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역사 야마모토 격추 - 일본 연합함대 사령관을 떨어뜨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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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68회 작성일 16-02-07 0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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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모토 이소로쿠 연합함대 사령관



솔로몬 군도 일대에서 태평양 전쟁이 치열하게 전개되던 1943년 4월 18일, 부겐빌 섬의 상공에서 일본 해군의 1식 육상 공격기 한 대가 미 육군 항공대 P-38 전투기에게 격추당했다. 격추된 일본 공격기에는 일본 연합함대 사령관 야마모토 이소로쿠 대장이 탑승하고 있었다.

야마모토는 자신이 발령한 '이고작전'이 종료된 전방의 부대를 시찰 중이었다. 이고작전은, 1942년 과달카날에서 일본군을 축출한 후 남태평양 제공권을 장악해버린 미 항공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펼친 작전이었다. 과달카날 섬과 뉴 기니아 섬 남동부 포트 모레스비 등의 연합군을 항공 기습하는 대규모 작전이어서 동원된 일본 항공력만 400기에 가까웠다. 이 작전은 4월 7일 발령되어 4월 15일 종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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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고 작전



야마모토는 일본 해군에서는 절대적인 카리스마로 존경을 받고 있었지만 미군들에게는 진주만을 공격한 증오의 대상이었다. 태평양 전쟁의 핵심적인 인물이었던 야마모토가 부겐빌 상공에서 격추됨에 따라 일본군은 전쟁 수행의 의지와 사기에 큰 타격을 입은 반면 승기를 잡고 맹렬한 반격전을 펴고 있던 미군들은 필승의 신념을 다지게 되었다.

유명한 태평양 전사가 새무얼 모리슨은 미군에게 야마모토 이소로쿠 대장의 격추는 대규모 해전에서 대승한 것과 같은 효과였다고 평하였다. 야마모토의 피격은 일본 해군이 야마모토의 전선 시찰 사실을 전방 부대에 통보한 무선이 미 해군에게 감청 당함으로서 빚어진 결과였다.

일본군의 통신을 감청하는 미 해군의 군사 정보대는 주로 일본인 2세들로 편성되어 있었다. 이들은 영어는 물론 일본어도 잘했고 군사 정보에 관한 전문 교육도 받은 요원들이었다. 이 군사 정보대가 2차 세계 대전에서 이룬 최대 공적 중에 하나가 야마모토 이소로쿠 대장이 전선 시찰을 할 것이라는 정보를 획득한 것이었다.

4월 14일, 일본이 관계 전방 기지들에 타전한 야마모토의 시찰 스케줄이 태평양 세 곳의 미군 군사 정보대 기지에서 감청되었다. 그 중 제일 먼저 관심을 가지고 빠르게 움직인 것은 하와이 주둔 해군 태평양 함대의 군사 정보대 소속 감청반의 해롤드 후데나였다.

암호 전문은 매직이라는 암호 해독기를 통해 판독되었는데 일차 해독한 암호는 전체의 15%에 지나지 않았다. 단 15%만을 분석한 끝에 미군이 얻은 최종 결과는 야마모토의 방문지와 방문 시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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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전 지역



암호문은 야마모토가 일본군의 거점 라바울을 떠나 부겐빌 섬의 부인 비행장을 거쳐 쇼트란드 군도의 바라래 비행장까지 가리라는 일정을 보여주었다. 라바울 출발은 4월 18일 오전 6시, 부인 비행장 도착은 두 시간 뒤인 오전 8시였다. 이 시각은 일본 시간으로서 미국 시간보다 두 시간 정도 빨랐다. 정보는 야마모토의 방문 일정과 수행원 시찰에 동원할 항공기, 호위 전투기에 관한 추가 정보를 담고 있었다.

하지만 해롤드 후데나가 이런 일정을 보고했음에도 처음에 그의 상관들은 수많은 정보의 하나로만 여길 뿐 그 정보를 별로 신뢰하지 않았다. 그러나 알래스카와 다른 하와이의 정보 부대가 이 정보를 감청하면서 정확한 정보라는 쪽으로 무게가 실렸다. 이제 문제는 그 정보가 정확하더라도 야마모토가 정확하게 스케줄대로 움직일 것이냐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해군 정보대는 평소 야마모토가 시간 관념이 철저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면 이제 공격 작전이 문제가 되었다. 미군의 F4F 와일드캣이나 F4U 콜세어 같은 단발 엔진 전투기로는 부겐빌 상공에서 야마모토의 비행기를 공격하고 돌아올 정도의 긴 비행 거리를 확보할 수 없었다.

그런 장거리 출격을 할 만한 전투기는 과달카날의 쿠쿰 비행장을 기지로 작전하는 육군 항공대의 쌍발 P-38 전투기 밖에 없었다. 그것도 보조 연료 탱크를 부착했을 경우에만 가능했다. 이 부대의 P-38은 G형으로서 후에 개발된 J형에 비하면 공기 확산기가 장착되지 않은 구형이라 수직 급강하 공격이 힘들었다. 그러나 항속 거리를 만족시킬 만한 항공기는 이 기종밖에 없었다. P-38 G는 기수에 20mm 기관포 한 문과 50구경 기관총 4문이 장치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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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38 G형 라이트닝



정보는 해군이 입수했으나 출격은 육군 항공대에서 맡기로 하고 극비 작전이 수립되었다. 작전의 총지휘는 마크 미처 제독이 맡았다. 작전명은 ‘복수 작전’. 며칠 안에 모든 준비가 완료되어야 했다. 야마모토 공격은 극비리에 해군성 장관 프랭크 녹스를 통해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보고되었고 대통령은 이를 재가하였다. 태평양 함대 사령관 니미츠 제독은 할제 제독과 상의하여 4월 17일 작전을 최종 승인하였다.

