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역사 두리틀공습 - 두리틀 공습 – 진주만의 보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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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517회 작성일 16-02-07 0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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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모 호넷 갑판에 적재된 두리틀 폭격대 B-25



두리틀 공습은 1942년 4월 18일 일본에 접근한 미 해군 항공모함에서 출격한 미 육군 항공대 쌍발 폭격기 B-25가 일본 도쿄와 요코스카, 고베, 나고야 등 일본 도시를 폭격하고 중국으로 탈출한 공습 작전을 말한다.

‘도쿄 공습’ 또는 폭격대 지휘관 이름을 따서 ‘두리틀 공습’이라고 칭한다.





이 폭격 작전은 1941년 12월 7일 일본의 진주만 폭격에 분노한 국민들의 복수심을 잘 읽고 있던 루스벨트 대통령이 진주만 기습 2주 뒤인 1941년 12월 21일, 백악관 합참 회의에서 진주만 피습의 복수를 하고 국민들의 사기를 진작하기 위해서 일본 본토 공습을 단행하라고 지시함으로써 발동이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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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넷 함상의 두리틀 폭격대원들





로 대령의 육상 쌍발 폭격기 항모 발진 건의



육군의 육중한 쌍발 폭격기들을 해군 항공모함에 적재하고 일본에 접근하여 타격을 가한다는 구상은 대잠수함전 본부 참모부장 프랜시스 로 대령이 최초로 제시하였다.

그는 항모 호넷을 확인하고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확신했다. 해군의 단발 함재기들과는 비교가 안 되게 긴 항속 능력을 가진 육상 쌍발 폭격기들을 항모에 싣고 일본의 방공망에서 먼 해역에서 출격시켜 본토를 기습 폭격을 해보자는 아이디어였다

로 대령은 1942년 1월 10일 자기의 구상을 어네스트 킹(Ernest J. King) 제독에게 건의했다.

이 안은 약간의 검토를 거쳐 우선 그 아이디어가 가능한지 먼저 시험부터 해보자는 쪽으로 시작이 되었다.

버지니아 주 노포크 기지에서 항모 비행갑판 크기의 표시를 한 활주로에서 쌍발 폭격기 이륙을 몇 번 거듭해보자 그 작전의 성공가능성이 엿보였다.

육상 폭격기를 사용하는 작전은 구상 단계에서 실행 단계로 들어서서 상부로부터 추진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작전의 대략적인 구성은 일본에 접근한 항모에서 폭격기들을 출격시켜 일본을 폭격하고 중국 남부로 비행하여 착륙한다는 것이었다(항모 귀함 착륙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일본 본토 폭격대 대장은 민간인 시절 유명한 항공 경주인(20~30년대에는 항공기 경주가 유행 했었다.)이었고 미국 명문 MIT의 항공공학 박사 학위 소지자였던 제임스 두리틀(James H. Doolittle) 중령이 임명되었다.

지휘관이 결정되고 동원할 기종의 검토가 뒤따랐고 여러 단계를 걸쳐 B-26과 B-25가 최종 후보로 남았다.

작전 후보기로서 두 기는 각각 장단점들이 있었으나 결국은 이륙거리가 더 짧다는 장점이 있던 노스 아메리칸사의B-25가 결정되었다.

일본 본토 폭격대를 운용할 승무원들을 선발할 부대로서 17 폭격 비행단이 선정되었다.

이 부대는 최초로 중(中)폭격기를 배치 받은 비행단이었으며 최초로 B-25를 인수받은 비행단으로서 B-25에 대한 경험이 가장 풍부하게 축적된 부대였다.



선발대원의 훈련과 항공기 개조



17 폭격 비행단은 오레곤 주의 펜들턴 기지에서 태평양 대잠(對潛) 초계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는데 극비의 일본 폭격 임무가 부여되자 사우스 캐롤라이나 콜럼부스로 이동하여 준비에 들어갔다.

승무원들은 고도의 위험성이 있는 작전에 참가할 지원자를 뽑는다는 충분한 설명을 듣고 지원한 승무원들 중에서 선발하였다.

