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역사 줄루전쟁 (10) - 처절한 방어전 - 로크스 드리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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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531회 작성일 16-02-07 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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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산들와나에서 켈름스포드의 본대가 패배하면서 영국군의 침공계획은 완전히 어그러졌고 다른 방향에서 진격하던 부대들은 고립되었다. 더 큰 문제는 줄루군이 의외의 대승을 거둠으로써 제대로 싸움도 못해보고 ‘할 일’이 없게 된 줄루 부대들이 남아 있었다는 것이다. 전사 사회인 줄루군의 특성상 전쟁에 동원된 부대가 싸움도 못해보고 귀가하게 되면 지휘관들이 그 불만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불만을 잠재울 ‘사냥감’이 필요한 시점. 영국군 본대를 격파하고 다른 영국군 지대(支隊)들이 멀리 떨어져있는 상황에서, 이산들와나 근처의 외딴 지역에서 100명 남짓의 소규모 부대가 지키고 있는 작은 초소인 로크스 드리프트(Rorke’s Drift)는 한 마디로 ‘만만한’ 목표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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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로크스 드리프트 초소의 모습



로크스 드리프트로 향하는 줄루군은 약 7백에서 1천 명 정도의 ‘대대’ 넷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30세 이상의 베테랑으로 이루어진 부대가 셋, 그리고 10대 후반에서 20대의 젊은이들이 주축이 된 청년대대가 하나였다. 약 4천 명으로 구성된 이 부대는 영국과의 전쟁을 위하여 동원된 줄루군 중에서 공격을 담당하는 ‘뿔’ 부대가 아닌 예비병력인 ‘엉치’에 해당하는 그룹이었다. 사실 전투에 참가하지도 못하고 전투가 종료되었다는 것은 줄루군의 관점에서 이산들와나가 상당히 성공적인 작전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비록 이산들와나에서 줄루군의 손실도 만만치 않았지만 예상보다는 병력 손실이 적었던 것이다.

이 당시의 기록에 의하면 줄루왕 세츠와요는 상당히 호전적인 인물로 묘사되고 있지만 이는 그가 영국에 굽히지 않고 그 최후통첩(심지어 본국정부도 문제가 많다고 지적한)을 거부하였기 때문이지, 한 나라를 다스리는 군주로서의 지각(知覺)은 분명히 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전쟁이 시작될 때부터 지휘관들에게 줄루왕국의 영역에 들어오는 영국군과는 싸우되 영국의 식민지인 나탈로 진입하지 말 것을 강력히 주문하였다. 줄루인들이 영국식민지인 나탈에 들어갈 경우 전쟁할 구실을 찾고 있는 영국인들이 전면전으로 나올 것이고 그럴 경우 줄루왕국이 존망의 위기에 처할 공산이 크다고 생각한 것이다. 사실 케이프 식민지의 영국인 관리들은 줄루군이 나탈로 들어오건 말건 이미 줄루왕국을 집어삼키려고 마음먹은 상태였지만 어찌되었건 이산들와나에서 승리한 마당에 더 이상의 확전(擴戰)은 줄루왕국에 불리하면 불리하였지, 득이 되지는 않을 것이 확실하였다.




로크스 드리프트로 드리운 전운



앤소니 던포드(Anthony Durnford) 대령이 이산들와나로 지원병력을 이끌고 떠난 다음 날, 1월 22일 이른 오후에 나탈 식민지 기총부대(Natal Native Carabineers)의 게르트·아덴도르프(Gert Adendorff) 소위와 대원 한 명이 급하게 말을 몰고 부대에 도착했다. 그들은 이산들와나의 영국군이 전멸당했고 켈름스포드 부대의 행방을 알 수 없다는 급보를 전했다. 이 중 아덴도르프 소위는 초소의 방어를 위하여 남았고 그와 함께 왔던 병사는 나탈의 주민들에게 빨리 알려 대비를 해야 한다며 인근의 국경도시인 헬프메카르(Helpmekaar)로 향하였다. 앞서 말한대로 세츠와요는 나탈을 침공할 의도가 없었지만 나탈의 식민지인들이 이를 알 방법은 없었다. 더군다나 영국군이 대패하였고 상당한 수의 줄루병력이 국경을 향하여 다가오고 있었다. 적어도 나탈에 줄루인들의 접근을 알리고, 침공에 대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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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소를 경비하고 있던 제 24보병연대 2대대 B중대 병력



