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역사 동서독 기본 조약 - 통일로 가는 작은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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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83회 작성일 16-02-07 0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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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약 체결 쌍방은, 평화 유지에 대한 각자의 책임을 의식하며, 유럽의 데탕트와 안보에 기여하기를 바라며, 현재 국경선을 기준으로 하는 모든 유럽 국가들의 국경의 불가침성과 그 영토 및 주권을 존중함이 평화의 기본적인 전제 조건임을 확신하면서, 두 독일 국가 사이에 무력 위협이나 무력 사용이 없어야 함을 인식하며, 역사적으로 형성된 현실에 따르고, 민족문제를 비롯한 독일연방공화국과 독일민주공화국의 여러 다른 견해 중 한쪽을 중시하지 않는 한, 독일연방공화국과 독일민주공화국의 협력이 두 국가의 주민들의 복지를 증진하리라는 바람에서, 그에 필요한 조건을 마련하고자, 다음과 같이 합의한다......”

1972년이 저물어 가는 12월 21일, 동독 치하의 동베를린에서는 이런 전문(前文)으로 시작하는 조약이 체결되었다. 전문 외에 10개조밖에 안 되는 단출한 조약이었으나, 그 역사적 의미는 대단했다. 그리고 그 조약으로 이어지는 길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다섯 개의 독일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독일은 다섯으로 갈라졌다. 일단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 4개 승전국이 분할 군정을 하고 나서 미국, 영국, 프랑스가 점령했던 서부의 9개 주는 ‘독일연방공화국’, 즉 서독으로 1949년 5월에 독립한다. 이에 대항하여 소련 점령지였던 동부의 5개 주도 같은 해 10월에 ‘독일민주공화국’, 즉 동독으로 독립했다.

분할 통치는 수도 베를린에서도 이루어졌는데, 소련 점령 지구가 동독에 편입된 반면 서방 3개국의 점령지는 그대로 ‘서베를린’이라는 특별 구역으로 남았다. 그리고 1945년 7월 26일의 포츠담 회담에서 결정된 대로, 옛 독일의 동단부 영토는 오데르 강과 나이세 강을 경계로 하는 선에 따라 독일에서 분리, 소련과 폴란드 영토로 편입되었다. 이렇게 1871년, 프로이센에 의한 독일 통일 이래 기본적으로 하나로 유지되어 온 독일 땅은 70여 년 만에 모두 다섯 개의 정부에 귀속되는 형태로 갈가리 찢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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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 독일의 분단. 회색은 서독(및 서베를린), 붉은색은 동독. 동독의 동쪽 경계선이 된 오데르 강과 나이세 강 동쪽으로 포메른-브란덴부르크-슐레지엔, 그리고 프로이센 남부는 폴란드령, 프로이센 북부는 소련령이 되었다.



이런 현실을 독일인들은 비탄과 치욕으로 받아들였으며, 자연스레 ‘1937년 당시의 영토’로 되돌아가는 것이 정치의 지상 과제라고 여기게 되었다. 서독의 경우, 동독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을뿐더러 오데르-나이세 강 오른편의 옛 영토(그중 프로이센 및 동부 브란덴부르크 지방은 프로이센의 발상지였고, 슐레지엔은 프리드리히 2세가 7년 전쟁을 치르며 천신만고 끝에 지켜낸 땅이어서, 더욱 독일인의 민족 감정을 자극했다)도 되찾아야 했다. 베를린의 경우에도 일단 동독 땅에 포위된 서베를린에 대한 통행의 자유를 확보하고, 궁극적으로 서독 정부의 관할에 두도록 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냉전 구도에 따라 서방국가들과 긴밀히 협력하는 한편, 한시라도 통일의 이상을 잊어서도, 타협해서도 안 되리라!

1950년대에 이런 정치 강령은 좌파와 우파를 막론한 모든 서독 정당들에게 불문율이었다. 한편 동독의 입장은 좀 달랐다. 소련의 압력과 사회주의 원칙에 따라 민족주의에서 어느 정도 거리를 둔 동독 정부는 통일을 지향하되 일단 두 독일 국가가 서로를 인정, ‘1민족 2국가’ 체제를 확립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런 주장이 서독에 먹힐 리 없었고, 동독 역시 그 사실을 뻔히 앎에도 다분히 구호상으로만 ‘상호 인정에 따른 통일’을 주장하는 상태였다.