일본 본토 습격에 20 기가 필요할 것으로 예측되었지만 여유 있게 24기를 특별 임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개조에 착수 했다.

목표는 기존의 B-25에서 최대의 항속거리가 나오게 하는 것이었다. 무게를 줄이기 위해서 불필요한 장비를 제거하고 여분의 연료 탱크가 기체의 공간이 나오는 부분마다 설치되었다.

그 결과 B-25의 연료 공급 능력은 646 갤런에서 1,141갤런으로 대폭 확장되었다. 개조를 마친 24기는 3월 1일에 플로리다의 엘진 기지로 이동했다.

여기서 대원들은 해군이 파견한 해군 비행사 헨리 밀러 대위로부터 3주간 항모 비행갑판 크기의 이륙 활주로에서 이륙하는 교육을 받았다.

이후 1942 3월 25일 사고로 임무에서 배제된 몇 기를 제외한 22기의 B-25가 엘진 기지를 떠나 켈리포니아의 맥크레란 기지로 이동하였고 이틀 뒤에는 최종 마감 개조를 위해 맥크레란 기지로부터 세크라멘토 해군 비행기 물류창으로 이동하였다.

최종적으로 기체 결함이나 고장 등의 정비문제로서 6기가 제외되고 16기가 남았다. 16기의 폭격기들은 3월 31일 캘리포니아 알라메다 기지로 이동하여 함상 적재의 준비를 마쳤다.

15기의 함재기가 출격기가 될 것이고 1기가 예비기였다. 4월 1일 미 해군 알라메다 항공기지에서 16기의 폭격기는 크레인으로 호넷의 갑판으로 옮겨 적재되었다.

조종사, 정비원, 무장병등 71명의 장교들과 103명의 육군 항공대 부사관, 사병들이 승함하였다.



폭격기의 무장



출격하는 각 폭격기들은 500파운드의 폭탄 네 발씩을 장비했다. 세 발은 통상의 고폭탄이지만 한 발은 긴 튜브 형태 소이봉[燒夷棒]들의 집속탄이었다.

투하하면 산탄(散彈)으로 흩어져 낙하되어 광정면에 화재가 일게 하였다.

폭격기들의 기총 무장은 기체 상부에 있는 2정의 50구경 기관총과 기수에 있던 30구경 기관총은 그대로 유지되었지만 후미의 50구경 기관총들은 제거되고 대신 모양만 비슷한 모의 기관총들이 설치했다.

기체 무게를 줄이고 연료 탱크 공간 확보를 하여 항속 거리를 늘리기 위한 목적으로 기관총을 제거 했던 것이다.



기습 항모부대 출동



항모 호넷과 순양함 3척, 구축함 3 척의 18기동 함대는 1942년 4월 2일 10시경 샌프란시스코를 떠나 하와이 북방 해역으로 직행했다.

이곳에서 홀지 제독의 항모 엔터프라이스와, 그 호위를 하는 순양함 2척과 구축함 4척들과 합류하였다.

항모 호넷은 갑판을 꽉 채운 B-25 폭격기들 때문에 유사시 자기 방어를 할 수가 없어서 엔터프라이스가 동행하는 것이었다.

두 개의 기동 함대가 합쳐 연합한 일본 기습 함대는 두 척의 항모와 세 척의 순양함, 1척의 경순양함, 8척의 구축함으로 편성되었다.

함대는 무선 침묵을 지키고 일본이 있는 서쪽으로 항해했다. 4월 17일 함대는 급유선으로부터 급유를 받고 급유선에 구축함 호위를 붙여 미국 쪽으로 돌려보냈다.

속도가 느린 급유선을 떼어낸 함대는 이때부터 20노트의 고속으로 일본 쪽을 향하여 급행했다.



발각된 미 기동부대



하지만 미 함대는 예상치 못하게 동쪽에 전진시킨 초계선과 조우했다. 4월 18일 새벽, 항모 엔터프라이즈에서 발진한 SBD 폭격기는 함대 진행 방향 8Okm 전방에서 일본의 특설 감시정 제 23 이토마루(第二十三日東丸)를 발견했다.

