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역사 프랑스 전역 2 (1940) - 사상 최대의 전쟁을 잉태한 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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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40회 작성일 16-02-07 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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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어만 가는 골



나치가 베르사유 체제를 부정하는 것으로 인기를 얻고 합법적으로 정권을 획득하는 데 성공하였던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독일인들이 승전국에 대해 느끼는 반감이 컸고, 특히 프랑스에 대한 감정의 골은 상당히 깊었다. 따라서 히틀러는 궁극적인 목표인 소련을 정복하기 위해서라도 반대편에 있는 프랑스를 먼저 손봐야 했고, 프랑스라면 군부와 국민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을 충분한 명분과 동기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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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년 수상에 오른 히틀러. 그는 베르사유 체제를 부정하며 인기를 얻었고 역설적이지만 합법적이고 민주적인 방법으로 정권을 장악하였다. <출처: wikimedia>



이러한 프랑스 우선 정벌은 양면전을 벌였던 1차대전 당시의 뼈저린 경험 때문이기도 하였다. 전쟁 발발과 동시에 처음부터 러시아와 프랑스를 맞상대한 독일의 부담은 너무 컸고 이것은 결국 극복할 수 없는 한계가 되었다. 따라서 독일이 다시 동서 양쪽의 적들과 전쟁을 벌인다면 어느 한쪽을 반드시 먼저 제거해야 했다. 사실 1차대전 당시에도 그렇게 전략을 구상하였는데 러시아의 동원이 예상보다 빨라 실패하였을 뿐이다.

1933년, 호전적인 모습을 보인 나치가 정권을 잡자 복수에 관한 논의가 공공연히 회자되기 시작했다. 좌우대립이 극심하여 정치적으로 혼란을 겪고 있던 프랑스도 이런 사실을 직감하고 긴장하게 되었다. 이처럼 계속된 원한으로 철저히 대립하고 있던 두 나라는 조그만 변화에도 민감하게 반응할 정도였다. 프랑스는 호전적인 세력이 정권을 잡은 이상 최악의 경우를 예상하여 철저히 대비하여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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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배상금 지불 지연을 문제 삼아 1923년 독일의 주요 공업지대인 루르를 점령한 프랑스군. 이렇게 수시로 가해진 승전국의 군사적 압박은 베르사유 조약에 대해 처음부터 불만이 많았던 독일인들의 반감을 고취시켰다. <출처: wikipedia>



그런데 가장 큰 문제는 바로 프랑스 자신이었다. 1차대전 당시에 한 세대를 희생하면서까지 싸웠고, 1920년대 초만 해도 배상금 지불 지연을 빌미 삼아 프랑스군을 독일 영토인 루르(Ruhr)에 전격 주둔시켜 위협하였을 만큼 자신감이 있었던 프랑스의 용기는 어느 틈엔가 사라져 버렸던 것이다. 역설적으로 불공평한 베르사유 조약의 성립하게 만들 만큼, 독일에 대해 프랑스가 느끼고 있던 공포는 프랑스를 더욱 움츠러들게 만들었던 것이다.




개시된 연합국의 응징



1939년 9월 1일, 독일이 폴란드를 전격 침공하면서 프랑스는 그렇게 피하고자 했던 전쟁에 말려들어갔다. 독일이 폴란드를 공격한다면 군사적으로 대응하겠다는 공언대로, 이틀 후 프랑스와 영국은 선전포고를 하였고 이때부터 이들은 독일과 교전상태가 되었다. 즉시 동원령이 하달되면서 프랑스는 전시태세에 돌입하였고 폴란드는 연합국의 도움을 받아 체코슬로바키아나 오스트리아와 같은 험한 꼴은 당하지 않을 것 같았다.

당시 프랑스와 영국의 군사적 준비가 완료된 상태는 아니었지만 서부전선만 놓고 본다면 프랑스 단독으로도 독일에게 충격을 가할 능력은 있었다. 1939년 말이 되면 프랑스군은 300만 명 수준까지 대폭 증강될 예정이지만 이미 독불국경에 150만이 배치되어 있었다. 반면 이곳을 지키던 독일 제1군은 20만여 병력뿐이었다. 이처럼 텅 빈 독일 서부로 프랑스가 공격한다면 반대편에서 폴란드와 전쟁 중이던 독일은 마땅히 대응할 방법이 없었다.

독일이 배후의 안전을 우려하는 동안 마침내 악을 타도하기 위한 연합국 측의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영국이 30만으로 구성된 해외 원정군(BEF-British Expeditionary Force)을 대륙에 파견하였다. 당시 참전국 중 유일하게 완전히 차량화된 최정예 3개 보병군단과 500여 기의 작전기를 보유한 공군파견대로 구성된 영국 원정군은 고트(John Vereker, 6th Viscount Gort) 경(卿)의 지휘를 받아 즉시 대륙으로 이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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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해외 원정군을 이끌고 프랑스에 도착한 고트 경



더불어 세계 최강의 영국 해군이 북해 외곽에서부터 독일을 제압해 나가면서 대서양으로 나갈 해상 통로를 틀어막아 버렸다. 하지만 이보다 극적인 움직임은 프랑스가 개시했다. 9월 8일, 프랑스와 영국의 모든 신문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자랑스럽게 보도했다. “어제 프랑스군은 프랑스-폴란드 군사조약에 의거 독일로 진격을 개시하였고, 요충지 자를란트(Saarland)의 점령을 눈앞에 두고 있다.”




