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역사 프랑스 전역 3 (1940) - 마지노선 위에 드리운 전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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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517회 작성일 16-02-07 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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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군부의 고민



베르사유 조약으로 오랫동안 군장비의 개발과 보유에 제한을 받아 왔던 독일에 비해 프랑스는 전차와 야포 같은 중화기의 성능이 개선되었고 물론 수량에서도 앞서있었다. 더불어 독불국경 사이에 건축된 사상 최고의 군사 건축물인 마지노선(Maginot Line)은 말 그대로 난공불락이었다. 전시 동원령이 내려지면서 프랑스군은 12월까지 300만으로 확대될 예정이었고 더불어 전 세계에 흩어진 식민지들로부터 막대한 전쟁 물자가 속속 공급되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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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노 요새의 내부 모습. 거의 대등한 수준이었지만, 프랑스와 영국 연합군은 객관적인 군사 지표에서 독일을 앞서고 있었다. 특히 국경에 설치된 마지노선은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출처: 위키피디아>



더불어 세계 최강의 영국 해군과 세계 4위의 프랑스 해군이 장악한 바다에 독일 해군이 비집고 들어갈 틈은 없었다. 유일하게 독일이 앞서고 있다고 평가되던 분야가 공군이었는데, 단지 최신예기가 많았을 뿐이지 오히려 작전기의 절대 수량은 연합군이 근소하게 앞서 있었다. 따라서 군사적으로 독일의 우위를 장담하기 어려웠고 사실 이러한 명백한 차이를 누구보다도 독일 군부가 더욱 잘 알고 있었다.

이 때문에 아직 군부를 완전히 장악하지 못했던 히틀러도 이들의 반발을 무조건 무시할 수만은 없었다. 공식적으로 1939년에만 9차례나 프랑스 침공계획이 연기되었고 섣부른 프랑스 침공은 독일을 파멸로 이끌 것이라며 군부 내에서 공공연히 쿠데타 모의가 있었을 정도다. 엄밀히 말하면 당시 독일 군부도 프랑스처럼 전쟁을 회피하고 싶어 했다. 히틀러는 사석에서 군부를 ‘겁쟁이’라고 매도하였지만 이러한 군부의 태도가 무조건 그른 것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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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 바르샤바에서 승전 퍼레이드를 벌이는 독일군. 나치의 선전 매체는 독일군이 최강이라고 선전하고 있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출처: Bundesarchiv>



나치의 선전 매체가 독일 국방군(Wehrmacht)이 세계 최강이라고 끊임없이 국민들을 세뇌시키고 있었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군부 자신은 물론 히틀러도 잘 알고 있었다. 특히 공격자가 방어자의 3배 정도 전력이 되어야 전쟁을 개시할 수 있다는 고대로부터의 법칙을 상기한다면, 독일이 프랑스를 상대로 선공을 펼친다는 것은 군사교리상 맞지도 않았다. 객관적으로 독일의 군사력은 방어는 할지언정 먼저 공격을 개시할 수준은 아니었던 것이다.




가짜 전쟁(Phoney War)



외교적으로 전시 상황이었음에도 프랑스가 자를란트에서 철군한 이후 양측 모두 더 이상의 군사적 행동을 보이지 않았다. 대서양에서 해군 간에 벌어진 일부 교전을 제외한다면 이는 결코 전면전의 모습이 아니었다. 막상 먼저 전쟁을 선포하고도 공격이 아닌 방어에만 집착하였던 연합국 측의 한심함과 총통의 닦달에도 신중을 기하던 독일군의 대응에서 비롯한 결과였다. 그러다 보니 마치 평시처럼 국경에는 평안함이 감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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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전쟁 당시 무료함을 달래고 있는 영국 원정군의 한가로운 모습. <출처: 위키미디어>



처음 동원되었을 때 느꼈던 팽팽한 긴장감은 서서히 사라지고, 훈련 중 포탄이 국경 너머 상대편 지역에 떨어지면 “미안하다. 연습 중 실수였다”라고 사과방송까지 하였을 정도였다. 이를 역사에서는 ‘가짜 전쟁(Phoney War)’이라 칭하는데, 독일에게는 침공 준비를 충분히 갖출 수 있던 천금 같은 시간이었던 데 반하여, 참화를 막을 수 있었던 프랑스에게는 마지막 기회를 날려버린 한심한 시절이었다고 정의할 수 있다.