이 75톤의 감시정은 전신이 가다랭이를 잡던 어선이었다. 일본 해군은 초계 전문 구로시오(黑潮)부대를 창설했었다.

구로시오 부대는 쓸 만한 어선들을 징발해서 무전기와 기관총을 장치하는 등의 개조를 하고 특설 감시정으로 변신시켰다.

배는 해군 요원들과 일반 선원들이 혼성 운용됐었다. 그런 징발선 22척이 일본의 먼 동쪽 태평양 한가운데에 남북으로 초계선을 형성하고 있었다.

미군기는 니토마루를 즉각 공격했으나 니토마루는 이를 피했다. 순양함 내슈빌이 달려와 추격하면서 포격하였다.

그러나 해군 병조장(상사)가 정장인 니토마루는 해군기의 공습과 순양함 네슈빌의 치열한 6인치 포격을 이리저리 피하는 교묘한 조함(操艦)운동으로 미군을 애먹였다.

내슈빌은 이 70톤의 일본 초계정을 격침하는데 무려 915발의 포탄을 발사하여 격침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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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몰하는 제 23 니토마루



초계정의 정장은 포로가 되기를 거부하고 자결하였다. 14명의 승조원중에 다섯 명이 구조되었다(일본 기록에 의하면 구조를 거부하고 죽었다고 했는데 항복을 금기시하는 일본의 문화는 이런 식의 왜곡 발표를 많이 하였다).

니토마루는 본부에 여러 번의 적함이 출현했다는 무선을 보냈다. 마지막 송신은 ‘적 항모 2척, 구축함 3척 발견‘이었다.

23 니토마루를 남북으로 연결하여 초계선이 설치되어 있다는 것을 파악한 미 해군 SBD 폭격기들과 와일드캣 전투기들은 남북을 뒤져 발견되는 일본 감시정들을 파괴하였다.

해상에서 내슈빌의 수색 활동도 있었다. 합계 다섯 척의 일본 감시정들이 미군기와 순양함 내슈빌에게 격침당하고 22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내슈빌은 나카토마루라는 초계정을 발견하고 한 시간이나 추격하면서 6인치 포탄 102발과 5인치 포탄 63발로 격침시켰다. 승조원 9명은 사망했다.

아무리 대형의 거포라 하더라도 대피 기동을 하는 작은 함선을 명중시킨다는 것은 쉽지가 않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사례이다.

항모 호넷이 일본 감시정에게 발견된 위치는 항공기를 발진시킬 예정 위치보다 310km나 못 미친 지점이고 시각이 열 시간이나 빠른 순간이었다.

그러나 함대가 발견된 이상 이대로 간다면 기습의 효과는 다 사라져 버릴 것이다.



폭격대의 조기 비상 출격



두리틀 중령은 호넷 함장과 의론하고 즉시 출격할 것을 홀지(William F. Halsey) 사령관에게 건의하고 재가를 받았다.

폭격대는 이륙 준비에 돌입했다. 두리틀을 포함에서 B-25 폭격기 조종수들 중에 아무도 이동하는 항모에서 이륙한 경험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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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급출격 준비를 하는 폭격대원들



16번기는 원래 비좁은 함상에 육군이 억지로 집어넣은 예비기였다.

일본으로 출격하지는 않고 관측이나 출격 장면의 촬영등의 임무들을 수행하기로 했지만 두리틀은 기습의 효과가 줄어든 이상 폭격의 성공률을 높이기 위해 출격하라는 결정을 내렸다.

16번째 기는 급히 폭장[爆裝]을 하였다(16번 기의 기장 파로 중위는 안했을 지도 모르는 출격을 하게 되어 일본군에게 포로가 되어 총살되었다. 참 기구한 운명이라 아니할 수 없다).

모든 B-25폭격기들은 08:20에서 09:19 사이에 이상 없이 출격을 완료하였다. 이 역사적인 출격 장면은 헐리우드 역사에 명감독으로 날리게 되는 존 포드 감독이 촬영했다.

