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역사 마스트리흐트 조약 - 유럽 통합을 위한 한 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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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533회 작성일 16-02-07 0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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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대륙의 분할을 끝낸다는 역사적 중요성과, 미래 유럽을 건설할 굳건한 기반을 조성할 필요를 되새기며, 자유, 민주, 인권 및 기본권의 존중과 법치주의 원칙을 더욱 확고히 하며, 각국 국민의 고유한 역사, 문화, 전통에 대한 존중을 유지하는 가운데 그 연대를 강화하며, 단일한 제도적 틀이 보다 민주적이고 효율적인 행정 서비스를 가져다주기를 바라며 (……)

단일 통화를 갖춘 경제통화동맹을 수립하고 (……) 시민권을 창설하고 (……) 공동 외교ㆍ안보 정책을 추진하고 (……) 사람들의 자유로운 이동 원칙을 재확인하는 가운데 그들의 안전을 확실히 보장하고자 내무 및 사법 분야에 대해 협력하기 위하여 (……)

보충성의 원칙(principle of subsidiarity)에 따라 의사결정을 하게 될 보다 긴밀한 연합을, 유럽 시민들 사이에 수립하기로 한다.”

- 마스트리흐트 조약 전문(前文)


‘하나의 유럽’이라는 오래된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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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스트리흐트 조약 체결 10주년을 기념하여 룩셈부르크에 세워진 기념비



유럽은 지리적으로나 역사적으로 독특한 곳이다. 다른 대륙에 비해 좁은 편이지만(러시아를 제외하면 더더욱) 통일 제국이란 로마를 제외하면 없었으며, 할거하던 본토의 국가들은 반대로 해외로 뻗어나가 바다의 제국을 이룩해 나갔다. 나라별로 고유한 언어와 문화를 발전시켜왔던 한편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 알파벳과 라틴어라는 공동의 ‘문명 축’을 유지하기도 했다. 세계사를 뒤바꾼 산업혁명, 시민혁명, 사회주의 혁명이 이곳에서 일어났고, 세계를 공포로 몰아넣은 세계대전도 이 땅에서 치러졌다.

말하자면 공통 문명의 토대 위에 저마다 경쟁을 벌이며 문화와 기술을 한껏 발전시켰지만, 그 경쟁이 지나치면 참혹한 전쟁이나 암담한 경제난이 유럽과 그밖의 세계를 위협해온 것이다. 이를 제어하고자 현대에는 북대서양 조약브레턴우즈 협정 같은 장치가 마련되었다. 그러나 여기에서 더 나아가 유럽을 하나로 묶음으로써 불필요한 분쟁을 줄이고, 사람과 물자가 자유롭게 오가게 하며, 또한 거대한 공동체로서 시너지 효과를 내면서 발전해보자는 생각도 멈추지 않았다.

최초의 유럽 통합안은 1306년에 프랑스의 법률가 피에르 뒤부아가 내놓았다고 한다. 정치적 통합이 어려운 현실에서 교황의 종교적 권위를 중심으로 단결하자는 것이었는데, 이처럼 교황을, 또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를 중심으로 하나된 유럽을 이루자는 주장은 중세에서 근세까지 이따금 나왔지만 권한이나 실행안이 결여된 몽상에 가까운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다가 황제의 강제에 반발하고, 신ㆍ구교의 분열에 부추겨져 일어난 30년 전쟁 끝에 1648년 맺어진 베스트팔렌 조약은 교황이나 황제 같은 통합의 구심점에 종지부를 찍었으며, 이후 여러 독립국가들이 할거하는 유럽의 모습은 당연한 상식처럼 굳어졌다.

