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역사 산호해해전 3 - 산호해해전 (3) – 전략적으로 승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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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32회 작성일 16-02-07 0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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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일 기동함대의 2차 결전 회피



양측이 막심한 피해를 입은 이 해전 후에 기묘한 일이 발생했다. 서로 죽기 살기로 전속력으로 마주 달려오던 양측은 호되게 겨룬 전투 후에 서로 등을 돌리고 다른 방향으로 후퇴하는 상황이 발생한 것이 연출 된 것이다.

미군은 17 기동함대의 항공기들을 모두 회수한 플레쳐 제독은 올린 전과와 상황을 분석했다. 귀함한 미 조종사들은 그들이 일본 항모 한 척을 대파시켰지만 한 척은 별로 피해를 입지 않고 도주했다고 보고하였다.

반면에 그의 항모 두 척은 중상을 입고 거의 작전 불능 상태였다. 게다가 출격했었던 함재기들의 손실율도 예상외로 컸다. 급유선 네오쇼의 침몰로 함대 함선의 연료들이 고갈되어 가지만 이에 급유할 방법이 없었다.

항모 사령관 피치(일본 항모 부대장 하라의 카운터 파트너)는 플레쳐에게 무선 감청 결과 두 척의 항모가 증강된다는 정보를 전달하였다.

플레쳐는 이제 제공권은 의심할 바 없이 완전히 일본으로 넘어갔다고 판단했다. 그는 신속한 철수를 결심하였다.

그는 철수와 동시 호주의 맥아더 사령부에 새로 나타났다는 일본 항모들의 추정 위치를 통보하고 장거리 육상 폭격기를 동원하여 이를 공격하도록 건의하였다.

한편 일본 기동함대의 항모 사령관 하라는 기동함대 사령관 다카키에게 함재기들의 전투 소모가 극심하여 그가 현재 운용할 수 있는 함재기는 24기의 제로기, 8기의 99식 급강하 폭격기, 그리고 단 4기의 97식 수평 공격기(뇌격기)만이 운용 가능하다고 보고하였으며 이렇게 격감한 항공력으로는 공격은 무리일 뿐 아니라, 적의 공격을 방어하기도 힘들다고 의견을 개진을 하였다.

상황을 불리하게 하는 또 다른 변수도 있었다. 미군 함대와 같이 일본 함대의 연료 소모도 극심하여 그의 순양함들은 50%의 연료만 남았고 일부 구축함들은 단 20% 만 연료가 남았다고 보고하였다.

일본 함대의 사정을 요약하면 사정은 미 함대와 같아 더 이상의 전투는 무리였다.

다카기는 라바울의 이노우에 사령관에게 두 척의 미 항모 즉 요크 타운과 사라토가 급 항모(렉싱턴)를 격침했지만 함재기의 극심한 소모로 포트 모르스비 공략함대 항공 엄호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고하였다.

이노우에는 오전 일찍 정찰기로부터 포트 모르스비 공략 함대에 접근하고 있던 미 크레이스 제독의 순양함 부대의 출현을 보고받고 공략 함대를 라바울로 철수하도록 이미 지시한바 있었다.

그는 유동적인 전황을 분석한 뒤에 포트 모르스비 공격을 7월 3일로 연기했다. 그 두 달의 연기는 영원한 연기로 되고 말았다.

그는 기존 함대를 다음 작전을 위해 솔로몬 제도 북방에 집결하도록 하고 즈이카쿠는 라바울로, 대파된 쇼가쿠는 수리를 위해 일본으로 귀환시켰다.



항모 렉싱턴의 침몰



렉싱턴의 함내에서는 방재 팀이 불길을 잡아 렉싱턴을 거의 운항 상태로 되돌려 놓았다. 하지만 한숨을 돌렸다고 생각했던 순간, 전기 모터에서 일어난 불꽃이 중앙 관제 센터 부근에서 함내에 퍼진 유증기를 유폭시켰다. 폭발은 25명을 죽이고 큰 화재를 만들었다.

오후 3시경 또 다른 전기 스파크가 큰 폭발을 일으켰다. 폭발은 연속 터졌다. 폭발할 때마다 사상자가 발생했고 화재가 연달아 퍼져 렉싱턴은 이제 떠있는 화로와 같았다.

화재는 통제 불능 상태로 판단되어 17시 07분 총원 퇴함 명령이 발령되었다. 항모 사령관 피치, 렉싱턴 함장 프레데릭 C. 셔만 대령 이하 생존 승조원들이 모두 구조되자 접근한 미 구축함 펠프스가 불덩어리가 되어서 연소하고 있는 렉싱턴에 다섯 발의 어뢰를 발사했다.

