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역사 미드웨이 해전 (1942) 1 - 전세를 역전시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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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98회 작성일 16-02-07 0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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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전의 배경



1942년 4월 18일 일본 해군은 미 항공모함에서 출격하여 일본을 공습하고 중국으로 탈출했었던 두리틀의 폭격에 크게 충격을 받았다.

항속 거리가 긴 쌍발 육상 폭격기를 항공모함에 적재하고 출격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었던 일본 군부는 공습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었고 충격을 받은 일본 국민들의 군부 비난은 크게 일었다.

일왕 히로히토가 거주하는 도쿄에 적의 폭격이 가해지는 것은 당시의 군민 모두 상상할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해군 야마모토 연합함대 사령관은 대담한 결심을 하였다. 야마모토는 전쟁 전부터 염두에 두고 있던 미드웨이- 알류산 열도 작전을 실행하기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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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계선의 동진 <출처 : wikipedia>



그는 개전후의 2단계 공세에서 중부 태평양을 주요한 목표로 보고 이를 상부에 우겨서 관철시키고 행동을 구상 중이었다.

즉 미드웨이섬을 점령하여 초계선을 멀리 하와이 근처까지 동진시켜 두리틀의 폭격대와 같은 기습의 가능성을 없애버리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해 10월쯤 예정된 하와이 점령 작전의 교두보로 삼겠다는 의지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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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모토 이소로쿠 연합함대 사령관 <출처 : wikipedia>



그의 목표는 또 있었다. 그는 미국이 하와이에 가까운 미드웨이같은 전략적 가치가 큰 섬을 일본이 점령하고 있으면 호주와 남태평양 사이에서 활동하는 미 해군의 기동부대가 급히 달려올 것이고 이를 격멸하여 전쟁의 종말을 지어보겠다는 결심을 하였다.

일본 육군은 야마모토의 작전안에 공감하여 미드웨이와 알류산 작전에 필요한 병력을 협조하기로 하였다.



미드웨이 작전 연기 주장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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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구모 주이치 중장 <출처 : wikipedia>



그러나 반론도 만만치 않았었다. 반론은 해군 내부에서 나왔다.

1941년 12월 진주만 기습 작전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제 1기동함대(나구모 기동부대) 사령관 나구모 주이치(南雲 忠一)중장은 진주만 공격 후 계속해서 남태평양과 인도양의 여러 작전에 동원되었던 함정과 항공기, 군인들의 피로가 누적되어 일정기간 정비와 휴식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며 작전의 연기를 강하게 건의하였다.

그의 건의는 휘하 항공전의 중요한 전문가들인 항공 참모 겐다 미노루대좌나 제 2 항공전대 사령관 야마구치 다몬소장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산호해 해전에서 큰 타격을 입고 수리중인 즈이카쿠의 수리가 끝나고 그의 자매함 쇼카쿠가 인원 충원과 훈련이 완료된 후에 합류하기를 기다려서 작전을 실시해야 한다는 의견도 만만치 않았다.

그러나 야마모토는 이를 모두 거부하였다. 그의 생각에 미드웨이 해전은 시간을 다투는 것이었다.



야마모토의 고집



두리틀 공습의 충격이 가시지 않은 4월 28일 연합함대 기함 야마토에서 연합함대 제 1단계 작전 전훈연구회가 열렸고 이어서 미드웨이 공략 작전의 도상(圖上) 연습이 있었다.

도상 연습의 결과는 만족스럽지 못하였다. 미군의 반격도 만만치 않았고 일본군도 보급 등의 여러 문제들이 노출되었다.

특히 야마모토가 야심차게 기대하고 있는 미 항모부대의 포착과 격퇴의 가능성은 보장할 수가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나구모 기동부대 구사카참모장은 그의 자서전에서 미드웨이 점령과 미 기동부대 격멸, 두 목표를 동시에 달성하고자 하는 것은 두 마리의 토끼를 쫓는 것과 같다고 회고하였다.

만약에 미드웨이 해전에 참가했더라면 그 전세의 방향을 돌려놓았을지도 모르는 두 척의 항모들, 쇼카쿠는 산호해 해전에서 입은 손상 수리에 무려 3개월이나 걸리는데다가 산호해 해전에서 조종사 손실이 절반에 달했던 자매함 즈이카쿠는 트럭 섬에 정박시키고 정비하기로 한 상황으로 이 주력 항모 두 척의 작전 참가 배제는 불안스런 것이었다(미국 기록은 즈이카쿠가 일본 구레 군항에 입항해 있었다고 쓰여 있다).

