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역사 니하우 사건 - 진주만을 공격한 일본 장교의 6일 간 생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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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78회 작성일 16-02-07 0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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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 전쟁의 서막을 연 일본의 진주만 기습. 이 공격으로 미 태평양 함대와 해군기지 시설이 큰 피해를 입었고 일본 해군 항공대 역시 29기의 전투기와 55명의 승무원을 잃었다.

그러나 군인들이 전투를 벌이는 것은 전장의 일이었고, 미국 본토에서 일본인들을 격리 수용까지 할 이유는 없었다. 그러던 중 '니하우 사건'이 일어나면서 미국 당국은 미국 본토의 일본계 미국인을 격리하는 조치를 취하게 된다.

니하우 사건은, 하와이의 니하우섬에 불시착한 일본 제로기 조종사가 일본 교민의 도움을 받으면서 주민들과 대치한 사건을 말한다. 일본 교민들은 목숨을 걸고 제로기 조종사를 돕고자 했으나 조종사는 하와이 원주민들의 반격으로 사망하게 된다.

미국에서 태어났으나 일본의 이익을 위해 싸운 니하우섬 일본 교민의 민족 정신은 미국인들에게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여기에 전쟁의 공포와 적국에 대한 광범위한 증오가 더해지면서 미국에서는 일본계 미국인을 격리수용하라는 여론이 높아졌고, 결국 10만이 넘는 일본계 미국인들이 2년 반이나 캠프에 억류되는 상황에 처한다. 전쟁 중에는 어떤 일이든 벌어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한 예라고 말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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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와이 군도 최좌측에 있는 니하우섬



사건이 있었던 니하우섬은 하와이 군도의 가장 서쪽에 위치해있는, 하와이 군도에서 두 번째로 작은 섬이다. 이곳은 1864년부터 로빈슨 가족의 개인 소유지였는데 사건 당시 소유주는 하버드대 출신의 아일머 로빈슨이었다. 그는 원주민 언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사람으로서 관청의 별다른 간섭 없이 섬을 관리하고 있었다. 하지만 니하우섬에 거주하지는 않고 인근의 카우아이섬에 거주하며 주말에만 모터 보트를 타고 니하우를 방문했다. 섬에는 136명의 주민이 있었는데 거의 폴리네이사 원주민이었고 소수의 이민자들이 있었다.

소수의 이민자 중에는 신타니 이시마쓰와 하라다 요시오, 그리고 하라다의 아내 아이린이 포함되어 있었다. 일본 해군 항공대 조종사가 이곳에 불시착한 것은 1941년 12월 7일. 조종사 니시카이치가 이 섬을 택한 것은 일본 해군 항공대의 비상 시 지침에 의한 것이었다. 진주만 기습 당시 일본 해군 항공대는 이 섬에 소를 방목하는 목장이 있고, 목장을 관리하는 세 명의 일본인과 20여 명의 원주민이 살고 있다는, 약간 부정확한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 하여 해군은 귀함이 불가능한 피격 항공기들의 비상 불시착 섬으로 니하우를 지정했다. 이후 잠수함을 보내 조종사를 구출한다는 계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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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시카이치 일등 병조



진주만의 두 번째 기습에 참가했던 22살의 일등급 조종사 니시카이치 시게노리는 이런 매뉴얼에 따라 그가 조종했던 제로기가 귀함이 불가능하자 기수를 니하우섬으로 돌렸다.

니하우섬 상공에서 불시착을 강행한 니시카이치는 충격으로 잠시 정신을 잃었다. 그가 불시착한 곳은 원주민 칼레오하노의 집 부근이었는데 칼레오하노는 난데없이 비행기가 착륙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다가 상황을 살피기 위해 달려갔다. 그는 일본군의 진주만 기습을 아직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간 읽은 신문을 통해 미국과 일본의 관계가 아주 험악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불시착한 비행기의 정체가 일본 군용기라는 것을 확인한 그는 아직도 정신이 혼미한 니시카이치를 조종석에서 꺼낸 후 비행기에 있던 권총과 서류 등을 챙겨 자기가 아는 곳에 숨겨두었다.

