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역사 산호해해전 - 산호해해전 (1) – 태평양 전쟁의 역전의 발판을 만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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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46회 작성일 16-02-07 0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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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호해 해전에서 침몰한 미해군의 렉싱턴 항공모함





해전의 개관



산호해 해전은 미국과 일본이 1942년 5월 4일부터 8일까지 남태평양 산호해에서 격돌한 해전이다. 이 해전은 세계 전사에 한 기록을 남겼다. 항모끼리의 최초 격돌 해전이었다는 점이다.

양측이 육안으로 적을 보지 않고 함포가 아닌 항공기만 가지고 싸울 수 있다는 사실은 그 한 세대 전에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이 해전에서 미국측 항모 1척이 격침되었고 일본도 경항모 한 척을 잃었다.

일본은 태평양 전쟁 개전이래 꾸준히 추진해온 남진 정책에 따라 파푸아뉴기니의 포트 모르스비(Port Moresby)와 솔로몬 제도의 투라기(Tulagi)섬의 공략 작전을 전개했다.

일본은 이 작전에 “모(mo)작전”이라는 명칭을 부여했었다. 총사령관은 이노우에 시게요시 제독이었다.

이노우에는 작전 성공에 항공력의 증파를 절감하고 항모 부대의 지원을 요청했다. 해군은 그에게 두 척의 항모와 한 척의 경항모를 파견했다.

그러나 태평양 전쟁중 미드웨이 해전이나 총사령관 야마모토 이소로쿠 대장의 피격과 같이 이번에도 미국과 영국은 무선 감청으로 일본 항모부대의 증파를 미리 탐지해냈다.

미 해군은 플레쳐(Frank J. Fletcher) 제독이 지휘하는 기동 부대를 급파했다.

일본은 솔로몬 제도의 끝 투라기섬에 상륙 작전을 하던 중 플레쳐 제독의 항모, 요크 타운에서 출격한 함재기들에게 공격 당하자 산호해에 미 해군의 항모 부대가 출현한 사실을 뒤늦게 알고 이의 반격에 나섰다.

양측의 항모 부대는 1942년 5월 7일부터 이틀간 화력을 주고받았다. 5월 7일 미 해군의 함재기들은 일본의 경항모 쇼호를 격침했다.

일본 항모부대도 미 구축함 한 척을 격침시키고 유조선 한 척을 대파하였다. 다음날 5월 8일 일본 항모 쇼카쿠가 미해군기들의 공격으로 크게 파괴되었고 반면 미국도 항모 렉싱턴이 침몰하였다.

또한 항모 요크 타운도 대파되었다. 치열한 이틀간의 세계 최초 항공 해전은 이렇게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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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와 솔로몬 제도-과달카날과 투라기 포함- 사이의 산호해(coral sea)





포트 모르스비 침공 계획



개전 후 남진 정책을 추구 하던 일본은 솔로몬 제도 남단의 투라기 섬과 당시 호주 식민지였던 파푸아뉴기니의 주요 거점인 포트 모르스비를 점령하는 작전 목표를 세운다.

일본은 해군 소장 아베 고소 소장이 지휘하는 11척의 수송선으로 수송되는 육군 병력 5,000명과 일본 구레 군항에 주둔중인 해군 육전대 500명이 침공에 동원하였다.

침공 함대는 5월4일 라바울을 출항해서 다음날 한 척의 순양함과 다섯 척의 구축함으로 구성된 호위함대(사령관 :가지오카 사다미치 소장)와 랑데부해서 1,600km 떨어진 모르스비로 향했다.

기본 계획은 5월 10일 포트 모르스비에 도착하여 상륙작전을 개시할 예정이었다.

포트 모르스비를 수비하는 연합군 병력은 5,333명이었지만 그 중 전투를 감당할 보병은 절반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무장도 빈약했고 훈련도 부족한 약체의 군사력 부대였다.