어뢰를 맞은 렉싱턴은 19:52분 격침하였다. 함의 본래 승무원 2,951명중 216명이 함과 운명을 같이 하였다. 36기의 항공기도 같이 침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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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발하는 렉싱턴



5월 9일 플레쳐의 17 기동함대는 동쪽으로 코스를 바꾸어서 뉴칼레도니아의 남쪽을 돌아 산호해를 벗어났다. 태평양 함대 사령관 니미츠는 대파된 요크 타운을 재급유 시킨 후 수리를 위해 하와이 진주만으로 급행시켰다.

크레이스의 순양함대는 계속 무선 침묵 상태가 이어지자 플레쳐 제독으로부터 아무 연락도 없음을 알고 17기동 함대가 산호해를 떠난 것을 짐작했다.

게다가 일본 포트 모르스비 공략 함대의 자취가 안보이자 일본 함대도 공격 일정을 연기 또는 취소했다고 보고 5월 10일 오후 1시 크레이스 역시 호주 기지로 철수 길에 올랐다.



야마모토의 오기와 작전 계속 명령



5월 8일 연합 함대들이 철수한 사실을 알게 된 일본함대 사령관 야마모토는 밤늦게 라바울의 이노우에에게 미 함대들을 격멸하고 포트 모르스비 공격임무를 완수하라고 다그치는 명령을 내렸지만 이노우에는 명령에 따르지 않고 포트 모르스비 공략 함대의 철수를 진행하였다.

그러나 다카키와 고토의 기동 함대에게는 그들 함대 함재기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야마모토의 명령대로 미 기동 함대의 잔존 함대를 찾아 격멸하라고 명령하였다.

다카기와 하라는 이 무리한 명령을 받고 하루 밤을 급유함으로부터 급유를 받는 것으로 시간을 다 보내고 아침에야 출동하여 5월 10일 아침내내 산호해를 정찰을 해보았으나 미 함대는 그 흔적을 찾을 수가 없었다.

다카기는 5월 10일 오후에 라바울로 함대의 방향을 돌렸다. 야마모토는 다카키의 철수 결정을 추인하고 라바울에 기항한 항모 즈이카쿠를 일본으로 귀항하도록 명령했다.

그는 이미 이 때 미드웨이 공략전을 구상하고 있었다. 산호해 해전의 마지막 뒷정리는 5월 10일 미 해군의 PBY 비행정이 해상에서 표류하고 있던 급유선 네오쇼와 호위함 심스의 생존자들을 발견함으로 마무리되었다.

침몰 상태의 네오쇼는 마지막 타전에 자기 위치의 좌표를 잘못 알려주어 늦게야 발견 된 것이다. 구난 신호를 받고 현장으로 달려온 구축함 헨리는 109명의 네오쇼 생존자들과 14명의 심스 생존자들을 구조했다.

완파되어 표류하고 있던 네오쇼는 어뢰로 격침했다. 해전이 끝난 뒤 할제 제독의 16 기동함대가 13일 남태평양으로 달려와서 북쪽으로 항해하며 일본 함대를 찾았다.

그러나 일본 해군이 미드웨이 섬의 공략을 준비중이라는 정보를 입수한 니미츠 제독의 긴급 철수 명령을 받고 하와이 진주만으로 되돌아갔다.

할제이 함대는 28일 진주만에 도착해서 일본 함대의 미드웨이 기습에 대비했다. 함체 파손으로 속도가 느려진 요크 타운은 다음 날 오후에 도착하였다.

한편 일본 항모 쇼가쿠도 산호해 해전에서 대파된 상태로 귀항 하다가 태풍을 만나 거의 침몰할 뻔하던 난관을 겪으며 21일에야 일본 구레 항에 기항했다.

전문가들은 쇼카쿠가 수리를 완료하고 손실이 컸던 비행대도 재구성해서 다시 출동하려면 적어도 약 2-3개월이 걸린다고 예측했다.

쇼카쿠와 자매함 즈이카쿠 두 척은 결과적으로 6월 5일의 미드웨이 해전에 참전하지 못해서 일본 함대의 대패에 일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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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손 된 쇼카쿠





산호해 해전의 가치와 교훈



글머리에서 잠깐 언급한바 있었다. 이 해전은 세계 해전사에서 최초로 상대방을 육안으로 보지 않고 싸웠던 해전이었으며 역시 쌍방의 함대가 함포가 아닌 항공기들만을 동원해서 싸웠던 최초의 해전이기도 했다.