그는 니시카이치를 호의적으로 대하며 오후에는 이웃 주민들과 함께 파티까지 열어주었다. 그러나 언어가 통하지 않자 하와이 원주민과 결혼해서 살고 있는 일본 교민 신타니 이시마쓰를 불러왔다. 상황을 알게 된 신타니는 개입하기 싫다는 표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그는 니시카이치와 몇 마디만 나누고 황급히 떠나 버렸다. 통역이 진척되지 않자 주민들은 다시 다른 일본인인 하라다 요시오를 불러왔다. 그는 하와이에서 태어난 일본인 2세로서 역시 일본인 2세인 아이린과 결혼하여 니하우에 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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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시착한 니시카이치의 제로기



니시카이치는 하라다에게 일본군이 진주만을 공격한 사실과 자신이 불시착한 경위를 설명해 주었다. 조심성이 많은 하라다는 원주민들에게 진주만 공격에 대해서는 알려주지 않았다. 니시카이치는 칼레오하노가 가져간 자신의 서류를 돌려주기를 간절히 요청했다. 서류의 정체가 알려지지 않았지만 암호표일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그는 그 서류가 절대 미군 손에 들어가서는 안 된다고 말하며 하라다에게 칼레오하노를 설득하도록 요청했다. 그러나 칼레오하노는 요청을 들어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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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쪽에서 본 니하우섬 전경 -사건이 벌어진 곳은 섬의 북쪽에 있다.



당시 니하우는 전기도 전화도 들어오지 않는 오지였으나 그날 밤 원주민들은 배터리로 작동하는 라디오를 청취하고 진주만이 기습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원주민들은 일본 조종사를 찾아왔다. 그제서야 하라다는 자기가 니시카이치에게서 들은 진주만 공격의 전모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주었다.

섬의 주인 아일머 로빈슨이 다음 날 오전 니하우섬을 방문할 예정이었기 때문에 주민들은 일본 조종사를 그에게 인계해서 데리고 나가도록 하자는 데 뜻을 모았다. 그러나 다음날 로빈슨은 도착하지 않았다. 진주만 기습 직후 미군이 전 하와이 해상에 선박 운행을 금지했기 때문이다. 그런 금지 조치를 알 수 없던 주민들은 불안한 생각이 들었지만 하라다가 요청하는 대로 니시카이치가 당분간 하라다 집에 머무르는 것을 허락했다. 네 명의 보초가 그를 감시해야 한다는 조건을 덧붙였으나 하라다가 니시카이치와 대화하는 것은 허락되었다.

12월 11일, 사건에 개입하기 싫어하던 신타니가 하라다의 중재로 니시카이치를 만나게 되고, 다음날 밤 칼레오하노의 집에 비밀리에 찾아와 그 시절에는 큰 금액이었던 200달러를 내놓으며 니시카이치의 서류를 팔라고 제안했다. 그러나 칼레오하노는 그 제안을 거절했다. 신타니는 불만스런 표정으로 자리를 떠나며 "서류를 안 돌려주면 당신의 목숨이 위험할지도 모른다"고 위협했지만 칼레오하노는 그 말에 겁을 먹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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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해군 조종사들은 8mm 권총을 권총집 없이 구명동의 위에 휴대했었다.



그 직후 드디어 일이 발생했다. 하라다와 니시카이치는 미리 모의한 대로 홀로 보초를 서고 있는 원주민을 공격했다. 하라다의 부인 아이린은 격투 소리가 멀리 퍼지지 않도록 축음기에 판을 걸고 음악을 틀었다. 세 명의 감시자가 더 있었지만 두 명의 일본인이 원주민을 공격할 때는 현장에 없었다. 두 사람은 감시자를 제압하여 하라다 집의 창고에 감금했다. 그곳에서 하라다는 로빈슨의 목장에서 훔친 산탄총과 니시카이치의 권총으로 무장하고 칼레오하노의 집으로 달려갔다.