투라기 공략부대는 시마 기요히데 소장이 지휘하는 두 척의 기뢰 부설함, 두 척의 구축함, 6척의 소해정, 두 척의 구잠정등과 수송선 한 척의 함선, 400명의 구레(吳) 육전대 병력과 고토 아리토모 소장이 지휘하는 경항모 소호와 네 척의 중순양함이 포함된 강력한 호위 함대로 구성되었다.

투라기 공략 작전에는 또 다른 지원 함대가 있어서 후방에서 원거리 지원을 했다. 이 지원 함대는 두 척의 경순양함이 함대 주력함이었다.

이 함대는 5월 3일과, 4일 투라기 상륙 작전이 끝나면 10일 계획인 포트 모르스비 공격 작전을 지원할 계획이 있었다.

이 외에 항모 즈이카쿠와 쇼가쿠로 편성된 기동함대가 5월 1일 트럭 섬을 출항했다. 기동함대에는 두 척의 중순양함이 포함되어 있었다.

기동함대 사령관은 다카기 다케오 중장이었지만 항모 부대는 즈이카쿠를 지휘함으로 하는 하라 주이치 소장이었다.

기동함대는 솔로몬 제도 동쪽 해안을 타고 내려가 투라기 섬 바로 옆의 과달카날 남쪽에 있는 산호해에 들어섰다.

이 기동함대는 투라기 섬의 점령 작전을 엄호하고 호주 북부의 다윈 항을 공습하는 임무,그리고 혹시 산호해에 들어오는 연합군의 해군 함정을 격멸하는 다목적의 임무가 주어졌었다.

연합군의 함대가 산호해 해역에 들어올 가능성에 대비해서 네 척의 일본 잠수함이 과달카날 830킬로 남서 해역에 초계선을 치고 경계했다.

미국 프레처 기동함대는 운 좋게도 일본 잠수함들이 초계 위치에 도착하기도 전에 초계선을 통과해서 산호해에 진입했다.



미 기동함대의 산호해 출동



5월 1일 아침, 미 해군의 17 기동함대와 11 기동함대는 뉴칼레도니아의 북서쪽 560킬로 해상에서 서로 만났다.

플레쳐 제독은 예상되는 해전을 앞두고 두 기동함대에게 급유부터 받을 것을 명령했다. 17 기동함대는 급유함 티페카누로부터 급유를 받았고 11기동함대는 네오쇼로부터 급유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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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쳐제독 - 후에 미드웨이 해전의 영웅



17기동함대는 다음날 2일 급유작업을 완료했지만 11 기동함대는 4일날 완료했다. 급유 작업이 완료되자 이 함대에 미국과 호주의 함대가 혼성된 44 기동함대가 합류하였다.

일 함대는 투라기에 도착하여 상륙 부대를 발진시켰다. 투라기 섬은 방어 병력이 없는 빈 섬이었다.

본래 호주 코만도 부대와 소수의 호주 공군 병력이 주둔하고 있었으나 일본 함대가 접근하기 전에 모두 철수를 한 상태였다.

섬을 접수한 일본 해군은 즉시 설영대(設營隊)1)를 상륙시켜서 수상기 기지와 통신기지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일본 경항공모함 쇼호의 정오 조금 지나기 전까지 상륙작전을 엄호하다가 투라기 엄호 함대 사령관 고토 제독의 명령으로 포트 모르스비 상륙작전 지원 임무를 수행을 위한 급유차 부겐빌 섬쪽으로 북상을 했다. 이제 투라기에는 상륙 부대인 시마 함대만 남아있었다.

주력부대가 전진하여 작전이 예상되는 새로운 위치를 주력부대가 도착 또는 점령하기 전에 이를 확보하고 정찰하여 사전에 지역을 편성하기 위하여 부대 대표로 파견된 부대. 주요 임무는 예하부대의 정확한 위치를 지정해 주고 각 부대를 준비된 지역으로 유도하며, 숙영 및 행정시설을 사전 준비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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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3일 오후 5시, 플레쳐는 그 전날 미 해군 정찰기가 발견한 일본 투라기 공략 부대가 솔로몬 제도 남쪽에서 항해하고 있다는 정보 보고를 받았다.