그런 동독이 통일의 최대 걸림돌이자 국가 안보의 최대 위협이라고 여긴 콘라트 아데나워(Konrad Adenauer, 1876~1967)의 기민당(기독교민주당) 정권은 1955년에 ‘할슈타인 원칙’을 내세우며 동독 배제 입장을 분명히 했다. 서독만이 유일한 독일 국가이므로, 동독을 승인한 모든 국가(소련은 유일한 예외)와는 외교 관계를 단절한다는 원칙이었다. 아데나워는 다른 NATO 회원국들과의 안보 협력을 더욱 굳건히 하며 외교ㆍ안보ㆍ경제 전방위로 동독을 압박함으로써 끝내 그 정권을 무너뜨리고 동독 지역을 흡수해 통일한다는 방침을 견지했다.



1970년에 일어난 일들



그러나 1960년대가 되며 이런 방침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분단 상황이 장기화되며 국민들도 그 현실에 익숙해진데다, 냉전의 최전선에 있는 서독을 응원하면서도 독일 통일은 바라지 않는 프랑스, 영국, 미국 등의 눈치가 따가웠고, 동독을 무조건 타도의 대상으로만 삼는 것이 통일에나 안보에나 그리 유익하지 않다는 생각이 고개를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부 진보적인 국회의원들은 소련을 방문하고 동독 승인에 이은 국가연합제적 통일(복수의 국가 주권을 유지하는 상태에서의 통일)안을 내놓기도 했다.

그러나 기민당 정권은 그런 움직임을 탄압하며 기존의 노선을 고집했다. 이는 1960년대 초에 동독과의 교류가 한때 완전히 단절되고, 동독이 베를린 장벽을 세우며 여차하면 제2의 베를린 봉쇄를 시도하려는 듯한 제스처를 보임으로써 양독 관계가 최악으로 치닫는 상황까지 초래했다.

이런 상황에서 해빙 국면은 두 가지 요인에 따라 시작되었다. 첫째, 1968년의 핵확산 금지조약(NPT) 의 체결. 둘째, 1969년의 닉슨 독트린(베트남을 포함한 아시아에서 미국이 군사개입을 하지 않으며, 동맹국들에게만 최소한의 군사원조를 하리라는 것) 등으로 형성된 국제적 데탕트(긴장 완화) 무드. 마지막으로 1969년 10월, 서독에서 기민당-기사당(기독교사회당) 연합의 오랜 집권이 끝나고 동독에 대해 보다 유연한 자세의 사민당(사회민주당)-자민당(자유민주당) 연립 내각이 새로 출범한 것이었다. 새 정권의 수반은 사민당 대표인 빌리 브란트(Willy Brandt, 1913~1992) 총리였다.

이에 앞서 기민당과의 임시 연립 내각에서 외무장관이 되어 동서 화해 가능성을 검토했던 빌리 브란트는 수상 취임 연설에서 “우리는 동독을 승인(recognize)할 수는 없다”는 종전의 원칙을 되풀이하면서도 그 ‘실체’를 용인(acknowledge)하면서 상호 무력행사 포기와 화해 협력을 추진할 의사가 있음을 강하게 천명했다. 이에 발빠른 호응을 보인 쪽은 동베를린이 아닌 모스크바였다. 소련과 서독은 앞서 상호 무력행사 포기 논의에 들어갔었지만 1968년에 소련이 체코를 침공한 이후 대화가 단절되어 있었는데, 이를 대화 재개 계기로 삼으려는 것이었다. 브란트는 여기에 다시 호응하여 1969년 11월에 핵확산 금지조약에 가입한다. 서독과의 관계 정상화는 서독의 독자 핵 보유 의사 포기를 전제로 해야 한다는 소련 측의 입장을 수용한 것이었다. 이로써 해빙 무드는 급물살을 탔으며, 마침내 소련의 중재로 1969년 12월에 동독의 실권자 울브라이트가 브란트에게 정상회담을 제의해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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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3월, 에어푸르트에서 만난 두 독일 정상. 왼쪽이 서독의 총리 빌리 브란트, 오른쪽이 동독의 수상 빌리 슈토프이다. <출처: (cc) Das Bundesarchiv at en.wikipedia.org>



