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역사 줄루전쟁 (8) - 이산들와나 전투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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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69회 작성일 16-02-07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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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우에 잠긴 남아공 렝스버그(Laingsberg)의 모습. 남아공의 1월은 우기에 해당하며 군사작전에 적절한 시기가 아니다. 사진은 1981년 1월 폭우의 참고자료.






최악의 시기에 전쟁을 시작한 영국군



영국이 동원한 5개 지대의 침공 계획은 다음과 같았다. 제1지대는 피어슨 대령의 지휘하에 투겔라강에 집결하여 인근 요새에 수비병력을 주둔시킨다. 이후 요새 포대의 엄호 하에 강을 건너 건너편 언덕에 집결하고 차후 에쇼웨(Eshowe) 방면으로 진출한다. 제2지대는 거의 원주민 병력(Native contingents)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역시 피어슨 대령 밑에 편제되어 있었지만 그 하위 지휘관들의 지휘 하에 투겔라강 중류 지역을 감시하다가 진격명령이 떨어진 후 피어슨 대령의 1지대가 에쇼웨에 도달하면 움직이도록 한다. 제3지대는 글린 대령(Col. Glyn)의 지휘 하에 로크스-드리프트(Rorke’s Drift)에 집결하여 영국의 최후 통첩 이행기한이 끝나는 즉시 진군한다. 제4지대는 우드 대령(Col. Wood)의 지휘 아래 블러드-리버(핏빛강) 인근까지 이동하여 집결한다. 인근에서 마로타(Marota)족과 싸우던 제5지대는 미들버그(Middleburg)에 집결하여 퐁골로(Pongolo)강 방면으로 나아간다.

이런 계획 아래, 영국이 줄루왕국 침공을 위해 동원한 5개 지대의 병력은 15,051명에 달했다. 물론 정규군은 6,700명이었고 나머지는 소위 원주민 출신 병사들이었다. 그러나 제국주의 국가가 식민지 변경에서의 전쟁에 동원하는 병력의 수가 수천을 넘지 않았던 것을 감안하면 이러한 대군이 동원되는 것은 상당히 이례적이었다. 이것도 모자라 영국은 세인트헬레나 섬과 모리셔스에 주둔한 병력, 그리고 기타 추가 병력을 케이프에 데려왔다. 아울러 3개 중대 병력을 “예비 병력과 경비 병력 확보”를 명목으로 추가 동원하였다. 따라서 줄루전쟁을 위하여 영국이 동원한 총병력은 22,545명이었다. 단순히 줄루와 싸워서 이기는 것이 아니라 아예 끝장을 보겠다는 영국 식민지 세력의 의도를 잘 드러내주는 대목이다.

줄루왕국을 침공한 영국군은 침공 초기부터 큰 어려움을 겪었다. 근원적인 이유는 전쟁할 시기를 잘못 선택했기 때문이었다. 영국이 줄루왕국을 공격한 시기는 남반구의 여름에 해당하는 때로, 비가 자주 오는 우기(雨期)였다. 물이 불어난 강과 하천마다 흙탕물 급류가 흘렀고 평지는 늪지대로 변했다. 불행하게도 테시거 중장(켈름스포드 경)을 위시한 영국군 지휘관들에게는, 이러한 사정을 고려하여 경장(輕裝)의 빠른 부대와 중무장 부대를 분리해서 운용하려는 융통성조차 없었다. 줄루 왕국의 수도인 울룬디까지 빠르게 진격하여 줄루왕국으로부터의 위협을 제거한다는 것이 기본적인 전략이었지만 영국군의 진격 과정은 속전속결과는 전혀 반대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켈름스포드경은 하필이면 가장 기동하기 어려운 시기를 골라 진격을 시작한 것이다. 물론 이때가 줄루왕국에서 바쁜 농사철에 해당하니 병농일치(兵農一致)의 군사시스템을 가지고 있는 줄루왕국에서 군사를 쉽게 동원할 수 없으리라 여겼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영국군은 기후와 이에 따른 보급의 문제를 전혀 고려하지 않았으며 이는 영국의 공격 결정이 군사적인 효율보다는 정치적 고려를 우선하여 내려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계절로 따지자면 남아프리카에서 전쟁하기 가장 좋은 시기는 3월에서 5월이었다. 남반구의 여름(11월-2월) 우기가 끝나 풀도 적당히 자라있어 우마(牛馬)의 먹이가 충분하고 비로 불어난 물이 어느 정도 빠져 땅이 굳어지는 시기였다. 아울러 너무 춥지도 덥지도 않아 유럽 출신의 군인들이 싸우기 적절하였다. 매우 적극적으로 전쟁에 나서기는 했지만 줄루왕국 침공군은 혹독한 어려움을 겪어야 했고 켈름스포드의 기대감은 얼마 안 가 곤혹스러움으로 바뀌었다.



