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역사 리의 항복과 전쟁의 결말 - 퇴로가 끊긴 남부연맹, 남은 선택은 항복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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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66회 작성일 16-02-07 0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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셔먼의 최후통첩과 캐롤라이나주의 함락



셔먼의 군이 서배너에 도착했을 때 서배너 외곽 지대에서는 하디(William Hardee) 중장이 지휘하는 1만의 남군 수비 병력이 강력한 방어진을 구축하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서배너로 통하는 길은 진창 투성이의 좁은 소로(小路) 하나밖에 없었다. 군의 기동이 어렵다고 생각한 셔먼은 우회로를 확보하기 위하여 12월 13일에 서배너 남쪽의 맥칼리스터 요새(Fort McAllister)에 대한 공략을 명한다.

수비 병력이 채 400명이 되지 않는 요새를 공격하기 위하여 무려 1개 사단이 동원되었고, 공격을 맡은 미시시피 방면군 15군단 제 2사단은 공격을 시작한 후 채 1시간도 되지 않아 요새를 점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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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칼리스터 요새를 공격하는 미시시피 방면군. 공격을 시작한 지 1시간만에 셔먼의 군대는 요새를 점령하였다.


이로써 셔먼의 군대는 서배너를 측면에서도 공격할 수 있게 됨은 물론, 해군 수송함대로부터 보급품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이 보급 물자 중에는 서배너 포위와 공략에 필요한 중포(重砲)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서배너로 통하는 철로마저 끊어버리고 서배너를 육지와 바다에서 포위한 셔먼은 12월 17일, 하디와 남군 수비병들에게 최후통첩을 보낸다.

최후통첩을 받은 하디는 고민했다. 만약 싸우게 되면 서배너 역시 애틀랜타와 마찬가지로 철저하게 파괴될 것이었다. 그러나 항복한다는 것도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하디는 서배너강(Savannah River) 위에 지푸라기로 다리를 급조한 다음, 12월 20일에 그의 수비병들과 함께 탈출을 감행하였다. 셔먼은 탈출하는 수비병들을 굳이 추격하지 않았다.

도시의 운명이 기울었음을 알게 된 서배너 시장은 다음날 말을 타고 북군 전선으로 나와 주민들의 재산과 생명을 보장받는 조건으로 항복하였다. 서배너가 함락된 것이다.

셔먼은 애틀랜타에서 서배너로 진군하면서 남부의 경제에 중대한 타격을 입혔다. 셔먼의 초토화로 인한 피해는 현재의 화폐가치로 약 15억 달러가 넘었고, 이를 복구하는 데는 10년이 넘는 세월이 걸렸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했다. 애틀랜타와 서배너가 함락되면서 남부가 승리하리라는 희망은 완전히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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셔먼의 군대는 조지아주를 철저히 파괴하였다. 현재의 화폐가치로 약 15억 달러에 달하는 재산 피해가 발생하였고, 남부가 승리하리라는 희망은 완전히 사라졌다.


서부전선이 뚫리고 애틀랜타와 서배너가 함락되면서 이제 남부의 패배는 시간문제였다. 이제 북군은 남부의 수도인 리치먼드를 남북에서 공격할 수 있게 되었다.

남부의 영역 중 텍사스 지역은 거의 전쟁의 피해를 입지 않았지만, 북북의 강력한 수상 전력과 견제 병력으로 인하여 텍사스 쪽에서 원군을 보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서배너가 무너진 후 북군의 진격은 더욱 거침없었다. 1865년 1월 15일, 북군은 노스캐롤라이나 해안에 있는 피셔 요새(Fort Fisher)를 점령하였다.

그리고 이를 발판으로 삼아 동부 해안에 있는 항구도시 윌밍턴(Wilmington, N. Carolina)에 대한 공략을 시작하였다.

한편 1865년 1월 19일, 서배너에 있던 셔먼의 미시시피 방면군 병력 중 6만 명이 노스캐롤라이나 방면으로 북진(北進)을 시작하였다.

셔먼의 목표는 봄이 될 때까지 노스캐롤라이나로 진격하여 그곳에 배치되어 있는 북군 병력과 합류하는 것이었다.

남군은 병력 자원도 떨어져가고 물자도 부족했지만, 이대로 쓰러질 수는 없었다. 2월 3일, 일단의 남군이 북쪽을 향하여 진군하고 있던 미시시피 방면군을 요격하려 하였다.