동독 수상 슈토프와 서독 총리 브란트의 정상회담은 1970년 3월 19일과 5월 21일에 에어푸르트와 카셀에서 각각 이루어졌다. 그러나 동서독 정상이 마침내 한 자리에 마주 앉았다는 상징을 제외하고는 이렇다 할 결실이 없었다. 슈토프는 “서독이 동독을 먼저 승인하고 이야기를 시작하자”는 입장을 고집한 반면, 브란트는 그것만은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브란트는 실망했으나, ‘동독과의 직접 대화는 먼저 주변국과의 관계를 정상화한 다음이어야 한다’는 본래의 생각을 더욱 다지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곧 소련 및 폴란드와의 관계 정상화에 박차를 가했다. 소련과는 1970년 1월부터 5월까지 14차례의 회담을 가졌고, 그때 서독 대표로 나선 외무차관 에곤 바르의 이름을 딴 ‘바르 문서’는 이 회담이 동서독의 기본 관계 회복을 위한 소련의 양해를 얻는 자리였음을 보여준다. 한편 폴란드와의 회담은 같은 해 2월에 시작되었다. 두 나라 모두 서독이 할슈타인 원칙을 폐기하고, 사실상 1민족 2국가를 받아들이며, 소련 및 폴란드령으로 되어 있는 오데르-나이세 선 동쪽의 영토 회복을 추구하지 않는다는, 그야말로 대폭적인 양보를 전제로 양국은 물론 동독과의 관계 정상화를 받아들이는 원칙에 합의했다.

이런 ‘신동방 정책(최초의 동방정책은 기민당 정권 시절 나왔다)’은 다수의 서독 국민과 세계인들에게 호평과 환영을 받았으나, 한편 실망과 분노의 목소리도 자아냈다. 동독을 법적으로 승인하지 않는다는 것만 빼고 서독 정부 수립 당시의 국시(國是)를 거의 모조리 포기하는 것이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 대가가 과연 그런 희생을 치를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가? 이로써 분단은 영구불변이 되는 것이 아닌가? 또 공산 진영의 영향력이 서독으로 넘어오고 서방세계 전체로 독극물처럼 퍼져나가지 않겠는가?

브란트는 소련이 끝내 못마땅해 했던 “독일의 통일을 지향한다”는 문구를 1970년 8월 12일의 모스크바 조약에 집어넣었음을 지적하며, 자신이 분단을 고착화하고 있다는 비난은 얼토당토않다고 반박했다. 그리고 “동구권만이 아니라 서방세계 국가들도 우리의 통일을 용인하고 축복해줄 수 있게 하려면, 우리는 겸허해져야 한다. 과거의 과오를 반성하고 참회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참회의 정치(politics of regret)”를 내세웠다. 그것은 1970년 12월 7일, 바르샤바 조약을 맺기 위해 폴란드를 방문한 브란트가 나치 시절 학살된 유대인을 추모하는 위령비 앞에 무릎을 꿇고 꽃을 바치는 모습에서 극명하게 표현되었다. 그를 지지하던 국민들 상당수조차 ‘국가수반으로서 너무 지나친, 굴욕적 행동’이라고 이를 불쾌해 했지만, 이는 다른 수많은 세계인들에게 깊은 감동을 심어주었다. 실로 그것은 한 개인으로서는 가벼운 무릎 꿇음이지만, 한 국가로서는 위대한 도약을 예비하는 행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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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12월 7일, 폴란드 바르샤바 유대인 희생자 기념비 앞에 무릎 꿇은 빌리 브란트.