그러나 국경을 향해 다가오고 있는 줄루병력은 4천 명, 이 줄루 병력에 맞서는 영국군 병력은 민간인과 부상병을 포함하여 약 300명 정도였다. 초소를 책임지고 있던 선임장교는 스폴딩 소령이었으나 헬프메카르에서 지원병력으로 오기로 했던 레인포스 대위 휘하 1개 중대가 오지 않자 스폴딩 소령은 이들의 행방을 수소문하기 위해 1월 22일 정오쯤에 헬프메카르로 떠난 참이었다. 스폴딩은 초소를 떠나면서 휘하의 차드 소위에게 임시로 지휘권을 맡겼는데 바로 이때 아덴도르프가 도착하여 이산들와나에서의 패전 소식을 가지고 온 것이다.

아덴도르프의 보고를 접한 차드 소위는 휘하의 브롬헤드 소위, 그리고 보급관인 돌턴과 함께 중대한 결정을 내려야 했다. 물론 가장 확실한 방법은 초소를 포기하고 16km 떨어진 헬프메카르까지 이동하여 구원 부대와 합류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줄루족의 이동속도가 매우 빨랐고 아덴도르프의 보고에 의하면 이미 초소 인근까지 접근해 있었다. 더군다나 초소 내에는 영국군 부상자들과 함께 수많은 보급품이 있었다. 줄루군이 근처까지 와있다면 부상병과 보급품을 가지고 후방으로 이동하는 것은 너무나도 위험한 도박이었다. 사방이 노출되어있는 벌판에서 소규모의 병력으로 부상병과 보급품을 지켜가면서 싸운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만약 이동 중 줄루족 임피에게 발각된다면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몰살 당할 것이 뻔했다. 결국 차드와 브롬헤드, 그리고 달튼은 초소를 요새화시켜 방어전에 임하기로 뜻을 같이하였다.

일단 차드 소위는 강에 놓여진 부교에 대한 점검을 명하였고 이어 초소의 보급품 창고로 향하였다. 이 와중에서 제 3지대, 즉 본대로부터의 서신을 받게 되었는데 그 서신에는 줄루족 부대가 접근하고 있으니 초소의 방비를 강화하고 초소를 끝까지 사수하라는 명령문이었다. 이에 브롬헤드 소위와 보급관 돌턴은 요새화 작업을 진행시켰다. 일단 초소를 구성하는 건물들 사이에 식량인 옥수수가 담긴 부대를 쌓아 임시방벽을 만들고 건물 외벽에 구멍을 뚫어 사격구(射擊口, loophole)를 만들었다. 작업이 완료되자 차드 소위는 부교를 건너 밖에 있는 병력과 보급품을 모두 초소 안으로 이동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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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로크스 드리프트 초소의 지휘관 존 차드 소위와 곤빌 브롬헤드 소위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오후 3시 30분 경에 이산들와나에서 살아남은 던포드 대령의 기마대 병력 100여 명 정도가 헨더슨 소위 지휘 하에 초소에 도착하였다. 초소의 선임장교인 차드는 이들에게 초소외곽을 정찰하고 부교와 여울지역을 지키라는 명령을 내렸고 이들은 스스로 인근을 정찰한 후 초소가 내려다보이는 시야네(Shiyane)라는 언덕으로 올라가 자리를 잡았다. 이때 로크스 드리프트 초소 수비대의 상황은 적어도 병력차원에서 그리 나쁘지 않았다. 제 24보병연대 2대대 소속 B중대 병력, 전쟁의 시작과 함께 이미 지원병력으로 와서 주둔하고 있던 스티븐슨 소위 휘하의 나탈 식민지 보병대 (Natal Native Contingent/NNC) 중대병력. 그리고 이산들와나에서 살아남아 인근의 야산에 진을 친 기마대 병력을 합쳐 전투병력만 약 350명에 달하였다. 보급품도 충분하고 초소도 보강을 해놓았으니 차드 소위는 줄루의 대군이 오더라도 상당 기간 버틸 수 있으리라 여겼다. 그러나 매사는 불여튼튼, 차드는 진지 안쪽에도 비스킷(건량乾糧) 상자를 쌓아 만약의 경우에 대비하게 하였다.