공격의 임무는 육군 항공 부대 347 전투 비행단의 339 비행대대에 주어졌다. P-38 쌍발 전투기를 운용하는 부대로 비행 대대장은 존 미첼 소령이었다. 그는 유능한 조종사로서 이후 한국전쟁에도 참가했는데, 1952년 6월 F-86을 직접 몰고 출격하여 미그기 4기를 격추한 기록을 세웠다. 미첼 소령이 야마모토 격추를 명 받은 것은 앞서 밝힌 대로 작전 하루 전인 4월 17일이었다. 그는 천막 안에서 파리를 잡으며 쉬고 있다가 본부로 급히 오라는 연락을 받고 달려갔다. 그곳에는 작전을 총괄 지휘하는 해군 소장 마크 미처 소장이 와 있었다. 미처 소장은 작전의 개요를 설명하고 야마모토 격추작전에 즉시 착수하도록 극비 명령을 내렸다.

미첼 소령은 바쁘게 움직였다. 작전이 성공하려면 치밀한 준비와 정교한 비행이 필수였다. 아무래도 해상 비행은 육군 항공대보다 해병대나 해군 항공대의 조종사들이 더 노련했다. 임무가 주어진 339 비행대대의 미첼 소령은 해병 항공대의 루터 S.무어 중령의 자문을 받고 그의 도움으로 더 정밀한 해군 함정용 나침반을 자기 전투기에 설치했다.

18기의 P-38이 ‘복수 작전’에 동원되었다. 4기 1개 편대가 야마모토의 탑승기를 공격하기로 하였고 나머지 14기는 1만8천피트 상공으로 급상승하여 상공 엄호를 하기로 하였다. 339 전투 비행대대가 임무를 맡았지만 18명의 조종사 중 10명은 다른 두 비행대대에서 차출한 유능 전투기 조종사들이었다.

총지휘자인 마크 미처 소장은 대원들 중 솜씨가 좋은 조종사 네 명을 선발하여 작전조를 만들었다. 토마스 대위, 렉스 바버 중위, 짐 맥크라나한 중위, 조 무어 중위가 그 작전조에 속한 인물들이다. 한편 P-38은 평소 장거리 출격시에는 165갤런의 보조 연료 탱크 두 개를 장착했는데 이번에는 처음 시도하는 비행 코스여서 보조 연료 탱크로도 연료가 충분하지 않을 수가 있었다. 그래서 미리 330갤런의 대형 보조 연료 탱크를 뉴기니아의 포트 모르스비 기지에서 공수해 와서 각 P-38마다 165갤런 탱크와 함께 이 대형 탱크도 장착했다. 양 날개에 크기가 다른 연료 탱크가 부착되다 보니 균형의 문제가 있었지만 연료 탱크들을 H형의 기체에 최대한 바짝 붙여서 장착하여 불균형 문제를 최소화했다.

조종사 선발을 비롯한 출격 준비가 어느 정도 마무리되자 미첼 소령은 신뢰하는 부하 토마스 란피어 대위와 함께 공격 계획을 짰다. 우선 일본군에게 발각되지 않고 은밀하게 부겐빌까지 접근할 필요가 있었다. 과달카날에서 부겐빌까지의 직선 항로는 약 400마일이었다. 일본군이 솔로몬 군도의 여러 섬에 깔아놓은 감시자들 때문에 직선으로 비행하기는 불가능했다.

공격대는 일단 솔로몬 군도로부터 보이지 않는 남서쪽 공해상 50마일 상공까지 나가서 방향을 부겐빌 쪽으로 바꾸고 일본군의 함정이나 잠수함, 항공기 등으로부터 탐지 당하지 않도록 최대한 고도를 낮추고 해면에 붙듯이 부겐빌까지 비행하여야 했다. 부겐빌의 측면에 도착하면 비로소 오른쪽으로 방향을 바꾸고 부인 비행장 상공으로 직행하는 코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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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모토 시찰기와 미첼 공격대의 항로 우회가 필요했다. 일본군이 점령하고 있던 뉴조지아 섬, 벨라 라벨라 섬의 감시원들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우회 침투 비행은 600마일의 긴 항로를 거쳐야 했다. 귀환할 때는 400마일의 직선 코스로 난다고 해도 합계 1천 마일의 거리였다. 두 사람은 야마모토가 탑승한 폭격기의 평균 속도가 시속 180마일로서 부인 상공에 도착하는 시각을 09:35분으로 추정했다. 이 때가 기습 시점이었다. 그 시각에 미첼의 공격대는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게 정확히 그 지점에 도착해 있어야 했다. 무선 침묵은 반드시 엄수하도록 하였다.

미첼 소령은 란피어 대위와 검토와 검토를 거쳐 작전 계획을 짜고 검토한 뒤에 자정쯤 전 대원들을 불러 다음 날의 작전에 대해서 브리핑을 하였다. 그러나 미첼은 중요한 거물을 제거한다는 것만 암시했을 뿐 야마모토의 이름은 알려주지 않았다.




김창원 | 전사연구가
연세대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시라큐스 경영대학원에서 MBA를 취득했다. 장교로 군 복무, 기갑부대 전차 소대장을 지냈다. ‘울프 독’이라는 필명으로 전사와 역사를 다룬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다. 국방부 정책·정보 블로그(N.A.R.A.)에 기고하고 있으며, 저서로 [공격 마케팅]이 있다


제공

유용원의 군사세계
http://bemil.chosun.com/



발행2014.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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