기본 조약, 체결되다



그러나 소련, 폴란드, 그리고 서방국가들의 허들을 넘은(1970년부터 이어진 회담에서, 미국, 영국, 프랑스 3국은 소련과 더불어 서베를린 문제를 논의, 종전대로 서독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되 서독인들의 왕래와 교류를 대폭 개방한다는 데 합의했다) 브란트가 동서독 화해에 이르려면 마지막으로 국내 정치의 허들을 넘어야 했다. 그가 “나라의 위신과 국익을 팔아먹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동료 사민당 의원들 중에서까지 있었으며, 그들 중 일부가 마침내 탈당하자 아슬아슬했던 사민당-자민당 연립정권의 과반수 의석은 백척간두에 섰다. 오랜만의 야당 생활에 진절머리를 내던 기민당-기사당 연합은 나아가 브란트 정권을 합법적으로 붕괴시키려 했다. 1972년 4월, 소련과 폴란드와의 조약에서 국익을 훼손했다는 이유로 불신임 투표를 추진한 것이다.

그 결과는 손에 땀을 쥐게 할 만했다. 불신임안은 부결되었으나, 단 2표 차이였다. 사실 상당수의 여당 의원들이 불신임에 찬성할 것으로 보여 상황은 매우 비관적이었는데, 뚜껑을 열어보니 그 못지 않게 기민당의 개혁적인 의원들이 동방정책을 옹호한 것으로 나왔다. 그 중에는 나중에 수상이 될 헬무트 콜과 대통령이 될 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도 있었다. 불신임안이 무산된 기민당-기사당은 후폭풍에 시달렸고, 11월 총선에서 여당의 의석 수는 약진하여 안정 과반수가 확보되었다.

마침내 1972년 12월, 동독과 서독은 다음과 같은(요약본) 10개 조의 ‘기본 조약(Grundlagenvertrag)’에 합의했다.

제1조. 독일연방공화국과 독일민주공화국은 동등한 권리의 토대 위에서 정상적인 우호 관계를 발전시킨다.

제2조. 독일연방공화국과 독일민주공화국은 유엔헌장에 명시되어 있는 제반 목표와 원칙을 준수한다.

제3조. 유엔헌장의 정신에 따라, 독일연방공화국과 독일민주공화국은 갈등을 오로지 평화적인 수단을 통해서만 해결하며, 무력 위협과 무력 사용을 포기한다. 쌍방은 현존하며 앞으로도 존속할 경계선의 불가침을 재확인하고 존중한다.

제4조. 독일연방공화국과 독일민주공화국은 어느 한쪽이 상대방을 국제사회에서 대신하거나 대표할 수 없음에 동의한다.

제5조. 독일연방공화국과 독일민주공화국은 유럽 국가들끼리의 평화적 관계 발전을 촉진하며 유럽의 안보 및 협력에 기여한다. 쌍방은 세계의 안보에 기여하는 군비 제한과 군비 축소의 노력, 특히 핵무기와 기타 대량살상무기 분야의 군비 축소 노력을 지지한다.

제6조. 독일연방공화국과 독일민주공화국은 각자의 권력이 각자의 영토 내에서만 행사될 수 있다는 원칙을 고수한다. 쌍방은 국내 및 대외 문제에 있어서 상대방의 독립과 자주성을 존중한다.

제7조. 독일연방공화국과 독일민주공화국은 관계 정상화 과정에서 현실적이고 인도적인 문제들을 타결할 용의가 있음을 천명한다. 양국은 이 조약의 원칙에 입각하여 상호 이익을 도모하기 위하여 경제, 학술, 기술, 무역, 사법, 우편, 전화, 보건, 문화, 스포츠, 환경보호 등등의 분야에서의 교류 협력을 촉진, 발전시키는 협정을 체결하기로 한다. 이에 대한 세부 사항은 추가 의정서에서 정한다.

제8조. 독일연방공화국과 독일민주공화국은 상주 대표부를 교환한다. 대표부는 각기 상대방의 정부 소재지에 설치하기로 한다. 대표부 설치에 관계되는 실제적인 문제들은 별도로 해결한다.

제9조. 과거 쌍방이 각기 체결한 조약 또는 쌍방 관계의 2국간 및 다국간의 조약은 이 조약의 저촉을 받지 않는다.

제10조. 이 조약은 비준 후에 효력을 발생한다. 위의 내용들을 확인하기 위하여 조약 체결 쌍방의 전권 대표는 이 조약문에 서명한다.



