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역사 과달카날 2차 해전 - 태평양 패권을 두고 공방을 펼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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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512회 작성일 16-02-07 0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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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함(戰艦)은 2차 세계 대전 직전만 해도 전투함들 중에서 제일 큰 대형함이었다. 지금은 역사 속으로 사라진 함형(艦型)이 되었지만 20세기 초반부의 해상 권력사를 좌우한 것도 이 전함들이었다.

전함의 크기와 포의 위력을 중시하는 거함대포주의(巨艦大砲主義)는 러일 전쟁때 쓰시마 해전과 1차 세계대전의 유틀란트 해전을 거치면서 거침없이 성장해 태평양 전쟁 개전 때는 일본의 야마토(大和)나 무사시(武藏)같이 72,000톤을 자랑하는 거대한 슈퍼 전함들을 출현시키기도 했다.

1941년 5월 영국 전함들이 독일의 전함 비스마르크를 추격해서 격침시켰을 때만해도 전함의 시대가 그렇게 쉽게 막을 내릴 것이라 예상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태평양 전쟁이 개막되고 나서 불과 몇 개월 동안에 발생했었던 여러 해전들은 대포의 시대에서 항공력의 시대로 변했음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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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달카날의 핸더슨 비행장



사실 대형 전함들은 태평양 전쟁 내내 항공모함들에게 주연 자리를 내주고 조연의 역할을 감수해야 했었다. 단 한번의 예외가 있었다.

미일 양국의 대형 전함들이 맞붙어서 일본 전함이 격침된 해전이 태평양 전쟁 중에 발생했다. 해전이 벌어진 장소는 과달카날에서 아주 가까운 해협이었었고 때는 1942년 11월 15일 자정이 조금 지난 시각이었다.

은밀히 접근한 미국 전함이 가한 기습 사격에 일본의 전함이 맥을 못 추고 격침되는 것으로 결판이 났다. 미 전함의 레이더와 우수한 포술이 이 야전에서 미 전함의 승리를 가능케 했다.

해전의 배경을 먼저 알아본다. 1941년 6월 미드웨이에서 일본군에게 일격을 가해 영토의 팽창에 브레이크를 건 미군은 불과 두 달이 지나지 않은 1942년 8월 7일 일본의 최남단 전선에 위치한 과달카날 섬에 상륙하였다.

일본군은 보급과 방어에 절대 불리했던 이 원거리의 전장을 포기하는 융통성있는 전략을 외면하고 오직 이 섬에서 미군들을 꼭 몰아내겠다는 우직한 전략을 고수했다. 덕분에 일본군은 피를 말리는 소모전에 말려들었다.

교두보 확보에 성공한 미군은 일본군들이 건설하던 미완성 비행장을 단숨에 완공하여 이 섬에 해병대와 해군의 항공대는 물론이고, 육군 항공대의 항공력을 집중시켰다.

미드웨이 해전에서 전사한 해병 항공대의 뇌격대 대장 핸더슨 소령의 이름을 딴 핸더슨 비행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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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군복을 입은 드문 사진의 히로히토



이 비행장은 태평양 전사에 기념비적인 공적을 깊게 새기게 된다. 과달카날이 미군 반격의 시발점이라는 것을 뒤늦게 알아챈 일본은 과달카날에 계속 병력을 증파했지만 성과는 보잘 것이 없었다.

과달카날 방어 성공 여부는 보급이 좌우했는데 미군의 공격으로 일본군의 보급 작전은 크게 지장을 받았다.

전투가 전개되면서 일본 해군은 함대의 보급 활동에 가장 큰 위협이 되는 존재가 미군의 항공력이며 그 항공력의 근원지가 바로 과달카날의 핸더슨 비행장이라는 것을 깨닫고 이를 파괴하고자 여러 수단을 동원했다.

일본 해군 항공대는 수시로 라바울에서 과달카날까지 왕복 8시간이나 소요되는 장거리 출격을 했으나 핸더슨 비행장의 항공력 격멸은 여의치 않았다.

일본 해군이 주간에는 폭격기를 동원한 장거리 폭격을 연속 가했었고 야간에는 전함들이나 순양함들을 과달카날 해안에 접근시켜 포격도 해보았지만 핸더슨 비행장의 항공기들은 건재하여 계속 일본군을 괴롭혔다.

10월 말 일본 해군은 진퇴양난으로 빠져 들어가는 과달카날의 전국을 일거에 만회하고자 두 가지의 작전 목표를 부여한 함대 작전을 구상한다.

미국 항모 호넷이 격침 된 산타 크루즈 해전에서 남태평양의 미국 항모 세력이 사실상 궤멸되었다고 판단하고 과감한 과달카날 작전을 결행하기로 하였다.

하나는 일본 육군 38사단을 과달카날에 증파시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전함들로 과달카날의 핸더슨 비행장을 야간 포격하여 무력화시키는 것이었다.

러일 전쟁 때인 1904년 5월 15일, 여순항 봉쇄 작전 중 일본이 국력을 기울려 편성했던 주력함대의 여섯 척 최신형 영국제 전함 중에 두 척의 전함인 하츠세와 시키시마가 러시아 해군이 설치한 기뢰에 걸려 격침되는 큰 피해가 있었다.

