.

일본은 보물 창고가 손에 넣기도 전에 파괴되는 것을 그냥 좌시할 수는 없었다. 일본군은 야만적인 위협을 수 차례 했다.

만약에 네덜란드인들이 유정에 방화하거나 정유 시설이 파괴되는 경우 지역에서 잡은 모든 유럽인들의 목을 베어 버리겠다는 경고였다. 이 협박의 경고는 일본군이 보르네오 유전지대를 공격할 때 최초로 발표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르네오 바리크파판유전의 네덜란드 민간 기술자들은 정유 시설들을 폭파해버렸다.

남 수마트라를 침공한 일본이 노리던 최초 점령 목표는 팔렘방 시 외곽의 팡카란밴탕 비행장이었다(발음이 복잡해서 영국인들은 이 비행장을 P1이라는 약칭으로 불렀다).

일본군은 정유 시설뿐만 아니라 이 비행장도 절실하게 필요하였다. 비행장을 손에 넣게 되면 북부 수마트라와 자바 섬 점령 작전을 위한 보급이나 출격을 위한 중요한 기지가 되기 때문이다.

또한 이 비행장이 있던 팔렘방에서 수마일 떨어지지 않은 프라드조에 다국적 석유 기업 로얄 더치 셀이 세운 큰 정유 시설이 있었다.

팔렘방, 프라드조에 있는 유전지대와 정유공장 시설을 연합국이 파괴하기 전에 일본군이 점령하기 위해서 낙하산 부대에 의한 기습작전이 필요했던 것이다.1)

비행장을 공수 기습하기로 한 작전은 1940년 7월 독일이 노르웨이 수도 오슬로 시의 비행장을 공격 점령한 공수 작전을 본보기로 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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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낙하산 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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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전출동 - 수송기에 탑승하는 일본군 낙하산 병





연합군의 수마트라 방어 상태



한편 팔렘방을 방어하던 네덜란드 군의 작전 관점으로 보면 팔렘방과 비행장의 성공적 방어의 키는 무시 강에서 적을 저지하는 것이었다.

해안에 상륙한 일본군은 이 강을 건너야만 일본군이 목표로 하는 유전시설이나 비행장, 팔렘방 시가지에 도달할 수가 있었다.

병력과 화력이 모두 약한 네덜란드 군은 해변에서 일본군을 격멸을 시도하는 것은 헛된 짓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상륙하는 일본군은 일본 해군의 강력한 포 지원을 받을 것이라고 예상하였기 때문이다.

팔렘방을 방어하는 L.N.W 보겔레상(L. N. W. Vogelesang)중령 휘하의 네덜란드군 병력은 2,000명 규모였다. 그 병력의 편성과 장비는 외견상 일본 공수 부대를 방어하기에 충분해 보였다.

P1 비행장에는 1개 대대가 주둔했었고 랜드스트롬 1개 대대와 8문의 75mm 고정포가 팔렘방 시를 방어하고 있었다.

이 병력에 더해서 두 량의 장갑차가 P1 비행장에 주둔하고 있었고 세 량의 장갑차가 팔렘방 인근의 다른 비행장인 프라보에모에리히(P 2 비행장이라 불렸다)비행장을 지키고 있었다.

중요한 정유시설은 기관총으로 무장한 중화기 중대가 진지를 만들고 경비하고 있었다.

팔렘방 지역을 방어하는 군대가 육군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지원차 파견된 네덜란드 해군도 있었다.

LF 귀토 중령이 함장인 기뢰 부설함 프로 파트리아와 P-38과 P-40 두 척의 초계정이 무시 강을 오르내리며 순찰을 하고 있었다.

팔렘방 지역에 영국 공군이 파견한 대공포병들도 있었다. 영국 대공포병들은 6문의 3.7인치 대공포와 6문의 40mm 보포스대공포를 양 비행장에 배치해 놓고 있었고 4문의 3.7인치 포와 4문의 40mm 보포스대공포들을 정유공장 주변에 배치했다.

이들 대공포에서 소용 될 여분의 대공포탄을 수송하던 선박이 팔렘방으로 오는 도중에 격침되었기 때문에 대공포들은 포탄을 극도로 아껴 써야 했다.

