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역사 프랑스 전역 1 (1940) - 독일과 프랑스 간의 갈등이 불러온 전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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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53회 작성일 16-02-07 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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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이 시작한 전쟁



두말할 것 없이 제2차대전은 인간이 인위적으로 만들어 낸 역사상 최악의 재앙이다. 몽골의 정복전쟁처럼 엄청난 희생을 불러일으킨 여타 사례들도 인류사에는 부지기수지만, 불과 6년이라는 시간 동안 전쟁의 직접적인 영향으로 죽어간 사람이 가장 적게 기록된 자료에서조차 5,000만 명으로 추산될 정도로 참혹하였다. 이때 입은 물적 피해 또한 역사상 최대의 규모여서 인류가 전쟁 전의 수준으로 완전히 회복하는 데 10년이 넘게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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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대전은 이론의 여지없이 인류사 최대의 비극이었다. <출처: wikipedia>



그런데 참사를 일으키는 데 가장 커다란 역할을 담당한 히틀러가 1933년 정권을 잡았을 당시에 정작 독일은 전쟁을 벌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독일의 무장을 제한한 베르사유 조약(Treaty of Versailles)에 의해 독일의 군사력은 약해져 있었고 오히려 주변국의 압박에 버거워 했을 정도다. 1935년 재군비를 선언한 후, 독일군의 전력은 급속도로 커갔지만 인근의 프랑스, 소련에 비해 앞섰던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러한 독일이 불과 5년도 지나지 않아 전 세계를 상대로 과감히 일전을 벌일 수 있었던 것은 짧은 시간 동안 물리적인 뒷받침을 신속히 구축한 덕분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요인은 주체할 수 없는 자신감 때문이었다. 소련을 침공한 지 1년도 지나지 않아 자신감이 자만이었음을 깨닫게 되지만, 그들의 의지대로 세계사를 이끌어 나간 1941년 겨울까지 독일은 분명히 의기양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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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에서 승전 퍼레이드를 벌이는 독일군. 이때의 승리를 계기로 자신감을 얻은 독일은 대외팽창을 더욱 가속화할 수 있었다. <출처: wikipedia>



유럽 대륙을 단시간 내 지배해나간 독일은 그 어떤 상대와 겨루어도 당연히 이길 수 있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함부로 사용하기 어려운 전쟁이라는 수단을 쉽게 꺼내 들곤 했던 것인데, 이러한 독일의 자신감은 1940년 봄에 있었던 놀라운 승리에서 비롯되었다. 결과론이지만 만일 이때 독일이 승리하지 못했다면 유럽에서의 2차대전은 거기서 끝났을 가능성이 컸다. 바로 역사상 최고의 전격전(Blitzkrieg)이었던 프랑스 전역(Battle of France)이다.




소심한 도발



인기를 얻기 위해서 집권 이전부터 노골적으로 호전적인 모습을 보여 왔지만, 막상 독일이 제1차대전 이후 처음으로 대외 도발에 나섰을 때 히틀러는 상당히 노심초사하였다. 1936년 3월 7일, 히틀러는 비무장지대로 설정되어 연합국의 감시를 받던 라인란트(Rhineland)에 독일군의 진주를 명하면서 최초의 무력 도발을 자행했다. 교전이 없었고 독일 영토 내에서 벌어진 일이라서 2차 대전에 포함하지는 않지만 이는 엄연한 군사행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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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영을 받으며 라인란트에 진주하는 독일군. 하지만 히틀러나 독일 군부는 연합군의 대응에 몸을 사렸다.



자신 있게 명령을 내린 겉모습과 달리 후일 히틀러는 “점령 후 이틀 간이 내 인생에서 가장 피 말랐던 시간이었다”고 술회했을 만큼, 이제 막 재건을 시작한 독일군의 능력을 벗어난 엄청난 모험이었다. 당시 총통의 명령에 가장 반발한 곳이 바로 독일군이었는데, 이들을 달래려고 군부를 대표하고 있던 국방성 장관 블롬베르크(Werner von Blomberg) 원수에게 ‘만일 프랑스가 반격하면 교전하지 않고 즉각 퇴각’하기로 약속하고서야 작전을 펼칠 수 있었다.

대부분의 사료에서 2차 대전의 공식적인 발발일로 보는 1939년 9월 1일에 있었던 폴란드 침공전에서도 독일의 소극적인 모습을 여실히 살펴볼 수 있다. 폴란드를 지원하기로 협정을 맺은 프랑스와 영국의 반격을 우려하여 배후 단속에 노심초사하였고, 소련과의 직접 충돌을 피하고자 사전에 밀약을 맺어 폴란드를 분할하는 것으로 만족하였다. 이런 몸을 사리는 태도는 절정기의 독일이라면 상상도 못할 나약한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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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독소전쟁 초기에 포로가 된 소련군. 독일은 더 이상 전쟁 발발에 망설임이 없는 자신만만한 모습이었다. <출처: wikimedia>



독일이 이처럼 소심했던 가장 큰 이유는 적대 세력인 프랑스, 영국, 소련에 비해 객관적으로 군사 전력이 뒤졌기 때문이다. 독일은 1930년대 말까지 꾸준히 대외 팽창을 시도했지만 한편으로는 분명히 주변을 두려워했다. 독일이 눈치를 보지 않고 자신들의 의도대로 행동할 수 있게 된 것은 1940년 프랑스를 일격에 굴복시키며 명실상부하게 대륙의 패자가 된 이후부터다. 이때부터 그들은 전쟁이라는 수단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필요할 때마다 꺼내어 쓰게 된 것이다.




