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역사 프랑스 전역 6 (1940) - 독재자에게 자신감을 안겨준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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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512회 작성일 16-02-07 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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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당으로 출동하는 프랑스군 R35 전차. 포위망 밖에 200만의 프랑스군이 더 남아있었지만 이들은 의미 있는 구출 시도나 저항을 하지 않았다. <출처: 위키피디아>







처음부터 없었던 항전의지



6월 4일, 최초 150만에 달하던 프랑스의 최정예 제1집단군은 제대로 싸워보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다가 산산이 무너져 내렸다. 그 과정에서 제대로 된 교전은 없다시피 하였다. 포위망 밖에는 예비군으로 긴급 편성된 제3집단군과 제4집단군, 포위망을 벗어난 제1집단군의 일부 잔여부대가 독일 A집단군과 대치하고 있었지만, 이들은 독일의 포위망 안에 갇힌 제1집단군 주력을 구원하기 위해 적극적인 시도를 벌이지 않았다.

이렇게 프랑스가 머뭇거리는 사이, 저지대 국가를 평정한 독일 B집단군이 신속히 남하하여 견제에 들어갔다. 그런데 이런 와중에도 100만에 이르는 또 다른 프랑스군이 마지노선 안에 계속 머물고 있었다. 그런데 제1집단군이 됭케르크로 밀려가면서 이처럼 와해되고 있을 때, 사실 독일의 포위망을 벗어나 있던 프랑스군은 무려 200만에 달하였다. 물론 이들 모두가 정예라 할 수는 없지만 결코 적은 숫자는 아니었다.

그런데도 이들은 포위된 제1집단군의 몰락을 밖에서 지켜만 보았을 뿐이었다. 물론 이들도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고 주장하지만 결론적으로 프랑스군에게는 적극적인 항전의지가 없었다. 진정으로 프랑스가 최후의 일전을 마음먹었다면 마지노선을 사수할 최소한을 제외한 나머지 병력을 서북쪽으로 이동 전개시켜 됭케르크를 향해 북진하는 동시에 포위망에 갇혀있던 제1집단군을 남진시켰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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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군도 너무 앞으로만 내달리다 보니 측면이 길게 노출되어 있던 상태였다. 만일 이때 연합군이 남북 양측에서 협공을 하였다면 또 다른 결과가 나올 수도 있었다. <출처: Bundesarchiv>



독일 A집단군의 진격로가 워낙 길게 신장되어버렸기 때문에 프랑스가 힘을 낸다면 독일군의 진격로를 역으로 절단할 가능성도 충분하였고, 이런 점은 독일이 가장 우려하던 상황이기도 했다. 사실 워낙 속도가 빠르고 전과가 크다 보니 독일군은 그들의 진격이 과연 제대로 진행되고 있는지 상당히 우려하였을 정도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예상을 뛰어넘을 정도로 처음 겪는 놀라운 경험이었기 때문이었다.





지키기를 포기한 나라



그때까지 독일에게 점령당한 프랑스 영토는 5퍼센트 정도밖에 되지 않았지만 싸울 의사가 없는 프랑스가 굴복하는 건 시간문제였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수도까지 옮기며 끝까지 맞섰지만, 이번에는 불과 한 달 만에 단 한 번의 결정적인 패배로 프랑스는 스스로 저항의지를 꺾어 버리고 있었다. 반면 똑같이 1차대전의 악몽을 경험하였던 독일은 계속된 승리로 인하여 전쟁 전의 우려는 사라져가고 전투의지만 나날이 커져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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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파된 프랑스군의 솜무아 S35 전차. 일부 프랑스군의 저항이 있었으나 무의미하였다. <출처: 위키피디아>



1년 후에 벌어진 독소전쟁을 떠올린다면 프랑스는 너무 나약했다. 초반에 엄청나게 붕괴되며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 같았던 소련이 꺼지지 않는 들불처럼 계속 항전을 벌인데 비하여, 당대의 육군 최강국 프랑스는 그렇게 하지 못하였고 그럴 의지도 없었다. 소련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작지만 프랑스의 국토도 마음만 먹으면 지구전을 펼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커다란 공간이었고 그것은 1차대전에서 한 번 증명된 바 있었다.

