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역사 북미자유무역협정 - ‘자유무역주의’를 표방하며 ‘블록화’를 형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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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529회 작성일 16-02-07 0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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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미자유무역협정은 말이죠, 일자리라는 말입니다. 미국민의 일자리입니다. 벌이가 좋은 일자리입니다. 제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면, 이를 결코 지지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빌 클린턴, 북미자유무역협정 비준안에 서명하며


“그들은 전혀 관심 없다. 우리가 가진 게 없음을, 아무 것도 없음을, 집도 없고, 땅도 없고, 일자리도 없고, 의료보험도 없고, 먹을거리도, 교육의 기회도 깡그리 없음을. 그리고 민주적으로 우리를 대표할 사람을 뽑을 권리도 없고, 외세에 대한 자주성도 없고, 우리와 우리 자식들을 위한 평화도 정의도 일체 없음을. 그러나 이제 우리는 외친다. ‘야! 바스타(그만! 이젠 됐거든).’”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EZLN) 봉기 선언에서


세 가지의 특별함



북미자유무역협정은 세 가지 면에서 특별하다. 첫째, 신자유주의적인 경제 이론에 근거하면서도 세계무역기구(WTO)로 대표되는 다자주의와 다른 ‘지역주의’의 트랙을 바로 그 다자주의의 주도자였던(지금도 그렇다고 해야겠지만) 미국이 설치한 협정이다. 둘째, 초창기의 유럽경제공동체(EEC)와는 달리, 부국과 빈국 사이에(당시 멕시코의 국민총생산은 미국의 4퍼센트에도 못 미쳤다) 자유무역지대를 창설한 사실상 최초의 협정이다. 셋째, 아주 어설프나마, 오랫동안 지리학적인 의미밖에 없었던 ‘북미’를 국제정치 차원에서 하나로 묶어낸 지역공동체 협약이다.

그런 특별한 협정으로 가는 길이 처음부터 분명하지는 않았다. 적어도 1950년대, 미국 경제가 세계 경제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브레턴우즈 협정과 관세와 무역에 대한 일반협정(GATT) 체제에서 미국이 명실공히 국제경제의 중심축이 되고 있던 시절에는 꿈도 꿀 수 없었다. 절대 강자는 자유무역을 할수록 유리하며, 세상의 어떤 나라도 예외가 없는 다자주의 체제에서 무역 조건을 정하는 것이 낫기 때문이다. 그러나 1960년대부터 서유럽과 일본의 경제가 상승세를 타고, 특히 서유럽은 1958년에 EEC를 수립한 뒤 지역주의적 경제 발전을 거듭했으며, 마침내 1971년에 닉슨 선언으로 브레턴우즈 체제가 붕괴되는 상황에서 더 이상 ‘보편적 자유무역은 보편적인 이익을 가져온다’는 말만 되풀이할 수는 없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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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세계무역기구(WTO) 회의. <출처: (cc) russavia at en.wikipedia.org>



그래서 미국은 한편으로는 세계무역기구(WTO) 체제를 추진하여 GATT에는 없었던 무역 분쟁 조정, 반덤핑 규제 권한 등을 갖추고 농업과 서비스, 직접투자 등의 부문까지 포괄하는 ‘다자주의적 세계자유무역체제 2.0’을 추진하는 한편, 캐나다와의 자동차 면세협정(1965), 이스라엘과의 자유무역협정(1985), 통상관세법 제정(1984), 이른바 ‘슈퍼 301조’를 포함하는 종합무역법 제정(1988) 등의 보호무역주의 내지 지역주의적 조치를 취하며 서유럽과 일본에, 그리고 한국 등의 신흥공업국들에 대항해왔다. 그런 일환으로 1989년에는 캐나다와 자유무역협정(FTA)을 맺었던 것인데, 이를 추진했던 레이건 행정부에서는 내친 김에 멕시코까지 끌어들여 북미를 서유럽처럼 하나의 경제권으로 묶자는 구상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경제 규모가 크게 차이 나는 나라와의 자유무역협정 전례가 없었던 데다 노동계 등의 강력 반발이 우려되었고, 세계무역기구 체제를 주도하는 나라가 동시에 명백한 블록화도 추진한다는 모양새가 부담스럽기도 했다. 그래서 공은 뒤이은 부시 행정부로 넘어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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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의 신도’로서 북미자유무역협정을 적극 추진했던 멕시코의 살리나스 대통령. <출처: (cc) Esteban Zissou at en.wikipedia.org>