줄루군의 출현과 병력의 이탈



줄루군이 수비군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1월 22일 오후 4시 30분 경이었다. 약 600명 정도로 추정되는 줄루군 선봉대가 나타났고 즉각 초소의 남쪽 방벽을 향하여 돌격해왔다. 영국군 수비병들은 침착한 사격으로 연이어 줄루전사들을 쓰러뜨렸지만 줄루전사들은 수많은 동료들이 피격되는 와중에서도 맹렬한 돌격으로 남쪽 방벽에서 불과 40미터 지점까지 접근해왔다. 그러나 이 지점에서 이들은 병동(病棟)에 있던 영국군 병력으로부터도 동시에 사격을 받게 되었다. 이들은 양방향에서 이루어지는 교차사격의 희생물이 되어 많은 전사들이 치명상을 입고 거친 땅바닥에 몸을 뉘었다. 그러나 줄루전사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많은 숫자의 전사들이 특유의 기동력을 발휘하여 초소 옆을 돌아 반대쪽에서 옥수수 부대 방벽을 공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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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크스 드리프트 전투도. 줄루전사들은 남쪽 방벽을 먼저 공격하였으나 집중사격으로 인하여 좌절되자 병동건물을 우회하여 북쪽을 공격한다. <출처: 브리티시배틀닷컴>



이 와중에 의외의 상황이 발생하였다. 옆의 시야네 언덕에 자리잡았던 헨더슨의 기마대 병력이 이탈한 것이다. 이들은 이미 전날의 이산들와나 전투 때문에 몹시 지쳐 있었고 지휘관이었던 던포드가 전사하는 것을 보면서 사기가 떨어져 있었다. 전날 싸우느라 죽을 고비를 넘겼는데 자기들이 있을 곳도 아닌 초소를 지켜야 한다는 사실에 심각한 회의가 들었다. 물론 초소 선임장교인 차드의 명령을 받기는 하였지만 사실 차드는 뒤숭숭한 기마병들의 분위기를 고려하여 헨더슨에게 명령이 아닌 ‘요청’을 한 것이었다. 이미 힘든 상황에서 이들은 명령도 아닌 요청을 받아들여야 할 아무런 이유를 찾지 못하였다. 결국 언덕방향으로 진격해오는 다른 줄루족 부대와 잠시 전투를 한 후, 이들은 헨더슨 소위의 명령도 거부하고 바로 헬프메카르 방향으로 철수하였다. 자신들의 병사가 전투를 거부하고 철수하는 마당에 지휘관 헨더슨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고 그 역시 병사들을 따라갔다.

더 큰 문제는 초소 바깥에 있던 크랄(kraal)을 지키고 있던 나탈 식민지 보병대였다. 초소를 지켜야 한다는 목적의식이 희박한 것은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더군다나 이들 대부분은 총도 아닌 창으로 무장한 흑인병사들이 대부분이었고 자리잡은 위치도 초소 안이 아니라서 줄루족의 공격에 바로 노출이 되어있는 외곽시설이었다. 이들은 헨더슨의 기마대가 언덕에서 내려와 전장을 이탈하는 것을 보고는 바로 크랄에서 몸을 빼서 나탈 방향으로 도주하였다. 이에 초소 안에서 싸우고 있던 나탈 부대의 백인병사들 역시 이탈하였고 기존 수비병들은 전장에서 몸을 빼려는 NNC 병력의 행각에 분개하여 철수하는 NNC 부대의 등뒤에 사격을 가하여 NNC 소속의 병사 한 명이 사망하는 불상사로 이어졌다.

그러나 줄루전사들이 코앞에 닥친 상황에서 정규 수비병들에게 식민지 병력의 이탈을 단속할 여유는 없었다. 수비병력을 나누어 식민지 병력이 빠져나간 크랄을 방어하는 것이 이들이 취할 수 있는 조치의 전부였다. 어찌되었건 식민지 병력이 대거 이탈하면서 초소의 병력수는 불과 150여명으로 줄어들었다. 초소의 남쪽 방벽으로 들이친 줄루군의 왼쪽 “뿔”에 이어 오른쪽 언덕쪽으로 우회한 오른쪽 “뿔”은 기마병들과 잠시 전투한 후 기마병들이 철수하자 초소에서 외곽으로 빠지는 길을 틀어막았고 이제 초소의 수비병들은 탈출의 가능성 없이 꼼짝없이 포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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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수수 부대로 만든 북쪽 방벽에서 줄루전사들을 사격하고 있는 수비병들. 뒤쪽으로 병동건물이 보인다. <출처: 브리티시배틀닷컴>