맥로즈(L. McLaws)의 남군은 1865년 2월 3일에 사우스캐롤라이나로 진입하고 있던 셔먼의 본대를 공격하려 하였으나, 셔먼의 본대와 함께 측면에서 올라오던 북군 블레어(Francis Blair) 소장의 1개 사단 병력에게 협공을 당하면서 공격이 격퇴당하고 북군의 진격을 지연시키려는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채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셔먼의 군은 조지아에서와 마찬가지로 파죽지세로 진격하였고, 2월 17일에 사우스캐롤라이나의 주도인 컬럼비아(Columbia)가 함락된다.

비록 누가 불을 먼저 질렀는가에 대한 논란이 있지만 컬럼비아 역시 애틀랜타와 마찬가지로 대화재로 완전히 파괴되었고, 컬럼비아가 점령됨으로써 고립될 위기에 처한 항구도시 찰스턴(Charleston)의 남군은 스스로 철수하였다.

컬럼비아를 점령한 다음날인 2월 18일, 북군은 컬럼비아에서 철도, 역사(驛舍), 창고, 공장 등 전쟁에 사용될 가능성이 있는 모든 시설을 철저히 파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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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5년 2월 17일, 사우스캐롤라이나의 주도인 컬럼비아 역시 셔먼의 군에 의해 함락되었고 대화재로 철저히 파괴되었다.


2월 22일에는 북군의 포위에 맞서 버티고 있던 노스캐롤라이나의 윌밍턴 역시 함락되었다.

윌밍턴은 남부에 남아 있던 마지막 국제 항구였다. 따라서 그곳의 함락은, 이제 남부가 외부로부터 어떤 지원도 받을 수 없음은 물론 다른 나라로 배를 띄울 수조차 없게 됨을 의미하였다.

2월 중에 사우스캐롤라이나를 종단(縱斷)한 셔먼의 군은 3월에는 노스캐롤라이나에 진입하였다.

노스캐롤라이나에 있던 브래그(Braxton Bragg)의 남군이 셔먼의 군을 막으려고 시도하였지만, 3월 10일에 와이즈-포크의 전투에서 패했다. 패한 브래그의 군은 북쪽으로 후퇴한다.


퇴로가 끊긴 남부, 전쟁의 끝이 보인다



한편 버지니아에서는 그랜트가 목표를 피터스버그로 잡으면서 리는 이동 방어를 포기하고 농성전을 준비해야만 했다.

피터스버그는 수도인 리치먼드와 외부를 이어주는 유일한 항구였고 보급기지였다.

피터스버그가 떨어지면 리치먼드 역시 그 운명이 다하는 것이었고, 이 때문에 남군도 피터스버그의 방어에 필사적이었다.

북군은 계속하여 피터스버그 점령을 위한 공략을 시도해 보았지만 그때마다 남군의 완강한 방어로 실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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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군이 피터스버그를 공략하기 위하여 설치한 공성포(The Dictator). 피터스버그는 남부 수도 리치먼드와 외부를 이어주는 유일한 항구이자 보급기지로, 북군은 공략에 남군은 방어에 필사적일 수밖에 없었다.


피터스버그 공략을 시작할 때, 북부에서는 남군이 의외로 빨리 수비를 포기할 수도 있다는 낙관론이 우세했다.

포위전이란 그 특성상 빨리 끝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지만, 북군은 이러한 낙관론에 힘입어 우세한 병력을 앞세워 바로 피터스버그 공략에 나섰다.

6월 9일에 북군 길모어(Quincy Gillmore) 소장은 1개 사단 병력으로 남군 방어선을 공격해보았으나 보우레가드(P.G.T Beauregard)의 수비 병력에게 격퇴되었다.

6월 15일부터 6월 18일까지 전개된 2차 공격에서는 2개군 무려 6만의 병력이 동원되어 남군의 방어선을 일시에 돌파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3만 5천의 남군은 필사적으로 방어에 임하였고, 북군은 이번에도 1만 2천에 달하는 사상자를 내고 공격에 실패하였다.

남군의 방어가 의외로 완강한 것을 깨달은 그랜트는 포위전을 통해 남군을 굶겨 죽이는 작전으로 전환하였다.

