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역사 탄넨베르크 전투 1 (1914) - 러시아를 상대로 한 독일의 역전극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댓글 0건 조회 517회 작성일 16-02-07 08:59

본문















14548031638077.png





어둠 속에 빛난 승리



1914년 8월 1일, 독일은 세르비아를 지원하던 러시아에 노골적인 선전포고를 하며 제1차대전에 참전하였다. 그런데 3일 후인 8월 4일, 독일이 쳐들어 간 곳은 엉뚱하게도 정반대편의 벨기에였다. 엄밀히 말해 벨기에가 목적이 아니라 이곳을 통과하여 프랑스를 공격하려던 것이었다. 이미 8월 2일에 독일은 프랑스에 선전포고하였고 벨기에에게는 군대가 통과할 수 있도록 길을 내달라고 요청하였다가 거부당한 상태였다.





14548031648348





1914년 8월 초, 서부전선을 돌파하는 독일군. 미리 준비된 슐리펜 계획에 의거하여 독일은 먼저서부전선에서 전쟁을 시작했다.



이처럼 독일이 엉뚱하게 전쟁을 시작하였던 이유는 ‘슐리펜 계획(Schlieffen Plan)’을 따랐기 때문이었다. 1905년에 수립된 이 계획에 따르면 독일이 만일 러시아, 프랑스와 동시에 전쟁을 벌인다면 서쪽의 프랑스와 먼저 싸우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러시아는 광활한 영토와 후진적인 행정 시스템 때문에 동원령이 선포되어도 막상 전쟁을 실제로 시작하기까지 최소 6~8주 정도의 시간이 걸릴 것으로 판단하였다. 이 시간 동안 프랑스를 먼저 굴복시키고 다음에 러시아를 상대하면 둘 다 이길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하지만 러시아군의 움직임은 예상보다 빨라서 독일을 경악하게 만들었다. 독일이 선전포고한 지 보름 만인 8월 15일이 되자 무려 80만의 러시아군이 전선에 동원되었고 그 중 절반이 독일의 초입인 동(東)프로이센에 나타난 것이었다. 반면 독일군은 전체 병력의 80퍼센트가 프랑스 침공전에 투입되어 있었기에 이곳을 담당하던 병력은 불과 16만에 불과했다.





14548031660999





탄넨베르크 전투 당시 주민들의 환영을 받으며 오텔스베르크(Ortelsberg)에 진입하는 독일군을 묘사한 기록화.



방어는 고사하고 자칫하면 한창 전투 중인 서부전선에도 악영향을 끼칠 위기의 상황. 그런데 절대 불리한 이 상황에서 독일은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엄청난 승리를 기록하였다. 비록 그 결과가 1차대전의 승리로까지 이어지진 못했지만 전투 자체만 놓고 본다면 역사에 길이 남을 만한 전과였다. 바로 1914년 여름에 있었던 탄넨베르크 전투(Battle of Tannenberg)다.




독일의 자신감



독일은 당시 러시아와 프랑스의 동맹 관계 그리고 독일과 프랑스의 적대 관계를 고려한다면 양면충돌을 피하기 어렵다고 파악하였다. 이에 독일은 싸움을 피할 수 없다면 먼저 공격하는 게 유리하다는 판단 아래 ‘침략자’라고 낙인 찍힐 선전포고를 먼저 하는 무리수를 감행, 전쟁을 개시하였다. 그것은 충분히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의 표현이기도 했다.





14548031673098





저격되기 직전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페르디난트 황태자 부부의 모습. 이 사건으로 인한 충돌은 국지전으로 끝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양면전쟁은 피하는 것이 상책이라 일부러 먼저 양면전을 벌일 이유는 없다. 그동안의 유럽 역사를 돌이켜보면 선전포고가 반드시 전면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설령 동맹관계 때문에 일단 전쟁에 뛰어들었더라도 외교적으로 타협할 수 있는 여지 또한 충분히 있었다. 따라서 독일이 실제로 군사 행동을 자제하였다면 1차대전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세르비아의 국지전으로만 끝날 수도 있었다.

반면 너무 서둘러 전쟁에 뛰어들면서 독일은 전혀 생각지도 못한 상대와도 싸움을 벌여야 했다. 바로 영국이다. 1차대전에 영국이 참전하게 된 가장 결정적인 계기는 당시 영세중립국이던 벨기에를 독일이 침공한 것이었다. 영국은 프랑스, 러시아와 이른바 삼국협상(Triple Entente)이라 불린 전략적 협력체의 당사국이었다. 그렇긴 하지만, 어느 일방이 전쟁에 돌입하면 반드시 참전할 의무를 졌던 불러(佛露)협상과 달리 단지 외교적인 정책 공조관계일 뿐이었다.





14548031687546





벨기에의 브뤼셀에 입성하는 독일군. 이처럼 예상치 못한 독일의 벨기에 침공은 영국에게 참전 명분을 주었다. <출처: International News Service>



통상 영국은 많은 분쟁에서 유럽 대륙의 균형이 무너지는 것을 방지하는 조정자 역할에 머물렀고, 설혹 군사적 개입을 하더라도 최소로 제한하던 상황이었다. 그러나 영국이 대륙으로 향하는 관문 노릇을 하던 벨기에의 위기는 국익과 안보에 당장의 위협이었다. 더불어 영세중립을 보장하였던 조약은 영국에게 충분한 참전 명분이 되었다. 덕분에 독일은 슐리펜 계획 수립 당시 전혀 고려하지 않았던 영국과도 전쟁을 벌여야 했다.