하지만 유럽 통합의 이념을 내세우는 사상가와 정치가들은 끊이지 않았고, 특히 루소, 생시몽, 빅토르 위고, 그리고 나폴레옹 1세와 3세 등 프랑스에서 많이 나타났다. 프랑스는 서유럽 최대의 국가로 오래 전부터 중앙집권을 이루어 군사, 경제, 문화 등에서 앞서가고 있었기에 통일 유럽의 주역이 될 자신이 있었던 한편, 독일과 이탈리아는 스스로의 국가적 통일에 바빴고, 영국과 러시아는 대체로 독자 노선을 선호했던 때문일 것이다.

현대의 유럽 통합안 역시 프랑스인들이 주도했다. 제1차 세계대전 후 프랑스의 외무장관 아리스티드 브리앙이 ‘범유럽연합’을 주창했으며(1929년), 다시 제2차 세계대전 뒤에는 로베르 슈망과 장 모네가 유럽 통합의 주역이 되었다. 슈망이 유럽 통합 계획안을 발표한 1950년 5월 9일은 유럽연합의 헌법에 유럽연합의 ‘건국일’로 지정되었었다(비록 부결되었지만). 슈망 계획을 서독의 아데나워가 수용함으로써 유럽 통합의 길에는 마침내 빛이 비치는가 싶었으나, 저마다의 잇속만 차리는 각국의 입장 충돌로 금세 어두워졌다.

그러자 장 모네는 ‘입장이 첨예하게 부딪치는 정치 부문의 통합은 일단 미루고, 이해관계가 조화를 이루기 쉬운 사회, 경제 부문부터 통합해 나간다’는 기능주의 이론에 따라 1951년에 프랑스, 서독, 이탈리아, 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6개국이 참여하는 유럽석탄철강공동체(ECSC)를 출범시킨다. 이 노선에 따라 1957년에 로마 조약을 맺어 유럽경제공동체(EEC)와 유럽원자력공동체(Euratom)가 출범함으로써 서유럽을 중심으로 유럽의 사회ㆍ경제적 상호의존성이 증대되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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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망 계획”으로 현대 유럽 통합의 첫발을 내디딘 로베르 슈망(Robert Schuman).





서독의 총리 아데나워(오른쪽)를 만난 장 모네(Jean Monnet, 왼쪽). 유럽석탄철강공동체를 출범시키고 1952~55년 유럽공동체 의장을 지냈다.




기능적 통합이 비교적 순조롭게 진행된 반면(영국과 북유럽 국가들이 프랑스, 독일 중심의 통합체제에 대항해 유럽자유무역연합을 결성했으나, 결국 1960년대에는 통합체제에 합류하게 된다) 정치적 통합은 느리고 난관이 많았다. 각국의 정치적 기득권과 안보 문제가 걸린 데다, NATO가 엄존하는 현실에서 미국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통합의 흐름 자체가 중단되거나 무산되는 일은 없었다. 묘하게도 서로 다른 입장을 갖고 통합의 총대를 둘러매는 지도자들이 잇달았기 때문이다. 1960년대 초에 프랑스의 샤를 드골 대통령은 미국의 영향에서 벗어나고 프랑스 중심의 유럽을 만들어가려는 뜻에서 적극적으로 유럽 통합을 추진했다. 그를 계승한 조르주 퐁피두는 드골처럼 공격적으로 통합을 모색하기보다는, 당시 서독의 빌리 브란트가 추진하던 동방정책이 동유럽에 대한 서독의 영향력을 늘릴 것을 우려한 나머지 서독의 입지를 제한하려는 의도에서 통합에 임했다. 브란트의 후임자 헬무트 슈미트도 브란트가 지나치게 동구권과 밀착했다고 보고, 서유럽과의 관계 강화를 위하여 퐁피두의 정책에 호응했다.