강요 받은 패배



베르사유 조약의 굴욕을 겪은 독일에게 프랑스는 반드시 복수해야 할 대상이었다. 독일에게 불공정한 강화조약을 앞장서서 강요한 주역이기 때문이다. 프랑스가 1차 대전 중 가장 치열하게 혈투를 벌였던 상대여서 그만큼 미움도 많았지만 종전 후에도 프랑스를 승전국이라고 인정하지 않는 경향이 컸는데, 여기에는 그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역사에 가정은 없지만 1차대전 당시에 독일이 처음부터 양면전을 벌이지 않고, 영국이 초반에 참전하지 않았다면 프랑스는 1914년에 패전하였을 가능성이 컸다. 프랑스는 독일의 침공을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수도를 보르도(Bordeaux)로 옮겨야 했을 만큼 상당히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그런데 독일의 예상과 달리 동부전선에서 러시아가 조기에 동원되면서 독일은 양면전쟁에 빠져 전력이 분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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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대전 당시의 프랑스군. 독일과 양보 없는 격전을 벌여 전후에도 적개심이 대단하였다.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으로 확정된 독일의 지배와 간섭이 확정된 영역. 비록 강화조약이었지만 러시아를 계승한 소련은 이처럼 영토의 많은 부분을 포기하면서 실질적으로 1차대전에서 패하였다.




또한 처음에는 중립적인 태도를 보이던 영국이 영세중립국이던 벨기에를 독일이 침공한 것을 빌미로 프랑스 측에 즉시 가담함으로써 부담감은 커졌다. 결국 독일은 1차대전 내내 동쪽에서는 러시아와 서쪽에서는 프랑스, 영국 연합군과 싸웠다. 전쟁 말기에 미국까지 참전하면서 계속 중과부적의 상태로 전쟁을 치렀고 마침내 패배하였다. 그것은 반대로 이야기하면 그만큼 독일이 강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독일은 종전까지 자국 영토 밖에서 대부분의 싸움을 벌였다. 1918년, 강화조약을 맺으며 동부전선을 종결한 독일은 많은 점령지를 얻으며 승자의 위치에 섰다. 새롭게 탄생한 소련은 혁명의 혼란기에 빠져 내부 정비가 시급했던 관계로 실질적으로 항복과 다름없는 굴욕적인 조건을 받아들였다. 서부전선은 매번 돌파에 실패하여 결정적인 승기를 잡지는 못하였지만 1914년 이래로 계속해서 북부 프랑스와 벨기에의 상당 부분을 점유하고 있었다.




프랑스에 대한 적개심



이처럼 겉으로 드러난 정황만 놓고 본다면 독일이 군사적으로 앞서고 있던 상태에서 종전을 한 것인데, 아이러니하게도 역사는 프랑스를 승자로 만들어 버렸다. 물론 강화가 이루어지지 않고 전쟁이 계속 이어졌었다면 결국 사방이 고립된 독일이 패했을 것이라는 점에 대부분이 동의하지만, 어찌되었든 종전 당시에 독일은 가만히 앉아서 순순히 패배자의 지위를 받아들이기는 상당히 어려웠던 상황이기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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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년 정전 당시의 서부전선 상황도. 이처럼 전쟁 내내 대부분의 전투는 독일 밖에서 벌어졌다. 이런 상태에서 독일 국민은 패배자의 위치를 강요 받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미국이나 영국 같은 일부 승전국조차 너무 가혹하다고 우려했을 정도로 강화조약이 독일에게 일방적으로 불리하였다. 이처럼 순순히 받아들이고 감당하기 힘들만큼 무거운 올가미를 독일에게 씌우는 데 앞장섰던 나라가 바로 프랑스였다. 프랑스가 집요하게 굴었던 이유는 보불전쟁의 치욕과 1차대전에서 당한 피해를 보복하기 위해서이기도 하였지만 무엇보다도 독일이 너무 무서웠기 때문이다.

프랑스는 이번 기회에 독일의 군사적 능력을 철저하게 제한하여 위험을 제거하고자 했다. 이 점은 역으로 생각한다면 1차 대전에서 독일을 완벽하게 제압하지는 못했다는 점을, 아니 적어도 프랑스가 확실히 이긴 것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스스로 인정했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만일 나폴레옹 시절처럼 군말하지 못할 만큼 독일을 압도하고 계속 우위를 달성할 수 있을 자신감이 있다면 지독한 강화조약은 이루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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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욕적인 베르사유 조약 내용이 알려지자 국회 앞에 모여 데모를 벌이는 독일 국민들. 이 때문에 프랑스에 대한 적개심이 컸다.



강화를 생각하던 독일과 달리 프랑스는 무지막지하게 독일을 눌러 항복을 받아내려 하였다. 결국 더 많이 당하고도 우격다짐으로 승전국의 위치에서 전쟁을 종결하였지만, 독일과 국경을 접하고 있던 프랑스의 입장은 이처럼 영국이나 미국과 분명히 차이가 있었다. 이러한 프랑스의 강력한 태도는 독일에게 두고두고 잊을 수 없는 상처가 되었고 이후 전쟁 당시보다 더한 적개심을 불러 일으켰다.




남도현 | 군사 저술가
[전쟁, 그리고], [2차대전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 순간들], [끝나지 않은 전쟁 6.25] 등의 군사 관련 서적을 저술한 군사 저술가. 국방부 정책 블로그, 군사월간지 [국방과 기술] 등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현재 무역대행 회사인 DHT AGENCY를 경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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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용원의 군사세계
http://bemil.chosun.com/



발행2015.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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