생색으로 끝난 행동



9월 7일, 프랑스의 11개 사단이 국경을 넘어 군사행동을 개시하였다. 비록 전면전이 아닌 제한적 작전이었지만 폴란드에서 한참 속도를 올리며 전선을 돌파해 가던 독일에게는 가장 우려하던 일이 벌어진 것이다. 국경을 돌파한 프랑스군은 독일의 별다른 대응을 받지 않고 텅 빈 서부전선을 30여 킬로미터 진군하여 자를란트를 서서히 장악하여 나갔고 20여 국경 마을에 주둔하고 있던 독일군을 몰아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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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를란트로 진격한 프랑스군. 하지만 제2전선을 구축하여 독일을 굴복시킬 생각은 처음부터 가지고 있지 않았다. <출처: wikipedia>



폴란드 처단 후 다음 상대로 프랑스를 생각하던 히틀러도 예상보다 빠른 프랑스의 대응에 노심초사했다. 그런데 프랑스는 자를란트 일대를 확보한 후, 더 이상 독일 본토로 진격을 계속하지 않았다. 애초부터 소심하였던 프랑스는 전면전을 벌일 생각이 없었다. 바로 그때 9월 17일, 소련이 동부 폴란드를 침공하였고 이 소식을 접한 프랑스군 총사령관 가믈랭(Maurice Gamelin)은 군사 행동 중지를 명령했다.

프랑스의 진공 소식에 용기를 내어 저항하던 폴란드에게 예상치 못한 소련의 침공은 결정타가 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마지못해 폴란드와의 조약을 준수하는 모습을 보여주던 프랑스에게 발을 뺄 수 있는 좋은 구실이 되었다. 가믈랭은 “폴란드는 이제 끝났다”고 주장하며 작전을 멈추도록 한 것이다. 그뿐 아니라 9월 20일에는 자를란트에서 철수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자신만만하게 진군하였던 프랑스군은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이 회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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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군을 총지휘한 총사령관 가믈랭. 독일에 체포되어 종전까지 수감생활을 하지 않았다면 간첩으로 오인 받기에 충분할 정도로 잘못된 명령만 남발하여 프랑스의 패전을 촉발하였던 무능한 사령관이었다.



프랑스는 제2전선을 구축하여 폴란드를 구원하려는 생각이 애당초 없었다. 그들은 엄연히 독일에게 선전포고를 해놓고도 철저하게 전쟁을 회피했다. 이런 모호한 태도는 인류가 역사상 최악의 참혹한 시기를 경험하도록 만들어 버렸다. 프랑스와 영국이 전쟁을 회피하고자 한 이유는 한마디로 전쟁이 두려워기 때문인데, 문제는 이런 소심함으로 전쟁을 막을 수도 없으려니와 오히려 자신의 운명을 단축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전쟁에 대한 두려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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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덩 전투 당시 전사한 프랑스군의 모습. 당시의 참혹한 기억으로 말미암아 프랑스는 전쟁을 회피하는 경향이 강했다.



세계는 1차대전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지난 전쟁에서 경험한 끔찍한 참상을 망각하기에는 20년은 너무 짧은 시간이었다. 특히 프랑스, 영국, 독일이 엉켜서 싸운 서부전선은 한마디로 현실에 나타난 지옥이었다. 당시 가장 많은 희생을 당한 프랑스는 무려 140만이 전사하고 420만이 부상을 당하였는데 이것은 당시 20~30대 프랑스 남성의 80퍼센트에 해당하는 규모로, 한 세대가 순식간 사라져 버린 셈이었다. 더불어 물적 피해도 가장 심했다.

이처럼 프랑스는 전쟁에 대한 두려움이 다른 어느 나라보다 컸다. 때문에 어떻게든 전쟁을 회피하려는 분위기가 사회를 지배하고 있었다. 사실 이런 끔찍한 기억을 가지고 있기는 독일도 마찬가지였다. 독일 또한 그에 못지않은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전쟁이 결코 반가울 수는 없었다. 1940년까지 독일 군부가 히틀러의 전쟁 개시 요구에 소극적으로 대응했던 이유이기도 했다.

하지만 독일은 프랑스를 반드시 응징해야 했다. 전쟁 말기의 편집증적인 간섭으로 패전을 촉진하였지만, 적어도 1941년 6월 이전까지 히틀러는 상당히 성공적인 군사적 결단을 연이어 내렸다. 군부가 몸을 사리며 감행했던 라인란트 점령 이후 대외 도발을 계속할 수 있었던 것은 히틀러의 확고한 의지와 결단 때문이었다. 더구나 프랑스는 독일에게 먼저 선전포고를 해놓은 교전 당사국이어서 도발에 대한 정치적, 외교적 부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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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 10월 5일 바르샤바를 방문하여 열병식에 참석한 히틀러와 독일 군부 수뇌들. 그는 군부에게 곧바로 프랑스 침공을 명령했다.



히틀러는 10월 초, 폴란드 전역이 정리되자마자 곧바로 프랑스 침공을 명령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군사적인 승리를 계속해 온 군부가 격렬히 반발하고 나섰다. 한마디로 프랑스는 폴란드와 격이 달랐다. 전쟁을 최대한 회피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지만, 프랑스는 객관적으로 당대 최강의 육군을 보유한 나라였다. 이런 차이는 라인란트 재 점령 직전에 독일이 몹시 겁을 낸 결정적인 이유이기도 했다.




남도현 | 군사 저술가
[전쟁, 그리고], [2차대전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 순간들], [끝나지 않은 전쟁 6.25] 등의 군사 관련 서적을 저술한 군사 저술가. 국방부 정책 블로그, 군사월간지 [국방과 기술] 등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현재 무역대행 회사인 DHT AGENCY를 경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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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용원의 군사세계
http://bemil.chosun.com/



발행2015.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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