1864년 6월에 시작된 피터스버그 공방전은 그해 가을과 겨울을 넘겨 1865년 3월까지 계속되었다.

연이은 정면공격이 실패로 돌아가자, 6월말과 7월에 북군은 외부에서 피터스버그로 들어오는 철로를 끊는 데 노력을 집중하였다.

북군은 예루살렘 플랭크로드(Jerusalem Plan Road), 스턴톤 리버브릿지(Staunton River bridge), 새포니 처치(Sappony Church), 림즈 스테이션(Ream’s Station) 등에서 남군의 철도망에 기습을 가했다.

기습으로 시작했으나 보급선을 지키려는 남군의 저항으로 인해 전투는 의외로 대규모로 번졌고, 북군은 기습할 때마다 수km씩의 철로를 뜯어냈다.

그렇잖아도 공업 생산력이 저하된 남부는 파괴된 철로를 복구하는 데 몇주씩 걸리고는 하였다.

남군은 철로를 방어하기 위하여 피터스버그 주변에 참호선을 만들었고, 북군의 철로 기습이 늘어나면서 참호선은 점점 길어지기 시작하였다.

북군도 남군의 보급로를 끊는 데 주력하면서 남군의 참호에 맞서 참호선을 구축하였다. 결국 피터스버그는 50km가 넘는 참호로 둘러싸이게 되었다.

이에 북군은 참호선을 돌파하기 위하여 남군의 참호선 밑까지 갱도를 파고 화약을 집어넣어 폭파시키는 작전을 수립하였다.

사실 폭약이 사용된 것이 달랐을 뿐, 성이나 요새의 수비 병력이 완강히 싸울 경우 성벽 밑으로 갱도를 파서 붕괴시키는 작전은 고대부터 공성전에서 흔히 사용되던 것이었다.

그랜트는 일단 7월 28일에 수천의 병력을 리치먼드 방면으로 보내 남군 병력 일부를 유인하여 참호선 수비를 약화시켰다.

그리고 7월 30일 새벽 5시경, 남군 참호선 밑에 묻어놓은 화약 3600kg에 불이 붙었고 대폭발이 일어났다.

이에 남군 병사 수백명이 폭사(爆死)하고 길이 50미터, 넓이 20미터 정도의 폭발구(crater)가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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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군의 참호선 밑으로 갱도를 파고 화약을 집어넣어 폭파시키는 작전을 실행 중인 북군. 이는 고대부터 공성전에서 흔히 사용되던 작전으로, 북군 역시 이 작전을 통한 승리를 예상했다.


남군의 참호선을 돌파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으나, 작전은 대실패로 끝났다.

원래 폭발구 돌파는 페레로(E. Ferrero) 준장 휘하의 흑인 부대가 맡기로 되어 있었는데, 미드(George G. Meade)가 흑인 부대가 실패하고 대규모 사상자가 발생할 경우 정치적인 부담이 너무 커진다는 이유로 그랜트에게 건의하여 마지막에 부대를 교체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새로이 투입된 레들리(James Ledlie) 준장의 사단은 작전에 대하여 아무런 설명도 받지 못한 채 곧장 돌파 작전에 투입되었다.

원래 작전은 폭발구 가장자리를 따라 전진하여 무너진 참호의 후방으로 돌입하는 것이었는데, 레들리의 병사들은 폭발구 안으로 그대로 들어갔고 참호선 뒤에 몰려든 남군 병력으로부터 집중사격을 받았다.

오도가도 못하는 북군 병력들은 남군의 사격에 무참히 쓰러졌다. 레들리의 병사들을 구출하기 위하여 페레로의 흑인 병사들이 뒤늦게 투입되었으나 이들도 같은 꼴을 당했다.

일부 병력은 참호선을 돌파하여 남군의 제 2 방어선 일부를 점령하였으나 병력이 많지 않아 남군의 예비 병력에 격퇴당했다.

9천의 병력이 동원된 북군의 야심찬 돌파 계획은 4천의 사상자만을 남긴 채 참담한 실패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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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4년 7월 30일, 폭파 작전 이후 생긴 폭발구로 진격하는 북군 병력. 9천의 병력이 동원된 야심찬 돌파 계획은 그러나 4천의 사상자만을 남긴 채 참담한 실패로 돌아갔다.