플레쳐는 즉시 함수를 돌려 50km/h의 고속으로 과달카날로 직행했다. 플레쳐 휘하 11기동부대는 급유를 마치고 17기동부대로부터 110km 떨어진 곳에 있었다.

그러나 플레쳐 제독으로부터 무선 침묵을 명령 받았기 때문에 상황에 대한 정보를 통보 받지 못했다. 그 결과 플레쳐의 17 기동부대만이 공격에 나선 것이다.

플레쳐는 투라기가 미함재기의 공격 거리 내에 들어가는 다음 날 4일 아침, 투라기를 침공한 일본 함대를 급습할 목표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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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전 직전 양함대의 전개





미 해군의 투라기 기습



5월 4일 투라기에 185km까지 접근한 미 17 기동 함대는 60기의 공격대 항공기들을 세 파로 나누어 발진시켰다.

미 함재기들은 투라기 근해에서 여유 있게 작전 중이던 시마의 함대를 공격했다. 이 공격은 완전한 기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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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항모 요크 타운



일본 함대는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있다가 당했다. 이 급습에서 일본 구축함 기쿠스키와 세 척의 소해정들이 격침 당하고 다른 함선 4 척이 대파되었다.

미 공습작전에서 미 해군은 한 기의 급강하 폭격기와 두 기의 전투기를 격추당했다. 비행 승무원들은 모두 구출되었다.

플레쳐 제독의 17기동 함대는 저녁이 다되어 출격한 함재기들을 모두 회수 한 뒤에 남쪽으로 철수하였다.

미 함대에게 기습당해 상당한 피해를 입은 투라기의 일본군은 그래도 수상 정찰기 기지를 건설해서 5월 6일부터 일본 수상 정찰기가 이 기지에서 작전을 개시하였다.

한편 포트 모르스비 공략을 위해 투라기에서 648km 떨어진 곳에서 급유를 받고 있던 다가키의 기동 함대는 5월 4일 투라기에서 날린 미국 함대 기습을 알리는 급전을 받았다.

다카기는 즉시 급유 작업을 중단하고 솔로몬 제도의 남동쪽으로 급진하면서 수상 정찰기들을 동쪽으로 출격시켰다.

일본 기동함대 지휘부는 함대의 동쪽에 미군 함대가 잠복하고 있다고 추정했다. 하지만 동쪽 방향에는 미국 함대는 없었다. 일본 수상 정찰기들은 아무 성과도 거두지 못하고 그냥 돌아왔다.

5월 5일 아침 8시 16분, 투라기를 기습했던 17 기동부대는 11기동부대와 44기동부대와 미리 지정한 해상에서 모두 랑데부하였다.

이곳은 과달카날 섬과 592km 떨어진 곳이었다. 세 부대의 랑데부 무렵에 초계 임무 차 요크 타운에서 출격했었던 4기의 F-4F 와일드캣 전투기들은 일본 해군의 97식 가와니시 정찰기를 격추했다.

이 수상 정찰기는 쇼트랜드 섬에서 날아온 것이었다. 일본 수상기는 격추되면서 피격당했다는 비상 무전을 본부에 하지 못했지만 이 수상기가 돌아오지 못하자 일본 해군은 이 수상기가 미 해군 함재기에게 격추당했다고 판단했다.

플레쳐 제독은 진주만으로부터 일본 함대가 포트 모르스비에 10일경 상륙을 목표로 움직이고 있으니 플레쳐의 미 함대는 일본 함대의 상륙작전을 저지할 수 있는 근처 해역으로 신속히 이동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플레쳐는 이 명령을 받자마자 17 기동함대에 5월 6일까지 급유를 한 뒤에 북상시켜 5월 7일 일본 함대를 공격할 작전 계획을 세웠다.