폭격기들을 이륙시킨 기동 부대는 지체하지 않고 함수를 180도 반전하여 전속력으로 동쪽으로 철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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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주하는 두리틀대의 B-25 폭격기



그러나 미 기동 부대의 사령관 홀지 제독은 큰 실수를 저질렀다. 이 실수는 미 해군 전사에서 잘 기록되지 않은 실수였다.

즉 홀지 제독은 두리틀의 폭격대가 예정보다 10시간이나 이르게 출격했다는 사실을 본부에 타전하지 않았다.

아마도 무선 감청으로 일본 기동 부대나 잠수함 등에 함대의 위치를 추적당해 위기에 처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으로 생각되지만 하여튼 그의 조기 출격 사실을 타전하지 않았던 결과는 결국 두리틀 폭격대에게 참담한 결과를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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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함하는 B-25 폭격기



무사히 이함(離艦)한 B-25 폭격기들은 삼삼오오 편대를 짓고 날다가 일본 청음기 가청(可聽)해역에 들어서자 고도를 해면에 가깝게 내리고 한 줄로 비행 대열을 만들어 일본을 향하여 비행하여 갔다(당시 일본은 레이다가 없었고 비행기 폭음을 잡는 거대한 나팔 같은 청음기로 내습 항공기들을 탐지하는 부대를 운용하였다).

B-25 폭격기들이 항모를 출발한지 다섯 시간 만에 조종사들의 시야에 일본의 해안선이 멀리 나타나기 시작했다. 하늘에는 염려했었던 적의 요격기가 한 대도 나타나지 않았다. 완전한 기습이었다.



일본의 판단 실수와 무대응



일본은 니토마루가 침몰직전 타전한 미 기동함대 출현의 정보를 접수하고 긴장했다. 일본은 즉시 초계기를 발진시키고 함대와 항공대에 경계령을 발령하는 등 부산하게 응전 준비를 했다.

그리고 인도양 실론 공격을 성공적으로 완료하고 귀국길에 올라 타이완 근해를 지나오는 나구모 기동 부대에게 서태평양쪽에 미군 항모부대가 나타났으니 영격하라고 명령했다.

그런 부산한 대비는 잘못 판단한 변수가 한 가지가 들어있었다. 즉 미군 항모에서 발진할 일본 본토 공격기들은 모두 항속 거리가 짧은 단발 함재기일 것이라 생각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미 기동부대는 일본에 바짝 접근해서 다음날 아침에나 공격기들을 발진시킬 것으로 알고 있었던 것이고 따라서 공격은 내일 아침이나 있을 것으로 속단하고 있었던 것이다.

23 니토마루가 적 함대 발견의 급전을 보낸 그 날은 아무런 방공 태세가 없었다.

일본의 육해군 간부 어느 누구도 항속 거리가 긴 육상 쌍발기가 항모에서 발진할 수 있다는 상상을 하지 못했다.

일본 육군과 해군이 책상 위에서만 부산을 떨고 있던 시간에 저공으로 미군 B-25기들이 들이닥쳤다.



기습 성공한 두리틀 폭격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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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표 상공에 진입한 B-25.



두리틀의 공격대 B-25 폭격기들은 출격한지 6시간만인 정오경에 각기 일본 목표 상공에 진입하기 시작했다.

폭격기들의 폭격 목표는 주로 도쿄 지역에 집중되었으나 일본인들에게 주는 심리적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서 넓은 지역에 산개하여 여러 목표들을 폭격하였다.

폭격 목표들은 도쿄에 열 개, 요코하마에 두 개, 그리고 요코스카와 나고야, 고베 나고야등에 폭격 임무가 부여되었다1).

일본 전사는 폭격 받은 도시가 도쿄시[東京]市、가와사키시[川崎]市、
요쿄스카[横須賀]市、나고야[名古屋]市 요카이치[四日市]市、
고베[神戸]]市로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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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12시 15분에 도쿄 지역의 목표에 첫 폭탄 투하가 있었다. 두리틀 중령이 가한 폭격이었다.