이들이 1970년대 유럽 통합을 주도했다면 1980년대와 1990년대 초에는 프랑스의 프랑수아 미테랑과 독일의 헬무트 콜이 그 바통을 이어받았다. 미테랑은 본래 유럽 통합에 별 뜻이 없었으나, 그가 추진한 사회주의적 개혁이 실패를 거듭하자 인기를 만회하고 경제 위기를 극복하려는 뜻에서 통합에 발 벗고 나섰다. 한편 콜은 경제적 이유보다는 독일 통일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주변 국가들의 든든한 지지를 확보하려는 속셈에 따라 미테랑의 손을 잡았다. 그러는 사이에 영국 지도자들은 통합에 대체로 관망적인 입장이었고 특히 마거릿 대처는 거의 적대적인 입장까지 보였지만, 그 뒤를 이은 존 메이저는 영국의 경제 문제를 해결할 돌파구는 유럽 통합뿐이라는 판단에 따라 통합의 기수가 된다.



‘세 개의 기둥’을 세우다



그리하여 1967년에는 ECSC, ECC, Euratom이 통합하여 유럽공동체(EC)가 출범했으며, 1973년에는 영국, 덴마크, 아일랜드가, 다시 1981년에는 그리스가, 1986년에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EC에 가입했다. 그리하여 총 12개국이 된 EC 회원국들은 1985년의 솅겐 조약으로 회원국들 사이에 국경을 개방하고, 1986년에 단일유럽의정서(SEA)에 서명하여 기존 관세동맹의 수준을 넘는 경제통합을 이룰 것과 정치통합을 현실화할 것에 합의하였다. 또한 유럽의회는 1962년에, 유럽이사회는 1974년에 수립되어 각기 유럽공동체의 하원과 상원 역할을 맡았으며, 1950년대에 처음 만들어진 유럽위원회와 유럽사법재판소는 행정부, 사법부로서의 역할이 점차 강화되었다.

마침내 1990년에는 SEA에 제시된 목표를 실현할 정치적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통일 독일의 첫 총선에서 콜의 기민당-기사당 연합이 승리를 거두고, 콜은 미테랑과 통화동맹 및 정치동맹을 추구할 합의를 이뤘으며, 로마에서 통화동맹 관련 국가간 회의가 개최된 것이다. 그러나 막상 자리에 모이면 각국의 입장을 하나로 정리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초국가주의”를 따르느냐, “국가간주의”를 따르느냐 하는 이념 내지 원칙상의 합의점이 좀처럼 나오지 않았다.

초국가주의는 개별 국가를 넘어서는 상위 구조를 만드는 것으로 유럽이 그야말로 하나가 되기를 바랐던 여러 유럽 통합 사상가들의 이상을 반영한다고 하겠는데, 사회경제적 부문에서는 유럽은행을 만들고 공동 화폐를 도입하는 등 비교적 순조롭게 수용되었으나 정치 부문에서는 첩첩산중이었다. 유럽이 초국가주의적인 정치통합을 한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각국 정부의 주권을 폐기하고 단 하나의 정부 아래 ‘유럽 연방’으로 거듭난다는 뜻이었지만, 통합 운동의 주축인 독일과 프랑스는 개별 국가의 주권을 유지한 채 공동협의기구를 마련하는 국가연합적 통합을 선호했으며, 영국, 덴마크 등은 그나마도 반대하며 개별 국가들이 함께 협의하고 잠정 타협안을 내놓는 수준인 국가간주의를 고집했다.

1991년 4월에는 룩셈부르크에서 ‘3개의 기둥’ 위에 더 발전된 유럽공동체를 세우자는 제안이 나왔다. 경제에서는 공동시장과 단일 화폐를 사용하는 경제화폐동맹(EMU)이, 정치에서는 공동외교안보정책(CFSP)이, 그리고 내무 및 사법 분야에서의 협력(JHA)이 그 세 개의 기둥이라는 것이었다. 세 개의 기둥 중 경제 기둥만 빼면 국가간주의에 그친다는 점에 대해 네덜란드나 벨기에처럼 초국가주의를 선호하는 나라는 반발하며 정치ㆍ외교 동맹을 제안했으나, 영국 등의 격렬한 반대와 프랑스 등의 차가운 시선 앞에 어쩔 수가 없었다. 결국 3개의 기둥을 수용하기로 대략 합의가 이루어진 상태에서 유럽공동체보다 한 걸음 더 나간 통합체제를 구축하려는 협의가 본격화된다.