협정의 물꼬가 트인 것은 오히려 멕시코 쪽에서였다. 멕시코에서 FTA에 적극적으로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당시 멕시코는 1980년대 들어 저성장과 외채 위기 등 경기 침체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 여파로 1946년 이래 사실상 일당독재적인 장기 집권을 해온 제도혁명당이 1988년 대선에서 전에 없는 고전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때 당선된 살리나스 데 고르타리 대통령은 미국 대학교에서 경제학을 공부한, 열렬한 신자유주의 신봉자였다. 그는 재정 긴축, 민영화, 시장 개방, 그리고 기존의 수입 대체 중심 산업구조에서 수출 지향적 산업구조로의 전환 등 과감한 경제개혁을 추진했으며, 초기에는 가시적인 성과를 거두며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시장 개방에 따라 점차 무역 적자가 확대되며 경제 불안이 재연되자, 미국 시장 진출도를 높이고 미국 자본을 유치하는 돌파구로서 미국과의 자유무역협정에 발 벗고 나서게 된 것이다.

결국 1990년 6월, 부시와 살리나스는 미국-멕시코 FTA를 추진하기로 합의한다. 그러자 캐나다가 고민에 빠졌다. 캐나다는 멕시코에는 별로 기대를 하지 않았지만, 미국-멕시코 FTA로 미국 시장에서 캐나다 상품의 점유율이 줄어드는 상황을 염려했다. 또한 이를 기존의 미국과의 FTA를 사실상 재협상하는 기회로 활용해, 좀 더 유리한 조건을 따내자는 속셈도 작용했다. 그래서 미국은 멕시코와 합의한 양국 간 FTA를 추진하지 않되, 기존의 미국-캐나다 FTA에 멕시코가 참여하여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을 수립하자는 데 3국의 입장이 일단 일치하게 된다.



클린턴, 소속 정당 및 지지자들과 투쟁하다



그리하여 1991년에는 캐나다의 토론토에서 6개 실무위(시장 개방, 통상법, 서비스, 투자, 지적재산권, 분쟁 해결 절차)로 나뉜 협상이 3국의 통상장관들을 중심으로 8차에 걸쳐 진행되었다. 이 과정에서 미국은 멕시코와의 협정 체결에 어느 정도의 부담을 안으면서 임했고, 멕시코 쪽이 더 다급했으므로 최종안은 몇 가지 점에서 미국에게 유리하게 체결되었다. 반면 캐나다는 이미 체결했던 FTA를 냉정하게 재정비했으며, 이에 따라 멕시코는 미국의 문화 상품과 교육 서비스, 농산물 등에 거의 무방비로 시장을 내준 반면 캐나다는 이를 철저하게 틀어막았다.

1992년 8월 12일, 3국의 통상장관들이 워싱턴에서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골자에 합의를 마쳤으며, 부시는 ‘타결되었다’고 언론에 공표했다. 공식 체결은 그로부터 4개월이 지난 1992년 12월 17일이었고, 협정문은 전문 및 본문 8부 22장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부시의 발표 이후 미국은 NAFTA 찬반론에 휩쓸렸다. 경제 이론가 이안 플레처의 말대로 “20세기 미국의 역사에서 제일 치열한 자유무역 논쟁”이 벌어진 것이다.

반대론의 선봉에는 노동 운동가들과 환경 운동가들이 섰으며, “NAFTA가 미국 경제에 도움이 된다는 것은 환상”이라고 주장한 폴 크루그먼을 비롯한 일부 경제학자들과 “멕시코가 미국의 일자리를 집어삼키는 무시무시한 소리가 들린다!”고 외친 로스 페로를 비롯한 일부 정치인들이 뒤를 따랐다. 노동계에서는 멕시코로 사업장이 대거 이전될 가능성에 펄쩍 뛰었을 뿐 아니라 논의 과정에서 노동계가 일체 배제되었다는 사실에 분통을 터뜨렸다. 더구나 미국 법률상 무역에 관련된 중요한 정책 결정에는 노동계의 자문이 따라야 하는데, 자문위에 NAFTA 내용과 자문 요구서가 전달된 시점은 ‘자문 마감 시한 하루 전’이었던 것이다. 환경운동 쪽에서는 NAFTA가 환경 규제 철폐의 수단으로 활용될 가능성(실제로 워싱턴 협약, 몬트리올 의정서, 바젤 협약 등 주요한 3개 국제환경협정을 제외한 수십 개의 환경 규제가 이로써 미국과 멕시코에서 철폐되었다)과 멕시코로 이전하는 미국 기업들이 환경오염을 거침없이 유발할 가능성을 우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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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북미자유무역협정 체결 현장. 3구 재무장관들 뒤에는 멕시코의 살리나스 대통령, 미국의 조지 H. 부시 대통령, 그리고 캐나다의 브라이언 멀로니 수상이 서 있다.