에워싸인 초소와 죽고 죽이는 싸움



어찌되었건 초소 수비병들의 사격은 매서웠고 줄루전사들은 초소에 가까이 접근할 방도를 찾다가 초소 외곽에 잡목과 긴 풀이 정리되지 않은 체 띠를 형성하고 있는 곳을 발견하였다. 줄루전사들은 이를 이용하여 초소의 사격을 피할 수 있었고 방벽에 매우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다. 그들 중 일부는 동료들의 도움을 받아 방벽을 뛰어넘어 총검을 든 영국 수비병들과 격투하였다. 그러나 방벽을 뛰어넘은 전사들의 수는 너무 적어서 영국군 수비병들은 줄루군을 비교적 수월하게 격퇴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특히 그 용맹이 두드러진 것은 잔류한 NNC 소속 병사인 샤이스 상병이었다. 그는 철수한 동료들을 대신하여 싸우려는지 직접 총검으로 여러 명의 줄루전사를 죽이는 등 기존 수비병들보다 용맹하게 싸웠다. 그러나 너무 많은 수의 줄루전사들이 사격을 피하여 방벽에까지 다다르자 이들은 바로 주요시설인 병동 건물을 목표물로 삼고 맹공을 퍼부었다. 아울러 일부 전사들은 인근의 길게 자란 풀 속에 엎드려 노획한 총으로 반격을 가했다. 또 다른 일부는 헨더슨 부대가 포기한 언덕으로 올라가 고지에서 초소를 향하여 총격을 가하였다. 심지어 어떤 전사들은 방벽에 몸을 붙이고 그 구멍으로 총을 들이밀어 총격을 가하고, 창으로 영국병사들을 쑤셔댔다.

물론 줄루전사들의 사격술이 형편없어 잘 맞지는 않았지만 이 전투에서 전사한 영국군 17명 중 대다수가 창이 아닌 줄루족의 총격, 그것도 노획한 영국군의 소총에 의한 총격으로 사망했다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라 아니할 수 없다. 사격의 정확성과는 상관없이 줄루전사들의 총격은 북쪽방벽에 몰려있던 영국군 수비병들을 위축시키는 효과가 있었고 보다 많은 전사들이 방벽으로 몰려들어 구멍으로 이클와 단창(短槍)을 들이밀어 수비병들을 공격할 기회를 주었다.

오후 6시경 북쪽 방벽의 수비가 어려워지자 차드는 수비병들을 철수시켰고 이는 인접한 병동의 수비가 허술해지는 결과를 가져왔다. 병동으로 접근하는 줄루병력들을 막을 수단이 없었기 때문이다. 줄루병력들은 영국군이 벽에 뚫어놓은 사격구를 역이용하여 사격구 밖으로 나온 영국군 소총을 손으로 잡아 사격이 빗나가게 하거나 심지어 총기를 뺏기도 하였다. 그리고 노출된 사격구를 통하여 창으로 찌르거나 총을 들이밀어 안의 영국군을 사격하였다. 병동에도 철수명령이 내려지면서 수비병과 환자들은 초소마당 중간에 구축한 건량 상자 방벽 뒤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병동의 방 일부에 줄루족이 난입하려 하자 병사와 환자 가릴 것 없이 그들과 싸웠고 방문 근처에서 14명의 줄루전사가 쓰러졌다. 그러나 결국 줄루인들은 병동으로 진입하였고 이에 탈출로가 막히자 다음 방으로 통하는 벽을 뚫어 환자들을 대피시키는 등 처절한 싸움이 벌어졌다. 이러한 싸움에서는 환자들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몸을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면 함께 싸워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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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량 상자 방벽에서의 치열한 전투. <출처: 브리티시배틀닷컴>



설상가상으로 전투 와중에 줄루전사들이 병동건물에 불을 지르는 데 성공하면서 더 이상 병동을 지키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당시 초소내에는 부상병과 환자 30명이 있었고 상대적으로 부상이 가벼운 환자들은 병사들과 함께 싸우면서 최대한 사람들을 바깥으로 끌어내 마당쪽으로 옮겼다. 그러나 병동에 불이 붙고 줄루군이 쳐들어온 상황에서 모든 사람을 구하는 것은 불가능해졌다. 거동을 할 수 없던 환자 몇몇은 창에 찔려 목숨을 잃었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마당에 급히 쌓은 방벽 뒤로 이동하였다. 수비병들은 계속해서 사격을 가하였으며 환자들조차도 총을 쏘는 수비병들에게 탄약을 날라 주었다.