해가 바뀌어 1940년이 되었을 때 연합군이 독일로 진격할 가능성은 완전히 사라져 버렸고 결국 선택은 순전히 독일의 의지에 따라야 하는 형국으로 바뀌었다. 영국과 프랑스는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계속 말로만 전쟁이 지속되기를 원했다. 특히 실전이 벌어지면 제일 먼저 전쟁터가 될 프랑스는 좌파를 중심으로 계속 반전을 외치고 있었는데, 그들은 자신들이 평화를 주장하면 독일이 프랑스를 그대로 놔둘 것으로 철석같이 믿었을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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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 바이마르 공화국 당시의 독일군. 베르사유 조약으로 감군되면서 엘리트들만 남게 된 독일군은 소수 정예화되었고 이후 2차 대전의 주역이 되었다. <출처: 위키미디어>



당시 얼추 대등하던 프랑스군과 독일군이 가장 큰 차이를 보였던 부분이 지휘관들의 능력이었다. 20여 년 전 승전국의 영예를 얻은 프랑스 군부는 차후 있을지도 모르는 전쟁에 대비한 새로운 연구에 소극적이거나 무관심하였던 데 반하여, 베르사유 조약의 치욕적인 감군상황에서 살아남아 군을 지킨 엘리트 중의 엘리트들이었던 독일의 장성들은 와신상담의 자세로 장차 일어날 전쟁에 대해서 치밀하게 연구를 해왔는데 이런 차이가 승패를 결정하였다.




너무 뻔했던 양측의 작전



난공불락의 요새인 마지노선으로 독일이 정면 돌파한다는 것은 자살행위와 같았으므로 독일과 프랑스가 전쟁을 벌일 경우, 군사전략상 양측이 선택할 방법은 이미 결정되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마지노선은 독불국경을 따라 연결되었지만 프랑스와 벨기에 국경에서부터는 끊겨있었다. 따라서 슐리펜 계획(Schlieffen Plan)에 의해 독일이 프랑스를 침공한 25년 전처럼 벨기에 평원이 다시 독일의 침공로가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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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불국경에 설치된 마지노선 때문에 독일은 북부의 벨기에, 네덜란드를 통해 프랑스를 공격해야 했다. 전쟁이 벌어진다면 양측 모두 어디서 싸워야 할지 이미 정해져 있는 셈이었다. <출처: 위키피디아>



따라서 프랑스는 1차대전 같은 지구전으로 다시 한 번 독일을 주저앉혀 버릴 작정이었다. 침공로를 충분히 예측할 수 있었기에 대응이 오히려 수월해 보였다. ‘다일-브레다 계획(Plan Dyle-Breda)’으로 알려진 프랑스의 작전은 연합국 주력을 프랑스와 벨기에 국경 인근에 배치하고 있다가 독일이 침공을 개시하면, 벨기에의 다일 강과 브레다 강까지 이동하여 강력한 교두보를 구축한 후 여기에서 독일군을 저지하는 것이었다.