비록 북군의 대공세를 격퇴하기는 했지만 남군의 상황이 나아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남군은 병력의 손실을 메꾸는 것이 불가능했지만 북군은 신병들이 계속 보충되었다.

북군은 8월에 피터스버그의 철도에 대한 공격을 개시하여 남쪽에서 들어오는 웰든(Weldon) 철도를 봉쇄하였다.

9월과 10월에는 각각 채핀스-팜(Chaffin’s Farm)와 피블즈-팜(Peeble’s Farm)에서 북군이 승리하면서 피터스버그 남동쪽의 도로도 봉쇄되었다.

10월 말에는 보이튼 플랭크-로드(Boydton Plank Road)에서 북군의 도로 봉쇄 시도를 저지하면서 남군이 간신히 외부와의 연락 통로를 유지하였으나 1865년 2월의 해처스-런(Hatcher’s Run) 전투로 남군 참호선 일부가 점령당하며 남군은 거의 완전히 포위되었다.

3월에 이르자 보급 물자가 바닥난 남군은 막다른 골목에 몰렸다. 리치먼드와 피터스버그를 수비하고 있는 병력 5만 5천은 제대로 먹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거의 악으로 버티고 있었다.

이에 비하여 포위를 하고 있는 북군 병력은 12만 5천에 달했고, 셰넌도어 초토화 작전을 마친 셰리든의 5만 병력 또한 그랜트의 병력과 합류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조지아를 불태운 셔먼의 병력도 사우스캐롤라이나를 돌파하고 버지니아의 턱밑인 노스캐롤라이나로 진입하였다.

3월 25일, 남군 수비 병력은 포트-스테드먼에 병력을 집중하여 포위망을 돌파하려고 하였으나 4천의 사상자만 내고 실패하였다.

설상가상으로 셔먼의 군은 노스캐롤라이나를 돌파하고 남부 버지니아까지 진격해왔다. 셰리든의 군도 피터스버그 인근까지 접근하였다.

피켓(George Pickett)의 남군이 4월 1일에 파이브 포크스(Five Forks)에서 셰리든의 군을 막으려 시도하였으나 피켓이 식사하러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셰리든의 병력이 돌격하면서 남군은 지리멸렬되었다.

사실 피터스버그의 남군에게 있어 가장 좋은 선택은 남쪽으로 후퇴하여 노스캐롤라이나의 병력과 합류하는 것이었는데 파이브 포크스의 패배로 이마저도 불가능하게 되었다.

이로써 남군은 마지막 남은 퇴로마저 끊겼다. 4월 2일에 북군의 총공격이 이어졌고, 피터스버그는 함락 위기에 몰렸다.

결국 리는 4월 2일에 남은 병력을 수습하여 서쪽으로 빠져나왔고 피터스버그와 리치먼드의 수비를 사실상 포기하였다.

북군은 4월 3일 오전에 피터스버그를, 그리고 오후에는 남부의 수도였던 리치먼드를 점령한다.


남부의 명장 리, 항복하다



수도 리치먼드가 함락되면서 남부는 무너졌다. 다만 리와 존스턴의 야전군이 아직도 싸우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항복을 하지 않았다 뿐이지, 전쟁은 실질적으로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리 또한 휘하 병사들의 사기 저하를 막고 혹시라도 보다 유리한 조건하에서 항복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버티고 있었을 뿐, 이미 승리의 가능성이 전무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리는 노스캐롤라이나에서 버티고 있는 존슨의 군과 합류해야만 그나마 전투를 지속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군을 서쪽 방향으로 돌렸다.

남쪽으로 가는 길은 벌써 셰리든 휘하의 북군 기병대가 막고 있었기에 일단 북군을 우회하여 남쪽으로 갈 계획이었다.

여기에는 남군 병참감으로부터 서쪽에 있는 팜빌(Farmville)이란 마을에 대규모로 군량을 가져다 놓을 것이라는 연락을 받고 식량을 확보하려는 이유도 있었다.

북군은 후퇴하는 남군을 맹렬히 추격했다. 셰리든의 부대는 세일러즈-크릭(Sailor’s Creek)에서 남군 이웰(Richard Ewell)의 1만 8천 병력을 따라잡아 그 퇴로를 가로막았다.