적을 육안으로 보지 않고 싸우는 이 해전은 과거의 해전에 비해서 불확실성과 통신의 중요성이 훨씬 컸었다.

1972년 미국 해군 소장 H.S. 더그워스는 산호해의 양측 전사를 분석해보고 5월 7일 산호해 결전장은 세계 역사상 가장 많은 혼동이 지배했던 전장이었다고 언급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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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노우에 중장



현장에서 직접 함대를 지휘했었던 프레처는 상황 파악을 잘해서 임기응변의 판단을 할 수가 있었지만 하지만 먼 라바울에서 지휘를 했었던 이노우에는 그만큼 신속 대응이라는 면에서 느릴 수밖에 없었다.

지휘 통신 분야뿐만 아니라 여러 사실이 산호해 해전에서 밝혀졌다. 일본의 조종사들은 중일 전쟁과 진주만 공격과 그 후 여러 작전에서 경험을 쌓았었기 때문에 미군 조종사들 보다는 숙련도가 높았었다.

비슷한 규모의 항공대가 서로 맞붙은 5월 8일의 전투는 일본 항공대가 훨씬 더 잘 조직된 전투를 하였다.

하지만 일본군은 지나치게 육박하는 전투 기술을 구사해서 조종사 전사율이 아주 높아 미군이 35명의 조종사를 잃은 반면 일본군은 90명의 조종사들을 잃었다. 태평양 기간 이 인적 소모전의 경쟁에서 일본은 미국에게 크게 패했다.

전쟁 전에 일본이 보유하였던 숙련된 조종사의 높은 손실율을 산호해 해전 이후 계속 겪으면서도 인적 보충에 대비가 없었던 일본은 결국 조종사의 손실을 감당하지 못하고 나중에는 미숙련 조종사들을 출격을 내보내야 했는데 이는 산호해에서 그 징조가 보이기 시작했다.

미국은 이 전투에서 레이다를 사용했는데 아직도 초보적인 기술 때문에 절반의 성공만을 거두었다.

그러나 이 경험이 바탕이 되어 레이다의 성능 개발 사업과 사용 방법의 개선이 계속 실행되어 태평양 전쟁 후반기에는 전투의 승리에 필수적인 전쟁 도구로서 활약하였다.



해전 결과의 전술 전략의 분석



해전 후 미일 양국은 서로가 자기들이 승리했다고 발표했었다. 전술적으로 보면 미일 첫 항모의 전투에서 중형항모 한 척을 상실한 미해군이 패배하고 경항모 한 척을 잃은 일본이 승리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한 평가다.

그러나 전략적으로 보면 중요한 전략적 거점인 포트 모르스비를 점령을 거부당한 일본의 패배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견해다.

엉성하게 방어되던 파푸아뉴기니의 포트 모르스비는 일본의 침공 실패 후에 대폭 강화되어 일본군의 남진 정책를 가로막고 저지하는 기지가 되었다.

일본은 이 포트 모르스비를 목의 가시로 생각하고 수차 점령을 시도했지만 실패했었다.

이 포트 모르스비가 일본군에게 입힌 손해는 항모 한 두척 격침의 가치와 비교할 바가 아니다. 마지막으로 결과론적이지만 이 산호해 해전은 일본의 전략에 재앙을 부를 한 씨앗을 잉태시켜 놓고 있었다고 할 수 있겠다.

항모 요크 타운이 대파 되었지만 진주만의 막강한 정비력은 단 열흘만에 요크 타운을 수리해서 미드웨이에 출동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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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급 수리를 마치고 미드웨이 출동을 대기중인 요크 타운



그러나 미군기에 대파된 쇼카쿠는 두 달이 지나서야 수리를 완료하여 미드웨이 해전이 끝난 7월에야 합류를 했다.

만약 일본군의 기동함대가 진주만 공격 때처럼 쇼카쿠와 즈이카쿠를 포함한 항모 6척의 대군으로 미드웨이 작전에 출동했더라면 아무리 행운이 있었다 해도 미 항모 부대가 완승을 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김창원 | 전사연구가
연세대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시라큐스 경영대학원에서 MBA를 취득했다. 장교로 군 복무, 기갑부대 전차 소대장을 지냈다. ‘울프 독’이라는 필명으로 전사와 역사를 다룬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다. 국방부 정책·정보 블로그(N.A.R.A.)에 기고하고 있으며, 저서로 [공격 마케팅]이 있다


제공

유용원의 군사세계
http://bemil.chosun.com/



발행2013.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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