도쿄의 제일 육군 조병창을 겨눈 폭탄이었는데 명중하지 않고 와세다 중학교 교정에 떨어져 학생 한 명의 사망자와 여러 부상자들이 생겼다.

사가미 만으로 침투하던 에버렛 W. 홀스트롬 중위의 4번 기는 일본군의 요격기가 출현했으며 기총이 고장 났다는 보고를 하고 폭탄들을 바다에 투하하고 이탈했다.

11번기는 도쿄로 침투하다가 우연히 발견한 가토리(香取)해군 비행장을 폭격하였다. 11기는 폭격 완료 후 99리 해변으로 빠져나갔다.

11번기는 일본 전투기와 교전을 벌여 적기 2기를 격추했다고 했지만 당시 이 지역에서 이륙한 일본 Ki-61 전투기들은 모두 귀환했었다.

웨어드 E. 마크에로이 중위가 조종하던 13번기는 요코스카 해군 기지를 폭격하였다. 13번기는 호소 반도 남부를 횡단하여 요코스카에 침입 오후 1시경 3발의 폭탄을 투하했다.

한 발이 요코스카 군항 제 4독크에서 경항모로 개장(改裝)중인 잠수함 모함(母艦) 대경(大鯨, 개장후 용봉 (龍鳳)으로 개칭)에 명중시켜 화재가 발생했다.

이 화재로 개장 공사가 늦어져 류우함은 11월에야 진수할 수가 있었다.

13번기는 폭격후 요코스카 군항에 정박중인 함대에서 쏘아 올리는 대공 포화를 받으며 목표지를 이탈했다. 13번기는 폭격대에서 가장 큰 전과를 이룬 폭격기였다.

14번기는 나고야를, 15번기는 고베를 폭격하였다. 16번기(기장 윌리엄 파로우 중위)는 나고야 부근 와카야마를 폭격후 생포된다.

일본은 이 폭격기 기총수들이 항로 주변의 민간인들에게 기총 사격이 심했다고 주장하고 파로우 중위를 총살했다.

8번기(에드워드 요크 대위)는 초장부터 연료 소비가 예상을 넘어서자 일찌감치 원래의 목표 폭격을 포기하고 일본 반도를 북상해서 니가타 현의 철교를 폭격하고 동해로 빠져나가 소련 극동항 블라디보스톡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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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오조 수상이 기상에서 조우한 두리틀 폭격대



두리틀의 공습을 하늘에서 목격한 중요한 인물이 있었다. 미군에게 무척 인기 없고 전후 전범으로 처형당한 일본 수상 도오조 히데키(東條英機)가 바로 그 사람이다.

그는 육군의 100식 수송기를 타고 미도(水戶)에 시찰을 나갔다가 전방에 나타난 수상한 폭격기와 조우했다.

양쪽이 가까워져서 기내의 사람들까지 인식할 거리가 되자 폭격기는 먼 거리에서 기관총 사격을 가하고 사라졌다. 대경실색한 그는 미도 비행장에 내려 상황을 파악하고 기차로 도쿄로 돌아왔다.

생각지 않게 한방 맞은 일본은 벌집을 쑤신 것처럼 소란을 떨었다.

공습 후 즉각 미 항모부대를 찾기 위한 초계기가 뜨고 미사와기지의 해군 항공대에서 30기의 어뢰 무장 1식 육공기가 출격하여 오랜 시간 빈 바다만 뒤지고 돌아오다가 사고로 3기나 잃는 실수를 하였다.

일본 본토가 공습 받았다는 경보에 각지의 육해군기들이 산발적으로 요격에 나섰으나 모두 실패했다.

일본이 두리틀 폭격대를 단 한기도 요격하지 못한 것은 주요 신형기들을 일선에 내보내고 해군 96식이나 육군 97식 같은 구식기들로 요격했기 때문이라지만 요격한 기종들중에 육군의 하야부사나 해군의 제로 전투기도 있었고 시험 비행 단계인 육군의 최신 3식 전투기 히엔(飛戀)도 있었다.

폭격기들은 일본 남근해 상공을 저공 비행하면서 연안에 운항중인 선박들에게도 기총 소사를 했다. 일본은 여러 어선들이 기총 사격을 받아 중상자가 발생했다고 발표하였다.