한편 일본 다카기 제독의 항모 부대 역시 남진하여 과달카날 섬과 레넬 섬 사이 해협을 통과하여 5월 6일 아침 산호해로 진입했다.

다카키 역시 다음 날 5월 7일 미 함대와 해전이 있을 것을 예감하였다. 그는 투라기에서 333km 떨어진 해상에서 전투를 위한 급유를 실시하였다. 쌍방이 적의 존재를 알고 격돌을 벌이기 위해 링에 오르기 전 주먹을 다듬고 있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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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호해 해전을 위한 양측 함대 전개를 그린 다른 요도



5월 6일 미 기동함대 사령관 플레쳐는 11기동함대와 44 기동함대를 17함대에 흡수하는 방식으로 통합하였다.

그는 일본 함대가 아직도 부겐빌 섬 부근의 북쪽에 있다고 생각하고 미처 급유 받지 못한 함정들에게 급유를 계속 실시하였다.

플레쳐 함대 항모들에서 발진한 정찰기들이 하루 동안 정찰을 실시했지만 아직도 일본 함대를 발견하지 못했다.

실상은 공교롭게도 일본 함대가 미국 정찰기들의 초계 권 바로 밖에서 접근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전 10시 투라기 섬에 방금 설영한 수상기 기지에서 발진한 가와니시 수상 정찰기가 플레쳐 제독의 17 기동함대를 발견하고 사령부에 적함 발견의 급전을 띄었다.

다카키가 투라기 섬을 거쳐 중계한 적함대 발견의 무전 보고를 받은 시각은 11시경이었다. 그 시각 다카기의 함대는 플레쳐 함대로부터 556km 떨어진 곳에서 남진중이었다.

적 함대 출현을 보고를 받았을 때 다카키의 함대는 아직도 급유중으로 전투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다카키는 정찰기가 발견한 것이 플레쳐의 17 기동함대가 남쪽으로 이동 중이라는 사실로서 미 함대들이 일본 함대로부터 멀어지고 있다고 추측했다.

또 이 정찰기는 플레쳐 함대가 항해하고 있던 해상은 낮은 구름이 깔려서 기상이 별로 좋은 상황은 아니었다는 보고에 기초해서 일본 항공기들이 당장 이 미함대를 발견하기는 어려울 것이라 판단했다.

다카키는 다음날 해가 뜨기 직전 공격을 하기로 작전을 세우고 함대의 두 항모에 두 척의 구축함을 붙여서 20노트의 속도로 미 함대 방향으로 파견하였다.

이 시각쯤이면 자기 함대가 모두 급유를 완료할 수 있을 것이라고 계산이 있었다.

한편 호주에 기지를 두고 포트 모르스비 지역에 출격하고 있던 미군의 B-17 폭격기들은 이날 접근하고 있던 고토 제독의 함을 포함한 다른 포트 모르스비 공략 부대를 수 차에 걸쳐서 폭격했었으나 성과는 없었다.

호주에 있던 맥아더 사령부는 플레쳐에게 고토 제독의 포트 모르스비 공략부대의 규모와 위치 그리고 공격했었던 사실들을 비교적 상세히 통보해주었다.

B-17들은 추가해서 17 기동부대에서 787km 북서쪽에서 포트 모르스비 공략 함대를 지원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일본 해군 경항모 쇼호를 발견한 사실도 통보되었다.

5월 6일 저녁 6시, 플레쳐는 급유함 네오쇼에 호위를 붙여 다음 위치로 가도록 명령하고 함대를 이끌고 전속력으로 북서쪽 루이시아데스 섬 방향으로 급항진했다.

그날 밤 8시경. 남동진하고 있던 하라의 기동함대와 북서진하고 있던 미 기동 함대와 거리는 단지 130km 밖에 되지 않을 만큼 상호 접근을 하고 있었지만 양쪽 다 이 사실을 몰랐다.