‘공동의 지붕’을 올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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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스트리흐트 이사회에 참석한 프랑수아 미테랑(François Mitterrand, 사진 가운데)



그리하여 1991년 12월에 네덜란드의 마스트리흐트에서 개최 예정되어 있던 유럽이사회를 앞둔 두 달 동안 12개국 정부들 사이에서는 수없이 회의가 열렸다. 오랫동안 독자 노선을 선호해온 영국은 경제화폐동맹에 참여하되 단일 화폐 사용과 최저임금제 등의 대륙식 복지 정책 수용 등은 거부한다는 입장을 고집했다. 결국 현행 유럽의회의 권한을 높이는 대신 적극적인 복지 정책을 규정한 사회헌장은 유보하기로 영국과의 합의가 이뤄졌다. 한편 스페인을 비롯해 비교적 경제 수준이 낮은 유럽 국가들은 심화된 통합체제에서 대규모의 경제적 지원을 얻기를 열망했고, 그것이 어렵다면 통합 과정에서 빠지겠다는 식이었다. 이는 결국 ‘결속 기금’이라는 이름 아래 독일이 상당한 부담을 짊어지기로 함으로써 해결되었다. 또한 애초의 조약 초안에는 전문에 ‘연방’이라는 언급이 있었으나, 영국, 덴마크 등의 반대가 심하자 네덜란드의 제안에 따라 그 표현을 지우고 ‘보다 긴밀한 연합’으로 바꾸었다.

1991년 12월에 합의되어 이듬해 2월에 체결을 마친 유럽연합 조약, 속칭 마스트리흐트 조약은 전문과 7개 장의 본문 외에 17개 부속 의정서와 33개 부속 선언서로 이루어져 있다. 이 중 제2장에서 EC, 제3장에서 ECSC, 제4장에서 Euratom 창설 조약을 수정하여 경제화폐동맹을 구축하고, 제5장에서 공동외교안보정책, 제6장에서 내무사법협력을 규정함으로써 이른바 ‘세 개의 기둥’이 제1장, ‘공동 조항’이라는 ‘지붕’을 떠받치는 형태를 이룬다. 이 중에서 공동 조항 내용을 요약ㆍ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A조: 이 조약으로써, 체결국들은 유럽연합(EU)을 수립한다. 이 조약은 유럽 시민들 사이에 더 긴밀한 연합을 창출하는 새로운 장을 열며, 그 연합은 유럽공동체를 기반으로 하여 이 조약에서 신설된 정책과 협력 방식을 덧붙임으로써 창립된다.

B조: 이 연합은 1) 공동시장의 창출과 단일 화폐의 창출을 포함하는 경제화폐동맹의 수립에 따른 사회경제적 진보 2) 공동안보체제로 발전할 수도 있는 공동안보정책을 포함하는 공동외교안보정책 수립에 따른 국제 무대에서의 유럽의 단일성 부각 3) 유럽연합 시민권 창립에 따른 회원국 시민의 권익 보호 4) 내무 및 사법 분야에서의 긴밀한 협력 4) 그동안의 통합 노력에 따라 확보된 공동체법 및 관행의 집합(acquis communautaire)의 유지 등을 목표로 하며, 그 목표는 유럽공동체 창설 조약에 규정된 보충성의 원칙에 따른다.

C조: 이 연합은 그 목표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하나의 제도적 틀로 작동해야 하며, 대외적으로 외교, 안보, 경제, 개발 정책에서 일관성을 가져야 한다. 그런 일관성을 유지할 책임은 유럽이사회와 유럽위원회가 진다.