NAFTA를 둘러싼 찬반론이 특히 치열해진 까닭은 마침 미국 대선이 이때 치러졌기 때문이었다. 재선을 노리는 공화당의 부시는 당연히 NAFTA 찬성론자였고, 그에 맞서는 민주당의 빌 클린턴은 반대론을 취할 것으로 기대되었다. 그러나 의외로 그는 신중한 모습이었고, 자신은 원칙적으로 자유무역주의자라면서 NAFTA를 근본적으로 반대하기보다 ‘재협상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내세웠다. 결국 적극적인 NAFTA 반대 정치 세력은 제3후보로 나선 로스 페로와 노동계의 후원을 받던 소수의 민주당 의원에 그치는 가운데 클린턴이 제42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된다.

그는 공약대로 재협상에 착수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멕시코에게 환경, 노동 분야 등의 몇 가지 추가 양보를 끌어냈을 뿐 근본적인 변화는 없는 것이어서, 많은 클린턴 지지자들에게 실망을 주었다. 노동계는 ‘NAFTA를 끝내 비준한다면 민주당에 대한 전통적 지지를 철회하겠다’는 입장까지 밝히는 가운데, 백악관과 함께 의회까지 장악한 민주당의 전반적인 NAFTA 반대 입장 때문에 대통령이 거대 여당을 더욱 부담스러워하는 묘한 상황이 빚어졌다.

그러나 정치 협상의 달인이었던 클린턴은 여야 지도자들과 노동계, 환경 운동 대표들을 거의 매일 만나 ‘NAFTA 대박론’을 펼치며 꾸준히 설득했다. 또한 온건 반대파에 속하는 민주당 의원들의 후원자들에게 은밀한 압력을 넣어 그 의원들의 뜻을 돌리도록 하는가 하면, 공화당 의원들에게는 ‘다음 선거에서 민주당을 돕지 않겠다’고 약속하며 그 대가로 NAFTA 지지를 약속받기도 했다.

물론 끝까지 설득되지 않았던 소수의 민주당 의원들도 있었고, 이들은 ‘민주당을 탈당해 신당을 만들겠다’고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현실의 벽에 부딪혔다. NAFTA를 비준하는 한 민주당을 지지하지 않겠다던 강경 노조들도 미국 정치는 공화당 아니면 민주당이고(페로의 참패가 그것을 재확인해주지 않았던가?) 민주당이 그나마 자신들과 조금이라도 가깝다는 현실을 받아들였고, 소수 혁신파 민주당원들도 탈당을 시도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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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1월 20일 대통령에 취임하는 빌 클린턴. 많은 지지자들의 예상과 달리 그는 북미자유무역협정을 강경하게 밀어붙였다.



결국 1993년 11월에 북미자유무역협정은 미국 의회에서 비준되었고, 클린턴은 12월 8일에 서명했다. 이보다 조금 앞서(1993년 6월) 캐나다에서 비준이 이루어졌고, 멕시코에서도 11월 말에 비준되었다. 이로써 “3억 9천만의 소비 인구와 7조 달러 규모의 시장이 창출되었다.”



NAFTA 종말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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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FTA와 신자유주의, 멕시코 정부에 대항해 봉기한 사피티스타 민족해방국(EZLN)의 마르코스 부사령관. <출처: (cc) (Jose Villa) at VillaPhotography at en.wikipedia.org>



하지만 비준이 이루어졌다고 논란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멕시코에서는 비준을 둘러싸고 미국처럼 거센 논쟁이 벌어지지 않았지만, 그것은 일당우위 권위주의가 두드러졌던 멕시코의 정치적 특성 때문이었다. NAFTA가 미국에 대한 종속을 심화시키고, 미국에 접한 멕시코 북부와 남부 사이에, 또한 공업 부문과 농업 부문 사이에 격차를 벌릴 것이라는 우려는 결코 적지 않았다.