그렇게 프랑스는 초전에 받은 단 한 번의 타격으로 순식간에 꺾이고 말았다. 처음부터 싸울 의지가 없었던 프랑스라는 거목은 한마디로 안이 썩어있던 고목이었다. 대부분 전사를 살펴보면 프랑스 전역은 6월 4일, 됭케르크 점령을 마지막으로 글을 끝맺는 경우가 많다. 사실 그 이후는 전사에 긴박하게 기록할 만한 극적인 내용도 없다. 그냥 ‘항복, 점령, 항복, 점령’이라는 글자만 무한 반복된다고 보아도 크게 틀리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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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은 제1차 세계대전 정전 협정을 맺었던 열차 식당 차량을 당시 그 장소로 다시 가져와 프랑스로부터 항복을 받아내었다. <출처: 위키미디어>



하지만 6월 25일, 프랑스가 문서로 항복을 하고 독일이 진격을 중단할 때까지 전쟁은 삼 주 정도 더 이어졌다. 다시 말해 전사에 기록된 프랑스 전역은 물리적으로 불과 반만 지났을 뿐이었다. 프랑스의 패배주의적인 태도와 달리 독일은 아직도 긴장을 늦춘 상태가 아니었고, 프랑스로부터 항복을 받아낼 때까지 전쟁을 계속하려 했다. 프랑스는 이미 저항의지를 상실하였지만 독일은 그러한 사실까지는 정확히 알지 못하였다.





결과



6월 5일, 독일은 프랑스 완전 점령을 목표로 기안되어있던 ‘적색 작전(Fall Rot)’에 돌입하였다. B집단군은 솜(Somme) 강을 건너 파리로 쇄도하여 들어갔고, A집단군이 배후에서 그리고 C집단군이 정면에서 마지노선을 협공하기 시작했다. 지난 전쟁에서의 기억을 잊지 않고 있던 독일은 프랑스가 이미 전의를 상실한 상대임에도 전혀 틈을 주지 않았다. 6월 14일, 독일은 프랑스가 무방비 도시(Open City)로 선언한 파리를 점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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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에서 퍼레이드를 벌이는 독일군. 이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에게 최고의 순간이었다. 전후 프랑스는 무방비도시로 선언하였기 때문에 파리를 전쟁에서 보존시켰다고 자화자찬하였으나 그것은 굴욕을 감추기 위한 변명일 뿐이다. <출처: 위키피디아>



이 소식은 지난 전쟁에서 패전 아닌 패전을 당하여 프랑스에 대한 적개심이 높았던 독일 전체를 광분하게 만들었고 온 세계는 경악하였다. 세계 최강의 육군 대국 프랑스가 불과 전쟁 한 달 만에 수도를 독일에게 내주었고 도와주러 건너간 영국은 모든 무기를 내치고 간신히 몸만 빠져 나왔다. 이것은 꿈이 아닌 현실이었다. 이런 와중에도 일부 프랑스군이 마지노선을 최후의 보루로 삼아 격렬히 저항하였으나 요새선 곳곳이 차례차례 격파되거나 점령당했다.

6월 중순이 되자 프랑스의 절반이 독일의 지배하에 들어왔다. 프랑스 정부는 마지막 끈이라도 잡는 심정으로 1916년 베르됭(Verdun) 전투의 영웅이었던 페탱(Philippe Pétain)에게 위기 타개를 요청했다. 하지만 그가 선택한 것은 얌전한 항복이었다. 이후 그는 독일의 괴뢰정권인 비시정부의 수반이 되어 매국노로 손가락질 당하고 처벌까지 받았지만 사실 페탱이 정부를 물려받았을 때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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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를 방문한 히틀러를 영접하는 페탱. 그는 전후 매국노로 단죄를 받았지만 정작 당시에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출처: 위키미디어>