D조: 유럽이사회는 향후 유럽연합의 발전의 중추가 되며, 그 일반적인 정책 지침을 작성하는 주체가 된다. 이는 회원국 정상들과 유럽위원회 위원장으로 구성되고, 회원국의 외무장관들 및 유럽위원회 위원들의 보좌를 받는다. 이사회는 연 2회 개최되며, 위원회 의장국을 맡은 국가 정상이 의장이 된다.

E조: 유럽의회, 유럽이사회, 유럽위원회, 유럽사법재판소의 권한은 유럽공동체 창설조약을 비롯한 기존의 조약에서 규정된 내용과 이 조약에 새롭게 규정된 내용에 따른다.

F조: 이 연합은 회원국의 국가적 정체성을 존중하며, 1950년 11월 4일의 ‘인권 및 기본적 자유의 보호에 관한 유럽협약’에 보장된 기본권과 그에 연관된 회원국 헌법질서의 공통된 부분을 존중하며, 이런 목표들을 달성하고 정책을 수행하기 위해 필요한 수단을 확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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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기에 브뤼셀에 있는 유럽의회 회의장. <출처: (cc) Alina Zienowicz Ala z at en.wikipedia.org>





‘느슨하게 짜여진, 온갖 색깔의 직물?’



이처럼 마스트리흐트 조약은 유럽 통합에 관한 기존의 조약들을 폐기하거나 대체하지 않는 부가적ㆍ보완적 조약이라고 할 수 있으며, 기존의 조약 내용들을 기본으로 하면서 그 내용을 수정하거나 새로운 내용들을 추구하는 형태를 띤다. 또한 전문과 B조에 명시된 ‘보충성의 원칙’이란 유럽연합이 그 회원국들의 헌법이나 법률에 선행하는 초국가적 법령 및 정책을 만들 수는 없으며, 회원국들 모두의 법체계에서 빠져 있는 부분만을 ‘보충’할 수 있다는 원칙이다. 여기에 수십 개에 이르는 부속 의정서와 선언문들은 각국의 개별적 입장을 고려한 예외적 조항들을 마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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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연합의 회원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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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로화를 사용하는 유로존 국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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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리스본 조약을 체결하기 위해 모인 유럽연합 회원국의 정상들. <출처: (cc) Archiwum Kancelarii Prezydenta RP at en.wikipedia.org>



그래서 마스트리흐트 이후로도 1997년의 암스테르담 조약, 2001년의 니스 조약, 2007년의 리스본 조약 등이 추가되면서 유럽연합 체제를 수정하고 보완해 나가고 있으며, 같은 유럽연합 회원국들이라지만 특정한 영역과 부문별로 복잡하게 얽혀 각자의 길을 가는 경우가 많다. 가령 영국, 아일랜드, 루마니아, 불가리아, 크로아티아, 키프로스는 솅겐 조약에 따른 유럽 국가들 사이의 국경 개방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으며, 그 중에서 영국, 루마니아, 불가리아, 크로아티아는 유로화도 사용하지 않는다. 또한 스웨덴, 덴마크, 폴란드, 체코, 헝가리는 솅겐 조약은 따르되 유로화는 채택하고 있지 않으며, 노르웨이, 아이슬란드, 스위스, 리히텐슈타인은 유럽연합 회원국이 아니면서 솅겐 조약 가맹국이다. 역시 안도라, 산마리노, 모나코, 그리고 터키는 유럽연합에 속해 있지 않으면서 많은 유럽연합 국가들과 유럽관세동맹을 맺고 있다. 유럽연합은 1993년에 유럽경제지역(EEA)을 출범시켜 유럽연합 외의 국가들까지 포괄하려는 공동시장을 수립했는데 크로아티아는 여기에 참여하지 않았으며, 유럽연합 외의 EEA 참여 국가로는 노르웨이, 아이슬란드, 리히텐슈타인이 있다. 한편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회원국이면서 유럽연합 회원국이 아닌 유럽 국가는 노르웨이, 아이슬란드, 알바니아, 터키이며, 반대로 유럽연합에 속해 있으면서 NATO에는 속해 있지 않은 국가는 아일랜드, 오스트리아, 스웨덴, 핀란드, 몰타가 있다.

