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역사 줄루전쟁 (9) - 영국군의 참패로 끝난 이산들와나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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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516회 작성일 16-02-07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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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습과 참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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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루왕 세츠와요의 왕제(王弟)이자 이산들와나 줄루군의 총지휘관인 다불라만지 카-음판데(Dabulamanzi kaMpande)



1월 22일 새벽에 켈름스포드가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줄루군이 이미 이산들와나 본영근처까지 왔다는 징조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오전 7시부터 8시 사이에 캠프로부터 약 1.3km 앞에 있던 전초부대가 동북쪽에서 줄루군이 접근하고 있다는 보고를 하였다. 4,000명에 달하는 병력이었다.

풀레인은 별동대가 진격한 방향으로 전령을 보내고 황급히 자신 휘하의 병력을 무장시켰다. 그 뒤로도 줄루부대들을 발견했다는 보고가 이어졌다. 10시 30분경에는 켈름스포드의 명령을 받은 던포드 대령이 로크스-드리프트에서 토착 기병군과 로켓포를 가지고 나타났다. 던포드가 계급상 상급자여서 일시적으로 지휘계통 논란이 불거지기는 했지만 풀레인이 현장 지휘권을 유지하는 선에서 갈등이 봉합되었다. 그 뒤로도 소규모 줄루부대들을 발견했다는 보고가 계속해서 들어왔고 줄루군이 켈름스포드의 후미를 공격하려 한다는 우려가 제기되면서 던포드는 추가적인 척후 활동을 위하여 즉시 한 개 중대병력의 차출을 요구하였지만 어떤 경우에도 캠프를 사수하라는 명령을 받은 풀레인은 이를 거부하였다.

줄루부대가 소규모로 발견된 이유는 그들 역시 영국군 본영의 위치를 파악하려고 널리 퍼져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적을 발견하고도 전령을 보내어 명령을 기다리고 부대 차출에 대한 논란에 빠져있던 영국군과는 달리 줄루군은 영국군이 발견되자마자 거의 즉시 반응하였다. 영국군은 줄루군이 ‘야만인’이라는 편견에 사로잡힌 나머지 줄루 전사들이 혹독한 성장과정을 거쳐 양성된 정예라는 것을 간과하였다.

13세기, 전투가 일상화된 몽골의 전사들이 적 발견 후 빨리 집결하듯이 널리 퍼져 영국군을 찾던 소규모 부대들은 서로간 긴밀한 연락을 통하여 집결하였다. 놀라운 점은 줄루 전사들은 어느 한 곳에 모여 집결하여 대부대를 형성한 후 움직인 것이 아니라 행군을 하는 동시에 가까이 있는 동료부대와 뭉쳤다는 점이다. 영국군과 가까워졌을 때 이들은 이미 전통적인 ‘쇠뿔대형’을 완성하고 영국군을 들이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영국군에 맞서는 줄루군의 명목상 군령권은 줄루왕국의 총리대신이 맡고 있었지만 줄루족 부대는 대개 수천의 단위부대로 나뉘고 인두나(줄루어로 ‘長’)가 각 부대에 대한 독립적인 지휘권을 행사한다. 이날 이산들와나에 나타난 줄루군은 3개의 ‘사단’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이 부대들의 총지휘관은 줄루국왕 세츠와요의 이복동생인 다불라만지 카-음판데(Dabulamanzi kaMpande)였고 그는 총지휘관인 동시에 직속사단을 거느리고 있었다. 나머지 두 개 사단을 이끄는 인두나들은 각각 은칭와요 코차(Ntshingwayo Khoza), 마부맹그와 은툴리(Mavumengwa Ntuli)였다.

한편 풀레인에게 병력 차출을 강력히 요구하던 던포드는 풀레인이 주저하자 2개 소대를 본영의 좌측으로 보낸 다음 자신의 공병대와 토착병 부대를 이끌고 본영과 약간 떨어진 곳에서 전초를 형성하였다. 공격을 위하여 총집결한 줄루군이 발견된 것은 약 오전 11시경이었다. 사실 줄루군은 영국군 본영 가까이에 몰래 숨어있다가 2만의 병력으로 풀레인의 본영을 일시에 들이칠 계획이었으나 척후로 내보낸 일부 병력이 던포드가 내보낸 영국군의 정찰대에 들키면서 기습계획에 차질을 빚었다. 척후들이 영국군 기마대에 쫓기면서 하필이면 본군이 있는 쪽으로 도망 왔고, 본영으로부터 5km가 채 안 되는 잉쿠투(Nqutu/Inkuthu) 언덕 근처 수풀 속에 가만히 숨어있던 줄루 본군을 영국 기마대가 발견한 것이다. 영국 기마대는 황급히 위급함을 알리러 본영으로 달려갔다. 줄루 본군 지휘관들은 완벽한 기습이 이루어지지 않아 다소 실망하였으나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기왕 들킨 마당에 공격을 지체할 이유가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즉각 공격에 나선다. 줄루 본군은 2만 병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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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산들와나 전투도. 줄루군은 중앙과 우측에 대한 공격이 여의치 않자 좌측의 언덕으로 크게 우회하여 영국군을 포위한다.



