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역사 탄넨베르크 전투 3 (1914) - 2100년 만에 재현된 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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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531회 작성일 16-02-07 0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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덫에 갇힌 러시아 2군



힌덴부르크와 루덴도르프는 반신반의 하였지만, 러시아의 진공을 멈추기 위해 이곳에 온 이상 당장 전선의 상황을 가장 잘 알고 있는 호프만의 강력한 진언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1군과 2군 중 어느 쪽부터 공격할 것인가. 굼비넨 점령 후 부대를 재편 중이던 1군보다 8월의 무더위에 급하게 장거리를 진군하면서 몹시 지쳐있던 2군을 먼저 제물로 삼기로 하였다. 독일은 2군을 바르샤바 북쪽의 삼림과 늪지가 많은 탄넨베르크(Tannenberg) 부근으로 유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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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선으로 향하는 러시아군. 독일은 무더위에 장거리를 이동하여 지쳐있는 러시아 2군을 먼저 제물로 삼기로 했다. <출처: The Imperial War Museum>



독일 8군 예하의 제1기병사단이 굼비넨 일대에서 진격을 멈춘 러시아 1군을 견제하는 사이에, 제1, 3예비군단이 신속히 남하하여 제20군단과 함께 러시아 2군을 남쪽에서 포위하고, 동시에 제1, 17군단이 북쪽을 틀어막는 거대 포위망을 은밀히 형성하였다. 이때 독일은 철도망을 이용하여 신속히 부대를 이동 전개시키는 모범적인 선례를 남겼다. 이러한 앞선 기동력은 탄넨베르크 전투에서 독일의 대승을 이끈 중요한 요소였다.

8월 28일, 완성된 포위망 안으로 러시아 2군이 진입이 확인되자 곧바로 퇴로가 닫히고 무수한 야포가 불을 뿜었다. 당황한 러시아군은 탄넨베르크 습지에서 우왕좌왕하다 속절없이 쓰려져 갔고, 짙은 안개와 호수 주변의 진흙탕에 가로막혀 진퇴양난의 상태에 빠졌다. 가까스로 반격에 나섰지만 완전 포위된 채 전후 좌우에서 날아오는 불벼락을 맞게 된 1군이 자력으로 이 위기를 벗어날 방법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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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출구가 봉쇄된 러시아 2군은 독일군의 포격에 순식간 허물어져 내렸다.



삼소노프는 자존심을 굽히고 레넨캄프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 만일 이 시점에서 1군의 지원을 받는다면 더 이상 예비대가 없는 독일의 포위망이 허물어질 가능성이 컸고 오히려 독일 8군이 러시아 1군과 2군 사이에서 역포위 될 수 있었다. 1개 기병사단만으로는 18개 사단으로 구성된 러시아 1군의 이동을 물리적으로 막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호프만 대령의 신념 어린 예상은 결코 빗나가지 않았다.




동반하여 최후를 맞은 두 라이벌



삼소노프의 간절한 도움 요청을 레넨캄프는 냉정히 거부하였다. ( 레넨캄프의 그릇된 고집은 그의 명도 재촉하는 결과를 낳았다.) 전투가 끝났을 때 독일군은 1만 명의 손실을 입었지만 러시아군은 13만 명이 전사하고 9만 명이 포로가 되는 참담한 결과를 기록했다. 독일 8군은 전쟁사에 길이 빛날 놀라운 대승을 거두었고 궤멸한 러시아 2군 사령관 삼소노프는 굴욕을 이기지 못하고 권총으로 자결하였다. 이것이 바로 탄넨베르크 전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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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제1기병사단이 러시아 1군을 견제하는 동안 독일 3군이 신속히 남하하여 삼소노프의 러시아 2군을 궤멸시켰다.



이제 다음 차례는 2군의 몰락을 모른 척하였던 레넨캄프의 1군이었다. 독일 8군은 숨 돌릴 새 없이 굼비넨에 머무르고 있던 1군을 마수리안 호수로 밀어붙여 다시 한 번 대 포위를 완성하였다. 여기서도 러시아는 12만의 병력과 500문의 대포를 잃었고 6만은 포로가 되면서 처참히 붕괴되었다. 이를 탄넨베르크 전투와 구별하여 1차 마수리안 전투(Battle of 1st Masurian)라고도 한다. 이로써 러시아 북서전선군은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충분히 승리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음에도 사적인 감정 때문에 아군의 도움을 외면하여 결국 전체의 몰락을 가져온 레넨캄프는 명예를 더럽혔다는 이유로 군적을 박탈당하였다. 만일 레넨캄프가 공과 사를 정확히 구분하여 삼소노프를 지원했다면 러시아는 승리를 거두고 곧바로 베를린으로 향했을지도 모른다. 두 장군의 반목과 아집은 동반 몰락을 넘어 전쟁의 장기화를 가져왔고 이는 결국 러시아 제국의 붕괴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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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넨베르크에서 전사한 러시아군의 모습. 일방적이라 할 만한 참담한 패배였다.



지금도 각종 군사 교육기관에서 사례 연구 대상으로 두고두고 소개될 만큼 탄넨베르크 전투(1차 마수리안 전투 포함)는 전쟁사에 커다란 획을 그은 기념비적 전투다. 그리고 대부분 이 전투에 대해, “삼소노프와 레넨캄프의 반목과 무능 VS 힌덴부르크를 위시한 독일군의 탁월함”으로 인해 일방적으로 끝난 전투인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양측 합쳐 육십여 만의 대군이 정면 충돌한 이 전투의 결과를 단지 몇몇 사람의 책임으로만 몰아붙일 수는 없다.