이처럼 ‘긴밀한 연합’을 표방하면서 통일성은 부족하고 과거의 규정이나 관행에서 과감히 벗어나지 못하는 유럽연합의 성격은 일단 정치적으로 여러 국민국가의 다양한 입장이 반영되었기 때문이며, 입법 기술상으로도 과거의 통합 법규들과 그에 관련된 수많은 법조항들을 한꺼번에 개폐하는 일이 어렵기 짝이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는 ‘세 개의 기둥’에 초국가주의가 불충분하게 반영되었다는 점과 함께 이상주의적 통합론자들의 실망을 자아냈다. 하지만 기존의 기능주의적 통합의 역사에 한 걸음을 보태고, 수십 년 만에 미흡하나마 정치통합의 틀을 마련한 점은 마스트리흐트 조약의 역사적 의미를 평가하기에 충분하다.



또 하나의 EU를 위하여



유럽연합은 1999년에 단일 통화 유로와 유럽중앙은행을 설립하여 경제화폐동맹을 완성했으며, 2002년부터는 유럽연합 회원국들 중 ‘유로존’에 속한 12개국의 화폐를 유로화가 대체했다. 유럽연합은 외연적 확장도 거듭하여 1995년에 오스트리아, 스웨덴, 핀란드가 가입하고, 2004년에는 체코, 폴란드, 헝가리, 슬로베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 리투아니아, 몰타, 키프로스가, 2007년에는 불가리아와 루마니아가, 2013년에는 크로아티아가 가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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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5월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벌어진 유럽연합 창설 축하 퍼레이드. <출처: (cc) Cezary p at en.wikipedia.org>



하지만 유럽 각국의 국민들 사이에서는 유럽연합을 환영하는 시각과 우려하는 시각이 엇갈리고 있다. 갈등의 원인을 줄이고 사회경제적 발전을 모색한다는 점에서는 좋아도 오랫동안 국민국가의 틀에서 개발되고 정착된 고유의 규범, 관행, 문화 등이 침해되는 점은 걱정스럽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스트리흐트 조약 비준을 위해 제일 먼저 국민투표를 실시한 덴마크에서는 1992년 6월에 한 차례 부결되었다가 이듬해의 재투표에서야 가결되는 고충을 겪었으며, 1992년 9월에는 유럽통합론의 주축인 프랑스에서도 가까스로 가결되었고, 영국도 1993년에 메이저 총리가 정치 생명을 걸며 총력을 기울인 끝에 가결되는 모습을 보였다.

이런 경험을 한 회원국들은 연합의 틀을 바꾸는 과정에서 국민투표가 아닌 국회 동의로 비준을 마치기로 합의했다. 하지만 일부 회원국은 국민투표 절차를 여전히 유지했는데, 2004년에 유럽연합의 정치통합 부문을 강화하고자 ‘유럽 대통령’과 유럽 국기, 국가 등의 제정을 포함하는 유럽헌법을 제정하기로 결정했지만 프랑스와 네덜란드의 국민투표에서 부결되어 무산되었다. 다시 2007년의 리스본 조약에서 유럽 국기, 국가 등 단일정치체로서의 성격을 많이 삭제한 유럽헌법이 합의되었지만 회원국 중 유일하게 국민투표 비준 절차를 유지한 아일랜드에서 한 차례 부결시켰다가 2009년에 간신히 가결하여 리스본 조약이 발효되는 과정을 거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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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유럽헌법에 대한 국민투표를 반대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프랑스 부르고뉴 지방의 포스터. <출처: (cc) Justinc at commons.wikimedia.org>