공격에 나선 줄루군의 병력과 먼저 만난 것은 던포드가 이끄는 병력이었다. 던포드는 약간 후퇴하여 뒤쪽에 있는 동가(Donga, 마른 도랑)로 물러난다. 던포드는 도랑 내에 병력을 약간 넓혀 배치하고 수비에 임하였다. 이 도랑은 본영의 우측에서 약 700미터 떨어진 곳에 있었는데 이 곳에 배치된 던포드의 병력은 대다수가 인근의 바수토(Basuto)족 흑인 토착병이었음에도 정확한 사격으로 무수한 줄루전사들을 쓰러뜨렸다. 던포드의 병력을 그대로 집어삼킬듯이 달려들던 줄루전사들은 정확히 이루어지는 토착병들의 사격에 속절없이 꺾였다. 제3지대에 종군하였던 영국군 통역관의 증언으로는, 던포드 부대의 사격에 무려 1천이 넘는 줄루전사가 쓰러졌고 그 시신이 들판에 ‘후춧가루처럼 널려있었다”고 한다.

한편 좌측의 잉쿠투 구릉지대로 정찰을 나갔던 던포드 휘하의 소대도 언덕에 방어진을 형성하고 줄루군에게 지속적인 손실을 강요하였으나 지휘관인 솁스톤 대위(Capt. Shepstone)가 본영에 위기를 알리기 위하여 떠나고 줄루의 대부대에 맞서기에는 병력이 태부족이어서 본영 방향으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본영의 뒤쪽에 있던 풀레인에게는 줄루군이 빠른 움직임으로 영국군의 중앙대형의 중간과 좌측을 공격하는 듯이 보였다. 풀레인은 줄루군과 정면대결을 결정하고 제24 보병연대 병력 중 1개 중대를 전진 배치하여 전투를 벌이고 있던 전초부대를 보강하고자 했다. 화력의 우위가 확실하니 밀집사격으로 줄루군의 예봉(銳鋒)을 꺾으려 한 것이다. 그러나 이 병력으로는 충분치 않았고 결국 방어부대들에게 후퇴명령이 내려졌다. 1개 중대로는 줄루군의 진격을 멈추게 할 수 없었고 결국 풀레인은 24연대 전부를 동원하여 본영 전방 약 300미터 지점에서 방어선을 형성하였다.

이때 본영 내에 있던 제5포병 여단의 야포가 줄루군을 향하여 사격을 시작하였다. 이 포들은 살상력을 극대화하기 위하여 대인(對人)용의 “깡통포탄”을 사용하였다. 깡통포탄이란 깡통 안에 다수의 쇠구슬이 담긴 형태로, 일단 발사되면 깡통이 깨지면서 쇠구슬이 흩어져 적 병력을 살상하게 되어있었다. 영국군의 깡통포탄은 줄루군의 선봉부대가 아니라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서 기다리고 있던 줄루군의 예비병력을 살상하였고 이 부대들은 선봉부대를 지원하지 못하고 언덕 뒤의 안전지대로 물러나야 했다. 줄루군의 정면공격은 확실히 저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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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산들와나 전투지의 현재 광경



그러나 영국군은 방어만 할 뿐 스스로 활로를 뚫을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그리고 정면공격으로 활로를 찾지 못한 줄루군은 병력 수천을 분리하여 영국군 본영의 좌측에 있는 언덕 뒤로 이동시켰다. 영국군 방어선을 우회하여 측면공격을 노린 것이다. 이러한 가능성을 우려한 에섹스 대위(Capt. Essex)가 던포드에게 와서 병력의 일부를 좌측으로 이동시킬 것을 요청하였다.