이웰은 갈 길을 가로막는 북군 진영을 돌파하려 하였으나 북군 기병과 포병의 합동 공격에 군이 무너지고 거의 8천의 병력이 포로로 잡히는 대패를 당한다.

나머지 남군 병력은 인근의 아포맷톡스강(Appomattox River)을 건너 남쪽으로 가려고 하였으나 이곳 역시 북부의 대군에 의하여 가로막힌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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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포맷톡스 전투 상황도. 붉은 색이 리가 이끄는 남군, 푸른색이 그랜트가 이끄는 북군의 이동 경로이다. 이 전투로 남북 전쟁은 실질적으로 종결된다. <출처: (cc) Hlj at en.wikipedia.org>


하이-브릿지(High Bridge)와 아포맷톡스 스테이션(Appomattox Station)에서 남군은 돌파를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아포맷톡스 전투에서 북군의 승리를 이끈 것은 이후 리틀 빅혼 전투에서 인디언 부대에게 대패하는 커스터(George Armstrong Custer)였다.

한때 남부 최대의 야전군이었던 북부 버지니아군(Confederate Army of Northern Virginia)은 이제 3만명밖에 남지 않았고, 그나마도 식량과 탄약이 부족하여 얼마나 버틸지 알 수 없었다.

게다가 그랜트의 본대까지 아포맷톡스 인근에 도착하면서 북부 버지니아군을 포위한 북군은 10만을 넘어섰다.

전투는 다음날 아침까지 계속되었지만 롱스트리트(James Longstreet)와 존 고든(John Gorden)은 더 이상 북군을 상대로 앞으로 나가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보고했다.

리와 리의 부대에게는 이제 북군을 우회하기는커녕 탈출의 가능성마저 사라져 버렸다. 리에게 남은 선택은 항복밖에 없어보였다.

리가 항복을 고민하고 있던 차에 그의 부관인 알렉산더(Porter Alexander) 준장이 하나의 대안을 내놓는다.

항복하는 대신 병사들을 “토끼와 메추라기처럼 흩어지게(scatter like rabbits and partridges)” 하자는 것이었다.

싸울 수 있는 병사의 수가 여전히 1만이 넘으니, 그들이 아직도 북군의 손이 닿지 않는 벽지와 시골로 흩어져 게릴라전을 전개함으로써 북군을 지치게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어찌 보면 솔깃한 제안이었지만 수많은 전투에서 남군을 승리로 이끌었던 명장 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1만 명의 병사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네. 내가 귀관의 말을 받아들인다고 가정을 해보세.

그 병사들에게는 군량도 없을 것이고 따라서 그들의 기강을 유지할 수도 없네.

그들은 결국 약탈하고 도적질을 해야 하겠지. 그러면 이 땅은 무법자들로 뒤덮이게 될 것이야.

사회는 혼란스러울 것이고 그 상황을 복구하느라 또 여러 해를 허비해야 할 것이네.

아울러 적들의 기병대가 그들을 뒤쫓을 것이고 추격병들이 이르는 곳마다 또 다시 약탈과 파괴가 이어질 것이라네.




따라서 자네의 제안을 거부하는 바이네. 우리는 연맹(Confederacy)이 패했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하네.

우리 병사들은 아무 말없이 하루 빨리 고향으로 돌아가 곡식을 심고 전쟁의 상처를 치유해야 할 것이야.

자네와 같은 젊은이들은 숨어서 싸울 수도 있겠지만 본관에게 남은 길은 단 하나, 항복을 하고 그 결과를 받아들이는 것뿐이라네.”

리는 이미 패한 마당에 게릴라전으로 전쟁을 연장시키는 것은 더 큰 사회적 혼란을 가져올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실제로 그는 전쟁이 끝난 후 남부 곳곳을 다니면서 남부인들이게 연방정부에 대한 적개심을 접고 전쟁의 결과를 받아들일 것이라고 설득하여 남부의 여론을 무마하는 데 적지 않은 역할을 하였다. 항복하기로 마음을 정한 리는 그랜트에게 사절을 보내 만날 곳을 조율하였다. 사령관들이 조우할 곳을 찾던 사절들은 첫 번째 장소가 너무 낡았다는 이유로 거절하고, 큰 도로변에 있는 윌머 맥클린(Wilmer MacLean)의 저택을 만남의 장소로 정했다.