한편 유럽연합체제가 저소득 국가 주민의 이민을 촉진시켜 원래 주민의 문화적 정체성과 노동권이 위협받는 등 이른바 ‘다문화주의의 피로’를 가중시키고 있다는 불만도 적지 않다. 그리고 국민의 생활에 밀접하게 연관되는 법률의 상당수가(프랑스의 경우 무려 4분의 3) 국민이 선출한 국회가 아닌 유럽의회에서 결정되고 있다는 사실 등에서 나타나는 유럽연합의 비민주적 성격에서 ‘유럽 통합이란 정치인과 자본가 등 소수의 지배 엘리트들만을 위한 놀음’이라는 비판론까지 끊이지 않는다. 2013년 말에 유럽연합 회원국 8개국에서 실시된 여론조사는 유럽연합에 대한 지지도가 50퍼센트 이하로 떨어졌음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소수의 지배 엘리트들’도 유럽연합에 대한 지지도가 한결같지 않다. 마스트리흐트 조약은 회원국의 재정 적자 규모를 3퍼센트 이하로 묶는 등 초국가적인 경제 규정을 두고 있으나, 이는 일부 회원국들이 자국 경제의 실상을 은폐하는 일을 막지 못했다. 그 결과 최근 남유럽의 신용 위기가 벌어졌다고도 할 수 있는데, 한편 이때 독일 등이 투자금을 서둘러 회수하고 경제 위기 국가들에 가혹한 경제 구조조정을 강요한 것이 해당 국가들의 사정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고도 한다. 이와 같은 연합 내 부국과 빈국 사이의 갈등, 독일의 경제 패권에 대한 불만, 키프로스처럼 오랜 귀속 분쟁의 대상이 되었던 국가의 회원 가입 허용 등은 그리스, 이탈리아, 그리고 영국 정치권에서 ‘연합 탈퇴’를 진지하게 논의하게끔 만들었다.

결국 지금의 유럽연합은 뒤부아나 위고가, 그리고 브리앙이나 모네가 꿈꿨던 ‘하나로 통일되고 평화와 번영을 골고루 누리는 유럽’과는 거리가 상당히 멀다. 하지만 수십 년 전까지만 해도 그토록 격렬히 싸움을 벌였던 나라들이 이 정도의 통합이라도 이루어냈다는 사실도 놀랍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언젠가는 진정 이상적인 통합으로 귀결될 뿐 아니라, 그 경험을 교훈 삼은 전 세계가 또 하나의 EU, 즉 European Union이 아닌 ‘Earth Union(지구연합)’ 체제 아래 하나 될 수 있지 않을까? 오늘날 무력 분쟁, 환경 위기, 에너지 위기, 빈부 격차 등등의 ‘지구적 고민’ 앞에 선 우리는, 그런 ‘담대한 희망’을 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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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규진 | 서울교육대학교 교수/역사저술가
글쓴이 함규진은 여러 방면의 지적 흐름에 관심이 많다. 정치학을 전공하여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한편, 주로 역사와 관련된 책을 여러 권 썼고, 인물이나 사상에 대한 번역서도 많이 냈다. 동양과 서양, 전통과 현대, 보수와 진보 등 서로 대립되는 듯한 입장 사이에 길을 내고 함께 살아갈 집을 짓는 것이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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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간도서
조약의 세계사 2014.12.22
고대부터 현대까지 64개의 조약으로 읽는 화해와 배신, 강압과 화합 그리고 진보의 역사.

‘지뢰는 과연 쓸모 있는 무기일까?’, ‘난징 조약은 불평등조약인가?’와 같은 흥미로운 물음을 던지며 세계사의 이면을 파고들어 역사와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을 넓힌다. 강화도 조약과 같이 우리 역사 속 조약부터 마스트리히트 조약처럼 생소한 조약, 고대의 히타이트-이집트 조약에서부터 현대에 체결된 리우환경협약까지 역사의 흐름을 바꾸고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계를 형성한 조약을 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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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2014.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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