결과



사실 레넨캄프는 동프로이센을 석권할 수 있는 전략 거점인 굼비넨을 격전 끝에 점령한 이상 이를 포기하고 물러나기 힘든 상황이었다. 거대한 야전군급 부대의 이동은 단지 옆 부대의 요청이 있다고 함부로 결정할 사항은 아니었다. 당연히 상급 지휘부인 북서전선군 사령부나 STAVKA(러시아군 총사령부)에서 지시를 내려야 했다. 하지만 독일 8군이 워낙 빠르게 기동하자 러시아 최고 지휘부는 이를 여러 개의 부대가 움직이고 있는 것으로 착각하여 함부로 러시아 1군의 이동을 명령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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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을 방문하여 상황을 살펴보는 힌덴부르크와 참모진들.



결론적으로 정보 수집을 게을리 한 결과였다. 러시아는 독일의 동태를 전혀 눈치 채지 못하였지만 독일은 러시아의 움직임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한심하게도 러시아군은 평문(平文)이나 구식 암호로 통신을 하였다. 독일 8군의 기동 포위전에 갇혀 러시아 2군과 1군이 같은 방법으로 최후를 맞았다는 자체가 모든 것을 설명해 준다. 러시아군의 최초 동원은 독일이 놀랄 정도로 빨랐지만 단지 그뿐이었다.

원래 러시아 2군이 포위당했을 때 1군이 움직일 수 없다면 후위에 있는 예비대가 구출에 나서야 했지만 러시아군은 그럴 수 없었다. 북서전선군의 예비대로 예정된 10군이 아직 동원이 완료된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훈련이 부족하였던 러시아군 병사들은 밭을 갈다가 갑자기 총을 쥔 채 전쟁터로 내몰린 농민군 수준이나 다를 바 없었다. 그래서 겉보기에 비슷한 전력임에도 저항 한번 제대로 못해보고 무너져 내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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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로가 된 러시아군과 노획된 장비.



불과 10년 전 러일전쟁 패전의 경험이 있었는데도 절치부심하여 군을 정예화할 생각을 하지 않은 러시아는, 동원 가능한 병력 수만 믿고 허세를 부린 셈이다. 대외적으로야 과장되게 행동하였더라 자신들의 능력을 객관적으로 알고 있다면 신중하게 대처했어야 했다. 하지만 러시아의 수뇌부는 3국협상이라는 명분에만 급급하여 준비도 되지 않은 군대를, 그것도 서둘러 전쟁터로 몰아넣어 참사를 야기하였다.




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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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복한 러시아 제13군단장을 영접하는 프랑코 독일 제1군단장. 그는 결정적인 시기에 힌덴부르크에 항명하여 대승의 마지막을 장식하였다.



승리라는 결과를 얻었지만 독일군도 많은 갈등이 있었다. 이러한 갈등의 주체는 다름 아닌 힌덴부르크였다. 힌덴부르크는 이 전투의 엄청난 후광으로 인하여 이후 대통령까지 올랐지만, 엄밀히 말해 대승을 거둘 수 있었던 이유는, 전황을 올바르게 판단한 호프만 등의 유능한 참모들, 그리고 항명까지 하며 전투에 임했던 예하부대장들의 결단 덕이었다. 그는 단지 참모들의 진언을 수용하여 이미 수립된 계획을 행사하였을 뿐이다.

사실 부임 전 힌덴부르크는 서부전선에서 이동 중인 2개 군단의 재배치가 완료된 후 방어만 펼치려 하였다. 8월 25일 러시아 2군을 공격하기 시작했을 때, 러시아 1군의 이동을 염려하여 포위망 북쪽을 담당하던 독일 1군단을 철수시켜 러시아 1군을 견제하려다 참모들의 만류로 보류하였다. 28일에 다시 이동 명령을 내렸지만 이번에는 1군단장 프랑코가 불복하고 최후의 일격을 가하여 러시아 2군의 숨통을 끊을 수 있었다.

탄넨베르크 전투는 1차대전에서 보기 드물게 신속하고도 확실하게 승자와 패자와 결정된 싸움이었다. 이 전투가 전사에 기록된 수많은 기념비적 다른 전투들과 비교해서도 찬란하게 빛을 발하는 이유는 소수가 다수를 완벽하게 섬멸하였다는 점이다. 2,100년 전 카르타고와 로마 사이에 있었던 깐네 전투(Battle of Cannae)의 완벽한 재현으로 불릴 정도로 소수가 기동전으로 다수를 포위 섬멸한 전쟁사의 본보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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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대전 전체에 영향을 주었던 탄넨베르크 전투 전적지의 최근 모습.



당시 독일은 몰트케의 성급한 판단으로 서부전선에서 귀중한 2개 군단을 빼내 동부전선으로 보냈지만 탄넨베르크 전투는 그 군단이 도착하기 전에 종결되었다. 이는 프랑스를 강력하게 압박하고 있던 독일의 기세가 꺾이는 기점이 되었다. 비록 러시아는 참패를 당하였지만 위기에 몰려있던 프랑스를 도와준 셈이다. 이처럼 탄넨베르크 전투는 동부전선을 넘어 1차대전 전체에 영향을 미친 거대한 사건이었다.




남도현 | 군사 저술가
[전쟁, 그리고], [2차대전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 순간들], [끝나지 않은 전쟁 6.25] 등의 군사 관련 서적을 저술한 군사 저술가. 국방부 정책 블로그, 군사월간지 [국방과 기술] 등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현재 무역대행 회사인 DHT AGENCY를 경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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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용원의 군사세계
http://bemil.chosun.com/



발행2014.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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