팔렘방을 제외한 수마트라 섬 여러 곳에는 6개의 민병대대가 있었고 다수의 랜드스트롬 중대가 있었다.

이들 부대들은 주로 중부와 북부의 수마트라 섬에 있었는데 가용 수송력이 전혀 없어서 팔렘방이나 남 수마트라 방어를 위해서 이동 집결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영국군 항공 방어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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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허리케인기



일본군 낙하산 부대를 격퇴할 수 있는 최선의 수단은 공군력에 의한 요격이었다. 팔렘방 지역에는 네덜란드 공군이 없었다.

일본이 한창 기세를 올리던 1942년 1월, 영국은 225 폭격기 비행단을 팔렘방에 급파하였다. 이 폭격기 비행단은 영국군과 호주군의 공군기들이 혼성 편성된 것이었다. 이 비행단에 배속된 많은 항공기들이 중동과 이집트에서 이동해왔다.

장거리를 비행하는 동안 거의 모든 비행대대가 항공기들을 상실하였다. 폭격단이 장비한 항공기는 대부분 영국제 브렌하임과 미제 허드슨 폭격기들이었다.

영국은 북아프리카 전장에서 구식이 된 폭격기들을 극동으로 보냈다. 이 폭격기들은 영국이 독일과 싸우고 있던 북아프리카 전선에서는 이미 신형 독일 전투기의 손쉬운 먹잇감이 되는 구식으로 평가받고 있던 폭격기들이었다.

원래는 싱가포르로 파견할 예정이었으나 급속히 나빠지는 말라야 전역 때문에 이 방면 투입을 포기하고 수마트라로 그 최종 목적지가 변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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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과 호주 공군의 허드슨 폭격기



수마트라에 전개한 폭격기들은 내습하는 일본 해군 함대 정찰을 위해서 자주 출격했었다.

이런 출격에서도 항공기가 기관 고장이나 일본기에게 격추 되는 사례가 많아서 폭격 비행단의 폭격기들은 그 숫자가 많이 소모 된 상태였다. 일본이 팔렘방을 침공할 때 출격 가능한 비행단의 폭격기들은 소수였다.

침공 당일 호주 공군 비행대대와 영국 비행대대가 보유한 폭격기는 35기였었고 브렌하임 폭격기는 40기였다.

226 영국 전투 비행단은 2월 초에 추가로 팔렘방에 전개를 완료했었다. 이 비행단 역시 영국군과 호주공군, 뉴질랜드 공군기들의 혼성 편성으로서 일부는 말라야 작전에서 큰 피해를 입고 살아남은 공군의 전투기들이었다.

이 허리케인 전투기들은 수마트라 근해에까지 온 영국 항모 인도미타블에서 출격하였다.

2월 중순 7기의 허리케인 전투기들이 치리리탄에서 날아왔지만 수마트라 파견 허리케인들은 계속되는 일본기 공습에 요격 출격에서 다수를 상실하여 일본군이 침공할 때는 단지 15기만이 남아 있었다.

이들 연합국측의 공군기들은 일본군의 수송선을 격침하여 일본에게 타격을 주기도 했었으나 2월 14일 일본 수송선단을 폭격하러 나섰던 폭격기 9기가 일본의 신형 제로 전투기에게 격추되는 참사를 입기도 하였다.

실전 경험이 풍부한 영국 공군이었지만 일본 낙하산 부대를 요격 섬멸하기에는 너무 소수의 부대였다.



일본 낙하산 부대의 투입



연합군의 대공 방어력이 취약한 상태 있을 때 일본군의 공수 공격이 감행되었다. 여기에 동원한 낙하산 부대는 일본 육군 제1 정진단(挺進團)이었다.

단장은 구메 세이치(久米精一) 대좌였다. 제1 정진단에는 정진 제 1연대와 제 2연대 두 개 부대가 있었는데 정진 제 1연대는 1월 3일 승선했던 아카미스마루(明光丸)의 적재군수품에서 자연 발화가 일어나 선박 전소로 그대로 침몰했다.