반면 저지대 국가를 통하여 프랑스를 공략하기로 계획된 독일의 ‘황색 작전(Fall Gelb)’은 슐리펜 계획을 명칭만 바꿔 단 것과 다름없었다. 1차대전 당시와 굳이 차이가 있다면 돌파를 담당할 주역으로 기계화부대를 동원할 수 있고 공군이 하늘에서 지상군을 엄호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이처럼 독일의 예상 침공로가 피아 모두에게 뻔히 노출되어 있다 보니 양측은 서로의 전략을 충분히 예측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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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군의 침공에 대응한 연합군의 다일-브레다 계획. 어차피 저지대 국가는 거대한 전쟁터가 될 운명이었다. <출처: 위키미디어>



결국 벨기에는 본인들의 의사와 아무런 상관없이 20년 만에 또 다시 원하지 않는 전쟁에 끌려 들어가야 할 운명이었는데, 이들도 상당히 안이하였다. 전쟁이 다시 벌어진다면 자신의 영토로 독일이 진격하여 올 것이고 또한 그들을 도울 유일한 우군이 20년 전에도 함께 싸운 프랑스와 영국이라는 점을 분명히 알고 있었음에도 벨기에는 연합군의 사전 진주는 고사하고 정찰대가 벨기에 국내로 들어와 방어선을 점검하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다.




판을 뒤엎는 새로운 주장



이듬해 발발한 독소전쟁으로 인하여 1년 만에 기록이 갱신되긴 했지만, 1940년 독일군과 영불연합군의 대결은 당시까지 하드웨어적으로만 본다면 역사상 최대의 전쟁이었다. 양측 합쳐 동원된 병력만도 약 600만에 이르렀고 2만 문의 야포와 6,000대의 전차 그리고 8,000여 기의 군용기가 준비되었다. 연합국은 실전을 원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대비는 하고 있었고 독일은 군부가 작전 연기를 원하였지만 히틀러의 명령이 떨어지면 진격을 하여야 했다.

특히 가공할 점은, 이미 오래 전에 선전포고를 한 상황이어서 이러한 거대한 무력을 동원하여 전쟁을 벌일 만반의 준비를 마쳐 놓고 있다는 점이었다. 여기에 비한다면 이듬해 발발한 독소전쟁이나 태평양전쟁은 상대가 대응할 준비가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 독일과 일본의 기습으로 벌어진 전쟁들이었다. 그래서 이렇게 준비를 완료한 팽팽한 상황에서라면 기습의 이점이 없을뿐더러 싸움이 벌어진다면 엄청난 피해가 발생할 것은 명약관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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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대전 최고의 명장 중 하나로 손꼽히는 만슈타인. 히틀러가 소수의견이었던 낫질작전을 지지해 준 것은 그가 간섭한 중 몇 안 되는 올바른 결정이었다. <출처: 위키미디어>





만슈타인은 아르덴을 돌파하여 연합군 주력의 배후를 차단하는 작전을 제안하였다.




전운이 감도는 가운데 방어계획을 철저히 신봉한 연합군과 달리, 독일군 내에서는 엄청난 격론이 벌어지고 있었다. 보다 혁신적인 공격 방법을 주장한 소장파 장군들이 논쟁의 중심에 서있었고, 그 중에서 대표적인 인물이 A집단군 참모장이었던 만슈타인(Erich von Manstein)이었다. 그는 상대방도 충분히 예상하고 있는 지점으로 아군을 몰아넣는 황색 작전을 강력히 비판하고 이를 대신할 새로운 작전을 제시했다.

만슈타인은 적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으로 주공을 진격시켜 연합군 주력의 배후를 절단한 후 일거에 섬멸하자는 이른바 ‘낫질 작전(Sichelschnitt)’을 제시하였다. 그는 독일군 주력이 통과할 회심의 돌파구로 구릉지대인 아르덴(Ardennes)을 지목했고 사전에 정지만 하여 놓으면 기갑부대가 충분히 돌파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곳을 최대한 빨리 통과한 후 스당(Sedan)을 지나 대서양까지 신속히 내달리자는 구체적인 각론도 제시했다.




남도현 | 군사 저술가
[전쟁, 그리고], [2차대전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 순간들], [끝나지 않은 전쟁 6.25] 등의 군사 관련 서적을 저술한 군사 저술가. 국방부 정책 블로그, 군사월간지 [국방과 기술] 등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현재 무역대행 회사인 DHT AGENCY를 경영하고 있다.


발행2015.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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