만날 장소가 결정되자 리는 예법을 중시하는 군인답게 깨끗한 정복으로 갈아입고 허리띠까지 둘렀다.

반면 그랜트는 전장에서 달려온 모습 그대로였다. 장화는 진흙투성이였고 셔츠는 풀어헤친 상태였다.

만남 직후, 두 사람은 잠시 주위를 물리치고 미국-멕시코 전쟁(1846~1848)에서 동료로서 같이 싸우던 시절을 이야기하며 감회에 젖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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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군의 항복을 위하여 만난 그랜트(왼쪽)과 리(오른쪽).


이미 승리가 굳어진 마당에 그랜트는 미합중국 야전군의 총사령관으로서 자신이 베풀 수 있는 최대의 아량을 베풀었다.

법대로 하자면 남군 병사들은 모두 반란군으로서 포로가 되고 군사재판을 기다려야 했지만, 그랜트는 지휘관급 장성들을 사면하였고 해당 장성들은 휘하 장교들과 장병들에게 사면을 내림으로서 처벌을 면하게 하였다.

장교들은 권총을 휴대하고 말을 탄 채 귀가할 수 있게 되었다. 사병들 역시 미합중국 정부의 권위에 반항하지 않는 한 연방군으로부터 어떠한 제제도 받지 않고 귀향하는 것이 허락되었다.

1865년 4월 10일, 리는 휘하 장교와 장병들에게 이별을 고하였고, 4월 12일에는 항복문서에 서명했다.

2만 8천의 북부 버지니아군 장병들은 개인화기를 하나 둘씩 반납하였고 대신 넉넉한 군량을 지급받았다.

그리고 게티즈버그 리틀 라운드 톱에서 남군과 싸웠던 채임벌린(Joshua Chamberlain) 준장은 떠나는 남군을 향하여 경례를 하면서 그동안 싸운 적에게 예를 표했다.

이리하여 남군의 항복식은 아무런 소란 없이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사실 모든 것이 순조로웠던 것은 아니다. 공식적인 항복에 앞서 4월 9일에 항복에 관한 제반 논의를 마치고 리가 맥클린 저택을 떠나고 있을 때, 북군의 일부 병사들과 장교들은 승리감에 도취되어 환호작약하며 승전을 축하하였다.

그랜트는 그들을 제지하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제 그만하게. 반란군들은 다시 우리 동포가 되었어.”


남북 전쟁이 남긴 것



아포맷톡스에서 리의 항복이 모든 전투를 종결시킨 것은 아니었다. 리의 항복 선언은 엄연히 말하자면 주력군이기는 하지만 남부의 한 개 야전군의 항복에 불과했다.

아직도 18만 명의 남군이 무장해제되지 않은 채 싸우고 있었으며, 그해 4월 15일에는 링컨 대통령이 암살당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이미 남부의 패배는 기정사실이었다. 노스캐롤라이나에 있던 남부연맹 남부군(Confederate Army of the South)은 남부의 야전군 중 최대 규모였는데, 그 사령관인 존스턴 대장 역시 패배를 인정하고 4월 26일에 노스캐롤라이나주 더럼(Durham)에 있는 베넷농장(Bennett’s Farm)에서 북부 미시시피 방면군 사령관 셔먼에게 항복하였다.

한때 남부 출신의 존 윌크스 부스(John Wilkes Booth)에 의한 링컨 암살에 화가 난 워싱턴 정부가 셔먼이 제시한 항복 조건을 거부하고 존스턴의 항복을 받아들이지 않아 항복 과정은 난항을 겪었다.

남부 주정부 재구성에 대한 조건을 워싱턴 정부가 받아들이지 않자 존스턴과 같이 있던 남부 대통령 데이비스는 존스턴에게 보병대는 해산하고 기병대를 이끌고 탈출할 것을 제안하였으나 존스턴은 데이비스의 명령을 거부하고 항복문서에 서명하였다.

남부연맹 남부군이 항복하면서 존스턴이 관장하던 테네시-조지아 군관구, 테네시군, 사우스캐롤라이나-조지아-플로리다 군관구, 그리고 노스캐롤라이나-남부 버지니아 군관구가 모두 미합중국에 항복하였다. 데이비스는 거의 단신으로 탈출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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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스턴이 북군 셔먼에게 항복한 베넷 농장. 노스캐롤라이나주 더럼에 위치하고 있다. <출처: (cc) Ildar Sagdejev at en.wikipedia.org>


남군의 항복은 계속되었다. 5월 4일에는 앨라배마에 있던 테일러(Richard Taylor)와 포레스트(Nathan Bedford Forrest)의 부대가 항복하였다.