던포드는 에섹스의 건의를 따를 수 있는 여유가 없었다. 영국군 우측의 방어를 담당하고 있던 토착병들과 보어인/유럽인 부대의 탄약이 떨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던포드는 우측에 있던 병력을 탄약이 쌓여있는 본영의 우측 언덕으로 후퇴시켰다. 아울러 정면의 24연대방향으로 이동하여 방어선이 너무 늘어져 있다며 병력을 집중시킬 것을 주장하였다. 던포드의 의도는 병력과 탄약을 모두 본영 우측에 있는 언덕으로 올려 보내 감제고지를 확보하고 병력과 화력을 집중시키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때는 너무 늦었다. 12시에서 1시 사이에 언덕으로 우회한 줄루의 대병력이 본영의 좌측을 들이쳤고 좌측의 빈약한 영국군 병력은 이를 감당하지 못하고 그대로 허물어졌다. 24연대는 앞뒤로 적을 맞게 되었고 포대가 점령당하면서 지원사격도 끊겼다. 본영 내에는 영국군과 줄루군이 뒤엉켰고 일부는 대오를 유지하고 싸웠지만 대부분은 본영 아래쪽의 좁은 계곡을 통하여 달아나려 하였다 이 지형에 익숙해있던 줄루군은 도주하는 병력들을 따라잡아 흑인과 백인을 가리지 않고 창으로 찔러 죽였다. 이 혼란 속에서 지휘관인 풀레인 중령이 죽고 부하 장교들도 난전 중에 줄루전사들의 이클와에 찔려죽었다. 일부는 버팔로강에 도달하여 강을 건너려 하였으나 최근의 비로 버팔로강의 물이 급격히 불어난 상태여서 수백의 익사자가 발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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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연대 병력 1대대 병력은 방진을 만들어 최후까지 줄루 임피에 맞서 싸운다.



전장에서 탈출하는 데 성공한 것은 나탈 토착병 부대 중 기마대뿐이었다. 이들은 줄루군의 우회를 막아야 한다고 주장한 기마대의 에섹스 대위를 포함한 많은 패잔병들의 목숨을 구하였다. 일부 병력은 투겔라강을 건너 나탈로 귀환하는 데 성공하였으나 줄루왕국의 협박에 못이긴 인근 원주민들의 공격을 받았고 결국 이들도 살아 돌아가지 못하였다. 이 와중에서 24연대의 멜빌(Melville)과 코그힐(Coghill) 중위는 군기(軍旗)를 사수하기 위하여 혈로(血路)를 뚫고 투겔라강을 건너는 데 성공하였으나 결국 죽임을 당하였다. 멜빌과 코그힐 중위에게는 사후에 영국군 최고의 훈장이라 불리는 빅토리아 십자장(Victoria Cross)이 수여되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정작 원주민들은 이들이 사수하기 위하여 목숨까지 바친 군기에 아무런 관심이 없었고 그냥 땅바닥에 버려두었다.

마지막 패잔병들이 전장을 이탈한 것은 1시 30분, 그 이후 살아남은 병력은 거의 없었다. 상당수의 병력이 도주하지 않고 최후까지 싸웠다. 24연대 병력 150명은 보병 방진을 형성하여 줄루 전사들을 사격하고 탄약이 떨어진 후에는 총검과 개머리판을 휘두르며 싸웠고 결국 전원 전사하였다. 한편 로크스-드리프트에서 기마병을 데리고 와서 풀레인을 도운 던포드도 도망하지 않고 최후까지 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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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포드 휘하의 기마대 병력이 줄루 임피에 맞서 전투를 벌이고 있다.



일부에서는 던포드가 본영 우측 병력의 후퇴를 명하는 바람에 방어선이 약화되었다며 그에게 패전의 책임을 지우지만 사실 던포드의 병력이 싸운 줄루군은 국왕 직속의 응-고바마코지(Ngobamakhozi)사단으로 줄루군의 최정예였다. 던포드의 병력이 잘 싸우지 않았더라면 영국군 본영은 좌우에서 동시 공격을 받아 정오가 되기도 전에 무너졌을 것이다. 그의 휘하에 있던 식민지 기마병, 나탈 기마경찰대, 그리고 기마소총부대들은 말을 타고 달아날 수 있음에도 도망하지 않고 마차를 묶은 곳으로 물러나 끝까지 물자와 본영을 사수하다가 죽었다. 이들이 타고 다니던 말들은 전투 이후 말뚝에 묶인 사체로 발견되었다.

전투는 오후 3시 경에 이르러 끝이 났다. 최후로 버티던 병력들의 탄약이 떨어질 즈음하여 일식이 일어나면서 일시적으로 어둠이 전장을 뒤덮었다. 일식이 끝나고 어둠이 걷혔을 때 영국군 부대 중 살아 움직이는 자들은 없었다. 도주한 병력을 제외하고 본영에 남았던 영국군은 전멸하였다.