남중국으로의 탈출 비행



15기의 B-25 폭격기들은 모두 일본을 벗어나 동중국해로 진입, 남동진하여 중국 절강성으로 향했다. 폭격대는 동중국해를 횡단하면서 기대하지 않았던 장애에 부딪히기 시작했다.

연료가 빠르게 고갈되고 일기도 급속도로 나빠지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뒤쪽에서 불어주는 강풍이 있어 항속거리 연장에 큰 도움이 되었다.

이 뒷 바람이 없었다면 두리틀 폭격기대의 폭격기들은 한 기도 중국 해안에 도달할 수 없었을 지 몰랐다.

강풍은 시간당 25노트의 속도를 증가시켜주어 두리틀 폭격대 15기는 13시간의 장거리 비행 끝에 모두 중국 해안에 도달할 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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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리틀 폭격대의 탈출로





낙하산 탈출한 두리틀 폭격대원



폭격대가 중국대륙에 다가가자 수평선에 어둠이 찾아 들기 시작했다. 이들이 향하는 곳은 장개석 군이 장악하고 있는 중국 동남부 절강성의 비행장들이었다.

장개석이 장악한 지역에는 몇 개의 비행장들이 있었다. 비행장들은 두리틀 폭격대가 접근하면 유도 전파를 쏴서 이들의 비행을 돕기로 합의가 되어 있었다.

그들이 향하는 비행장이 몇 개 있었지만 쑤저우 비행장이 주요 기착지였다. 그러나 불행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중국 비행장들은 너무 일찍 나타난 미군기들의 폭음을 듣고 오히려 기지의 불을 모두 꺼버리고 대공 경계태세를 취했다.

중국으로 향했던 15기의 폭격기들은 모두 추락하거나 해상 불시착하고 승무원들은 전원 낙하산으로 탈출하였다.

제임스 두리틀 대장과 그의 승무원들도 낙하산 탈출을 했다. 그는 논들의 중간에 있던 가축 배설물 더미 위에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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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들과 걷고 있는 미 승무원들



중국 지역에 강하했던 대원들은 중국 군관민들, 그리고 일부 대원들은 그 지역에서 오랫동안 선교 활동을 했던 미국인 존 버치 선교사의 도움으로 먼 거리를 거치는 여행이었지만 미국으로 돌아 올 수가 있었다.

일본 폭격 작전에 출격하였던 80명의 대원중에 69명이 미국으로 생환하였다.



미군 포로 3명을 처형한 일본의 만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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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병 하사관에 연행되는 미군 포로 로버트 화이트



한 명이 낙하산 탈출 도중 사망한 것이 확인되었으나 10명의 대원의 대원은 생사를 알 수가 없는 실종 상태였다.

이들은 연료가 너무 일찍 고갈되어 중국군 지역까지 비행하지 못하고 일본군이 장악하고 있는 지역에 낙하산 강하한 것으로 추측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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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종수를 처형했다는 뉴우스에 격앙된 미국 여론을 내보이는 포스터, 수상 도오조에게 보복을 다짐하고 있다.



1942년 8월 15일 미국은 상하이의 스위스 영사관으로부터 미 승무원 8명이 샹하이 경찰서에 감금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일본은 포로 조종사들을 민간인 기총소사 혐의로 군법회의에 회부해서 모두 사형 선고를 내렸고 이중 5 명은 무기 징역으로 감형했지만 3명은 1942년 10월 28일 상하이 시 공동묘지로 끌고 가 총살했다(그러나 일본 전사는 세 명의 포로를 샹하이 경마장에서 총살되었으며 유해들은 화장되어 적십자사를 통해 유족들에게 건네주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화장했다면 공동묘지에서 처형했다는 미군의 기록이 잘못 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사형당한 폭격대원들은 딘 홀마크 중위, 윌리엄 G.파로우 중위, 기총수 해롤드 스파츠 병장이었다. 포로가 된 조종사를 전범으로 몰아 죽인다는 것은 잔인한 만행이었다. 600만 명의 유태인을 죽인 히틀러도 일본의 만행에 격분했다고 한다.