이런 우려는 마침내 1994년 1월 1일, NAFTA의 발효일에 맞춰 남부의 치아파스에서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EZLN)이 무장봉기를 일으키는 것으로 불거져 나왔다. 신자유주의 반대, NAFTA 반대, 멕시코의 권위주의와 농민-원주민 차별 정책 반대 등을 내세운 이 봉기는 노골적인 무력 대결보다는 부사령관 마르코스 중심의 ‘이미지와 말의 투쟁’으로 전 세계에서 지지자들을 모으며 아직까지도 건재하고 있다.

여기에 장밋빛 미래를 약속했던 NAFTA가 무색하게끔, 발효 후 1년도 안 되어 멕시코가 최악의 경제난을 맞이한다. 살리나스를 이은 아르네스토 세디요 대통령이 무역 적자와 외채 압력을 해소하고자 대미 달러를 환율 절상하자, 미국 투자자들을 비롯한 국내외 투자자들이 앞다투어 투자금을 환수해 버린 것이다. 뒤이은 금융 대란과 경제난에 멕시코에서는 ‘이게 다 NAFTA 때문이다’라는 목소리가 높아졌으며, NAFTA를 추진한 살리나스가 경제난의 원흉으로 지목된 끝에 해외로 망명해버리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이후 미국도 그동안 멕시코와의 무역에서 꾸준히 누려온 흑자가 환율 폭탄의 결과 적자로 반전되자 ‘이럴 바에야 NAFTA는 뭐하러 했나’는 주장이 대두했다.

당시 멕시코의 외환 위기가 과연 NAFTA 때문이었는지는 아직까지 논란이 많다. NAFTA가 직접 원인을 제공했다기보다는 당시 멕시코의 해외투자가 대부분 단기성이라는 점을 고려하지 않은 무리한 환율 절상이 실책이었다는 지적이 많지만, NAFTA가 멕시코의 대외환경 변화와 관련한 취약성을 더욱 높인 점은 분명하다.

그러나 외환 위기가 진정된 다음에도 NAFTA 회의론은 끊이지 않았다. 기대했던 경제 성장은 미미했던 반면, 양극화와 서민 생활 악화는 두드러졌기 때문이다. 2000년의 통계자료는 멕시코가 NAFTA 이후 농민 200만 명 실직, 평균임금 16% 감소를 겪었음을 보여주었다. 그해 치러진 멕시코 대선은 제도혁명당이 71년 만에 패배하고 국민행동당의 비센테 폭스 케사다가 집권하는 것으로 끝났다. 어쩌면 당의 인기를 회복하고 정권을 유지하고자 그토록 열심히 추진했던 NAFTA가 도리어 발목을 잡았던 셈이다. NAFTA 회의론, 또는 유해론은 2006년 대선까지도 이어졌으며, 당시 한미 FTA를 논의 중이던 한국에도 영향을 미쳤다.



‘기적도 재앙도 없었다’



NAFTA 이후 20년이 지난 지금, 그 결산은 멕시코의 사파티스타나 미국의 진보 지식인들이 우려했던 것만큼 참담하지는 않다. 하지만 그 추진 과정에서 기대되었던 것처럼 마냥 양호하다고도 볼 수 없다. 그동안 3국의 GDP는 평균 63% 성장했고, 수출 역시 미국과 캐나다는 약 3배, 멕시코는 7배의 수출 신장을 기록했다.

하지만 멕시코의 경우 수출액의 절반 이상이 대기업에 집중되고, 북부와 남부의 경제 격차도 확실히 더 커진 모습이다. 멕시코의 대미 무역수지는 1994년에 흑자로 돌아선 이래 계속 흑자폭이 늘고 있으며, 전체 무역수지도 흑자 또는 소규모 적자가 유지된다. 무엇보다 해외직접투자액이 현저하게 늘어났으며, 이것은 NAFTA로 인한 대외 신인도 향상 덕분으로 풀이된다. 미국과의 접경지대에 위치하여 미국 기업들을 위한 부품 제조나 상품 조립을 주로 수행하는 ‘마낄라도라’ 산업체들은 실질적으로 멕시코 경제에 기여도가 높지 않다는 지적도 있지만, 당초 예상보다 빠르게 성장 및 업종 전환하여 과거의 저가 생활용품에서 고부가가치 첨단산업 제품으로 주력 패턴이 바뀌었다. 하지만 농업 부문이 치명적인 피해를 입고 수백만 명이 고향을 떠나 근근이 연명하게 되었음 부정할 수 없으며, 미국은 국가보조금을 일체 철폐한다는 자유무역협정의 원칙에도 불구하고 자국 농산물을 보호하기 위해 2002년 이후 대규모의 보조금을 퍼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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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코의 한 마낄라도라 공장 내부.