칼레오하노는 마침 신타니가 떠난지 불과 10분 후라서 아직 바깥채 앞에 나와 있었다. 총을 든 두 사람이 중간에 납치한 16살의 소년을 데리고 달려오는 것을 본 칼레오하노는 재빨리 바깥채에 숨어버렸다. 그 바람에 두 일본인은 그를 찾지 못하게 되었고 집 옆에 불시착한 제로기를 살펴보던 중 도주하는 칼레오하노의 기척을 느끼게 된다.

칼레오하노는 하라다가 외치는 “멈춰! 멈춰!”하는 고함 소리와 총성에 개의치 않고 이웃마을로 달려가 주민들에게 즉시 피신하라고 외쳤다. 하라다를 잘 아는 동네 사람들은 그의 경고를 믿을 수가 없었다. 지난 3년 간 동네에서 평판이 좋았던 하라다가 이런 난동을 부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하라다와 니시카이치가 창고에 가두었던 원주민 감시자가 탈출하여 칼레오하노와 같은 이야기를 하자 깜짝 놀란 주민들은 모두 인근 동굴이나 정글, 해변에 몸을 숨겼다.

칼레오하노는 친척에게 서류를 잘 간수하라는 부탁을 한 후, 자정 무렵 다섯 명의 원주민과 함께 구명정을 타고 섬 주인 로빈슨이 사는 카우아이섬으로 향했다. 비록 10시간이나 걸렸지만 그들은 무사히 카우아이에 도착하여 로빈슨에게 사건의 전말을 보고했다.

안 그래도 로빈슨은 이미 지난밤부터 멀리 보이는 니하우섬에 무슨 이상이 생긴 게 아닌지 걱정하고 있었다. 사건 직후 주민들이 비상 사태를 알리기 위해서 석유등과 반사거울을 흔들어댔고 모닥불을 피웠기 때문이다. 섬에 이변이 발생한 것으로 짐작한 로빈슨은 당국에 니하우섬 방문을 청원했으나 거절당해서 걱정하던 참에 칼레오하노 일행이 찾아온 것이다.

한편 하라다와 니시카이치는 칼레오하노가 도주한 뒤 그의 집 옆에 있는 제로기에서 함대와 교신하려 노력했으나 허사였다. 아무리 호출해도 답신이 없자 두 사람은 미군이 제로기 정보를 수집할 수 없도록 기체에 불을 지르고 문제의 서류가 숨겨져 있을지도 모르는 칼레오하노 집에도 불을 질렀다. 시각은 오전 3시였다. 몇시간 후인 토요일 아침, 하라다와 니시카이치는 원주민 부부를 포로로 잡았다. 카나헬레와 그의 아내였다. 그들은 아내를 인질로 잡고 카나헬레에게 칼레오하노를 잡아오라고 명령했다.

두 일본인은 칼레오하노가 이미 섬을 벗어난 것을 몰랐지만 이 사실을 알고 있던 카나헬레는 내색하지 않고 그를 찾는 시늉을 하다가 다시 돌아왔다. 니시카이치는 그가 자기들을 속이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고 화를 냈다. 하라다는 이 일본인 조종사가 칼레오하노를 찾아 오지 않으면 그와 마을 사람들을 모두 죽일 것이라고 겁을 주었다.