조종사들의 처형은 일본 육군 참모총장 스기야마(杉山元)원수가 일왕 히로히토에게 진언해서 이루어졌다는데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히로히토는 A 급 전범으로 처벌할 충분한 죄상이 되지만 미국은 종전 후 이를 덮어두었다.

두 명의 행발불명 승무원, 윌리엄 J 디이터와 도날드 E. 핏츠모리스는 폭격기가 해상에 추락하여 익사했다. 그 사실은 일본의 항복 뒤에 알려졌다.

종신형을 선고 받은 다섯 명의 조종사 포로들은 학대 속에 중국을 옮겨 다니며 구금 생활을 하던 중에 로버트 메더 소위가 이질과 각기의 합병증으로 죽었다. 4명은 전쟁이 끝나고 닷새 후인 1945년 8월 20일 석방되었다.



폭격의 성과 분석



일본 육군 보도부는 이번 폭격 성과를 지휘관 두리틀의 이름을 빌려서 두리틀(Doolittle)폭격대는 두 리틀(do little)]아니라 두 나씽[(do nothing)이라고 빈정댔다.

기습을 당한 일본이 크게 놀라서 난리를 쳤으나 사실 엄격히 말해서 두리틀 폭격대는 기습에는 성공했으나 폭격의 정확도는 별로였다.

사전에 치밀한 폭격 작전을 짤 항공사진도 없었고 기습에 너무 집중하다 보니 무리한 저공비행을 하여 정밀 폭격에도 착오도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으로 귀환한 두리틀은 무척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너무 빠른 출격 결정으로 항공기 16기를 모두 잃고 돌아왔고 일본이 계속 피해 상황은 경미하다는 방송을 하여 성과도 별 볼 일이 없었다는 평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자기가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처벌 받을 수도 있다는 최악의 상황을 각오했다.



미국의 거국적 환영



그러나 미국은 거국적으로 그들 귀환 용사들을 환영하였다. 진주만에서 피습을 당한 수모와 연전연패의 우울한 소식만 들리는 와중에 일본 본토를 통쾌하게 타격하여 진주만의 보복을 했으니 국민들의 사기는 엄청나게 솟구쳐 올랐다.

그가 성취해낸 전공에 루즈벨트 대통령은 최고 무공훈장인 미 의회 명예훈장을 수여했고 다른 대원들도 전공에 따라 모두 훈장들을 받았다.

두리틀 중령은 파격적으로 육군 항공대 준장으로 특진되어 아프리카에서 활동하는 12 공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선교사로 일본에 온 두리틀대 포로



일본에게 종신형을 언도 받고 3년간 죽을 고생을 했던 4명의 생존포로들 중에 전후에 이색적인 인물이 나타났다.

폭격수였던 제이컵 드세이저 하사는 1948년 선교사가 되어 일본으로 되돌아와 30년간 선교사업을 했다.

그가 전도시킨 사람 중에 드세이저 선교사만큼이나 특이한 인물이 있었다. 그는 바로 두리틀 공습을 가져오게 한 진주만 공격대의 대장이었던 후치다 미쓰오(淵田美津雄)중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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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만 기습대장 후치다 미쓰오 중좌- 전후 선교사가 된다.



그는 거리 전도를 하던 드세이저에게서 선교를 받고 자신도 1948년 입교하여 선교사가 되었다. 후치다는 선교사로서 미국을 방문하여 두리틀 지휘관과 상봉하기도 하였다.



일본 육군의 보복



한편 일본 군부는 일본 민족에게 하늘같은 존재인 천황이 거주하는 소위 제도(帝都)가 공격 당한 것에 대해 크게 당황하였다.

나중에야 B-29의 대규모 폭격에 의해 도쿄 전체가 불바다가 될 정도로 미군 폭격이 일상사가 되었지만 이때만 해도 앞으로 다가올 상황 판단을 못 할 때라 군간부들은 몸 둘 바를 모르며 황공해 했다.