헌법재판까지 간 우려와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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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12월 21일, 조약 서명 후 기자들 앞에서 질문을 받고 있는 사민당의 에곤 바르. <출처: (cc) Das Bundesarchiv at en.wikipedia.org>



전문에서 “민족문제를 비롯한 독일연방공화국과 독일민주공화국의 여러 다른 견해 중 한쪽을 중시하지 않는”다고 밝히고, 제1조에서 “동등한 권리의 토대 위에서 정상적인 우호 관계를 발전시킨다”고 함으로써 동독을 승인하지 않는다는 서독의 입장과 1민족 2국가를 주장하는 동독의 입장이 절충되어, 동독은 법적으로는 아니지만 사실상으로는 승인되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이는 제4조에서 “어느 한쪽이 상대방을 국제사회에서 대신하거나 대표할 수 없”다고 한 것과, 제8조의 “독일연방공화국과 독일민주공화국은 상주 대표부를 교환한다”로 뒷받침되었다. 이상의 내용에다 제6조의 “국내 및 대외 문제에 있어서 상대방의 독립과 자주성을 존중한다”로 할슈타인 원칙은 최종적으로 폐기되었다. 그리고 전문, 제3조, 제6조의 내용은 동서독 사이의 경계선을 실질적인 국경선으로 간주하며, 오데르-나이세 경계선도 인정한다는 의미를 담았다. 또한 제2조, 제3조에서 유엔헌장을 언급하고 전문과 제3조, 제5조에서 평화를 강조한 것은 두 독일의 관계 개선을 의심의 눈으로 바라보는 서방국가들을 무마하려는 의도를 반영했다.

이런 기본 조약은 대중적으로는 두루 인기를 끌었지만, 야당과 일부 민족주의자, 반공주의자들에게는 대단히 불만스러웠다. 일단 전문에서 제10조까지 어디에도 ‘통일’을 언급하지 않음으로써 동방정책이 분단 고착화 정책이라는 저간의 의혹을 부채질했다. 객관적으로 보더라도 이 조약으로 동독 및 공산 진영이 얻는 몫은 크고 분명했던 데 비해(동독의 실질적 승인, 서독 핵 개발과 무력 사용 포기, 오데르-나이세 동쪽 영토 포기), 서독의 몫은 작고 불분명했다(전문에서 언급한 민족문제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배려한다는 조항이 없고, 제7조의 현실적, 인도적 문제 해결은 “타결할 용의가 있다”, 교류 협력 증진은 “추가 의정서에서 정한다”로 모호하게 처리되었다).

기민당은 동방정책에 대한 국내외의 큰 기대와 호응을 고려하여 불신임 투표와 같은 강경책은 자제하기로 했지만, 기사당이 장악하고 있던 바이에른 주정부만은 끝내 이 조약을 두고 헌법소원을 냈다. 1973년 7월의 헌법재판 결과 기본 조약은 합헌 판정을 받았으나, 어디까지나 이는 “기본(Grund)” 조약으로 잠정적인 의미만을 갖는다는 것, 서베를린 문제나 민족문제 등에서 서독의 입장을 더 강조해 나가야 한다는 것, 상주 대표부의 설치는 동독을 사실상의 외국으로 보고 외교 관계를 수립한다는 의미일 수 없다는 것 등 기본 조약을 ‘확대해석’하지 말아야 한다는 여러 조건을 부과했다.



마침내 통일의 날이 오다



브란트의 영광은 오래지 않았다. 1974년, 동독이 서베를린에 대한 통행권을 다시 옥죄고 서독과의 공식 문서에서 ‘민족’이라는 단어를 일체 배제함으로써 기본 조약이 갖고 있던 ‘서독 이익 보장의 모호함’ 문제가 현실로 불거져 나왔다. 게다가 정보 당국의 정부 내 동독 간첩 색출 과정에서 브란트의 비서가 연관되자, 브란트는 결국 사임하게 된다.