“이 지역에서 원래 예상보다 월등히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긴 수레행렬과 같이 행군하는 일은 엄청난 수고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로크스-드리프트와 이산들와나 구릉지대 간의 불과 10마일(16km)을 행군 가능한 도로로 만드는 데 제3지대 병력의 절반이 7일을 꼬박 매달렸습니다. 이 와중에도 폭우가 쏟아져 필경 지나가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일시 들기도 했습니다. 아울러 우리 보급선은 (적의 공격에) 노출이 되어있고 이 때문에 상시적으로 기마순찰을 내보내야 하며 10마일마다 보병초소를 두어야 합니다… 이러한 상황을 인정할 수밖에 없고 따라서 원래의 계획에서 어떠한 사항을 수정해야 하는지 고민 중입니다.”




켈름스포드의 망상과 자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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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침공군의 총사령관 켈름스포드경(테시거 중장). 자신감이 지나쳐 줄루족의 전투능력을 폄하하였고 결국 원주민에게 대패하는 망신을 당한다.



보급의 문제는 차치하고라도 침공군의 중심에 선 켈름스포드의 전략적 사고는 줄루족에 대한 경멸감과 함께 아전인수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켈름스포드는 일단 확보한 거점을 중심으로 마치 토끼몰이 하듯이 줄루군을 궁지에 몰아넣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즉 영국군이 진격하면 줄루인들은 그 위세 앞에서 물러날 것이고 그리하여 나탈 변경지역에 대한 줄루인들의 위협을 제거할 수 있다고 여겼다. 이로서 줄루왕국 대부분을 장악하는 동시에 줄루인들을 줄루왕국의 동북쪽 구석으로 몰아넣는다는 것이 그의 작전이었다.

아울러 켈름스포드의 머릿속에서는 다음과 같은 시나리오가 전개되었다: 영국군이 진격을 하는 상태에서 세츠와요는 전시동원체제를 유지하여야 할 것이고 결국 보급의 어려움에 직면하게 된다. 전투를 하지 않는 상태에서 전사들의 불만이 늘어나게 될 것이고 싸우기 위하여 모인 군사들은 세츠와요 스스로에게 위협이 될 것이다. 만약 영국군과 정면대결을 하기로 하면 아는 오히려 영국군이 원하는 결과로 이어질 것이다. 즉 줄루인들은 결국 결전을 하든지 아니면 고스란히 그들의 땅을 내주어야 하는 진퇴양난에 처하게 될 것이고 결국은 결전을 통하여 패할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위의 시나리오는 켈름스포드의 망상이었다. 켈름스포드를 비롯하여 영국 식민정부 수뇌부는 줄루왕 세츠와요가 수만의 병력을 동원하였다는 것만 알고 있었지, 군사작전 중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 적정(敵情) 파악을 게을리 하였다. 아울러 줄루군의 능력을 과소평가하는 것도 문제였다. 줄루군은 ‘홈그라운드’에서 싸우고 있었고 그들은 당연히 지형을 영국군보다 잘 알고 있었다. 영국군은 많은 수의 토착병(Native Contingents)을 포함시킴으로써 이를 상쇄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설사 토착병들이 영국군에게 지형에 대해 알려줄 수 있다고 하여도 해당 지역에서의 전투경험이 없는 영국군이 그 지식을 잘 활용할 리 만무하였다.