초소의 반이 점령된 상태에서 밤새도록 줄루군의 공격이 이어졌다. 초소에 대한 공격이 여의치 않자 줄루군은 초소와 분리되어 있는 크랄을 공격하였고 영국군은 밤 10시 경 크랄을 방어하는 것을 포기하였다. 어찌보면 줄루전사들이 병동에 불을 지른 것은 불행 중 다행이었다. 달도 없어 어두컴컴한 밤이었지만 병동이 크게 불타면서 주변을 훤히 밝혔고 이는 수비병들의 지속적인 사격을 가능케 하였다. 밤 12시가 지나면서 많은 전사자들이 발생한 줄루군의 돌격이 힘을 잃기 시작하였고 이들은 계속 돌격하는 대신 한 발 물러나 노획한 총기로 영국군 초소에 간헐적인 사격을 가할 뿐이었다. 수비병들은 언제 돌격이 재개될 지 몰라 불안하였지만 사실 새벽으로 접어들면서 전투는 사실상 멈춘 것이었다. 줄루군의 병력손실이 너무도 심각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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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후의 처참한 모습





1월 23일 아침에 도착하는 지원병력. 병동건물이 여전히 불타고 있다. <출처: 브리티시배틀닷컴>




1월 23일 새벽 4시경, 간헐적으로 이어지던 사격도 그나마 멈추었고 줄루군은 온데간데 없었다. 그러나 수비병들은 안심할 수 없어 방벽 밖으로 나가 정찰을 하면서 동시에 줄루군의 총기를 거두고 동시에 줄루군 부상자들을 모두 죽였다. 현실적으로 치료할 방법도 없었거니와 이산들와나에서 영국군 부상자들이 모두 몰살 당한 데 대한 복수이기도 하였다. 아울러 충분해 보였던 탄약도 이때쯤 거의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수비병들이 아낌없이, 그리고 정신 없이 사격한 까닭에 전날 전투시작 전 2만 발에 달하던 총탄이 새벽 4시경에는 불과 900발밖에 남지 않은 상태였다(SAM 히스토리 소사이어티 참조). 수비병들이 여전히 줄루군이 다시 돌아올까봐 불안해하던 오전 7시경, 초소 남서쪽 멀리 일단의 줄루군이 다시 나타났다. 수비병들은 황급히 방어태세를 갖추고 차드 소위가 헬프메카르로 지원을 요청하는 전령을 보내는 등 부산을 떨었지만 이 부대는 멀리서 초소를 지켜보기만 할 뿐 공격하려는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8시경에는 행방이 묘연했던 3지대, 즉 본대 병력이 나타났고 이를 본 줄루부대가 철수하면서 처절했던 로크스 드리프트 전투가 끝이 났다.




로크스 드리프트: 엇갈린 평가



로크스 드리프트는 소수의 병력이 다수를 물리친 방어전의 효시로서 전사(戰史)에 남았다. 이산들와나와 로크스 드리프트는 연장선상에 있는 전투라고 볼 수 있고 두 가지의 사례를 동시에 보여주고 있다. 지형지물에 익숙하지 못한 경우 아무리 우수한 무기를 지닌 국가 정규군대라도 무장 수준이 떨어지는 원주민들에게 완패할 수 있고, 만약 국가 정규군이 정찰과 방어시설 구축을 철저히 하는 경우 아무리 원주세력이 수적 우위를 지니고 있더라도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영국군 이전 보어 개척민들이 줄루족과 싸우는 과정에서도 드러났다. 그러나 세계제국을 다스리고 있다는 오만감이 충만한 영국군은 이러한 사례를 교훈 삼지 않아 줄루전쟁 초기에 고전을 면치 못했다.