제1차 세계대전 당시, 1918년 11월 11일 콩피에뉴(Compiègne) 숲 속에 있던 열차의 식당 칸에서 정전 협정에 서명함으로써 패전의 굴욕을 겪었던 독일은 바로 그 열차를 그 장소로 다시 끌고 와 프랑스의 항복을 받아내었다. 히틀러가 의기양양하게 방문한 가운데 1940년 6월 22일 프랑스가 항복문서에 서명함으로써 독일은 프랑스를 완전히 굴복시켜버렸다. 히틀러의 군대는 프랑스의 2/3를 군사적으로 점령한 후 진격을 멈추었다.





프랑스 침공전의 의의



프랑스 침공전은 군사적으로도 기념비적인 전쟁이었다. 이후 ‘전격전’으로 통칭되는 독일의 새로운 전략이 이때 완성되었다. 전쟁이 살상과 파괴를 피할 수는 없지만 승리를 얻기 위해 이를 최소한으로 줄이는 것은 상당히 중요한데 전격전은 바로 그러한 해결책이기도 하였다. 군사적인 결과만 놓고 보았을 때 살상과 파괴를 최소화시킨 덕에, 승리를 거머쥔 독일은 물론 굴욕적으로 패전한 프랑스도 피해가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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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군의 퍼레이드를 보며 눈물을 흘리는 파리 시민. 프랑스 전역의 가장 큰 특징은 워낙 속전속결로 이루어져 양측 모두 인적, 물적 피해가 적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패자로 전락한 프랑스는 이후 독일의 수탈 대상이 되었다. <출처: findingdulcinea>



7주 동안 있었던 전쟁의 결과는 실로 믿지 못할 정도였다. 프랑스는 전사 및 실종 12만, 부상자 24만의 인명피해와 더불어 항복한 200만이 독일의 포로가 된 반면, 승자인 독일은 전사 및 실종 3만5천에 부상 11만의 피해만 입었을 만큼 일방적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양측 합쳐 무려 400만 명 가량이 전사한 사실과 비교한다면 그야말로 약소한 수준이었다. 프랑스는 7월 10일 독일군의 군화가 닿지 않은 남부의 소도시 비시(Vichy)에 수도를 정하고 친독 정부를 수립했다.

거의 비슷한 강력한 두 세력이 정면으로 충돌하여 이처럼 허무하게, 그리고 어이없게 결판이 난 사례는 그리 흔하지 않다. 어디까지나 가정이지만 프랑스가 이겼다면, 혹은 제1차 세계대전 당시처럼 전선이 고착화되어 지구전에 빠졌다면 역사는 엄청나게 변화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아직까지 정치적 기반이 단단하다고 볼 수 없던 나치 정권이 조기에 붕괴될 가능성이 컸고 그렇다면 2차대전의 비극이 증폭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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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에서 놀라운 승리를 거둔 독일은 더 이상 새로운 전쟁의 시작을 겁내지 않게 되었다. 이를 기점으로 제2차 세계대전은 인류사 최대의 비극으로 증폭하였다. <출처: Bundesarchiv>



1940년 프랑스 전역은 복합적인 측면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는데, 이를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프랑스 전역 이후 독일은 물론 세계가 완전히 달라졌다는 것이다. 거인을 너무나 쉽게 꺾어버린 독일은 더 이상 전쟁을 벌이는 데 망설이거나 주저하지 않게 되었다. 힘 있는 독재자가 두려움마저 상실하다 보니 전쟁이 더욱 커져가는 것이 어쩌면 필연이었다. 즉, 제2차 세계대전이 지옥으로 바뀌게 된 결정적인 전환점이었다.




남도현 | 군사 저술가
[전쟁, 그리고], [2차대전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 순간들], [끝나지 않은 전쟁 6.25] 등의 군사 관련 서적을 저술한 군사 저술가. 국방부 정책 블로그, 군사월간지 [국방과 기술] 등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현재 무역대행 회사인 DHT AGENCY를 경영하고 있다.


발행2015.0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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