그러나 동방정책은 브란트와 운명을 함께하지 않았다. 그의 후임자인 헬무트 슈미트는 대동독 관계에서 보다 신중한 입장을 천명했지만 동방정책의 근간은 건드리지 않았으며, 심지어 1982년에 기민당 연합이 승리하여 정권 교체가 이루어진 다음에도 헬무트 콜 총리는 동방정책을 유지했다. 그는 아데나워를 우상처럼 여길 정도로 우파적 성향이 강한 사람이었으나, 독일의 미래를 위해서는 동방정책이 필요하고, 불가피하다고 인식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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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무트 콜. 기민당 당수로 우파적 성향이 짙었지만 동방정책을 유지했으며, 임기 중 통일을 이룩하고 통일 독일의 초대 수상이 되었다. <출처: (cc) Das Bundesarchiv at en.wikipedia.org>



그리고 처음에는 빛 좋은 개살구처럼 여겨졌던 제7조의 내용이 갈수록 진가를 발휘했다. 1973년 3월에 서독의 언론사들이 동독에 주재하며 활동할 수 있게 되고, 서독의 방송을 동독에서 시청하거나 동독 잡지를 서독에서 구독해 보는 것도 가능해졌다. 민간인의 상호 방문은 처음에는 자국 정부의 허가를 받은 이산가족에 한정하여 이루어졌으나 점차 자유로워져서, 1980년대가 되면 거의 보통의 이웃나라를 드나들 듯 다닐 수 있게까지 되었다. 편지 왕래도 최소한의 검열조차 없이 시행되었다. 체육인의 교류는 1974년 5월의 협정 이후 폭발적으로 늘고, 경제나 학술 교류도 활발해졌다. 정치적으로는 1973년 1월에 기본 조약에 명시된 대로의 경계확정회담이 열려 ‘국경선’을 확정했으며, 그해 1973년 9월에는 제28차 유엔총회에서 동독과 서독이 회원국으로 동시 가입했다. 그리고 1974년 5월에 본과 동베를린에 양국의 상주 대표부가 설치, 업무에 들어갔다.

제한된 장소에서 선별된 이산가족의 상봉을 한 번 이뤄내기도 어려운 남북한의 상황과는 판이하게 다르게 동서독 사이는 이렇게 폭넓은 교류 협력이 오랫동안 진행되었기 때문에, 1980년대 말 사회주의권이 흔들리기 시작하자 자연스럽게 통일로 무게중심이 쏠렸던 것이다. 1990년 성취된 통일은 서독에 의한 흡수통일이었으나, 냉전 논리대로 동독을 압박하고 위협하여 이뤄낸 것이 아니라 오랜 신뢰 구축과 상호의존성 증대의 결과 자연히 무르익은 통일 기반에 힘입은 것이었다. 국가수반이 무릎을 꿇고, 오랜 영토를 포기하고, 국시를 단념하고, 퍼주기 의혹에 시달리면서 꽃피워낸 동방정책의 나무에서 열린 과실이 아닐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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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11월, 베를린 장벽을 넘는 동독 시민들. <출처: (cc) Lear 21 at en.wikipedia.org>





동방과 북방 사이



브란트 이래의 동방정책은 지구상의 또 다른 분단국가에도 귀감이 되었다. 1990년대에 전개된 ‘북방정책’과 그것을 상당히 계승했다고 할 수 있는 ‘햇볕정책’은 분명히 동방정책을 본받은 것으로, ‘주변 강대국들의 양해를 얻어낸다 → 남북한 정상회담과 기본합의서를 추진한다 → 유엔에 동시가입하고, 교류 협력을 단계적으로 증진해 나간다’는 정확히 동방정책의 로드맵을 따르고 있었다.

그런데 왜 북방/햇볕정책은 동방정책처럼 성공을 거두지 못한 것일까? 해석의 차이는 있겠지만, 오늘날 남북간에는 1990년대 이전에 비해 신뢰와 협력이 별로 늘어나 있지 않다. 기본합의서와 불가침협정은 휴지 조각이 되었으며, 북한에 대해 대한민국이 일정한 영향을 미친다거나 동북아에서 남북한이 독자적인 목소리를 내는 것도 전혀 기대할 수 없다.