카나헬레는 두 사람이 잠을 자지 못해 피로한 상태이며 크게 맥이 빠져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힘이 굉장히 센 사내였던 카나헬레는 틈을 노렸다가 니시카이치가 그의 산탄총을 하라다에게 건네주느라 잠시 한 눈을 파는 사이에 아내와 함께 덤벼들었다. 당황한 니시카이치는 그의 가죽 장화에서 권총을 빼 들었으나 카나헬레의 아내가 그의 손을 잡아 총을 떨어뜨리게 했다. 하라다가 아내를 니시카이치로부터 떼어내는 동시에 니시카이치는 권총 세 발을 발사하여 남편 카나헬레의 사타구니와 복부와 허벅지를 명중시켰다. 그럼에도 카나헬레는 기력을 잃지 않고 니시카이치를 들어 올려 목에 걸친 후 돌담에 던져버렸다. 아내는 돌을 들어 꼼짝 못하는 니시카이치의 머리를 세게 내리쳤고 카나헬레가 칼로 목을 찔러 절명시켰다.

니시카이치가 목숨을 잃자 하라다는 다 틀렸다고 생각하고 가지고 있던 산탄총으로 자살했다. 사건 후에 카나헬레는 카우아이섬 병원으로 이송되어 목숨을 건지고 미 정부로부터 훈장을 받았다. 다음날 12월 14일 섬 주인인 로빈슨이 군인들과 섬에서 탈출했던 6명의 원주민들과 함께 니하우섬으로 돌아왔다. 하라다의 죽음에 울고있던 아내 아이린 하라다와 200달러로 니시카이치의 서류를 매입하려 했던 신타니 이시마쓰가 체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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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하우 사건은 알란 비크만의 저서로서 잘 알려졌다. 책 표지 상단이 자결한 하라다, 왼쪽이 섬 주인 로빈슨, 그 아래가 니시카이치를 죽인 카나헬레, 그리고 오른쪽 위가 암호표를 감추었던 칼레오하노다.



두 일본인의 그 후 이야기다. 신타니는 전후 섬으로 돌아와 살다가 1960년도에 미국 시민권을 받았다. 하라다의 아내 아이린은 31개월 동안 형을 살고 1944년 석방되었다. 그녀는 나중에 카우아이섬으로 이사하였고 후에 진주만 공격 항공대장 후치다 미쓰오와 만나기도 했다. 후치다는 전후 전도사가 되어 미국을 방문했을 때 틈을 내어 니하우섬을 찾아왔다가 하라다의 부인인 아이린을 만난 것이다.

니하우 사건은 미국인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적국으로 맞서게 된 일본 민족의 그 맹목적인 민족 정신에 질렸다는 표현이 맞을 듯하다.

니하우섬에 살던 세 명의 일본인은 미국에서 태어나거나 오래 살아서 미국인화한지 오래된 사람들이었다. 상식적인 선에서는 그들이 민족 의식이 있다 해도 이런 상황에서는 자신의 안전부터 챙기고 행동하는 것이 맞는데 이들 남녀 세 명은 자신들의 목숨을 걸고 일본의 이익을 위해 나선 것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 개전과 함께 미국을 휩쓸던 혐일 풍조가 더 격화되었고, 미국 정부는 하와이는 물론 미국 본토에 있는 일본인까지 대형 캠프에 수용하게 된다.

니시카이치의 유해는 1956년에 그의 부모 요청에 의해서 일본으로 송환되었다. 그의 고향 에히메현 이마바리 하시하마에는 그를 추모하는 7미터의 화강암 추모비가 서있다. 니시카이치가 몰았던 제로기의 잔해는 현재 하와이 진주만 포드섬에 있는 태평양 항공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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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 항공 박물관에 전시 중인 니시카이치의 제로기






김창원 | 전사연구가
연세대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시라큐스 경영대학원에서 MBA를 취득했다. 장교로 군 복무, 기갑부대 전차 소대장을 지냈다. ‘울프 독’이라는 필명으로 전사와 역사를 다룬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다. 국방부 정책·정보 블로그(N.A.R.A.)에 기고하고 있으며, 저서로 [공격 마케팅]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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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용원의 군사세계
http://bemil.chosun.com/



발행2014.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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