미국은 GDP의 견실한 성장을 얻었으나 대신 무역수지의 악화를 맞이했고, 무엇보다 NAFTA 발효 당시 1700만 개였던 제조업체 수가 1200만 개로 줄고, 70만 개로 추산되는 일자리가 감소했음은 뼈아플 수밖에 없다. 1992년 대선에서 페로가 던졌던 암울한 예언이 맞았으며, 클린턴의 호언장담이 틀렸던 것이다. 당초에 캐나다와, 그리고 멕시코와 이미 필요한 만큼은 경제자유화가 되어 있었던 상황에서 미국이 대체 왜 NAFTA를 밀어붙였던 것인지 이해할 수 없다는 지적도 있다. 그래서 관건은 경제보다는 정치가 아니었는가, 다시 말해서 멕시코와 멕시코의 친미 정권을 계속 미국의 품 안에 두고, 유럽연합만큼은 아니더라도 아메리카에서 미국이 중심이 되는 정치 블록을 수립하자는 계산이 NAFTA의 진짜 동기가 아니었겠는가 하는 추정도 나온다.

아무튼 미국은 NAFTA에 그치지 않고 남미까지 하나로 묶는 미주단일시장(FTAA)을 추진했으나, 그 노력은 2005년에 공식적으로 무산되었다. 그러자 다시 경제에 안보를 결합한 북미안보번영동맹(SPP)을 추진했지만 역시 2009년에 좌초된다. 이처럼 미국의 ‘유럽연합 따라잡기’ 시도가 NAFTA 이후 여의치 않은 것은 ‘기적도 재앙도 없는’ NAFTA의 성과 때문, 그리고 중국과 유럽의 영향력 증대 때문일 것으로 보이지만, 미국은 포기하지 않고, 2009년에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으로 미국, 중국, 일본, 한국 등이 하나의 자유무역지대에서 공존공영하자고 선언했다.

사실 두 나라 사이에 이루어지는 무역이 누구에게 얼마나 이익인가 하는 문제는 정확하게 따지기 어렵다. 아무튼 뭔가 둘 사이에 다른 점이 있기에, 이익이 발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FTA란 그런 이익을 극대화하면서 동시에 둘 사이의 다른 점을 최소화한다는 모순 같은 과제를 던지고 있다. 게다가 그 나라들의 이질성이 지나치게 클 때, 한쪽의 힘이 다른 한쪽보다 압도적으로 클 때, ‘호혜평등’이라는 이상은 의심스러워질 수밖에 없다. 아무튼 이미 하나가 되었고 갈수록 긴밀하게 상호의존하고 있는 지구촌. 우리는 그런 가운데 새로운 이익을 얻으면서 그것이 누군가의 소외, 착취, 종속으로 이어지지 않는 묘책을, FTA도 포함하여, 숙고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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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규진 | 서울교육대학교 교수/역사저술가
글쓴이 함규진은 여러 방면의 지적 흐름에 관심이 많다. 정치학을 전공하여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한편, 주로 역사와 관련된 책을 여러 권 썼고, 인물이나 사상에 대한 번역서도 많이 냈다. 동양과 서양, 전통과 현대, 보수와 진보 등 서로 대립되는 듯한 입장 사이에 길을 내고 함께 살아갈 집을 짓는 것이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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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간도서
조약의 세계사 2014.12.22
고대부터 현대까지 64개의 조약으로 읽는 화해와 배신, 강압과 화합 그리고 진보의 역사.

‘지뢰는 과연 쓸모 있는 무기일까?’, ‘난징 조약은 불평등조약인가?’와 같은 흥미로운 물음을 던지며 세계사의 이면을 파고들어 역사와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을 넓힌다. 강화도 조약과 같이 우리 역사 속 조약부터 마스트리히트 조약처럼 생소한 조약, 고대의 히타이트-이집트 조약에서부터 현대에 체결된 리우환경협약까지 역사의 흐름을 바꾸고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계를 형성한 조약을 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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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2014.0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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