왜 그럴까? 물론 근본적인 차이가 있었다. 동서독은 전쟁을 치르지 않았으며, 괴상한 정권 치하에 있지도 않았다. 남북 화해의 후원을 맡아주어야 할 소련 등 사회주의권이 금방 몰락해버리고, 북한이 독자 노선을 걷게 되었다는 점도 감안해야 한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으로, 독일과 한국의 정치 문화 차이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브란트는 강력한 리더십으로 동방정책을 밀어붙인 것이 아니었다. 여러 정당이 합종연횡을 하며 간신히 과반수를 얻는 식의 서독 정치에서는 그런 리더십을 발휘할 수가 없었다. 당시 서독 정치인들은 세 가지 차원에서 행동을 구속당했다고 할 수 있다. 첫째, 미국, 프랑스 등 서방국가들의 태도와 영향은 냉전 최전선에 선 국가의 존망과 직결되었다. 둘째, 불과 몇 명이 당론을 거스르거나 아예 탈당하면 언제든지 권력 구도가 바뀔 수 있으므로, 각 정파 및 정치인 집단의 입장과 동태를 살펴야 했다. 셋째, 국민 여론은 다음 총선에서 미래 권력 구도를 결정하는 중대 변수였다. 그래서 아무리 인기 있는 정책이라도 당내외의 반발을 무시하고 마구 밀어붙일 수 없었던 한편, 국내외적으로 지지받는 정책을 당리당략에 따라 마냥 거부할 수도 없었다. 전부 아니면 전무가 불가능한 상황에서 사방으로 눈을 돌리고 머리를 굴리다 보니, “조약 자체는 거부하지만 조약에 부과된 조건에는 찬성한다” 따위의 이상야릇한 결론에 이르기도 했다. 이런 정치 과정이 때로는 복잡하고 답답해 보였지만, 꾸준한 검토와 타협을 통해 지도자나 정권이 바뀌더라도 중요한 정책 기조는 유지되는 일이 가능했던 것이다.

반면 한국은 군사정권 이래 대북정책은 비밀스럽게, 행정부 위주로 밀어붙이는 일이 일반적이었다. 소외된 야당은 강력하게 반발했으며, 그 반발은 북한의 태도가 변할 때마다 단죄 수준으로 고조되었다. 기본적으로 정당의 발달 수준이 낮고 지도자 개인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한국 정치는 지도자의 부침이 정책의 존폐와 직결되는 경우가 많았다. 게다가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정책 기조가 바뀜은 물론이고 과거에 자신들이 추진했던 정책조차 여야 입장이 바뀌면 거부의 대상으로 삼는 일까지 벌어졌다. 따라서 꾸준하고 내실 있는 대북정책이 자리 잡기 어려웠던 것이다.

정치란 각양각색의 정파와 정치인들이 왁자지껄하고 떠들 수 있는, 그러면서 차근차근 합의를 도출하는 장이어야 한다. 흑 아니면 백, 빨갱이 아니면 파랭이밖에 없는 탄압과 투쟁의 정치는 생산성이 낮다. 불안하고 답답해 보여도 여러 목소리가 허용되고 다름 속에서 옳음을 찾는 정치만이, 역사의 영광과 국민의 안녕을 가져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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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규진 | 서울교육대학교 교수/역사저술가
글쓴이 함규진은 여러 방면의 지적 흐름에 관심이 많다. 정치학을 전공하여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한편, 주로 역사와 관련된 책을 여러 권 썼고, 인물이나 사상에 대한 번역서도 많이 냈다. 동양과 서양, 전통과 현대, 보수와 진보 등 서로 대립되는 듯한 입장 사이에 길을 내고 함께 살아갈 집을 짓는 것이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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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간도서
조약의 세계사 2014.12.22
고대부터 현대까지 64개의 조약으로 읽는 화해와 배신, 강압과 화합 그리고 진보의 역사.

‘지뢰는 과연 쓸모 있는 무기일까?’, ‘난징 조약은 불평등조약인가?’와 같은 흥미로운 물음을 던지며 세계사의 이면을 파고들어 역사와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을 넓힌다. 강화도 조약과 같이 우리 역사 속 조약부터 마스트리히트 조약처럼 생소한 조약, 고대의 히타이트-이집트 조약에서부터 현대에 체결된 리우환경협약까지 역사의 흐름을 바꾸고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계를 형성한 조약을 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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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2013.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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