로크스 드리프트의 승리 소식은 이산들와나에서의 패배소식과 거의 동시에 전달되었다. 당연히 영국언론은 이산들와나 전투를 ‘패배’가 아닌 ‘학살’로 기술하였고 로크스 드리프트의 승리를 대서 특필하였다. 그러나 정작 전투를 겪은 병사들에게 이 전투는 지옥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전장에 있었던 병사들은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의 전형적인 증세를 보이면서 그 삶이 순탄치 못하였다. 옥수수 부대 방벽에서 총검을 휘두르며 무수한 줄루 전사들을 찔러죽였던 식민지 병사인 샤이스 상병은 전투의 충격으로 거의 폐인으로 살았고 5년 후인 1884년에 28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했다. 존 필딩이라는 이등병은 전투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갈색의 머리가 백발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윌리엄 존스라는 병사는 노년까지도 수많은 줄루전사들이 자신을 공격하는 악몽에 시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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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크스 드리프트 전투에 대하여 혹평을 한 월즐리(Garnet Wolseley) 중장. 이후 켈름스포드로부터 지휘권을 인수한다.



비록 도망할 곳이 없게 된 병사들이 목숨을 걸고 싸움으로서 로크스 드리프트에서 완승하기는 하였지만 당시 영국군 수뇌부는 로크스 드리프트의 대승을 자랑거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로크스 드리프트의 병사들에게는 영국군 최고의 영예라고 할 수 있는 빅토리아 십자장(Victoria Cross)이 무려 11개나 수여되었지만, 이 소식을 들은 월즐리 중장(Sir Garnet Wolseley)은 이를 이산들와나의 패배를 감추기 위한 ‘홍보책’이라고 비꼬면서 “쥐새끼들처럼 로크스 드리프트의 건물 구석에 갇혀 스스로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싸울 수밖에 없었던 자들을 영웅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언어도단이다”라고 혹평하였다. 그에 비해 “살육과 문명(Carnage and Culture)”의 저자인 빅터 데이비스 핸슨의 평가는 후한 편이다. 데이비스는 로크스 드리프트를 서양사상의 전기적(轉機的) 전투 중 하나로 기리며, 서양군대의 우수성을 보여주었다는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로크스 드리프트의 영국군이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용감히 싸운 것은 맞다. 그리고 영국정부가 이를 크게 부각시켜 이산들와나에서의 패배에 대한 충격을 완화하고 전쟁 옹호 여론을 유지하기 위한 홍보책으로 삼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당대의, 그리고 후대의 평가가 어찌되었건 로크스 드리프트의 영국군은 사실 할 일 없게 된 예비대를 꺾은 것뿐이었다. 로크스 드리프트에서 승리를 거두기는 하였지만 당시 전황이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수천 명의 병력 손실여부와는 상관없이 줄루군은 여전히 건재했고 영국군 본대는 패잔병이 되어 황급히 철수를 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줄루 왕국으로 진입한 다른 영국군 지대(支隊)들은 적지에서 고립되었다. 영국군 사령관이었던 켈름스포드와 케이프의 총독 프레르(Bartles Frere)에게는 소환명령이 내려졌고 켈름스포드를 대체하기 위하여 월즐리 중장이 파견되었다. 그러자 다급하게 된 것은 켈름스포드였다. 만약 이대로 전투를 중지하고 얌전히 나탈로 철수하여 월즐리를 기다릴 경우, 켈름스포드는 대영제국의 장성으로서 하찮은 ‘야만인’에게 패배했다는 오명을 남길 터였다. 켈름스포드는 이런 저런 핑계로 본국에서 오는 훈령에 대한 즉답을 피하며 절치부심하였다. 본국의 훈령을 고의적으로 무시한 그는, 아직도 식민지에 남아있는 자신의 영향력을 이용하여 다시 병력과 물자를 긁어 모아 줄루왕국에 대한 재침공에 나서게 된다.




김성남 | 안보·전쟁사 전문가
글쓴이 김성남은 전쟁이 인간 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관심을 가지고 이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미국 UC 버클리 동양학과를 졸업한 후 연세대학교 국제대학원에서 국제학 석사를 받고 한국학중앙연구원 정치학과에 진학하여 정치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주요 저서로는 [전쟁으로 보는 한국사], [전쟁으로 보는 삼국지], [전쟁 세계사] 등이 있으며 공저로 [4세대 전쟁]이, 역서로 [원시전쟁: 평화로움으로 조작된 인간의 원초적인 역사]가 있다.


발행2015.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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