대원들은 다행히 호위하던 구축함에 구조 되었지만 병기와 군수품 등은 모두 잃어 버려 공정 강하는 남은 정진 제 2연대2)(連隊)329명이 실시하게 되었다.

여기서 말하는 연대(連隊)는 한국 육군의 연대(聯隊)와 그 규모와 성격이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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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장 공수 공격 - 일본군 수송기들을 오인한 연합군



일본군 공수 작전은 1942년 2월 14일에 개시되었다. 공수 기습을 당한 연합국측의 기록부터 먼저 들여다보면 영국 공군 84대대 소속 15기의 허리케인들이 수마트라에 상륙한 일본군 제 38사단을 공격하는 임무를 마치고 귀환 하던 중 P1 비행장 상공에서 아주 이상한 상황과 마주쳤다.

허리케인 조종사들이 착륙 모드에 들어가던 중 반대편 방향에서 접근해오는 34기의 미제 록히드 L-14기들 편대들과 뒤섞이며 스쳐 지나가 버렸다.

이 낯선 비행기들은 일본이 미국 록히드사의 수송기들을 라이센스 생산한 일본 육군 항공대 소속 로식(ロ式) 수송기들이었다.

이 로식 수송기의 여러 부분을 개수한 것이 1식 수송기로서 외관으로 구별하기가 힘들고 명칭은 혼동해서 사용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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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식(ロ式-1식)수송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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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히드 엘렉트라 여객기 - 1식 수송기의 오리지날 형



착륙을 준비하던 영국 조종사들 대다수가 이들 일본 수송기가 미국제 수송기 아니면 폭격기로 착각했다.

미국 록히드사의 L-14는 엘렉트라라고 불리는 여객 또는 수송기로서 이것을 군용으로 개조한 것이 유명한 허드슨 폭격기다.

허드슨 폭격기는 태평양 전쟁 초기에 영국군이나 호주군이 다수를 사용하였었기 때문에 영국 조종사들이 혼동한 것은 당연했었는지도 모른다.

일본 수송기들은 착륙을 준비중인 허리케인 기들의 반대 방향에서 비행장 상공으로 들어오면서 낙하산 부대를 비행장에 강하시켰다.

일본 육군 98전대의 97식 폭격기(ki-21) 18기가 수송기들과 동반 비행하면서 공수 낙하한 낙하산병들의 보급품을 낙하산 투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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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97식 폭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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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식 수송기



이 수송기들을 말라야 반도로부터 호위해온 편대는 유명한 격추왕인 가토(加藤建夫)중좌가 지휘하는 제 64전대와 비행 제 59전대로서 신형인 1식 하야부사 전투기들로 모두 편성되어 있었다.

다수의 1식 하야부사(ki 43) 전투기들이 일본 수송기들을 호위 비행하며 영국 전투기들과 스쳤지만 이들 일본 전투기들은 원래 수송기 호위의 기본 목표에 충실하라는 지시를 받았는지 영국 폭격대에 한 눈을 팔지 않고 수송기 편대와 같이 사라져 버렸다.

영국기들이 비행장 상공에서 조우한 일본의 낙하산 부대는 일본군이 점령한 말라야 반도의 비행장에서 이륙한 제 1정진대 제 1파를 탑승한 정진 비행전대의 100식 수송기(ki 56)들과 로(ロ)식 수송기 1.2.3 중대들이었다.

 




김창원 | 전사연구가
연세대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시라큐스 경영대학원에서 MBA를 취득했다. 장교로 군 복무, 기갑부대 전차 소대장을 지냈다. ‘울프 독’이라는 필명으로 전사와 역사를 다룬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다. 국방부 정책·정보 블로그(N.A.R.A.)에 기고하고 있으며, 저서로 [공격 마케팅]이 있다


제공

유용원의 군사세계
http://bemil.chosun.com/



발행2013.12.24.



주석


1
비행장을 공수 기습하기로 한 작전은 1940년 7월 독일이 노르웨이 수도 오슬로 시의 비행장을 공격 점령한 공수 작전을 본보기로 한 것으로 보인다.
2
여기서 말하는 연대(連隊)는 한국 육군의 연대(聯隊)와 그 규모와 성격이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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