일본군의 육군과 해군은 곧 행동을 보였다. 중국 주둔 일본 육군은 5월 중순 18만 병력을 동원해서 미군 폭격기 조종사들이 구출되었던 절강성 일대를 목표로 대토벌작전을 발령하였다.

장개석군의 고 축동(顧祝同)사령관이 지휘하는 34개 사단 격멸과 3개 비행장 격멸이 목표였다.

이 일대 장개석군과 비행장들을 제거해서 다시는 두리틀 작전 같은 본토 폭격을 불가능하게 만들겠다는 것이었는데 순수한 군사 작전이라기보다는 두리틀 공습에 대한 보복 작전의 성격이 짙었다.

이 토벌에서 무려 25만명의 중국 민간인들이 학살되었다. 미군 조종사들이 구조를 도와준 감사의 표시로 건넨 시계나 편지 등 조그마한 선물이라도 가지고 있던 민간인은 무조건 사살되었다. 이 작전은 9월 30일 종료되었다.



미드웨이 해전을 부른 두리틀 폭격



그러나 두리틀의 폭격이 세계사를 뒤흔든 한 계기가 된 것은 당시 해군 전력 양대축의 하나인 일본 해군이 발령한 대담한 작전이었다.

미 항모 부대가 육상 쌍발 폭격기를 탑재하고 은밀히 접근하여 제도(帝都)를 폭격하게 허용한 일차 책임이 있던 일본 해군의 연합함대 사령관 야마모토 이소로쿠는 거창한 계획을 세운다.

즉, 다시는 미 기동함대가 그런 식의 접근을 못할만큼 초계선을 훨씬 더 미국 쪽에 가까운 미드웨이 섬- 알류샨 열도로 동진시키겠다는 전략이었다.

더구나 이번 작전을 계기로 미 항모부대와 결전을 해서 전쟁을 끝내 보겠다는 복선도 내면에 깔고 있었다.

냉정히 보면 그 시점에 일본의 전략은 그런 광정면의 추가 전선을 형성할 것이 아니라 남방작전에 집중했어야 했다.

당시 인도양 작전을 끝내고 돌아오는 일본 나무모 기동 부대(항모 부대)는 진주만 기습이래 긴 작전으로 피로가 심해 대폭적인 정비와 충원 및 훈련이 절실했었다.

그러나 천황 폐하에게 면목을 잃은 해군은 미드웨이 공략작전을 강행하였다. 두리틀의 폭격이 없었으면 없었을 그런 무모한 작전이었다.

나구모 기동부대를 주축으로 미드웨이 공략 작전은 정보 누출의 실수로 미리 알고 매복했던 미 항모 부대 기습을 받아 일본 미드웨이 기동 함대는 네 척의 항모를 잃는 대패를 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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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드웨이 해전에서 격침 직전의 일본 항모 히류



정예 항모 부대를 잃은 일본은 이때부터 본격적인 수세로 돌아섰고 3년 뒤에 무조건 항복으로 무리한 침략전쟁은 종결 된다.

기발한 아이디어로서 성공했던 두리틀의 일본 본토 폭격은 물질적으로 보면 세계 전사의 물결에서 미미한 것인지 모른다.

그러나 두리틀 폭격을 한 달 반 뒤에 있었던 미드웨이 해전에서 거둔 미군의 대승과 연결해보면 역사의 거대한 이정표였던 것이다.




김창원 | 전사연구가
연세대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시라큐스 경영대학원에서 MBA를 취득했다. 장교로 군 복무, 기갑부대 전차 소대장을 지냈다. ‘울프 독’이라는 필명으로 전사와 역사를 다룬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다. 국방부 정책·정보 블로그(N.A.R.A.)에 기고하고 있으며, 저서로 [공격 마케팅]이 있다


제공

유용원의 군사세계
http://bemil.chosun.com/



발행2014.01.10.



주석


1
일본 전사는 폭격 받은 도시가 도쿄시[東京]市、가와사키시[川崎]市、
요쿄스카[横須賀]市、나고야[名古屋]市 요카이치[四日市]市、
고베[神戸]]市로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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