줄루군이 지형에 익숙하다는 것은 단순히 지역을 잘 아는 것이 아니라 지형을 이용하여 전투효율(combat efficiency)을 극대화시킬 수 있다는 의미였다. 길게 자라난 풀 아래로 몸을 숨겨 이동하거나 풀에 가려진 조그마한 도랑이나 계곡을 통하여 이동하는 방법을 통하여 자신들의 땅에서는 기병 이상의 기동력을 발휘했다. 지형의 이점과 빠른 도보행군을 이용한 기동력으로 줄루 임피는 각각 지대별로 진군하는 영국군의 틈새를 파고 들 수 있었고 영국군에게 파멸적인 전술적 기습을 감행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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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루 전사들. 유인작전과 지형지물의 이용으로 이산들와나(줄루어로 ‘작은 손’)에서 영국군을 격파하였다.



켈름스포드는 5개 지대로 시작된 침공계획을 수정하여 일부 지대를 통합하여 3개 지대로 줄이고 중앙으로 진격하는 지대를 본대(本隊)로 삼아 직접 지휘 하에 두었다. 그리고 1879년 1월 11일, 켈름스포드가 지휘하는 본대가 로크스 드리프트에서 버팔로 강을 건너면서 줄루왕국에 대한 침공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때 영국군 야전지휘관들은 줄루군대가 어디 있는지 그 위치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켈름스포드는 뒤늦게 정찰대를 내보냈고 다음날인 12일에 제3지대가 바시 지역으로 정찰을 가게 된다. 이들은 잉쿠투(Inkuthu)산 인근에서 전쟁의 발단이 된 시하요의 부족이 소와 양을 이동시키고 있는 것을 보았다. 전쟁에 앞서 부족의 재산을 숨기고자 하였던 것이다. 영국군은 시하요를 처벌하는 차원에서 우양(牛羊)을 탈취하고자 하였고 시하요는 부족의 전 재산을 빼앗기게 될 위기에 처하자 영국군에 맞서 싸웠다. 소규모였지만 어찌 보면 영국-줄루전쟁 최초의 전투가 잉쿠투에서 벌어진다. 그러나 시하요의 부족은 병력이 태부족이었고 하필 가장 취약한 순간에 영국군에게 발견된 것이다. 전투는 예상대로 영국군의 손쉬운 승리로 끝났다. 이 전투에서 영국군 소속은 토착병 2명이 전사한 데 비해 시하요의 부족에서는 30명의 전사들이 영국군의 총격에 쓰러진다. 그러나 나탈지방을 휩쓸던 줄루의 임피들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사실 영국군이 적정 파악을 게을리하여 몰랐을 뿐이지, 이때 줄루왕국 내의 전사들은 이미 활발하게, 그것도 대규모로 움직이고 있었다. 잉쿠투 전투에서는 시하요의 부족이 운 나쁘게 영국군의 눈에 띄어 공격 당한 것일 뿐 이미 줄루 왕국에 동원령이 내려져 수만에 해당하는 줄루왕국의 병력이 왕도로 향하고 있었다. 영국군이 이러한 움직임을 눈치채지 못했던 까닭은 정보 수집에 게을렀던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문명국이자 식민대국으로서의 자만심이 크게 작용하였다. 줄루왕국이 어느 정도의 병력을 동원할 수 있는지, 줄루 전사들의 전투력에 대하여 자세히 알려고 하는 적극적인 노력도 없이 그저 ‘잘 훈련되고’ 선진적인 무기 체계를 갖춘 자신들의 낙승만을 섣불리 예상하고 있을 뿐이었다.