남부 대통령 데이비스는 5월 5일에 마지막 ‘국무회의’를 주재하고 달아나다가 5월 10일 자신을 따르던 병사들과 함께 조지아주 아브빌(Abbeville, Georgia)에서 체포되었다.

5월 11일과 12일에는 아칸소와 조지아에 잔류해 있던 남군 병력이 항복하였고, 5월 26일에는 텍사스의 남군이 모두 항복하였으며, 마지막 남부의 군관구이던 미시시피 군관구와 그 사령관인 스미스(Edmund Kirby Smith)가 항복하면서 남부의 항복 과정이 모두 종결되었다.

이로써 피비린내 나는 4년간의 전쟁이 종결되었다. 남북 전쟁은 기본적으로 내전(內戰)이었다.

전쟁 중 가장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는 전쟁은 내전이라는 사실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남북 전쟁에서의 전사자만 22만에 달하였고, 전투와 관련하여 사망한 병사들의 총수는 60만이 넘었다.

미국이 참여한 해외 그 어떠한 전쟁에서(심지어 2차 세계대전도) 60만의 사망자가 발생한 전쟁은 없다.

비록 남부가 재건되기는 하였지만, 북부와 남부 사이에는 감정의 골이 깊이 패였다. 흑인들 또한 해방되었지만, 남부주들은 각종 차별법을 통해 흑인들의 민권을 제한하였으며 연방정부는 타협의 일환으로 남부주들의 차별적인 법을 묵인하였다.

결국 흑인들은 100년이 지난 1960년대에나 가서야 완전한 민권을 획득하게 된다.

미국을 하나로 만들기 위하여 많은 희생이 따랐고, 많은 사회적 갈등이 해결되지 않은 채로 남았으며, 전쟁에서 싸운 많은 사람들에게도 육체적ㆍ정신적으로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북부를 승리로 이끈 주역 중의 한 명인 셔먼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전쟁에 진절머리가 난다. 전쟁의 영광이란 것은 다 헛소리다. 적들의 피를 요구하고 복수와 파괴를 외치는 놈들은 모조리 총 한번 쏘아본 일도 없거나 부상자들의 절규와 신음을 들어본 일도 없는 작자들이다. 전쟁은 지옥일 뿐이다.”


“I am tired and sick of war. Its glory is all moonshine. It is only those who have neither fired a shot nor heard the shrieks and groans of the wounded who cry aloud for blood, for vengeance, for desolation. War is hell.”

그러나 엄청난 희생의 결과로 미국은 다시 하나가 되었다. 만약 미국이 둘로 나뉘었으면 그 후의 역사는 어찌되었을지 모르지만, 현재 미합중국이라는 강대국은 존재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참고문헌〈단행본〉


  • Iver Bernstein, [The New York City Draft Riots: Their Significance for American Society and Politics in the Age of the Civil War]
  • Benjamin Franklin Cooling, [Counterthrust: From the Peninsula to the Antietam]
  • John William Draper, [History of the American Civil War]
  • Joseph E. Johnston, [Narrative of Military Operations during the Civil War]
  • James M. MacPherson, [Battle Cry of Freedom: The Civil War Era]
  • Louis P. Masur, [The Civil War: A Concise History]
  • William T. Sherman, [Memoirs of General William T. Sherman]

 


 




참고문헌〈인터넷〉




김성남 | 안보·전쟁사 전문가
글쓴이 김성남은 전쟁이 인간 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관심을 가지고 이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미국 UC 버클리 동양학과를 졸업한 후 연세대학교 국제대학원에서 국제학 석사를 받고 한국학중앙연구원 정치학과에 진학하여 정치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주요 저서로는 [전쟁으로 보는 한국사], [전쟁으로 보는 삼국지], [전쟁 세계사] 등이 있으며 공저로 [4세대 전쟁]이, 역서로 [원시전쟁: 평화로움으로 조작된 인간의 원초적인 역사]가 있다.


발행2013.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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