결과적으로 일본 해군의 총동원 가능한 항공기는 319기로 예상되었지만 미군은 하와이에서 출격하는 육상기까지 포함하면 348기로서 비슷한 규모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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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모 즈이카쿠 – 쇼카쿠는 비슷한 크기와 모습을 가지고 있다. <출처 : wikipedia>



미국보다 압도적인 전투력을 집중해서 작전에 돌입하지 못하는 상황을 걱정하는 간부들이 많았다.

후에 평가되었지만 미드웨이 전장에서 먼 북쪽 알류샨 열도에 경항모 류조와 호쇼를 분산 투입하여 전투력을 분산한 것은 전투력 집중의 원칙에서 볼 때 야마모토의 또 다른 큰 실수였다.

그러나 작전에 집착한 야마모토는 본 작전에 이견을 가진 함장들은 조속히 퇴함하라고 위협의 훈시를 함으로서 반대나 연기 의견에 쐐기를 박았다.



사전 탐지한 미국의 정보력



1942년 5월5일 해군 나가노 군령부장은 야마모토에서 대해령(大海令) 제 18호를 발령하여 작전 개시를 알렸다.

이 무렵부터 일본군보다 항상 한 수 위였던 미군의 정보 능력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1942년 3월 4일 장거리 비행 능력이 뛰어난 일본군의 대형 2식 비행정 두 기가 하와이 오하우 섬을 폭격하고 같은 달 11일에 비행정 1기가 미드웨이섬에 접근했다가 격추 된 일이 있었다.

미 태평양 함대 사령관 체스터 니미츠 제독은 이는 일본이 이 해역에 공세를 취할 징후라고 판단하고 휘하 부대에 엄중한 경계를 지시했었다.

일본군은 진주만 공격 직전 변경한 암호 체계를 전략 암호 “D"라고 불렀는데 이 암호는 미 해군에게 JIN-25암호라고 알려져 있었고 일부 암호 해독에 성공하고 있었다.

미 해군은 1942년 4월말부터 암호의 부분 해독에 힘입어 일본군이 태평양 해역에서 대규모의 공세 작전을 전개할 농후한 가능성을 포착했다.

그러나 그 작전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는 불명이었다. 일본군의 암호에 자주 등장하는 AF라는 암호는 공격 목표로 판단되었는데 이것이 어느 곳을 뜻하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워싱턴의 미 합참본부는 이 미지의 암호가 하와이를 지칭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미 육군 항공대는 이것이 알래스카나 미국 서해안이라고 추측했었다.

5월 중순까지 여기에 대해서 아무런 정보가 없이 시간이 흘러갔지만 태평양 함대 사령관 니미츠 제독은 각종 정보를 종합 분석해보고 이곳이 하와이 인근 미드웨이섬일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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죠셉 존 로체포트 <출처 : wikipedia>



하와이 소재 해군 첩보부도 그 AF가 미드웨이라는 가정으로 정보 수집에 집중하였다. 블랙챔버라 불리우는 이 암호 부대는 워싱턴에서 하와이로 급파된 죠셉 존 로체포트(Joseph John Rochefort)가 지휘하고 있었다.

그는 미 해군 암호 첩보분야에서 전설적인 전공을 남긴 사람으로서 일본의 진주만 기습을 암호 분석으로 사전 예견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5월 11일 첩보대의 장교 야스퍼 홈스의 제안으로 기가막힌 작전이 만들어졌다.

미드웨이와 오하우 섬의 중간에 깔린 해저 케이블로 미드웨이섬 기지 사령관과 사전에 모의한 후 무선으로는 거꾸로 하와이에 미드웨이섬의 해수 정화장치가 고장나서 식수가 다 떨어져 간다는 긴급 위장 보고를 평문으로 하게 하였다.

미드웨이섬의 사령관은 그대로 하였다. 이 평문 전문이 일본이 점령하고 있던 웨이크 섬의 일본군 통신 부대에게 감청되어 암호문으로 본국에 보고되었다.

“미드웨이에 식수가 떨어져가고 있다.”라는 내용인데 여기서 미드웨이를 지칭하는 암호인 AF라는 내용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이 무선은 다시 미 해군 통신 정보대에게 감청되었다. 감청된 전문은 미 해군 통신 감청 본부에게 보고되어 비로소 AF가 미드웨이임이 밝혀졌고 이어서 이곳에 대규모의 일본군 공격이 있을 것이라는 정보 판단이 확정되었다.