정찰 활동도 게을리 한 채 영국군은 보급로 정비를 위하여 추가 병력을 바시(Bashi) 지역으로 보냈고 이 병력은 바시 지역에서 20일까지 움직이지 않고 머무르게 된다. 로크스-드리프트에서 거의 10km 떨어진 곳이었기에 바시 주둔병력의 지휘관은 혹시라도 고립될 수 있다는 우려를 나타내었고 사령관인 켈름스포드에게 수비전술을 문의하였다. 켈름스포드는 보어인들이 행하였던 라거(수레를 이용한 윤형진)라든가 특별한 수비방책이 필요 없다고 단언하면서 야습이 있을 경우 “착검하여 물리치라”는 말을 할 뿐 다른 지령이나 명령은 없었다.

영국군이 진격을 시작한 6일 뒤인 1월 17일에야 켈름스포드가 로크스-드리프트에서 정찰대를 내보냈고 이산들와나(줄루어로 ‘작은 손’) 지역까지 정찰해 보았지만 줄루군의 흔적조차 발견할 수 없었다. 1월 17일, 줄루왕국의 왕도인 울룬디에는 이미 2만이 넘는 전사가 모여 동원과 부대 편성을 마친 상태였다. 왕도 울룬디를 출발한 줄루 본대 24,000 병력(일부 기록에 따르면 28,000)은 영국군과의 결전을 위하여 움폴로지강을 건넜다. 전쟁 지휘를 맡은 줄루왕국의 총리대신(總理大臣)격인 음니야마나 부텔레지(Mnyamana Buthelezi)는 병력을 나누어 4,000명의 별동대를 편성하여 에쇼웨에 있는 피어슨 대령의 제1대를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나머지 병력은 넓은 초원이 펼쳐져 있는 이시페지 이칸다 (isiPhezi ikhanda, 현 남아프리카 콰줄루-나탈주) 지역으로 한꺼번에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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켈름스포드 본대의 주축이었던 제24 보병연대(24th Regiment of Foot) 중 1대대 H중대의 모습



줄루왕국에 진입한 켈름스포드의 본대는 1월 20일 이산들와나에 이르러 진을 치게 된다. 이산들와나에 진을 친 켈름스포드는 당시 영국군 최신무기인 마티니-헨리 소총으로 무장한 자신 휘하의 4천 병력이면 충분히 줄루왕국의 본대를 격파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이전 식민전쟁의 패턴은 언제나 영국군이 우수한 화력으로 다수의 원주민 부대를 학살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기껏해야 창과 방패로 무장한 줄루인들이 자신의 상대가 되지 못하리라 생각했다. 영국군의 화력에 대한 과신은 적이 어디 있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병력을 나누는 결과로 이어졌다.

이산들와나에 진을 친 켈름스포드는 일단 토착병 2개대대를 정찰부대로 편성하여 내보냈고 이들 토착병들은 얼마 안 가 소규모 줄루부대와 충돌하였다. 켈름스포드는 이들이 본대의 일부라고 생각하고 4,000의 병력에서 영국 정규군 2,000과 야포부대를 포함한 2,500명을 추려 별동대를 만들었다. 멀지 않은 곳에 있으리라 생각되는 줄루의 본대를 찾아 결전(決戰)을 통하여 격파하고 줄루왕국의 항복을 받아낸다는 것이 켈름스포드의 생각이었다.

1월 22일 오전, 켈름스포드는 그의 별동대와 함께 진격을 시작하였다. 줄루부대를 찾아나서는 켈름스포드에게 승리는 당연한 결론이었기에 승패에 대한 걱정은 전혀 없었으며, 별동대의 무기수송에만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그러나 줄루본대는 사실 매우 가까이 있었다. 수레가 다닐 수 있는 도로를 중심으로 이동하는 영국군과 달리 이동로에 구애 받지 않는 줄루전사들은 벌판과 초원을 가로질러 행군할 수 있었다. 토착병 정찰부대가 본 것은 줄루의 유인부대에 불과하였고 켈름스포드는 결국 유인작전에 말려들어 적을 근처에 두고 병력을 분산시킨 꼴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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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산들와나에서 기마대를 이끈 던포드 대령. 토착병들을 지휘하여 용감히 싸웠으나 이산들와나에서 목숨을 잃었다.