참담한 실패



전쟁이 시작되기 전에는, 제아무리 줄루군이 절대적인 수적 우위를 가지고 있더라도 영국군이 총기도 없고 창칼을 휘두르는 ‘검둥이 야만인’에게 패하리라 생각한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이는 영국인들의 오만이었을 뿐, 줄루 전사들은 혹독한 성장과정과 병영생활로 잘 단련된 전투원들이었다. 이들은 영국군의 총격과 포격에 많은 피해를 보기는 하였지만 효과적인 전술, 그리고 지형지물의 이점을 최대한 살려 영국군이 지닌 화력의 우위를 상쇄하고 이산들와나에서 영국군을 전멸하였다.

켈름스포드는 약 오전 10시경에 전령으로부터 이산들와나 본영이 좌측으로 줄루군이 출현하였다는 전갈을 받았으나 그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하고 줄루족의 유인부대 추격을 계속하였다. 심지어 오후 1시쯤 앞에서 얼쩡거리던 줄루부대마저 사라지고 근처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이상한 낌새를 전혀 눈치채지 못하였다. 그러나 1시 15분쯤 본대를 따라다니던 원주민들이 총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고 하였고 1시 45분쯤에는 원주민 몇 명이 급히 본대를 향해 오면서 본영에 큰 싸움이 벌어졌다는 소식을 전하였다. 켈름스포드는 여전히 반신반의하여 인근의 고지로 올라가 본영 쪽으로 시선을 돌렸지만 어떤 이상한 조짐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는 글린 대령으로 하여금 진격을 멈추고 야영준비를 하라 일렀고 대신 오후 2시쯤에 기병 40명을 차출하여 본영 쪽으로 향하였다. 4시쯤에 먼저 본영 쪽으로 달려간 론스데일(Col. Lonsdale)이 돌아와 본영이 줄루군에게 함락당했다고 보고하였다. 켈름스포드는 황급히 이산들와나로 회군을 명령하였으나 켈름스포드의 본대가 저녁 무렵 이산들와나로 돌아왔을 때 살아 돌아다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이미 본영은 초토화되고 그 병력은 전멸당한 것이다.

본영의 초토화와 그 병력의 손실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바로 본영에 있던 모든 탄약과 물자가 파괴되거나 소실되었다는 것이다. 론·록(Ron Lock)의 저서 <줄루족의 승리: Zulu Victory>에 따르면 탄약 40만 발과 함께 소/나귀 2,000마리, 그리고 130량의 수송용 수레가 없어지거나 부서졌고 이와 더불어 기타 군량과 군복, 천막 등 물자의 손실도 이루 말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근 2천에 달하는 병력도 병력이거니와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물적 기반 자체가 사라져버린 것이다.

사실 본대병력이 해가 떨어진 이후에야 본영에 도착한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본대 병력이 들판 가득히 쓰러진 시신 전부를 보지 못했다는 점이다. 본영에 쓰러진 전사자 시신의 상당수가 배가 갈라진 체 참혹한 모습으로 나뒹굴고 있었다. 전사 사회인 줄루왕국의 전사(戰士)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전장에서 그들이 죽인 적의 혼령이 지상에 머물면서 그들을 괴롭히는 것이었다. 이를 막기 위해서는 적을 죽인 다음 그 배를 갈라 열어야만 육신에서 영혼이 빠져 나와 무사히 사후 세계로 간다는 것이었다.

일부 시신은 수습하였지만 혹시라도 줄루 군사들이 다시 돌아올까 두려워 황급히 큰 구덩이를 만들어 시신을 던져놓고 돌무더기(Cairn)을 만들어 표시하였다. 군사들의 사기가 떨어질 것을 두려워한 켈름스포드는 다음날 동이 트기도 전에 군사들을 독려하여 이산들와나를 떠나 나탈로 복귀하였다. 이는 영국의 줄루왕국 침공 시도가 실패로 돌아갔다는 것을 의미했다. 승리를 자신하며 호기롭게 출발한 영국의 침공군은 한 판 싸움에 참담한 패배를 당하고 꼬리를 만 채 황망한 퇴군길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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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군이 전사자 시신을 집단매장한 곳을 표시한 돌무더기(Cair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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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산들와나에서 목숨을 잃은 줄루 전사들을 기리는 기념비






김성남 | 안보·전쟁사 전문가
글쓴이 김성남은 전쟁이 인간 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관심을 가지고 이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미국 UC 버클리 동양학과를 졸업한 후 연세대학교 국제대학원에서 국제학 석사를 받고 한국학중앙연구원 정치학과에 진학하여 정치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주요 저서로는 [전쟁으로 보는 한국사], [전쟁으로 보는 삼국지], [전쟁 세계사] 등이 있으며 공저로 [4세대 전쟁]이, 역서로 [원시전쟁: 평화로움으로 조작된 인간의 원초적인 역사]가 있다.


발행2014.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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