추가로 암호가 더 해독되어 미드웨이 공격부대의 병력과 지휘관 예정 항로등과 공격 시기가 더 밝혀졌다.



미 함대의 출동



미드웨이 침공을 격퇴하기 위한 미군의 작전계획은 5월 28일 태평양 함대 사령관 제 29-42로 발령되었다.

그 주요 내용들은 첫째, 원거리에서 적을 발견, 포착하여 기습을 방지할 것. 둘째, 적의 항모들을 격파하여 공습을 저지할 것.

셋째, 잠수함을 초계와 공격용으로 적극 활용할 것. 넷째, 미드웨이섬 수비대는 전력을 다해 섬을 사수할 것 등이었다.

미군은 작은 미드웨이섬에 해병 수비대 3,000명을 급파하고 항공기만 150기를 파견하였다. 조밀한 대공 포대망이 급속하게 구성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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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드웨이섬 – 두 섬으로 구성되어 있다. <출처 : wikipedia>



니미츠 대장은 이미 남태평양에서 산호해 해전을 겪은 플레처 제독의 17 기동부대(항모 요크타운과 호위함들)를 하와이로 이동하게 하였다.

니미츠 제독은 가용 항모에서 많은 제약이 있었다. 5월에 있었던 산호해 해전에서 항모 렉싱턴이 격침되었고 요크타운은 큰 수리를 요하는 손상을 입어 진주만의 도크에서 수리 중이었다.

항모 사라토가도 일본 잠수함의 어뢰 공격을 받아서 수리 중에 있었다.

니미츠 사령관은 자칫하면 플렛처 제독의 16 기동부대의 단 두 척의 항모, 엔터프라이즈와 호넷으로 힘겨운 작전을 시도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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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항모 엔터프라이즈 <출처 : wikipedia>





미 항모 호넷-두리틀 폭격대가 발진한 항모 <출처 : wikipedia>




한 가지 가능성은 5월 27일 하와이에 도착하여 수리 도크에 들어가 있는 요크타운의 수리가 어느 정도인지에 따라 요크타운을 미드웨이 해전에 투입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였다.

요크타운의 최대 파괴 부분은 연료 탱크로서 이를 제대로 수리하려면 하와이 수리 조선소에서는 불가능하고 미 서해안의 큰 수리 조선소에 가서 장기적으로 수리해야 하는 심각한 상태였다.

그러나 하와이 수리 도크의 인원들은 72시간의 불면불휴의 돌관 작업으로 요크타운을 일단 출항을 할 수 있게 하는 응급조치를 완료하였다.

요크타운은 5월 30일, 수리 도크에서 빠져나와 전장으로 달리는 동안 공작함(수리선)이 옆에 붙어 계속 긴급 수리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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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크타운 -미드웨이 출동 전 수리 독크에 있는 모습 <출처 : wikipedia>



일본측은 요크타운이 산호해 해전의 피해가 너무 커서 출동이 불가능하리라고 보았다. 만약 미 기동부대의 반격이 있다면 미군이 미드웨이 작전에 할제 제독의 16기동부대인 엔터프라이즈와 호넷, 2척 외에 경항모 와스프가 출동하리라고 판단했었다.

1942년 5월 28일. 미 해군의 엔터프라이즈와 호넷으로 편성 된 제 16 기동부대(TF-17)가 주력으로 출동하였다. 이 부대는 지난 4월에 두리틀의 폭격대를 발진시킨 부대다.

이어서 5월 30일. 17 기동부대의 요크타운이 뒤를 이어 출동하였다. 17 기동 부대는 플레처 제독이 계속 지휘를 맡았다. 그러나 16기동부대의 사령관인 맹장 할제 제독은 피부병으로 병원에 입원중이라서 스플루언스 제독이 부임하였다.

항모 작전에 별다른 경험이 없던 그는 참모장 엘리엇 브라우닝 대령의 조언을 대폭 받아들여 작전을 수행하기로 하였다. 이 콤비의 협동 작전은 커다란 성과를 만들게 된다. 연합한 두 기동함대의 통합 지휘는 플레처 소장이 맡았다.