켈름스포드는 로크스-드리프트에 머물고 있던 던포드 대령(Col. Anthony Durnford)에게 전령을 보내 이산들와나로 병력을 이동시키라는 조치를 취하고 일단 이산들와나에 남게 되는 잔류 병력은 헨리 풀레인 중령(Lt. Col. Henry Pulleine)이 맡게 되었다. 그러나 헨리 풀레인의 계급이 중령이었기는 하지만 이는 급조된 계급이었고 사실 풀레인은 야전 전투경험이 없는 행정장교 출신이었다. 켈름스포드는 출발하기 전에 풀레인에게 본진 수비에 대한 지시를 내리긴 했지만 ‘보병 병력으로 전초를 두고 방어선을 구축하며 기병은 이보다 멀리 내보내라’는 것이 명령의 전부였다.

당시 참전군인들의 증언을 토대로 줄루전쟁사를 저술한 선교사 콜렌소(John William Colenso)에 따르면 당시 영국군의 기본 작전명령 중의 하나가 행군을 멈추고 야영하게 되면 언제나 수레를 이용한 방어진(wagon laager)을 구축하라는 것이었다. 실제로 콜렌소의 저서에는 켈름스포드 휘하에 있던 글린 대령(Col. Glyn)이 라거 구축을 건의했다고 쓰여있다. 수레로 이루어진 라거는 보어인들이 수적으로 월등한 줄루왕국의 전사들을 무찌르는 과정에서 그 효율성이 여실히 증명되었다. 보어인들이 남부 아프리카의 험한 환경에서 살아남고, 또한 그들만의 독립국가를 세울 수 있었던 것은 상당 부분 라거를 중심으로 한 ‘수비형 공격전술’의 힘이었다. 그러나 켈름스포드는 라거 구축이 너무 시간이 많이 걸린다는 이유로 건의를 묵살하고 군공(軍功)을 쫓아 급히 진격하였다.

1월 22일 새벽, 동이 트자마자 켈름스포드 별동대가 본영을 떠나 진격을 시작하였다. 그들이 얼마 가지도 않아 가장 선두에서 정찰부대를 이끌고 있던 크릴록 중령(Lt. Col. Crealock) 부대 앞에 ‘상당히 많은 수’의 줄루 병력이 나타나 ‘얼쩡’거렸다. 켈름스포드는 이들이 줄루 본대의 일부라 생각하여 공격하려 하였으나 이들 줄루병력은 영국군의 신경을 적당히 자극하고는 유리한 위치로 후퇴를 하였다. 영국군 부대가 본격적으로 접근하면 싸움도 하지 않고 그 유리한 위치를 포기하고 도망갔다. 이후 사라졌다 싶으면 다시 나타나 영국군을 자극하고는 달아나기를 반복하였다.

이 과정이 3시간 동안이나 계속되었고 오전 10시쯤 켈름스포드의 본대는 이산들와나의 본영으로부터 무려 12마일(18km)이나 떨어져 있었다. 혹시라도 무슨 일이 일어날 경우 서로 지원하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멀어진 것이다. 줄루군은 유인작전을 통하여 켈름스포드를 이끌어내는 데 성공하자 나머지 전력을 풀레인이 있는 본영(本營)에 집중시켰다.




김성남 | 안보·전쟁사 전문가
글쓴이 김성남은 전쟁이 인간 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관심을 가지고 이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미국 UC 버클리 동양학과를 졸업한 후 연세대학교 국제대학원에서 국제학 석사를 받고 한국학중앙연구원 정치학과에 진학하여 정치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주요 저서로는 [전쟁으로 보는 한국사], [전쟁으로 보는 삼국지], [전쟁 세계사] 등이 있으며 공저로 [4세대 전쟁]이, 역서로 [원시전쟁: 평화로움으로 조작된 인간의 원초적인 역사]가 있다.


발행2014.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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