기동 항모부대장 하라는 급유 작업을 완료하고 먼저 급행시킨 항모부대를 향하여 항진해 오고 있는 다카키와 합류하기 위해서 항해 코스를 되돌려 다카키가 오는 쪽으로 항진했다.

5월 7일 새벽 6시, 플레쳐의 17 항모 부대는 로셀 섬의 남쪽 213km에 도달했다. 이 위치에서 플레쳐는 크레이스의 항모와 구축함들을(이 부대는 이제 17.3 기동부대라는 변경 된 부대명이 부여되었다) 적의 침투가 가능한 조마드 해협 쪽으로 보냈다.

크레이스의 함대가 빠져 버리면 플레쳐 함대는 그만큼 대공 화력 강도가 감소하지만 만약 미 기동 함대가 일본 기동함대와 한판 붙을 경우 포트 모르스비 공략함대가 그냥 기존 계획 항로가 아닌 변경 항로를 택할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그 항로는 조마드 해협일 것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계속된 정보 판단 오류



5월 7일 새벽 6시 19분, 플레쳐는 다카기의 일본 기동함대가 막연하지만 자기들 함대의 북쪽 해상 어느 곳에 있을 것이라 추측하고 항모 요크 타운의 급강하 공격기 SBD 10기에 정찰 임무를 주어 출격시켰다.

그 시각 다카기의 기동부대는 플레쳐의 556km 동쪽에 있었다. 지난 밤 야간에 130km로 가까워졌었던 두 기동 부대는 서로 항해하다보니 또 다시 멀어진 것이다.

다카기의 기동 부대도 미 함대보다 조금 빠른 새벽 6시에 12 기의 97식 수평 공격기를 발진시켜 플레쳐의 함대 수색을 하게 하였다.

플레쳐의 함대가 남쪽에 있을 것이나 정찰기들을 내보내 찾아보자는 항모 부대 지휘관 하라의 건의를 다카기가 받아들였기 때문이었다.

거의 같은 시각에 포트 모르스비 공략 지원 부대 사령관 고토 제독은 중순양함 기누카사와 후루다카로부터 4기의 94식 가와니시 수상 정찰기를 출격시켰다. 일본 해군이 해상 수색을 위해 동원한 항공기는 더 있었다.

데보인 섬에서 수상정찰기들이 총출동하였고 투라기 섬의 수상정찰기 기지에서는 대형 97식 비행정 4기가 출동하였다.

먼 북서쪽의 라바울 기지에서 1식 육상 공격기 1기도 장거리 수색에 동원되었다. 조종사들에게 주어진 임무는 루이시아드스 섬 남동쪽 해역의 수색이었다.

정찰기들을 출격시켜 적 함대를 찾고 있던 미일 양 함대는 적 함대 발견 보고만 들어오면 즉시 출격할 수 있는 완전 무장한 함재 공격대와 전투기들을 대기시켜 놓고 있었다.

아침 7시 22분, 일본 항모 쇼가쿠에서 발진한 정찰기들 중 한 기가 182도 방향, 302km 해상에서 미 항모 부대를 발견하고 ‘적함대 발견’의 긴급 타전을 하였다.

잠시 뒤 연락을 받고 현장으로 달려간 다른 정찰기가 “항모 1,순양함 1,구축함3 발견”의 정찰 보고를 발신하였다. 또 다른 정찰기가 이 보고를 확인시켜주는 발신을 했다.

그러나 쇼가쿠 정찰기들이 발견한 것은 항모가 아니라 플레쳐 함대에게 급유 작업을 끝내고 명령받은 다음 위치로 이동하고 있던 급유함 네오쇼와 호위하던 구축함 심스였다.