야마모토 사령관과 전함 야마토(大和)의 출동



한편 일본은 5월 27일 나구모 주이치 해군 중장이 지휘하는 제 1 항공전대가 엄중한 무선 봉쇄를 실시하며 출격하였다. 주력 항모들은 제 1 항공전대의 아카키, 카가, 제 2 항공전대의 히류, 소류의 네 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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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항모 아카키 <출처 : wikipedia>





일 항모 카가 <출처 : wikipedia>





일 항모 히류의 자매함인 소류 <출처 : wikipedia>




6개월 전 하와이를 공격했던 기동부대에서 제 5 항공전대의 쇼카쿠와 즈이카쿠가 빠진 것이었다.

참가했더라면 미드웨이 해전의 운명을 바꿔 놓았을지도 몰랐던 항모 쇼카쿠는 산호해 해전에서 입은 손상 수리에 무려 3개월이나 걸리는데다 산호해 해전에서 조종사 손실이 절반에 달했던 자매함 즈이카쿠는 트럭 섬에서 조종사 충원과 재정비를 하고 있었다.

전함 기리시마와 하루나 두 척의 전함이 호위함대의 주축으로 동반하였다. 그 뒤를 세계 최대 전함 야마토를 포함해서 5척의 전함을 중심으로 대함대가 거리를 두고 출동하였다. 사상 최대의 함대가 출동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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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대 전함 야마토 <출처 : wikipedia>



6월 3일 오후, 나구모 기동부대를 후속하던 주력 부대 기함 야마토에 승함했었던 연합 함대 사령관 통신 감청반은 미드웨이섬 부근에서 미군이 발신하는 항모 호출의 신호를 잡았다.

항모가 미드웨이 근해에 나타났다는 징조였다. 보고를 받은 야마모토 사령관은 즉시 앞서 가는 나구모 기동부대에 전달하도록 지시하였다.

그러나 무선 봉쇄상태에서 이렇게 할 수는 없어서 앞서가는 나구모 부대에서도 이를 접수했을 것이라는 가정을 하고 전달을 포기하였다.

항모의 통신 안테나는 전함의 통신 안테나 수신 능력보다 낮아서 기동부대에서는 이를 감청하지 못했다. 만약에 나구모 부대가 이 정보를 접수하고 경계를 했더라면 미드웨이에서의 전황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미군은 5월 30일 이후 미드웨이 기지 항공대 소속 32기의 PBY 카타리나 비행정들을 초계 임무에 배치하고 있었다. 6월 2일, 플랫처 소장의 제 17 기동부대와 스플루언스 소장의 제 16 기동부대가 미드웨이섬 북동 해역에서 합류하였다.



발견된 일본 함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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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BY 카타리나 –걸작 비행정으로 정찰 폭격 수송등의 다목적기였다. <출처 : wikipedia>



6월 3일 오전 9시, PBY 카타리나 비행정 1기가 마드웨이에서 930km 떨어진 곳에서 일본 수송선단을 호위하고 있던 제 2 수뢰전대를 발견하였다.

일본이 미국 함대를 발견한 것보다 하루가 빠른 것이었다. 급보를 받은 미드웨이 제 7 육군 항공 부대 분견대 소속 B-17 9기가 발진하였다.

오후 4시경. 선단을 발견한 B-17 부대는 폭격을 개시하였다. 폭격대장 월터 스위니 중령은 사령부에 자기 폭격대가 일본 전함, 공모, 수송선등을 공격하였고 다수의 적 함선을 격파했다고 보고했다.

실제로는 두 척의 일본 수송선이 함체 가까운 해면에 지근탄 공격을 받았을 뿐이다.

6월 3일 21:30, 하와이 섬에서 미드웨이로 파견 된 PBY 카타리나 비행정 4기가 어뢰로 무장하고 뇌격 출격을 하였다.

카타리나 뇌격대는 일본 선단의 선두 선박을 발견하고 뇌격을 가했다. 야간인데다가 대공 엄호를 맡아줄 호위 함대와 잠시 격리되었던 순간이어서 야간 뇌격은 완전한 작전 성공을 하였다.

두 척의 수송선단 선박이 어뢰와 기총소사의 공격을 받고 11명의 사망자가 발생하였다.

미드웨이에서 보내온 적 함대 발견의 보고를 받은 태평양 함대 사령부는 뒤따른 B-17 공격 보고에 폭격을 가한 함대는 적 주력인 기동 부대라고 판단하였다.

긴급 전문이 미 기동부대에 타전되었다. 기동함대 사령관 플레처 소장은 하와이 함대 사령부의 정보 판단과 의견을 같이 하였다.