1942년 11월 12일. 일본 연합 함대 사령관 야마모토 이소로쿠는 전함 두 척을 주력으로 한 공격 함대를 편성해서 과달카날로 출동시켰다. 일본군 대규모 증파와 핸더슨 비행장 분쇄가 목적이었다.

제 5차 정신대(挺身隊)라는 특별 임무 부대 명칭이 붙여졌다. 함대의 주력함들은 제 11전대 소속 두 전함 히에이와 기리시마였다.

이 전함들은 일본이 1911년 영국에서 도입했던 공고오함을 모델로 제작한 36,600톤의 전함들이었다. 히에이는 1914년에 취역하였고 기리시마는 1915년에 취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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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 년 히에이





1932년 개장 후의 기리시마





진주만 공격 기동부대 호위함으로 항해중인 히에이와 기리시마




태평양 전쟁 초기 히에이와 기리시마는 건조한지 이미 30년이 넘은 고령함들이었지만 그간 개조를 통해 현대화했었고 30노트의 쾌속을 자랑하는 고성능을 발휘하였다.

이들 전함들은 그 고속 성능으로 진주만 공격 공모 부대의 주력 호위함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히에이는 초대형 전함 야마토 건조 전에 야마토함의 핵심 최신 장비들의 테스트용으로 활용하였기 때문에 특히 성능이 뛰어났다.

히에이는 또 특별한 내력을 가지고 있다. 일왕 히로히토는 히에이를 좋아해서 해군 관함식에 꼭 히에이를 사용했다.

1942년 11월 9일 남태평양의 일본 해군 근거지 트럭 섬에서 히에이와 기리시마가 편성된 대함대가 출격하였다. 나흘 뒤인 13일 과달카날에 훨씬 가까운 쇼트랜드 군도에서 일본 육군 38 사단 병력과 보급품을 적재한 수송선 11척이 출항하였다.

이들 수송선단은 최고 속도 15노트의 느린 속도로 항해하기 때문에 미리 쇼트랜드 군도에 와서 대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군도는 과달카날 미군 항공대의 작전거리 밖에 있었지만 일본측에서 보자면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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윗쪽 작은 원 안의 쇼아줄 섬 끝이 쇼트랜드 군도. 아래 큰 섬이 과달카날 섬이다. 쇼트랜드 섬들은 작아서 군도 이름이 나타나지 않았다.



첫 번째 해전인 과달카날 1차 해전에서는 일본 해군은 비교적 잘 싸웠다.

일왕 히로히토가 제일 사랑하던 전함 히에이를 잃었지만 미군 함대 사령관 대니얼 캘러헌 소장과 부사령관 노먼 스콧 소장을 전사시키고 미 순양함 두 척(애틀랜타와 주노)과 구축함 네 척을 격침했다.

하루 밤사이에 같이 전사한 두 사람은 미군이 태평양 전쟁에서 잃은 유일한 제독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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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니얼 캘러헌 제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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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먼 스캇 제독



히에이는 미 구축함 세 척의 집요한 공격으로 항타가 고장 나는 치명상을 입고 일본 함대 기지가 있는 트럭 섬으로 철수하던 도중에 미 항노 엔터프라이즈의 항공대와 과달카날 해병 항공대가 가한 두 번의 공격에서 여러 발의 어뢰를 얻어 맞고 항해 불능 상태가 되었다.

더 이상 항해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아베 사령관은 자침(自沈)을 명령했다.

미군은 12일과 13일에 벌어진 해전에서 큰 타격을 받는 전술적인 패배를 당했으나 일본 함대 사령관 아베 히로아키 중장이 작전을 종료하고 철수하는 바람에 가까스로 일본군의 과달카날 지원을 차단할 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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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파되고도 미 B-17 폭격기의 폭격을 회피 기동하는 히에이





아베 히로아키 [阿部 弘毅] 중장




서로가 치고 받던 치열한 야간 해전 후에 미국은 단지 순양함 한 척과 구축함 한 척만이 운행 가능했었으나 일본은 전함(기리시마) 한 척과 순양함 한 척, 그리고 구축함들이 네 척이나 남아 있었으니 아베가 작심하고 작전을 계속 진행했으면 원래의 목적을 달성 했을 것이다.

1차 과달카날 해전에서 목표 달성에 실패했으나 일본 연합함대 사령관 야마모도 이소로쿠(山本 五十六) 제독은 과달카날에 증원군 파견과 핸더슨 비행장에 대한 철저한 포격을 단념하지 않았다.

1차 과달카날 해전에서 소극적인 지휘로 일관해서 작전을 실패로 이끈 아베(阿部 弘毅) 중장에게 격노한 야마모토는 귀환 항해 중에 있던 아베를 해임해 버리고 그 후임으로 곤도 노부다케(權藤 信介) 중장을 임명했다.




김창원 | 전사연구가
연세대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시라큐스 경영대학원에서 MBA를 취득했다. 장교로 군 복무, 기갑부대 전차 소대장을 지냈다. ‘울프 독’이라는 필명으로 전사와 역사를 다룬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다. 국방부 정책·정보 블로그(N.A.R.A.)에 기고하고 있으며, 저서로 [공격 마케팅]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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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용원의 군사세계
http://bemil.chosun.com/



발행2014.0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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