급유함을 항모로 오인한 일본 기동부대는 즉시 출격 가능한 함재기를 모두 발진시켰다. 항모 즈이카쿠와 쇼가쿠에서 발진한 공격대의 규모는 모두 78기의 대군이었다.

제로 전투기가 18기, 99식 급강하 공격기가 36기, 97식 수평 공격기가 24기였다. 단 두 척의 미군 함에 지나치게 많은 함재기들이 동원되었다고 하겠다.

그러나 상황은 엉뚱한 방향으로 전개되어 가기 시작했다. 다카키 제독의 함재기들이 항모 추정 미 함대 방향으로 비행하기 시작한지 불과 몇 분 뒤에 고토 제독의 중순양함 후루다카에서 발진한 수상 정찰기가 다른 해상의 위치에서 플레쳐 제독의 항공모함들을 발견했다.

이 긴급한 정보는 즉시 라바울을 경유하여 다카기에게 전송되었다. 10분뒤에 다른 중순양함 기누가사에서 발진한 다른 수상 정찰기가 플레쳐 항모 부대를 발견하여 앞의 보고를 확인시켜주었다.

의심할 여지없는 미 항모 부대의 출현이었다. 그러나 다카기와 하라는 앞서 쇼가쿠에서 발진한 함재기들이 보고했던 것과 고토 함대의 수상정찰기가 큰 차이가 나는 사실에 갈팡질팡하다가 결국은 자기 기동함대 정찰기들이 발견했던 정보가 더 정확하다는 믿음으로 고토 부대가 보낸 미 항모 부대 발견 정보는 묵살하고 미국 급유선으로 가고 있는 함재기들에게 아무 연락도 하지 않았다.

그런 결정을 내리고도 긴가민가한 일본 기동 함대는 항모의 함수를 후루다카가 발견했다는 미 항모의 위치인 북서쪽으로 돌렸다.

일본 항모 지휘부는 미 항모 부대가 두 개로 분산되어 작전 중이라는 오해를 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한편 미 함대의 항모 요크타운에서 출격한 닐슨(John L. Nielsen) 중위는 8시경 포트 모르스비 상륙함대를 호위 중이던 고토 제독의 함대를 발견했다.

그는 암호 전송에 경험이 없어 자기가 발견한 일본 함대를 과장해서 보고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즉 “항모 2, 중순양함 4, 225해리 북서방향‘ 발견이라고 보고했던 것이다.

플레쳐는 이 발신 정보를 그대로 믿고 항모부대의 전 함재기들을 출격시켰다.

18기의 F8F 와일드 캣, 53기의 SBD 급강하 공격기,22기의 TBD 디바스타토 뇌격기들이 출격한 다음 일본 항모부대 보고를 한 닐슨 중위가 착륙하여 자신이 암호 발신에 큰 실수를 한 것을 알고 이를 보고했다.

고토의 부대가 경함모인 쇼호 한 척을 포함하고 있었으나 그는 이 경함모를 보지 못했고 그가 보고하려고 했던 것은 두 척의 항모가 아니라 두 척의 중순양함과 네 척의 구축함이었다.




김창원 | 전사연구가
연세대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시라큐스 경영대학원에서 MBA를 취득했다. 장교로 군 복무, 기갑부대 전차 소대장을 지냈다. ‘울프 독’이라는 필명으로 전사와 역사를 다룬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다. 국방부 정책·정보 블로그(N.A.R.A.)에 기고하고 있으며, 저서로 [공격 마케팅]이 있다


제공

유용원의 군사세계
http://bemil.chosun.com/



발행2013.12.31.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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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력부대가 전진하여 작전이 예상되는 새로운 위치를 주력부대가 도착 또는 점령하기 전에 이를 확보하고 정찰하여 사전에 지역을 편성하기 위하여 부대 대표로 파견된 부대. 주요 임무는 예하부대의 정확한 위치를 지정해 주고 각 부대를 준비된 지역으로 유도하며, 숙영 및 행정시설을 사전 준비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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