미 기동부대의 접근



6월 3일 저녁, 미 기동함대는 일본 기동함대를 영격할 예상 지점을 향하여 남서로 진로를 변경하였다.


6월 4일 01:30. 미 항모 부대의 항공대원들은 이른 아침을 먹고 후 출격대기를 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한 시간 후 대원들은 정렬하여 함장과 비행대장으로부터 앞으로 있을 출격에 대해 주의와 훈시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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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드웨이 승리의 일등공신 SBD 돈트레스 급강하 폭격기 <출처 : wikipedia>



04:15. 미드웨이 기지에서 PBY 비행정이 출격하였고 15분 후 제 17기동 함대의 항모 요크타운에서 SBD 돈트레스 급강하 폭격기가 정찰 임무를 받고 출격하였다.

정찰을 나간 SBD 폭격대가 일본군의 수상 정찰기 1기와 교전을 했다고 보고한 시점에 나구모 기동부대는 요크타운의 서방 370km를 항해하고 있었다.



일본 항공대의 미드웨이 공습 발진



04:30에 나구모 기동부대는 미드웨이 공습대를 발진시켰다. 공격대장은 미드웨이 해전에서 전사하게 될 도모나가 조이치대위였다. 공격대의 규모는 상당히 컸다.

99식 함상폭격기(급강하 폭격기)36기, 97식 함상공격기(수평 폭격기) 36기, 영식 함상전투기(제로 전투기) 36기, 합계 108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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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뢰 장착하고 출격하는 97식 함상 공격기-수평 폭격기 <출처 : wikipedia>





99식 함상 폭격기- 급강하 폭격기 <출처 : wikipedia>





영식 함상 전투기 – 제로 전투기 <출처 : wikipedia>




원래는 진주만 공격대와 인도양 실론 섬 공격대를 지휘했던 후치다 미쓰오중좌가 지휘할 예정이었으나 그는 맹장염이 도져 수술을 받았기에 대신 도모나가가 지휘했던 것이다.

일본군의 공략 부대(곤도오 부대)가 상륙작전을 실시할 날짜를 6월 7일로 잡았기 때문에 그 전에 미드웨이섬의 전투력을 섬멸할 목적으로 항공대의 공습이 행해졌던 것이다.

출격한 함재기들 외에 있을 수도 있는 미 항모 출현에 대비하여 각 항모 격납고에는 어뢰로 무장한 함상 공격기들과 대함이나 대지 공격의 무장을 하지 않고 불시의 상황에 융통성있게 대비하기 위한 예비기들이 있었다.

일출전에 공격대의 출격에 앞서 정찰기 여섯기의 출격이 있었다. 제 8전대 사령관 아베 소장은 중순양함 도네의 정찰 해역을 중시하고 제일 먼저 도네의 정찰기부터 발진시켰다.

정찰기들은 모두 중순양함에서 발진한 95식 수상 정찰기나 영식 수상 정찰기들이었다. 공격대를 발진시킨 나구모 기동부대는 침로를 바꾸어 함재기 수용을 위해서 미드웨이 방향으로 근접 항해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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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식 수상정찰기 <출처 : wikipedia>



05:15, 아데이 대위가 조종하는 미 해군의 PBY 카타리나 비행정은 중순양함 도네에서 발진한 영식 수상정찰기를 발견하였다.

부근 해역에 일본 함대가 있으리라고 판단한 그는 근처 해역을 수색한 결과 대어를 낚았다. 나구모 기동부대를 발견한 것이다. 그는 즉시 본부에 타전했다. “일 항모 1, 미드웨이 320도, 150 해리.”

일본 함대도 PBY 비행정을 발견하였다. 선두의 경순양함 나가라와 뒤따르던 전함 기리시마는 비행정 발견과 동시에 연막을 살포했다.

나무모 기동부대의 제로 전투기들이 급히 발진하여 요격했지만 PBY 비행정은 구름 속으로 도주해서 제로 전투기들을 따돌렸다. PBY는 구름을 이용하여 숨바꼭질을 계속하면서 일본 함대를 미행했다.




김창원 | 전사연구가
연세대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시라큐스 경영대학원에서 MBA를 취득했다. 장교로 군 복무, 기갑부대 전차 소대장을 지냈다. ‘울프 독’이라는 필명으로 전사와 역사를 다룬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다. 국방부 정책·정보 블로그(N.A.R.A.)에 기고하고 있으며, 저서로 [공격 마케팅]이 있다


제공

유용원의 군사세계
http://bemil.chosun.com/



발행2014.0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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