러시아군의 동원



러시아의 대응력에 대한 독일의 오판은 러시아를 너무 깔보았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사실 러시아는 지난 6월 28일, 사라예보(Sarajevo)에서 저격 사건이 난 직후부터 전쟁에 대비해 왔다. 지난 두 차례의 발칸전쟁은, 유럽의 화약고인 이곳에 위기가 발생하면 참전 여부와 상관없이 주변국들은 일단 준비를 해야 한다는 교훈을 주었다. 더구나 러시아는 범(汎)슬라브주의를 주창하며 발칸 반도로 영향력을 넓히기 위해 애쓰던 중이었다.





14548031700005





1912년 발칸전쟁 당시 불가리아군의 모습. 발칸 반도로의 영향력 확대에 관심이 많았던 러시아는 다시 위기가 조성되자 즉각 전쟁 태세에 돌입하였다.



러시아는 동유럽에서 전면전이 발생할 경우를 대비하여, 동원령이 발령되면 40여만 수준의 상비군을 즉시 120만까지 증강하여 총사령관 니콜라이 대공(Grand Duke Nicholas)의 지휘를 받도록 계획하였다. 이에 맞추어 총 8천여 문의 각종 대포도 준비되어 있었는데, 포병의 배치와 편성이 아주 효율적이었고 포탄의 재고도 충분했다. 이처럼 러시아는 나름대로 전쟁 준비를 해 놓은 상태였다.





14548031707587





사촌 간인 짜르 니콜라이 2세(좌)와 전쟁 초기 러시아군 총사령관이었던 니콜라이 대공. <출처: The Imperial War Museum>



하지만 이러한 러시아의 전력도 독일과 일대일로 전면전을 펼치기엔 부족한 수준이었다. 물론 이후에도 계속 증강할 예정이었지만 그러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결국 러시아의 전쟁 전략은 단독 참전이 아니라 처음부터 프랑스와의 공조를 염두에 둘 수밖에 없었다. 독일의 경우 양면전이라는 최악의 경우를 대비하여 전략을 수립하였지만, 이처럼 러시아도 단독으로는 독일과 전면전을 펼치기 곤란한 상황이었다.

더욱이 독일뿐 아니라 독일의 동맹국인 오스트리아-헝가리와도 동시에 교전이 벌어질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다. 따라서 러시아는 여러 변수를 고려하여, 독일이 러시아와 먼저 전쟁을 벌일 경우에 모든 전력을 독일과의 국경지대로 집중하여 방어전을 펼치는 ‘G 계획(Plan G)’과 독일이 프랑스와 먼저 전쟁을 벌이면 독일 및 오스트리아-헝가리를 동시에 공격할 ‘A 계획(Plan A)’으로 나누어 전쟁 전략을 수립하였다.




양측의 전력



독일이 선전포고를 하기 전인 7월 30일, 러시아는 이미 동원령을 선포하여 병력을 증강하던 중이었다. 그리고 독일이 프랑스를 먼저 침공하자 러시아는 A 계획에 의거 부대를 공격대형으로 바꾸어 전방으로 배치하기 시작했다. STAVKA(러시아군 총사령부)는 러시아군을 크게 두 개 전선군(Front)으로 나누어 북서전선군(제1전선군)은 독일의 동프로이센으로, 남서전선군(제2전선군)은 헝가리의 갈리시아(Galicia)로 진격하도록 하였다.





14548031720740





전쟁 개시 전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동맹국과 러시아군의 배치도.



따라서 독일을 직접 공격할 러시아군은 질린스키(Yakov Zhilinskiy)가 지휘하는 약 40여 만의 북서전선군이었다. 북서전선군은, 마수리안(Masurian) 호수를 기준으로 북쪽으로 공격할 제1군과, 남쪽으로 진격할 제2군으로 구성되어있었고, 8월 15일이 되었을 때 이들은 공격 준비를 완료하였다. 후방에서 새로 편성 중인 제10군이 조만간 예비대로 합류할 예정이었지만 사실 1, 2군만으로도 전력은 우세한 상황이었다.





14548031727098




러시아 북서전선군(제1전선군) 사령관 질린스키. 그는 예하 부대의 갈등을 조정하지 못하고 오로지 공격만 요구하다가 참사를 초래하였다.



독일도 선전포고 이전에 신속히 예비군을 소집하여 모두 8개 야전군을 동원해 놓았다. 이들 중 7개 군이 서부전선에 촘촘히 배치되었고 12개 사단으로 구성된 총 15만의 제8군이 동부전선을 책임졌다. 프랑스를 제압하는 동안 동부전선에서 러시아와 전쟁이 벌어지면 8군은 최대한 현 전선을 유지하거나 최악의 경우 자국 영토의 일부를 러시아군에게 내주는 작전상 후퇴도 불사하며 시간을 버는 전략적 고려하고 있었다.

당시에는 폴란드가 주변 3국에 분할된 상태였기 때문에 독일과 러시아는 직접 국경이 맞닿아 있었다. 따라서 1개 야전군만으로 국경 전체를 방비하기는 곤란한 상황이어서 독일군은 요충지 위주로 분산 배치되었다. 당시 8군은 쾨니히스베르크(Königsberg)를 비롯한 동프로이센 일대 주요 요새의 현역들과, 현지에서 긴급히 동원된 예비군들로 편성되어 있었다. 따라서 독일의 여타 야전군에 비해 전력이 강한 편이 아니었다.




남도현 | 군사 저술가
[전쟁, 그리고], [2차대전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 순간들], [끝나지 않은 전쟁 6.25] 등의 군사 관련 서적을 저술한 군사 저술가. 국방부 정책 블로그, 군사월간지 [국방과 기술] 등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현재 무역대행 회사인 DHT AGENCY를 경영하고 있다.


제공

유용원의 군사세계
http://bemil.chosun.com/



발행2014.11.14.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